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NOTE
2019-02-23 山山水水, 山水와의 소통_화집 山山水水 머리말 - 조동일
山山水水, 山水와의 소통

화집 <<山山水水> 머리말 - 조동일 
나는 일찍부터 여러 분야의 예술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면서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음악은 재능이 모자라고 연주를 들을 기회도 적어 뒤로 처졌다. 문학과 미술이 앞으로 나와 평생 동안 서로 경쟁하면서 돕는 관계를 가졌다. 
문학과 미술은 무엇을 나타내 감동을 주고 하는 점이 다르지 않아 서로 필요로 한다. 문학은 미술처럼 하고 미술은 문학처럼 하면, 문학도 살고 미술도 산다. 그러나 문학과 미술을 동시에 하지는 못한다. 어느 쪽에 시간을 더 바칠 것인가 하는 데서 경쟁이 시작된다.
고등학교 시절에 그림도 그리고 문학 창작도 했으나, 그림 그리기가 더 좋아 거의 몰두하다시피 했다. 방학이 되면 그림 도구를 짊어지고 산천 유람을 떠나는 것을 커다란 즐거움으로 삼았다. 미술대학에 진학해 화가가 되겠다고 작정했다. 그런데 부모님이 극력 반대했다. 고생이 많고 생계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차선책으로 문학 창작을 택했다. 대학을 진학할 때 문학 창작에 특히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학과를 찾아 불문과로 갔다. 번역으로 기웃거리던 작품을 원어로 읽는 기쁨을 누리면서 새로운 자양분을 많이 섭취해 문학 창작에 힘쓰기로 했다. 그런데 공부를 더 하는 동안에 창작에서 비평으로 취향이 바뀌고, 비평의 근거를 다지기 위해 문학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국문학을 연구 영역으로 삼기 위해 국문학과로 옮기고, 대학원을 마친 다음 국문학 교수가 되었다. 
정년퇴임할 때까지 37년 반, 5년을 더 보태 41년 반 동안 교수 노릇을 하면서 문학 연구에 종사하고 관심의 영역을 넓혔다. 한국문학에서 동아시아문학으로, 동아시아문학에서 세계문학으로 나아갔다. 문학연구에서 인문학문으로, 인문학문에서 학문 일반으로 접근했다. 이 과정에서 불문과 시절의 공부가 긴요하게 쓰이고, 문학 창작의 경험, 그림을 그릴 때 얻은 식견까지 도움이 되었다. 60여권의 저서와 200여 편의 논문을 내놓아 뜻한 바를 거의 다 이루었다. 학술상을 여럿 받고,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아 있다. 연구에 몰두하느라고 창작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연구를 하는 동안에 문학 창작이나 그림 그리기를 이따금 하다가 말았다. 계속해서 하면 빠져들어가 본업인 연구를 소홀하게 할 염려가 있어 참고 지냈다. 연구를 위해 할 일을 다 하고 창작으로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지니고 있다가, 2009년 9월 1일 70세로 두 번째 정년퇴임을 하고 자유롭게 되자 오랜 소망을 마음껏 펼치기로 했다. 
문학 창작을 할 것인가 그림을 그릴 것인가 하는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으나, 그림을 택했다. 문학 창작은 <<조동일 창작집>>을 출간해 결별의 징표로 삼고, 있는 시간을 다 바쳐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학문도 즐겁지만 그림은 더욱 즐겁다. 그림은 말이 아니고 논리를 넘어서는 형상으로 이룩하는 창조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전문적인 화가가 되었으면 평가를 받고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두 가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겠는데, 지금 하고 있는 작업은 그런 부담이 없어 더욱 즐겁다.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지낸 오랜 기간 동안 나라 안팎에서 구경은 열심히 했다. 멀리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부 유럽 여러 나라에서 러시아, 미국까지, 가까이는 일본, 중국, 인도 등의 아시아 각국에서 미술관을 있는 대로 찾아 되도록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그림에 대한 동경과 소망을 키웠다. 문학 작품 특히 고전을 읽고 연구하면서 그림도 탐구하고 구상하는 데도 활용했다. 마음속에서 그려 깊이 간직하기만 하던 그림을 이제 밖에 내놓으니 황홀하다.  
