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최근석 국문평론, 김정윤 큐레이터 평론
시간 안에 드리워진 일상 
갤러리 도스 큐레이터 김정윤

  시간은 어느 한 순간의 멈춤도 없이 묵묵히 자기 길을 걸어가는 사람처럼 그저 소리없이 흘러간다. 우리가 흔히 시간을 말할 때 사용하는 시, 분, 초의 단위처럼 누구에게나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객관적인 시간이 있는 반면 개개인만이 겪는 주관적인 시간도 분명히 존재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감정적인 요소들로 인해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흘러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일분일초가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경험을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표면적으로 우리는 같은 시공간에 속해 있지만 결국은 이처럼 다른 시간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최근석은 작품을 통해 시간과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며 서로의 연관성을 찾고자 노력하는 동시에 일상 속에서 특별함을 발견하고자 한다.

  일상이란 날마다 반복되는 생활을 의미하듯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날들의 연속이기에 그 속에서의 경험은 사실상 특별하지 않게 여겨지고 잊혀지기 쉽다. 혹은 평소와는 다른 약간의 변화를 느꼈다 하더라도 일상의 범주에 놓고 들여다보는 순간 더 이상 이전과 동일한 감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특별한 순간은 작은 일상에서부터 찾아온다는 점은 변함이 없으며 이는 최근석이 현실에 존재하는 우리 주변의 흔한 풍경에 큰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이다. 작가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군중들을 그들만의 주관적인 시공간으로 바라보고 그려나간다. 동일한 때와 장소에 위치한 사람들의 형상은 화면 안에서 각자 자신만의 시간 속을 걸으며 지나쳐간다. 작품을 통해 우리 눈에 드리워진 그들의 뒷모습은 어쩌면 크게 나와 다르지 않은 사람들처럼 보인다. 작가가 이들에게 관심을 갖고 그들의 평범하고 의미없어 보이는 순간들을 포착하여 작품으로 표현해 나가는 이유는 나와는 다른 그들의 시간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다. 흐릿한 사람들의 형상을 배경으로 거리를 두고 서있는 사람의 형상은 화면 구도에 극적인 대비를 주고 있으며 이는 나와 타자 그리고 다른 시공간에 대한 사유를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군중들이 보여주는 일상의 풍경과 더불어 작품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조형요소는 빛이다. 빛도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미처 의식하지 못한 채 우리와 공존하고 있다. 또한 빛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우리의 눈에 드리워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될 만큼 예술에 있어서 근원적인 존재이다. 작가는 각기 다른 시간과 속도로 움직이는 사람들을 일종의 빛의 효과가 주는 형상이라고 받아들이고 이를 화면 속에 담아낸다. 그림자나 사람 형상의 잔상을 강조함으로써 빛이 우리에게 제공해주는 평범한 일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표면적으로는 군중들의 모습으로만 다가오지만 그 이면에는 평소에 소중한 것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에 대해 작가의 메시지를 담아 전달하고 있다.  

  평범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무기력함을 느끼기도 하지만 우리의 일상도 알게 모르게 꾸준히 변화하고 있다. 조금만 관점을 바꾸어 내 주변에서 특별한 장면을 찾아내고 그 순간을 소중히 한다면 누구나 익숙함 속에서도 생경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는 작가가 흘러가는 시간 안에서 평범함이 주는 깨달음을 시각화하여 표현한 작업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바로 그러한 일상 속에 특별함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다. 최근석의 바람처럼 익명으로 그려진 군중들의 모습을 통해 이를 감상하는 관람객들이 본인의 삶을 투영하여 들여다보고 스쳐지나가는 일상의 시간들이 나에게 주는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경험이 되기를 바란다. 

