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삶 물든 일상 속 자연, 그 발견과 기록_홍경한(미술평론가)
삶 물든 일상 속 자연, 그 발견과 기록

홍경한(미술평론가)

“자연의 본질적인 모습과 인생사와의 관계, 
삶 속에서 쌓인 감성들을 묵묵히 쌓아감이 나의 작품이다.” 
_작가 허문정

1. 세심함과 치밀함이 돋보이는 온갖 자연물이 화면에 자리한다. 사실적인 잎사귀의 잎자루와 형형색색의 꽃들을 비롯해 새, 나비, 사마귀, 무당벌레 등 온갖 곤충과 조류도 배치되어 있다. 원근법 없는 평평한 공간을 부유하는 그것은 전체적인 구성에마저 어느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을 만큼 계획적이고 꼼꼼하다. 그야말로 ‘질서의 미’다. 
‘질서의 미’는 2000년대 중반 선보인 <in nature> 이후 2020년 근작인 <in nature>연작과 <My Garden>(2020) 시리즈, <Forest>(2020)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고루 나타난다. 사실적이면서도 불규칙한 리듬을 지닌 채 예술적 대상에 대한 인식과 관점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체 및 집약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촘촘하게 그려진 자연물의 심미성도 눈에 띄지만, 무엇보다 홍엽이었다가 황엽이 되고, 다시 시간이 흘러 갈엽이 되듯 세월에 흔적이 열람된다는 게 특징이다. 
세월의 흔적은 잠시 가려졌다 다시 피어나는 자연의 그것마냥 작가에게 순환의 과정과 다름 아님으로 비춰진다. 이는 유기체적 세계관이지만, 자연의 순리에 인간의 운명을 맞춰가며 현세의 삶을 초월하려는 의지 역시 배어 있다. 반문명주의(反文明主義)까지는 아니더라도 인위적인 것과의 대립이 내재되어 있음이다. 
실제로 작가 허문정에게 자연은 일상의 한 부분이면서, 생명이 다한 것들에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는 생태학적 고리와 맞닿아 있다. 사적으로서의 자연은 그에게 행복을 일깨우거나 정체성을 확인하는 계기이고, 주어진 현실을 넘어서는 촉매로도 아쉬움이 없다. 특히 어느 면에선 폐쇄된 자의식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사고를 지향하는, 작가의 마음을 대리하는 색다른 재현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기 언급한 내용의 소실점엔 ‘지금 내 안에 있는 무엇(something that is in my mind)’이 걸려있다. 그것은 곧 자아를 의미하고, 인간 내면의 공통분모적인 욕구와 무의식, 삶을 지탱해온 여러 알고리즘과 연계된다. 물론 그 욕구와 무의식, 삶의 요소에는 미로와 같은 인생에서 하루하루의 문제들을 담담하게 맞닥뜨리며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와, 존재일 수 있기에 들어차는 다양한 의문들, 생을 소모할수록 되레 성장하는 여타의 것들이 나란히 분포되어 있다. 여정에 관한 고뇌, 매 순간마다 다가서는 ‘감정의 복선들’ 또한 복잡하게 내재되어 있다. 
<나의 정원>(my garden)을 비롯한 일련의 연작들은 바로 그 ‘감정의 복선’을 전사한 것이다. 이 작품 모두 본질적으론 작가가 추구해온 ‘삶의 주제’(ego)와 동떨어져 있지 않으며, 그건 ‘자연과 나’의 현상학적 관계들을 보다 밀도 있게 보여주는 행위이자, 작가 자신과 그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발견하거나 기록하는 것이라 봐도 무방하다. 
다만 그 발견과 기록은 지시적이지 않다. 지시적이지 않기에 상상력을 가중시키고 해석의 여지 또한 넓다. 판에 눌려 한지에 옮겨진 다양한 자연물과 인물 등, 모든 소재들 하나하나가 그렇다. 그 중에서도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꽃잎 작업은 자연 속 존재로서의 실존과 가깝다. 그 둘의 관계는 작가 스스로 살고자 하는 의지만을 가리키진 않는다. 서로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순종하고, 순종함으로서 자연의 섭리를 이해한다는 게 옳다. 이는 물질 관계로 전이되지 않고 이성으로 파악되지 않는 조건들로서, 작가는 이를 감성으로 걷어 올려 시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나의 정원 속 자연은 사색의 대상으로서 교감을 통해 작품으로 이어진다.”
_작가 허문정