예술의 본질은 소통이다. 예술에서 하는 소통은 특정의 용건에서 벗어나고 이해관계를 넘어선다. 의식의 깊은 층위에까지 이르는 절실한 소통을 널리 확산해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니 예술이 소중하다. 그러면서 소통하는 방식은 예술 갈래에 따라 다르다. 미술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서 시각적인 조형물을 만들어낸다. 시간은 배제하고 공간만 사용한다. 그래서 미술에서의 소통은 다른 어느 예술보다 분명하고 직접적이다. 
미술에서는 그리는 대상끼리의 소통, 그리는 대상과 그리는 사람의 소통, 그려놓은 작품과 보는 사람의 소통, 그린 사람과 보는 사람의 소통, 보는 사람들끼리의 소통이 시차를 두지 않고 한꺼번에 이루어진다. 이처럼 다면적인 소통에 즉시 동참하는 감격을 누리도록 한다. 언어의 장벽이나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서 소통을 함께 경험할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오늘날의 미술 창작은 세계 어디서든지 소통에 차질이 생긴 것들이 많아 실망스럽고, 경향이 혼미해 어떻게 하면 잘 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비전문가 창작은 장외의 특권이 있어 유행을 따르지 않는 자유를 누리면서 전환에 앞설 수 있다. 편벽되고 기이한 것들을 조작해 시선을 끌려고 하지 않고 소통을 정상화하는 큰 길을 여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미술이 자연을 무시하고, 자연과 결별한 것이 가장 큰 잘못이다. 자연 파괴가 개발이고 발전이라는 낡은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과의 소통을 회복해야 오늘날 인류가 겪고 있는 갖가지 불행을 치유할 수 있다. 자연을 그리는 대상으로 삼기만 하면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경치가 흥취이고 이치임을 그림을 그려 나타내는 오랜 전통을 되살려야 한다. 경치를 눈으로 보는 데 그치지 않고, 흥취를 함께 누리고, 공통된 이치를 체현하는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이렇게 설정한 목표를 내 나름대로 달성하려고 오래 누적된 갖가지 관습을 과감하게 깨는 그림을 그린다. 먹과 과슈 물감을 함께 사용해, 수묵화와 채색화,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분을 넘어선다. 관념산수화와 진경산수화가 하나이게 한다. 고인의 그림을 오늘날 방식으로 다시 그리기도 한다. 수채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유화 같기도 한 중간물을 내놓는다. 그림과 글, 미술과 문학의 소통을 위한 지혜를 이어받으려고 畵題를 한문 四字成語로 써서 天下同文의 여러 나라 많은 벗에게 보이고자 한다.        
사자성어 3백 개 가운데 “山山水水”를 골라내 책 이름으로 삼는다. 이 말은 여러 겹의 뜻을 지닌다. 산과 물을 많이 그려 山山水水이다. 산수화를 이어받아 山山水水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어서 山山水水이다. 산과 산, 물과 물, 산과 물, 물과 산이 生克의 관계가 山山水水이다.   
이 책을 내놓는 것도 별난 일이다. 작품을 널리 알리기 위해 전례가 없는 소통의 방식을 사용한다. 여기 수록하는 그림 3백 점은 전부 미발표 신작이다. 언제나 펼쳐 놓고 편안하게 구경할 수 있는 圖上展示會를 열고, 특별히 원하는 분들의 방문을 받아 원화를 보여드리고 가져가 소장하겠다는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靑鼓라는 호를 사용하면서 동방의 북소리를 내고 싶은 조동일이 2013년 늦가을에 이 글을 화집 머리말로 쓰고 흐뭇하게 웃는다.

