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멈춰진 일상 속에서 발견한 회화적 울림-이승훈
멈춰진 일상 속에서 발견한 회화적 울림

조안석 작가는 주로 인물과 풍경이라는 대상을 그려가는 가운데 인간의 일상 속에서의 한 순간을 기록해 내거나 풍경 속의 한적한 한때를 포착해 낸다. 작가가 그려내는 것은 인물이나 풍경이지만 그의 작업을 한동안 바라보다 보면 그의 그림 속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 아련한 울림처럼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작가의 그림 속에는 인물들이 무엇인가를 행하고 있는 한 순간이 담겨 있기도 하고 어떠한 행위도, 사건도 벌어지고 있지 않은 멈춰있는듯한 풍경 속의 한 순간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리고 이 화면들은 무료할 정도로 평온하고 정적인 느낌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그려낸 화면은 정지된 순간들을 그려내고 있음에도 화면 속에서는 다양한 색과 드로잉 선들이 마주치면서 아지랭이처럼 꿈틀거리며 피어 오르는 미묘한 파동들이 전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까지 그 울림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강렬하게 다가와 시각적 터치(touch)를 넘어 촉각적 잔상으로 남겨지는 듯하다.

어쩌면 어떠한 소리도 잠재워버릴만큼 고요한 공간을 그려낸 작가 특유의 화폭이 그림을 감상하며 감동을 느끼게 되는 관람자의 심장소리마저 발각되게 만들정도로 어느덧 큰 힘을 갖게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조안석 작가의 화면은 분명 고요하지만 그의 작업을 보는이의 내면에서는 반대로 잔잔한 실내악의 음악에서부터 거대한 관현악단의 오케스트라의 음악까지 다양한 떨림을 경험할 수 있게 되는것 같다. 

이 떨림은 도시공간이나 분주한 현대인들이 항상 마주하게 되는 요란한 환경 속에서 느끼게 되는 긴장감과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떨림일 것이다. 도시 소음과 현대의 속도처럼 강한 진동과 강한 움직임 속에 길들여진 현대인들이 느끼기에는 상당히 어려운 떨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일상속에서의 작은 멈춤과 쉼을 통하여 다양한 떨림과 울림들을 발견할 수 있음을 작가는 그의 작업을 통해 웅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은 작가가 그려내고 있는 일상 속의 공간들처럼 자연의 풍경과 인물 위에 드러나는 너무나 흔한 햇빛이거나 색과 선들과 형상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단지 멈춰서서 이 풍경과 인물들을 바라 볼 수만 있다면 그 적막함과 고요함 속에는 이 시대의 삶을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감각할 수 없거나 지나쳐 버릴 수도 있는 크고 작은 감동들과 깊은 울림들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경험할 수 있도록 멈춤이라는 작가 특유의 미학적 화면을 펼쳐 보임으로써 우리를 초대하고 있는 것일는지 모른다. 
사이미술연구소 이승훈 

고전적 화풍에 담아낸 일상-장희정
고전적 화풍에 담아낸 일상
 조안석 작가는 인물·풍경화가로 사실주의풍의 묘사를 추구한다. 이른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해 평면화면 속에 실재감을 부여하는 작업을 한다. 이 같은 사실주의풍의 묘사는 조안석 작가에 있어 중의적(重意的) 의미를 지닌다. 그의 의도는 먼저 고풍스러운 구도 속에 현실속의 모델이나 풍경을 등장시켜, 주인공들, 혹은 대자연의 일부가 지닌 고유한 면모를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재현해내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인물화의 경우, 주인공의 내면에 내재된 심리상태를 리얼하게 반영하고자 한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지극히 고전적인 인물화법이다. 이 같은 사실풍의 인물초상은 서구의 신비한 시적 이미지를 추구했던 르네상스시대의 화가들이나 비대칭 구도 속에 다양한 표정과 여러 각도의 빛을 이용해 역동적인 인물초상을 추구했던 램브란트를 연상시킨다. 또한 수묵이라는 한정된 재료로 화가의 역량으로써 모델의 성품과 정신세계를 화폭에 옮기도록 종용받았던 동양초상화의 전신론(傳神論)과 일맥상통한다.