최근석 국문평론, 천석필 자하갤러리 관장평론

LIFE
천석필 자하갤러리 관장

인생은 여행과 같습니다.
여행지에서는 새로운 일이 기다립니다. 여정 가운데 뜻밖의 인연이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서로 향하는 곳이 다르고 가는 방법도 다르지만, 언제나 단체 여행하듯 함께 움직이게 되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연은 아주 가까이에서는 가족과 친구들의 관계일 수 있고, 좀 더 외연을 확장하면 사회, 그 이상도 가능할 것입니다.

 

최근석은 삶을 단막극 광경으로 압축해 내고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일상의 상태에서 익명의 누군가를 포착해내고 그의 표정을 살펴보게 합니다. 그가 작품의 주인공이어도 무슨 일을 하는지 파악이 가능한 것은 극히 일부일 뿐, 대다수는 알 길이 없습니다.

누군가의 하루, 한 순간은 찰라의 긴장감으로 화면을 채우고 있습니다. 모두들 분주해 보입니다. 혹은 누군가를 응시하는 것 같습니다.

바쁘게 스쳐 지나가는 행인들, 서로 어울려 모여 있는 사람들, 그들 모두가 여행자입니다. 최근석의 주인공은 특별하지 않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최근석의 작품은 두 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등을 돌린 주인공 앞에 유사한 동작을 취하는 군중의 형태입니다. 이 작품 속 군중은 등을 돌리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이며, 자신이 그 모습을 바라보는 형식의 1인 다자의 관점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나, 그 안에 타자의 시선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작품입니다. 이를 통해 나를 여러 각도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 방식은 객관화된 자신의 상황을 집중해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도시풍경을 배경으로 동적인 상황을 펼치는 사람들입니다. 지극히 일상적인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이 형식은 건물의 형태가 있든 없든 간에 도시인의 일상을 포착해내고 있습니다. 한결같이 무엇인가에 열중하는 우리의 상황을 드라마틱하게 연출하고 있습니다.

마치 숨가쁜 상황이 순간적으로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위 두 가지 형식의 공통점은 시공간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일 페인팅은 가로 모양의 터치가 많습니다. 이는 인물과 배경이 세밀한 부분에서 섞이게 하여 시간과 공간의 속성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게 합니다.

시간은 속도를 갖습니다. 작품의 면면에서 활약하는 터치는 바로 이러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펙트럼을 통과한 빛의 파노라마 같은 색채는 인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공간감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디테일한 묘사는 사람들의 외형이 아니라 빛을 투영 받은 색의 공간입니다. 

 

인생은 시간과 공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진 이 영역에서, 사람들은 여러 상황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개개인의 모습으로 나타난 군중의 형상과 시공간의 회화적 구현은 세상 속의 삶을 그려내는 작품입니다.

최근석의 LIFE는 나의 삶과 주변인의 삶에 대한 소소한 일상의 가치를 찾는 것입니다.
 