2019-02-23 문학과 미술 사이_조동일 작가노트
문학과 미술 사이

고교생이면 다 그렇듯이, 나도 고교 시절에 문학, 미술, 음악 등 여러 예술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면서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음악은 재능이 모자라고, 연주를 들을 기회도 적어 뒤로 처졌다. 문학과 미술이 앞으로 나와, 내 일생 동안 경쟁하고 또한 서로 돕는 관계를 가졌다. 
문학과 미술은 예술이라는 점에서 서로 같고, 무엇을 나타내 감동을 주고 하는 점이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아 서로 돕는 관계이다. 문학은 미술처럼 하고 미술은 문학처럼 하면, 문학도 살고 미술도 산다. 그러나 문학과 미술을 동시에 하지는 못한다. 어느 쪽에 시간을 더 바칠 것인가 하는 데서 경쟁이 시작된다.
나는 그림도 그리고, 문학 창작도 했으나, 그림 그리기가 더 재미 있어 거의 몰두하다시피 했다. 방학이 되면 그림 도구를 짊어지고 산천 유람을 떠나는 것을 커다란 즐거움으로 여겼다. 미술대학에 진학해 화가가 되리라고 작정했다. 그런데 화가가 되는 것을 부모님이 극력 반대했다. 고생만 하고 생계가 어려울 것이라고 했다. 
나는 차선책으로 문학 창작을 택했다. 대학을 진학할 때 문학 창작에 특히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학과를 택해 불문과로 갔다. 번역으로 기웃거리던 작품을 원어로 읽는 기쁨을 누리면서, 새로운 자양분을 많이 섭취해 문학 창작에 힘쓰기로 했다. 그런데 공부를 더 하는 동안에 창작에서 비평으로 취향이 바뀌고, 비평의 근거를 다지기 위해 문학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불문학을 떠나 한국문학을 연구 영역으로 삼기 위해 한국문학과로 옮기고, 대학원을 마친 다음 한국문학 교수가 되었다. 
정년퇴임할 때까지 37년 반, 정년퇴임 후에 다시 5년을 근무해 41년 반 동안 한국문학 교수를 하면서 문학 연구에 종사하고, 관심의 영역을 더 넓혔다. 한국문학에서 동아시아문학으로, 동아시아문학에서 세계문학으로 나아갔다. 문학연구에서 인문학문으로, 인문학문으로 학문 일반으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불문과 시절의 공부가 긴요하게 쓰이고, 문학 창작의 경험, 그림을 그린 것까지 도움이 되었다. 학문에 종사하는 동안에 60여권의 저서와 200여 편의 논문을 써서 이루고자 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 학술상을 여럿 받고, 이번에는 후쿠오카 아시아문화상을 받게 되었다.
그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연구에 몰두하느라고 창작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연구를 하는 동안에 문학 창작이나 그림 그리기를 이따금 하다가 말았다. 계속해서 하면 빠져들어가 본업인 연구를 소홀하게 할 염려가 있어 참고 지냈다. 연구를 위해 할 일을 다 하자 창작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문학 창작을 할 것인가, 그림을 그릴 것인가? 문제가 다시 제기되었으나, 그림을 택했다. 문학 창작은 <<조동일 창작집>>을 출간해 정리하면서 작별하고, 있는 시간을 다 바쳐 그림을 그리기로 했다. 이에 관해, 학문을 한 생애를 회고한 책 마지막 대목에서 한 말이 있어 옮기기로 한다.

17세인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미술대학에 진학해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소망을 가졌다가, 부모님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문학을 대안으로 삼았다. 원통한 심정을 새로운 작업을 열심히 해서 달랬다.  
3학년 때에는 문예반에서 활동하고, 대학 입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학과를 택해 오늘에 이르렀다. 문학 독서ㆍ창작ㆍ비평ㆍ연구를 거치면서 이제 70세가 되었다. 임무 수행을 끝내고 자유롭게 되어, 53년 동안이나 단절되었던 역사를 잇고자 한다. 외람되게 두 번 사는 영광을 누리고자 한다. 
지금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하는 것은 결혼해 행복을 누렸으면서도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데가 견줄 수 있다. 사랑과 작업은 같지만 다르다. 작업은 혼자서 결정해 매듭을 분명하게 할 수 있다. 2009년 9월 1일에 학문에서 그림으로 방향을 돌리는 시대가 시작된다고 내 자신에게 조용하게 선언한다.  
학문도 즐겁지만 그림은 더욱 즐겁다. 그림은 논리가 아니고, 말이 아닌 형상으로 이룩하는 창조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전문적인 화가가 되었으면 평가를 받고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 두 가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겠는데, 지금 하려는 작업은 아무 부담이 없어 더욱 더 즐겁다. 학자 조동일의 무거운 이름을 떨쳐버리고 전혀 무명의 아마추어 화가로 다시 태어나니 더 더욱 더 즐겁다.
   