이 점이 이전시대 인물화나 타 인물화가와 차별되는 조안석 작가 인물화의 특징이다. 그가 즐겨 작업하는 친근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들, 그리고 그 소재를 표현함에 있어 가감없는 진솔함이야말로 작가가 바람직한 가치관으로 내면의 진실과 성실성에 의미를 부여하고 예술작업과 신앙으로 이 가치관을 세워나가고 있는 작가정신과 일체를 이룬다.
(미술과 비평지 2011년 겨울호, 평론가 장희정이 만난작가 중에서 발췌)
글 장희정 미술평론가

투명한 리얼리티의 '빛, 생명,사랑'-최병식
투명한 리얼리티의 '빛, 생명,사랑'

최병식  미술평론가, 경희대 교수

조안석의 리얼리티는 우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주제나 모델의 선정과 포즈, 인상의 묘사나 색채의 쓰임새에서 비롯되어진다. 풍경에서도 나타나지만 그의 구도는 모두가 수평적인 형태를 띠면서 어느 곳애서나 친근하게 만날 수 있는 주제들이며, 인물화의 모델 또한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를 비롯하여 자신이 운영하는 화실의 학생 등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지인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인물화에서는 의도적인 표정을 구사하거나 살롱 식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식의 경우는 없다. 그 대신 대체적으로 오랜동안 만나온 인물상과 같은 친근감이 느껴지는 것이 인상적이다. 평소 그의 품성이 그러하듯이 대단히 문학적인 순수성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의 이같은 시각은 최근 사실화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시점에서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더군다나 그의 파스텔화 같은 경우는 더더욱 재료의 특성이 최근의 디지털, 영상매체 등과의 이질감 때문에 쉽지 않은 노력이 요구되어진다. 
뒤늦게 만학을 위하여 노력하고 있는 그의 최근 작업들은 이같은 여러 상황을 바탕으로 흡사 대상에 대한 맑은 느낌 골라내기와 같은 긍정적인 사고에 의하여 그 자신이 말하는 “빛, 생명, 사랑” 등에 대한 열망을 사실적인 기법으로 반영하고 있다. 아마도 그의 종교적인 근원에서 기인되어지는 그의 회화적 심미의식은 이번 전시의 전 작품에서 쉽게 읽을 수 있는 투명성으로 나타난다.
조안석의 이번 전시에서 특기할 만한 것으로 친근한 일상적인 소재가 첫 번째 특징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는 빛의 관점을 들 수 있다. 파스텔 조의 부드러운 감각을 수반하는 화면의 일련의 작업들이 갖는 사실력이나 그에 접근해 온 작가의 일상성은 언제나 빛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화두에서 출발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역광을 즐겨 하는 빛의 효과나 마치 신인상파적인 색상의 가시적 효과를 바탕에 의식하고 있는 일련의 선택들은 그의 이번 전시에서 대하게 되는 명시적(明視的)인 특징과도 연결되어진다. 
셋째로는 그가 독실한 기독교신자라는 점에서 이해되어지지만 현실에 대한 긍정과 감사의 자세가 갖는 색상과 사실성의 성격을 들 수 있다. 전체적으로 밝고 명랑한 톤을 구사하는 작품들에서 느껴지는 편안함이 그러하지만 언제나 무엇을 응시하고 있는 모델들의 자세들이 인상적이다. 「오후-역광」「독서하는 소녀」이라는 작품에서도 전체 화면의 초점이 인물이 응시하고 있는 책으로  모두 집중되어있으며, 「여름」에서도 국화를 응시하고 있는 모델의 자세가 인상적이다. 
물론 이같은 응시는“빛, 생명, 사랑”이라는 다소 원론적인 작가의 삶에서 기인하는 것이지만 더 구체적인 것은 작가노트에서도 명료한 해답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적어도 그의 시각에서 맴도는 인생관이나 삶의 투영은 그가 대학 시절부터 즐겨 사용 해 온 파스텔조의 스테인드 글라스처럼 맑고 투명한 색채와 자연스러운 서정성으로 충만된 응시를 추구하고 있는 듯하다. 
