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Achieves a Conscientization of Mental Imagery-Chon Sokphil
2014 E-Land Foundation for the Arts & Culture, The 4th-term Artist Competition Exhibition 
Achieves a Conscientization of Mental Imagery 


By Chon Sokphil, E-Land Foundation for the Arts & Culture 


What is the spirit flowing in humanity’s soul? The spiritual world is profound and mysterious. Any linguistic annotation or new definition of this world is possible. Questions here have been constantly raised, and will also be raised in the future. Choi Geunseok takes note of visibility in terms of the artist’s spirit. He has posed questions concerning what he thinks, what is visible, and his own emotional world, accumulating naturally. One’s mind is an invisible manifestation of what one thinks. An artist’s work is especially a manifestation of their mind. It is quite natural such work becomes the only thing in the world. As uniqueness is the highest value in art, something unoriginal cannot be unappreciated and dies out. That is why one of the most significant keywords in art is “creativity”. 
 
A subjective conceptualization of deposited consciousness stands out in Choi’s work. He brings about the dimensionless world of the spirit, unfolding his own process of conscientizing the unconscious. His work’s artistry and completeness is enhanced by descriptive images deriving from the preoccupation of his self. His work is the result of communization of different things that makes them look to be linked to one context. His work dominated by a mood of bottomless thinking emits a fantastic atmosphere, making viewers feel curiosity about “what is in his painting”. However, what the artist painted is not landscape. There are trees, mountains, and the sky in the world he sees, but this is in no way special. The world he views is another scene of nature. He intends to showcase inner mystique. The attributes his images have are those of nature. He can see all in the world of mental landscape, the source of his creation. That is, his work is a portrayal of his mental imagery toward an infinite abyss. 
 
The mysterious shades of colors, the core of his work bring viewers to his profound inner world, making them have longing. The artist never exploits any black tone because he wants to maximize the sensuous effects of colors. Another kind of color is found in the two-dimensional form of a mountain. In the work featuring the sky and a river colors are in concert with one another. The sky and river are objects occupying mental spaces. He gives simplified form to his ideas through an intricate process, representing his innate consciousness with condensed hues.
 
The subconscious is like a message of hope inherent in the mind. His longing for a new world to be achieved in the future, intangible material, and dynamism of hope, are innate in his work. Choi creates his art with his own distinctive senses, concealing his consciousness under such expectation. He never reveals this. As his work is originally a manifestation of inward subconscious, his work brings about a feeling that it is concealed and revealed at the same time. His new purpose and hope is to seek the elevation of his spirituality to the level of art. 
어떻게 끄집어낼 것인가-임봉규
어떻게 끄집어낼 것인가?