문학, 미술, 음악 등의 예술에 세 가지로 관여할 수 있다. 감상을 할 수 있고, 창작을 할 수 있고, 연구를 할 수 있다. 이 셋의 관계에 관해 정리해 말해보자.
감상은 누구나 할 수 있는, 비전문가 아마추어의 행위이다. 사람은 누구나 평생토록 예술 감상자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예술 감상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고 삶을 즐겁게 한다.  
창작은 비전문가 아마추어도 하고 전문가 프로페셔날도 한다. 전문가 창작은 수준이 높아 평가된다고 하겠지만, 노동시간을 다 바쳐야 제대로 되고, 생업으로 삼아야 하니 어려움이 많다. 비전문가 창작은 여가에 할 수 있고, 평가 받지 않아도 되고, 생업과는 무관하니 어려움은 없고 즐겁기만 하다.
연구는 전문가가 한다. 비전문가도 연구를 할 수 있지만, 검증받을 기회가 거의 없고,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 애쓴 보람이 없다. 연구는 다른 일에 종사하다가 남는 시간에 하기에는 너무 벅찬 작업이며, 연구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면 하기 어렵다. 연구 전문가가 되어 연구를 계속할 자리를 얻고 생업을 보장받으려면 비상한 결단이 선행하고,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나는 음악에서는 초보적인 감상에 머무르고 있다. 미술에서는 감상에서 비전문가의 창작으로 나아갔다. 문학에서는 감상에서 비전문가 창작으로 나아가는 데 그치지 않고, 비전문가 창작에서 전문가 연구로 나아갔다. 문학 연구에서 많은 것을 이루었으나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연구를 마무리하고, 지금은 비전문가 미술 창작에 힘쓰고 있다. 세상에서 높이 평가되는 전문가 문학 연구에서보다 알려지지 않은 채 하고 있는 비전문가 미술 창작에서 더 큰 기쁨을 누리고 있다. 
예술의 본질은 소통이다. 예술에서 하는 소통은 특정의 용건에서 벗어나고 이해관계를 넘어선다. 의식의 깊은 층위에까지 이르는 절실한 소통을 널리 확산해 누구나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므로 예술이 소중하다. 그러면서 소통하는 방식은 예술 갈래에 따라 다르다. 미술은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서 시각적인 조형물을 만들어낸다. 시간은 배제하고 공간만 사용한다. 그래서 미술에서의 소통은 다른 어느 예술보다 분명하고, 직접적이다. 
미술에서는 어떤 소통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그리는 대상인 사물과 사물의 소통, 그리는 대상과 그리는 사람의 소통, 그려놓은 작품과 보는 사람의 소통, 그린 사람과 보는 사람의 소통이 시차를 두지 않고 한꺼번에 이루어진다. 이처럼 다면적인 소통에 즉시 동참하는 감격을 누리도록 한다. 언어의 장벽이나 문화의 차이를 넘어서서 소통을 함께 경험하게 한다.
2019-02-23 老巨樹展을 마치고_조동일
老巨樹展을 마치고
-조동일 

>>그림을 보러 오세요

다음과 같은 안내장을 이메일로 발송하고 전시회를 했다. 안내장에 그림 네 점 사진이 있는데, 여기 옮기지 못했다.
 
   화가가 되고 싶은 소망을 접고, 국문학 연구에 종사해 어느덧 50년을 보냈습니다. 고향을 잊지 못하는 심정으로 이따금 그려온 그림에 근래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바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작품 300점을 골라 <<山山水水>>(지식산업사, 2014)라는 화집을 냈습니다.
   이번에는 일관성 있는 작품 300점을 <<老巨樹展>>(지식산업사, 2018)에 수록하고, 원화를 보여드리는 전시회를 造形갤러리(서울 종로구 인사동 194-27, 02-733-4792, 인사동 네거리 서남쪽 방향 태화빌딩 반지하)에서 2018년 6월 13일(수) 오후 2시부터 26일(화) 오전까지 엽니다. 그림 본보기를 몇 개 보입니다.
   표구하지 않은 작품 100점을 동시에 전시합니다. 원하는 분이 있으면 즉석 판매를 하고, 비어 있는 자리는 다음 순번의 작품으로 메워나가 전시가 계속 달라집니다. 300점을 모두 내놓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작품 가격은 한 점에 100만원으로 합니다. 친분이 있는 분들에게는 후불로 드립니다. 친분이 있는 교수의 친필 확인서를 가져오는 대학원생들(수료자, 학위취득자 포함)은 장기 후불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오후 2시-5시에는 제가 자리를 지킵니다. 

신문에서 소개한 말 

시작하기 바로 전 6월 12일자 조간 <<조선일보>>, 석간 <<문화일보>>에 인터뷰 기사가 나왔다. 사진은 빼고 글만 옮긴다.