그간 한국인물작가회와 신구회, 한국파스텔화 협회 등에서 활발하게 작품을 발표해온 조안석의 작품은 이번 대학원을 마치면서 그 나름대로의 새로운 지평을 위한 재정리를 시도하고 있다. 그것을 「얼굴」이라는 100호에 표현된 인물상으로서 다른 작품들과의 차별성을 지닌다. 하이퍼리얼리즘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부분적 현상에 대한 성찰과 재확인으로서의 이미지 전달이 갖는 형태를 띠면서도 그 인간상의 성격과 표정을 보다 현장감 있게 전달하려는 의도성이 엿보이는 점에서 차이점을 발견하게된다.
얼마 전 우리는 러시아의 대가인 일리아 레핀의 작품을 대한 적이 있다. 실제로 모스크바의 트레차코프미술관을 가득 메운 작품들의 대다수는 구상성의 백과사전과 같은 다양한 경향들이었다. 물론 최근 이이쉬엔이나 쑨위민 등 중국의 복고주의적인 신고전주의식의 사실주의도 중국인들 고유의 정체성이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이 같은 경우는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에 들러서도 인상파 시대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 유명한 작가들의 구상성의 진수를 맛보게 되며, 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각 시대와 민족의 구상성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인상을 세례 받게 된다. 근대 러시아의 사회주의적인 사실주의도 그러하지만 역동감 넘치는 인체의 배치나 내용 미학의 바탕을 이루는 생명력은 역시 근대 프랑스의 유미주의적인 것과는 완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에 비하면 중국의 최근 사실주의는 마치 유리알 같은 미립자까지 나타내는 듯한 수성질의 투명성을 드러내 보이면서 대상의 초월적 사실성이 신고전주의의 작품들을 충만시키고 있다.
물론 최근의 복합적인 매체의 등장과 영상, 디지털 시대의 사조들이 숨가쁘게 넘나들고 있는 시점에서 왜 하필이면 수 천 년간 반복되어온 주변의 풍경이나 인물상인가 하는 반문을 던질 수 있다. 그러나 구상성은 어떠한 예술의 형태가 도래한다 하여도 우리의 1차적인 시각의 피사체로서 그 내면에 자리하는 일루전적인 복합성을 내장하고 있다는 본질의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다. 모든 생각이나 대상의 인식이 출발하는 이 구상성에 대한 고뇌와 해석은 이미 수 많은 역사를 거쳐서 거듭되어 왔지만 바로 이 같은 점에서 변함없이 우리들 곁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조안석은 사실성에 대한 매력을 누구보다도 강하게 느낀 작가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 때 이번 전시는 그간 닦아온 대상에 대한 관류와 기법적인 고뇌를 재정리하고 다시금 새로운 지평으로 열어가려는 도약의 출발이라는 각오를 작가노트에서도 남기고 있다. 그러나 물론 신비주의적인 측면을 수반하지만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1892∼1940)이 말한 아우라 (Aura)와 같은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단순한 대상에 대한 묘사가 아닌 이미지가 갖는 상징적인 언어체계에 대한 보다 심도있는 오리지널리티로서의 감정이입을 비롯한 심미의식과 표현 모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감각적인 편의성으로 드러나는 가벼움과 소재의 차별화, 기법적인 보수성을 어떻게 극복해 갈 것인가 하는 과제에 대하여 여지를 남기도 있다.
이미 서두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첨단 정보화 시대의 한가운데 서 있다고는 하지만 구상성에 기인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적응 또한 무한한 가능성이 아닐 수 없다. 퓨전(fusion)시대의 한 복판에 서있는 우리의 자화상을 성찰해 보면서 너무나 급격히 사라져가는 구상 회화의 현주소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에서 조안석의 이번 전시가 이제 새롭게 출발하는 디딤돌로서, 이 시대의 보편성을 획득하는 리얼리티로 거듭 나아가면서도 제2, 제3의 피사체로서 전환되어가는 세계관을 열어가기를 기대한다.

20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