교수 ■ 화가   임   봉   규
 
   21세기 지금은 창조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즉 창조적 발상의 근원은 ‘무엇을 끄집어낼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끄집어낼 것인가’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88 서울올림픽 개회식 때 굴렁쇠 퍼포먼스가 바로 ‘어떻게’의 좋은 본보기이다. 여백의 미가 동양의 회화적 특성임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바로 그 여백의 사상을 텅 빈 운동장에서 굴렁쇠를 굴리는 소년을 통해 표현해 냄으로 찬사를 받아 낼 수 있었다고 본다면, 최근 최 근석도 ‘어떻게 끄집어낼 것인가’에 고심하며 몰두하고 있음을 본다. 그의 작품에서는 이제야 이야기소리가 들려오기 때문이다. 색들은 각기 빨간색정열의 소리를, 파란색냉정의 신음을, 초록색평화의 음률을, 노란색 밝음의 음악을, 보라색존엄의 고함을 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붓놀림은 리듬감을 타고 경쾌해 졌으며, 형상은 쪼개지고, 깨지고 또는 재결합되어 색의 소리와 어울러져 밝고 경쾌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어떻게’를 다시 설명하자면 ‘상상할 수 없다면 창조할 수 없다’로 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없다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없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해내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묘사하고 있는 세계에 머무를 수밖에 없게 된다. 더 나쁜 것은 환상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갖춘 마음의 눈을 계발하지 않는다면 육체의 눈으로도 아무것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 상상의 날개를 달고 날개를 펄럭이며 날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눈에 보이는 것은 물론 그 이면의 세계까지도 들여다보고, 상상하고, 환상을 꿈꾸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지금까지의 그의 작품들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즉 그는 ‘무엇’을 그려왔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잘 그려진 ‘무엇’이었다. 항아리, 돌, 나무, 노인, 여인, 꽃과 과일 등등 수 세기 동안 ‘눈속임 사실주의(trompe l'oeil realism)’의 실현을 목표로 삼아온 서구 미술을 충실히 답습해 왔음에 불과 아니다. 물론 그의 관찰은 정확했다. 항아리의 질감도, 그릇에 담긴 내용물의 상태도, 뚜껑과 입구를 감싼 천의 구김이나 묶음의 디테일도 정확하게 잘 그려냈다. 그러나 그의 관찰이 시각분야에만 국한되어왔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 그림에 청각적 관찰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의 묘미가 녹아 있었다면, ‘무엇’이 아니라 지금처럼 ‘어떻게’의 맛을 일찍이 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잠깐! 여기서 한번 되돌아보자. 자칫 내 말이 지금까지의 작품들을 폄하하는 것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는 ‘무엇’에 철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로 넘어올 수 있었다는 것을 간과(看過)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한 예로, 요리의 대가가 되려면 필요한 도구의 용법을 익히고, 불의 강약을 조절하여 재료를 절이고, 졸이고, 살짝 튀기기도 하고, 어떤 재료에는 소금만 넣고, 어떤 재료에는 간장으로 간을 맞추는 등 그 모든 방법을 습득하고 알아야만 좋은 요리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그도 그림에 있어서의 모든 표현방법을 익혀왔기에 가능했음을 강조하고 싶다. 즉 묘사하고 그리고 또 그리는 작업량이 극히 많은 그림쟁이의 속성으로 내공(內攻)을 쌓아 왔음은 나름대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는 가장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것들에도 주목할 만한 가치를 찾아냈다. 때문에 그는 ‘세속적인 것의 장엄함(sublimity of the mundane)'의 가치를 알고 있는 작가인 것 같다. 즉 모든 사물에 깃들어 있는 매우 놀랍고도 의미심장한 아름다움을 감지할 줄 아는 ‘사람이다’라는 말이다. 
   물이 담긴 돌 항아리에 내려앉은 꽃잎에서 윤회전생(輪廻轉生)을 느끼는 그는 그의 작품에 “인간이 생을 다하고 죽음으로 멸하게 되면 한줌의 재만 남고, 이것은 땅에 뿌려져 썩음으로써 생명을 탄생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로부터 식물이 자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동물이 이를 따먹고 살아가며, 인간은 다시 식물이나 동물로부터 영양분을 취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이런 순환과정이 바로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윤회(輪廻)이다”라고 그림에서 역설하고 있는듯하다.
   자! 이제 다시 그의 지금의 그림으로 돌아가 보자. 정확하게 그려졌던 ‘무엇이’ 색과 공간과 빛과 움직임을 수단으로 삼아 풍요의 아름다움을, 삶을 즐길 줄 아는 즐거움을 ‘어떻게’의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가 말한 “예술이란 물(物)적인 사실과 영(靈)적인 효과사이의 불일치를 어떻게 삶에 대한 시각적 반응의 공식으로 나타내는 것이냐”다와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어떻게’를 이용해 소위 ‘창조적인 작업’을 할 때 예술가는 ‘생각을 위한 도구’라고 부르는 공통된 연장을 사용한다. 이 도구들 속에는 정서적 느낌, 시각적 이미지, 몸의 감각, 재현 가능한 패턴, 유사사물의 유추(類推) 등이 포함된다. 그리고 상상을 동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이 생각도구들을 가지고 얻어낸 주관적인 통찰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공식적인 언어로 변환(translation)하는 방법을 배운다. 이를 통해서 그들의 생각은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로운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림에서 ‘무엇’과 ‘어떻게’의 결별은 곧 그려진 것을 ‘안다’는 것과 ‘이해한다.’는 것이 분리되는 결과로 나타난다. ‘무엇’의 단계에서는 이해함으로써 앎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려진 것이 얼마나 사실적이냐를 식별해 내고는 안다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응용해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이며,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무엇’에서는 상상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고, 마음과 몸, 지성과 직관을 연결하는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사실’은 습득했지만 그것의 의미는 상상해내지 못한다. 이렇듯 ‘어떻게’는 현대미술을 행함과 이해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이렇게 ‘어떻게’를 그의 작품에 도입하기 시작한 그에게, 그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를 기대하고 호기심을 갖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발로라 하겠다.
   ‘무엇’을 벗어버린 그의 ‘어떻게’는 지금 현란한 꽃을 피우고 있다. 형식의 굴레에서 벗어났으며, 딱딱한 껍질을 깨고 부드러운 싹이 돋아나고 있다. 붓 터치와 색깔이 난무하는 경쾌한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벗어나고, 깨고, 다시 돋아나 함께 노래하며 춤을 추는 화면은 결국은 추상화로 진화할 것 같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어차피 추상(抽象)의 속성이 어떤 대상의 전체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느낀 특성만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바로 재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화가는 복잡한 체계에서 ‘하나만 제외하고’ 모든 변수를 제거함으로써 핵심적 의미를 발견하려고 애쓰기도 한다. 현실이란 모든 추상의 종합이며, 이 가능성을 알아냄으로써 최 근석은 현실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진정한 의미에서 추상화란 현실에서 출발하되, 불필요한 부분은 도려내고, 필요한 것은 덧붙여나가면서 사물의 놀라운 본질을 드러나게 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가 궁극적으로 할 일은 추상화 자체의 본질을 찾아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