<<조선일보>>

국문학자 조동일 서울대 명예교수
老巨樹 화집 내고 전시회도 열어… 어릴 적 화가의 꿈 정년 후 이뤄

신라 화가 '솔거'의 이름을 딴 경기 군포의 한 아파트엔, 현관에 '초인종을 누르지 말라'며 휴대전화 번호를 종이에 적어 붙여 놓은 집이 있다. "그림을 그릴 땐 집중하느라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서요…." 집주인은 원로 국문학자인 조동일(79) 서울대 명예교수다.
조 교수는 영남대,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대 교수와 계명대 석좌교수를 지냈으며 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다. '한국문학통사' '세계문학사의 전개' 등 저서로 문학비평과 고전문학 연구에 독보적인 업적을 냈고, 저서 70여권의 정수를 모은 '동아시아 문명론'으로 한·중·일 학문 통합의 비전을 제시했다.
조동일 교수가 경기 군포 자택의 작업실에서 자신이 그린 노거수 그림 앞에 서 있다. 그는 “동·서양화의 느낌이 고루 나는 구아슈로 그린다”고 했다.
국문학계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그가 붓을 잡았다. 지난 4년 동안 그린 노거수(老巨樹) 그림 300점을 최근 발간한 화집 '노거수전'(지식산업사)에 실었다. 13일부터 26일까지 서울 인사동 조형갤러리에서 전시회도 연다.
까까머리 소년 시절부터 꿈이 화가였다. 경북고 2학년 때인 1956년엔 두 친구와 함께 대구에서 전시회도 열었다. "부모님께서 '그것으로는 생계가 어렵다'고 반대하시는 바람에 학자로 진로를 바꿨죠. 다시 붓을 잡게 된 것은 10년 전이었습니다."
십 대 때 주로 썼던 구아슈(물과 고무를 섞어 만든 불투명한 수채 물감)를 구해 다시 작업하기 시작했다. "수채화처럼 가볍지도, 유화처럼 두껍지도 않으면서 동양화와 서양화의 느낌이 두루 나는 재료지요." 그림을 따로 배우지 않고 자기만의 스타일을 개척했다. 동양화가였던 아내 허정씨와 2010년 부부전(展) '풍경+산수'를 열었다. 지난 2월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엔 혼자 사는 아파트를 연구실 겸 아틀리에로 쓰면서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하루 4~5시간 작업한다.
그의 화폭 속 늙은 나무들은 거칠고 역동적이면서도 생명력이 넘친다. 온갖 풍상과 신고(辛苦)를 겪으며 포효하듯 몸을 비튼 채 세월을 견뎌 연륜과 품격이 묻어난다. 나무 전체를 그리지 않고 줄기나 가지, 잎, 꽃 같은 일부만을 담았다. “전체를 그리면 나무가 작아집니다. 그러면 표정을 살리기 어려워요.” “왜 늙은 나무를 그리는가?” “나무가 나이 들수록 얼마나 원기 왕성하고 우렁찬 기품을 드러내는지 보여주려 했지요. 인간의 정신도 그걸 본받아 '나무처럼 늙자'는 메시지를 전하려는 겁니다.”
조 교수가 가장 많이 그린 나무는 느티나무다. “가장 품위 있고 고목(古木)이 고목다운 나무지요.” 그다음은 정신적 격조를 지닌 소나무, 흥취가 살아 있는 버드나무 순이다. 고목에 피는 매화의 아름다움도 놓칠 수 없었다. 학문적 역량과 연륜이 그림에 농축된 것 같다고 했더니 “내가 계속 그림만 그렸다면 기교야 늘어났겠지만 문기(文氣)는 부족했을 것”이라며 웃었다.
노(老)학자는 어린 시절 왜 그림이 그렇게 좋았는지 이제야 깨달았다고도 했다. "글이 마음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꺼내는 거라면, 그림은 밖에 있는 것을 마음속으로 가져오는 것이더군요. 글을 쓰면서 번뇌와 망상에 시달리는 반면, 그림을 그리면서 그 번뇌와 망상을 다 씻어내게 됩니다."
조 교수는 "다음엔 산을 그려볼 생각"이라고 했다. "고결함, 높은 이상, 추구해야 할 목표, 탈속(脫俗) 이미지가 그 속에 있기 때문이죠."