심상의 의식화를 이루다-천석필
심상의 의식화를 이루다 

천석필(이랜드문화재단 학예실장)
인간의 내면에 흐르는 정신이란 과연 무엇인지, 그 세계는 오묘하고 신비롭다. 그러므로 언어학적으로 무엇이라고 주석을 달지라도 계속 새로운 정의가 가능하다. 지금 이 세대에도 이에 대한 물음은 계속 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명제이다. 최근석은 예술가의 정신적인 측면의 시각성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는 생각하는 것과 보이는 것, 그리고 자연적으로 축적되는 자신의 정서적인 세계에 대한 질문을 던져오고 있다. 마음은 생각하는 것에 대한 보이지 않는 표상이다. 특히 예술가가 지닌 마음의 표상이 작품으로 세상에 드러나면서 유일한 존재가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예술은 유일성이 최고의 가치이므로 독창적이지 못한 것은 인정 받지 못하고 사라지게 된다. 예술작품에서 주목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창조성”이기 때문이다.
최근석의 작품은 침전된 의식의 주관적 개념화가 돋보인다. 작가만이 형성시킬 수 있는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이 전개되면서 정신의 무차원적 세계를 끄집어내고 있다. 특히 이성적 분배가 배제되고 자아의 심취에 의한 서술로서의 이미지는 예술성의 완성도를 높히고 있다. 이것은 서로 다른 사물이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된 것처럼 공동화를 이룬 결과이다. 작품은 사유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침전된 분위기가 전체적인 기조를 이루면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여 “그림 속의 그곳”을 궁금하게 만든다. 그러나, 작가는 풍경을 그리지 않았다. 나무가 있고 산이 있고 하늘이 있는 곳이 바로 세상의 모습일 뿐, 특별한 장소가 아닌 것이다. 작가가 바라본 이미지는 또 다른 자연의 정경이다. 그러한 연유로 작가는 오직 내면의 신비성을 보여주고자 한다. 작품상, 형상 자체가 갖는 이미지의 속성은 자연이다. 창작의 원천인 심경의 세계에서 보지 못할 것이 없다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 그만의 자연의 심상인 것이다. 그것은 무한의 심원을 향하는 작가만의 심경의 묘사이자 이상이다. 
작품의 중심을 아우르는 신비스러운 색조는 내면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하며 동경의 마음을 갖게 한다. 작가가 검은 색을 전혀 쓰지 않는 이유는 색이 가진 감각적인 효과를 극대화 시켜 나가기 위해서이다. 그런 결과로 평면적인 산의 형상 속에 숨겨진 다른 색을 보게 된다. 하늘과 강이 보이는 작품에서는 그 대비가 하나의 협주를 이룬다. 하늘과 강은 마음의 공간으로 존재하는 대상이다. 하늘로 대신되는 허공이 오히려 밀도를 높여가며 근경으로 밀려 오는가 하면 물길은 점점 더 먼 곳으로 달아나기도 한다. 작가의 생각은 복잡한 과정을 거치며 단순화되어 형상을 이루고 내재된 의식은 압축된 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잠재의식이란 마음속에 내재된 희망의 메시지와 같은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새로운 세계와 성취에 대한 갈망과 무형의 물질이 하나의 형을 이루는 동시에 희망의 역동적인 엔진이 내재된 상태이다. 작가만의 감각으로 예술을 창작하는 것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작가가 갖는 의식 자체에 바로 이러한 기대가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순전히 드러나는 법은 없다. 또한 시각적으로 완전히 보이는 것도 아니다. 최근석 작품의 근원이 내재된 잠재의식의 표출이듯 그의 작품은 보일 듯 하면서도 감춰진 듯한 느낌을 전달한다. 그러므로 정신성의 진의를 작품의 세계로 승화시켜 나가는 것은 새로운 희망을 추구하는 목적이 될 것이다.

