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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6 Korean 1995년 11월 개인전 서문-안준희에게로 가는 기억
1995년 11월 개인전 서문         
               
안준희에게로 가는 기억
                                   
                                            김하린(시인)

화가 안준희에게로 가는 기억은 보성에서 벌교로 가는 기찻길로부터 열린다. 팔년 전 나는 이따금 후배들이 사는 보성과 벌교를 가끔 들렸었다.  보성에서 사는 후배를 만나고 벌교로 갈 때는 바로 한정거장이면 가는 기차를 타곤 했다. 기차는 을씨년스러운 겨울 들녘을 지나 벌교를 향했고, 차창가로 지나가는 겨울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항상 안준희라는 이름을 생각하곤 했다. 여러 명이 함께 실린 화집에서 본 그녀의 엘로우 톤의 강렬한 그림들 때문이었다.
 그 당시 나에게 있어 예술은 하나의 구원이었다.  회복되기 어려운 병을 앓고 있었던 당시의 내게 가장 큰 힘을 준 것은 엘뤼아르의 짧은 싯귀였다.


회복된 건강위에
사라진 위험위에
회상 없는 희망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Sur la sante' revenue
Sur le risque disparu
Sur l'espoir sans souvemir
J'ecris ton nom

P.Eluard의 이 짧은 싯귀에서 나는 삶의 강렬한 욕구를 느꼈고 얼마 후 서서히 기적처럼 건강은 찾아왔다.  엘뤼아르 시와 함께 병상에서의 나에게 커다란 기쁨을 준 또 하나의 예술은 바로 칸딘스키의 그림이었다. 그의 그림 또한 하나의 구원이었다. 칸딘스키의 추상은 내가 알 수 없었던 세계의 문을 열어 주었고 그림의 눈을 뜨게 해주어 삶의 또 다른 기쁨을 주었다.
 그 후 나는 건강을 위해 병원 언덕이나 고향인 항구 목포의 바닷가를 거닐며 4B연필로 스케치를 하기도 했고, 목포에 있는 후배들의 화실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내가 안준희의 그림을 본 것은 바로 이 후배들의 화실에 있는 화집에서였다.  여러 사람들의 그림 속에서도 그녀의 그림은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았고 무언가를 애기하는 것 같았다.
 건강이 회복되어 조금씩 여행을 할 수 있을 무렵 나는 벌교로 자리를 옮긴 후배의 작업실을 가끔 들렸고 벌교에 살고 있다는 그녀를 한번 만나보고 싶어 했지만 일정이 맞지 않아 한 번도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내가 안준희를 처음 만나게 된 것은 그 뒤로 수많은 시간이 지나 그녀의 개인전이 열리던 캠브리지 갤러리에서였다.  그때 처음으로 화집에서의 도판이 아닌 실제의 그림을 보았고, 그 후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식사도 하고 차도 마시게 되었지만 정작 그림에 대한 이야기는 나누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전 우연히 그녀와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안준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벌교에서 살던 시절에 그림은 나에게 자기 구원의 한 방식이었어요. 그림을 통해서 구원을 느꼈지요. 어렵고 힘든 세상에서 그림마저 투쟁을 해야 하는 목표로 생각했더라면 아마 나는 내 자신을 지탱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녀는 또다시 이렇게 짤막하게 덧붙였다.   “제 그림 속에 나타나는 선은 단순한 조형적인 언어가 아니고 내마음속의 세상과 우주를 반영한 것 이지요.”
 이 짧은 이야기를 듣는 순간 벌교로 가는 기찻길 속에서의 안준희의 기억이 다시 열렸고 내가 왜 그토록 그녀의 그림에 이끌렸던가 하는 의문이 풀렸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것 같은 병상에서의 그 시절 나는 내가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길 흔적이려니 하고 숲에 관한 시를 쓰고 있었는데 내가 그리고자 하는 숲은 단순한 숲이 아닌 내 마음속의 우주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그 작업을 완성하지 못하였고 영원한 나의 숙제였다.
 안준희가 말한 선은 곧 나의 숲이었고 그녀가 말한 구원은 곧 나의 구원이었다는 것을 안 순간 당시 내가 왜 그토록 그녀의 그림에 집착했던가 하는 의문이 풀렸고, 오랜 세월 같은 길을 걸어왔구나 하는 커다란 공감과 삶의 끈질긴 인연과 예술이 주는 끝없는 감동과 구원의 힘이 지나온 나의 세월을 감싸 안으며 나의 눈시울을 적시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