<<문화일보>> 

붓을 든 국문학석학 조동일 교수 개인전 

“천대받지 않을만큼 보증금만  
그림은 해몽보다 보기 좋아야”  
‘누구나 쉽게’ 대중적 미술철학  

인사동 조형갤러리 100점 전시  
시련에도 정정해지는 老巨樹  
작가의 풍경화 속 핵심 소재 

“그림을 그냥 주면 그림이 천대받을 수 있죠. 그렇다고 돈 많이 받는 것도 적당치 않습니다. 그래서 그림을 손상하지 말고 잘 간직하라는 보증금 조로 100만 원을 받는 것이죠. 많은 사람에게 그림을 나눠주는 것이 내 바람이기 때문에 친분이 있는 모든 분에게 후불제로 그림을 드릴 계획입니다. 특히 대학원생들에게는 장기후불제인데, 나를 다시 만날 수 없게 됐다는 소리가 들리면 그림값을 들고 빈소에 와서 부조금 대신 내도 된다고 말해줄 생각입니다.” 
조동일(79) 서울대 명예교수가 오는 26일까지 서울 종로구 인사동 조형갤러리(02-733-4792)에서 개인전을 연다. 경기 군포시의 자택 겸 화실에서 만난 조 명예교수는 그림값을 100만 원으로 정한 이유에 대해 그렇게 설명했다. 전시장에는 그가 직접 그린 100점의 작품이 내걸려 있다. ‘老巨樹展’(노거수전, 지식산업사)이란 타이틀로 얼마 전 내놓은 화집에 실린 그림들이다. 화집에 실린 그림이 300점이기 때문에 그림이 팔려나간 빈자리는 나머지 화집 속 그림들로 채워진다. 이번 전시에는 모두 액자 표구가 안 된 작품들이 전시돼 눈길을 끈다. 유리 액자가 자칫 그림 감상을 방해할 수 있어 일부러 표구를 안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전시장에 서면 수백 그루의 노거수가 생생하게 살아 숲의 향기로 관람객을 압도하는 듯하다.
조 명예교수는 국문학 연구와 문학비평에서 독보적 업적을 이룬 학자다. 1968년 계명대 교수를 시작으로 영남대와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을 거쳐 2004년 서울대에서 정년퇴임했다. 특히 조 명예교수의 저서인 ‘한국문학통사’는 우리 문학계에서 불멸의 명저로 통한다. 그러나 조 명예교수의 원래 꿈은 화가였다. 대구 경북고 2학년 때 친구 둘과 전시회도 열었으나 부모의 반대로 학자의 길을 걸었다
“교수 시절에도 그림을 간혹 그렸지만 너무 빠져드는 것 같아 자제했어요. 그리고 퇴직 후 본격적으로 붓을 잡기 시작했죠. 2004년 서울대 퇴직 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2009년 계명대를 퇴직하고서는 그림에 더 많은 시간을 바치고 있습니다. 문학창작과 그림을 비교하면 문학은 내 마음속으로 바깥의 것을 잡아 오는 것이고, 그림은 바깥의 것으로 내 마음을 씻어내는 일입니다. 그림은 마음속 찌꺼기를 다 씻어줘요. 계속 괴로움이 따라붙는 문학 창작과는 다르죠.”  
우리 근현대 화가 중 겸재 정선과 소정 변관식을 가장 존경하다는 그는 애초에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그리고 역시 산수화를 즐겨 그리다가 올초 세상을 뜬 부인 허정 씨와 2010년 부부합동전을 열기도 했다. 조 명예교수는 5년 전부터 수령이 오래된 거목인 ‘노거수’를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다. “나이 먹을수록 모든 시련을 겪으면서도 더욱 정정해지는 것이 노거수”라며 “사람도 노거수처럼 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린다고 그는 설명했다.
“최근 그림이 이상하게 되는 것에 대해 은근히 반발심이 들어요. 누구나 봐도 좋은 그림이 좋은 그림입니다. 그러나 요즘 그림은 자연을 떠나 있어요. 불행한 일이죠. 바깥의 것을 가지고 내 마음을 씻어내야 하는데, 추상화는 바깥의 것 없이 자기 마음속에서 헤매기만 합니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어려운 작품보다는 ‘즐거운 꿈’ 그 자체를 그려 보여주겠다는 생각에서 만들어진 철학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