단지를 보는 마음-천석필
단지를 보는 마음

천석필 (이랜드문화재단 학예실장)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요소는 무엇인가? 사람마다 다른 성격과 다른 취향이 있으므로 무엇에 대해 좋다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이 마주한 대상과 통하는 어떠한 것이 있을 때에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상호교감에 의한 감정의 표출이다.
최근석의 정서는 진해의 작은 어촌마을에서 보고 누렸던 소소한 일상이 축적되어 형성되었다. 그가 감동받는 대상은 의외로 보통은 스쳐 지나갈 만한 것들이다. 그는 이끼 낀 돌조각이나 오랜 세월을 보냈음직한 기물에서 사람들의 흔적과 온정, 정성을 유추해 보는 것을 좋아한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부단히 이어졌을 사람들의 이야기와 사연이 느껴질 때 감동을 받는 것이다. 비록 유년시절의 환경과 현재 환경이 다를지라도 마음속에 내재된 정서의 순수성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로 유지된다. 
최근석이 작품 소재로 삼는 것도 사람들의 숨결이 깃들여진 것이다. 기물이 갖는 특성에 의해 소재로 선택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작품에서 한지로 입구가 덮혀 있는 단지를 볼 수 있다. 단지에 담았을 그 무엇, 소박하게 종이로 감싸는 주둥이, 끈으로 한지를 동여맸을 손길은 결국 누군가를 향한 정성인데 이러한 광경을 생각하면 잔잔한 감동을 받게 된다. 작가는 소재가 함축하고 있는 것을 형상과 색채를 이용하여 새로운 대상으로 재탄생 시키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최근석은 극사실적 표현능력이 뛰어나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작품에서 극사실적이라는 느낌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화면 가득히 나열된 단지는 처음에는 사실적으로 그려지는데 차츰 붓질이 회를 거듭할 수록 처음의 극사실적 묘사는 속으로 묻히게 된다. 그림의 초기부터 현재 시점은 사물의 단순화를 향해 나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는 형태에서 이미지만 남기는 것이 단지의 본질을 전달하는 이상적인 수단이 되는 셈이다. 또한 대상에 대한 작가의 자기화를 이루는 결과이기도 하다. 그래서 작품에는 “완성”이라는 말을 사용하기가 어렵다. 소재가 갖는 특징 조차 단순화의 과정으로 소실되므로 이미지를 무한정 단순화 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회화에 있어서 색채가 갖는 위력은 대단하다. 어쩌면 형태적 이미지보다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색채에서 말하는 단색의 특징에 따라 전달되는 감성은 이론적으로 보편적인 것이지만 순수회화 작품에서 사용되는 색채는 과학적으로 하나하나 분리해서 설명할 수 없다. 화가 역시 완벽하게 일치하는 동일한 색을 한 화면에 만들어낼 수 없다. 같은 그림을 두 장 그리더라도 꼭 같이 그려지지 않는 이유는 작업의 환경과 작가의 심리상태가 그림에 그대로 전달되는 데 있다. 작가는 사실 색을 혼합할 때 비율을 생각하지 않으며 오직 감이 느껴지는 대로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매번 작품이 같지 않은 것이다. 다만 작가만의 정서에 의해 통일성을 갖는 색채가 구현될 뿐이다. 
화면 안에서 색은 서로 돕기도 하지만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것은 색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조화의 문제이다. 최근석의 작품에서 보듯이 정렬된 듯 배치된 단지의 독립성이 화폭 안에서 통일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색채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제해결의 가장 수월한 방법은 단색조를 사용하면 되겠지만 작가는 모든 색조를 활용하고자 한다. 화폭에 수없이 중첩되는 물감은 본래 색감을 넘어 서로가 호응하는 새로운 영역을 만들며 단지의 본질은 수 만 가지의 색감으로 생명력을 부여 받고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다. 만약 최근석의 작품에서 단지를 보려 한다면 작가의 마음을 들여다 볼 기회가 줄어들 것 만 같다. 
최근 몇 년간 지속적으로 다루어 오고 있는 소재에 대해 지루해하지 않는 이유 또한 같은 맥락이다. 처음 느꼈던 대상의 감동적인 실체가 외적 형상에서 왔더라면 긴 시간을 이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작품에서 단지의 이미지는 오래 전에 사라져 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가 추구하는 것은 감동의 형태를 빌어 작가 자신의 마음의 색채를 표현하려는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보고 싶어하는 그림은 잘 훈련된 그림이 아닌 작가의 감정이 오롯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예술작품의 생명은 미인처럼 빼어난 데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잘 그리는 능력에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형태감, 색채감, 묘사력이 뛰어난 점을 너무 간단히 폄하할 수는 없다. 미술에서 이것들은 뼈대와 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다만, 작가가 기계적인 습관으로 작품에 임했는지 온전히 작품에만 마음을 주었는지, 작품은 늘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작품이 하는 말은 결국 작가가 하는 말이다. 혹여 어떠한 여건의 변화가 있더라도 작품을 대하는 마음이 변치 않아야 예술가 아닐까? 시류에 흔들리면 그림도 흔들린다. 그러한 점에서 보면 최근석은 자신의 의지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