2. 꽃잎은 때로 매우 간결하다. 조형요소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 마치 한 폭의 문인화를 접하듯 여기로서의 작품이라는 여운까지 든다. 일상에서 마주하는 대상물을 주관으로 끼워 맞춰 또 다른 세계를 재구성하고 있는 탓이다. 
그렇게 재구성된 세계는 소박하다. 거창하지 않다. 대신 자연에서 느껴지는 맑은 기운과 섬세함, 미묘한 아름다움을 자연과 교감으로 인한 자신만의 감수성 아래 사라지고 변화하는 우리네 삶을 사색의 공간에 담았다는 게 옳다. 미학적 관점에선 꿈과 현실이 착종(錯綜)된 공상적 느낌도 배제하기 어렵다. 
하지만 허문정의 여러 시리즈는 세상의 각종 재단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순수한 심리적인 무의식이 내재된 조형이면서, 공중으로 맨드라미가 길게 뻗은 2009년 작품 <heart>처럼 간혹 치열한 현실성을 반영하는 무대이다. 희망과 자유에 대한 의지를 담보한 언어이고, 어느 땐 심연(心淵)의 이야기를, 감정이입이 뚜렷한 자신의 이야기를 일기 쓰듯이 펼쳐놓는 장(場)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들을 보며 문득 자연과 살갑게 맞닿은 삶을 생각한다. 매일 적어나가는 한 장 한 장의 개인적 서사를 떠올린다. 그 서사는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전개되기도 하나, 적어도 허문정에겐 사향(麝香)보다 진한 향기를 품고 있다. 그 향기 속에는 일상과 그 일상 속에서 읽는 자연, 나와 관계된 많은 것들이 깃들어 있다. 더불어 숨 쉰다는 것,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 그리고 시간에 의해 재탄생하는 생의 섭리 등이 균등하게 투영되어 있다. 
이밖에도 하루의 일과와 그 날의 감정들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가의 그림에선 그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려는 능동적인 제스처를 목도할 수 있으며 유한한 존재로서의 불안과 외로움, 인간의 욕망도 확인할 수 있다. 한편으론 현실에 대한 기존 관념의 탈출이자 자신을 찾아가는 자아실현의 여정도 개입되어 있다. 더구나 가느다란 선으로 다듬어진 인물과 눈동자는 작가의 삶, 그리고 멀리 있지 않은 세상을 묘사한 메타포(metaphor)적 형상이라 해도 그르지 않다. 
그러고 보니 허문정의 그림들은 하나의 풍경과 진배없다. 단, 그 풍경은 단순히 사물을 모방하거나 대상에 대한 장식적 경향의 풍경을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추상하는 공간이면서, 자신만의 살아 있는 상상력을 근간으로 한 무의식적 풍경에 준한다. 작가는 그 풍경 속에서 이상을 발견하고 다시 해체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흥미로운 건 근경(近景)과 원경(遠景)의 구별이 없는 배치가 눈에 띄는 그의 작품은 우위(優位)를 구별하지 않는 작가의 평범한 삶과 평등한 삶이 동시에 담겨 있다는 점이다.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이며 예술가인 자신의 내면과 현실이 은연 중 녹아 있는 셈이다. 
이런 흐름은 회화는 물론, 꽃잎과 나뭇잎, 생을 다한 곤충을 거둬들여 작업에 응용하는 간접매체인 판화에서도 동일하게 발현된다. 즉, 자연의 맑고 투명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와 “작품을 통해 생태학적으로 사실적인 부분과 이질적인 부분”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이다.(“나비가 꿀을 찾는데 꽃에 꿀이 없거나 서로 어울릴 수 없는 나비와의 관계 등을 통한 아이러니”라는 발언에서 알 수 있듯 그 안에서조차 있는 그대로의 경험적 주체의 의식이 드리워져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사실 그의 판화는 원시적이고 비인격적인 무의식충동(이드)의 욕구가 그 결과로 드러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의식의 깊은 곳에서 발생하는 자연적인 상태와 결이 같다. 이때 판화는 다양한 감정과 충동이 현실이라는 외계와의 중개자 역할을 하는 자아 그 자체로 지정되며, 이는 결국 그의 작품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에고(ego)로 나아감이다. 
에고(ego), 그렇다. 작가는 사회적 규범에 따라 주어지는 개인 내부 정사(正邪)의 의식을 미술표현이라는 예술장르로 소화한다. 이는 표현되어지는 많은 이야기들, 그 발원은 궁극적으로 ‘나’라는 존재성의 검증에 있으며 작가는 검증의 과정을 일종의 ‘코멘타리’로 부족하지 않다. 그것은 감성적인 관찰안에 의한 기록, 뛰어난 사색성, 그리고 그 내부에 안착된 “자연의 본질적인 모습과 인생사와의 관계, 삶속에서 쌓여진 감성들을 묵묵히 쌓아 감”에서 방점을 찍는다. 비록 가끔은 자아마저 비판하는 초자아(超自我)성을 엿보게도 하지만 그 삶 속 감성들을 묵묵히 그림으로 실어 나르기에 그동안 인내 가능한 상태를 유지할 수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말이다. 
이제 작가는 판화라는 틀에서 벗어나 보다 실험적인 작품세계를 통해 삶과 자연의 연계성에 대해 한층 깊이 자문하고 있다. 스스로를 이탈시키면서도 물질을 뛰어넘는 정신성으로 생명의 은밀한 과정을 구현해 왔고, 서로 다르고 같음을 자연스럽게 배열한 채 나를 포박하는 삶과 자연의 이야기들을 은은함과 강렬함, 단아함 등으로 잘 담아내 왔다. 
특히 여러 대상들을 평면 위에 다양한 색상의 어울림으로 완성하며 조형에의 강한 의지를 보인다는 점은 스스로 한 예술가로서의 삶의 무게가 다른 무엇과의 조화로 존재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속박되지 않은 채 서로 공존하는 인간 삶과의 조화, 삶과 자연의 조화, 인간과 사물의 조화, 채움과 여백의 조화, 딱딱함과 부드러움의 조화, 빛과 어둠의 조화, 채움과 비움의 조화 등이 그것이다. 허문정에게 회화와 판화는 그 조화를 가장 단단하게 각인시킬 수 있는 무대이다.■

“작가 허문정의 작품은 폐쇄된 자의식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사고를 지향하는, 
작가의 삶을 대리하는 색다른 재현인 것도 사실이다.”
_미술평론가 홍경한
꽃과 풀, 나비의 망적지적(忘適之適)의 순간들_성원선
꽃과 풀, 나비의 망적지적(忘適之適)의 순간들               
- 성원선
 
  여기저기 뛰어노는 허문정의 작품 속 나비들은 꽃을 업고 있다. 꽃을 쫒기보다, 마치 꽃처럼 물화 物化된 것은 사물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그리고 그 정체들을 이리저리 흔들리게 한다. 마치 그것 같지만, 그것 같지 않는, 그러면서 다시 그것인 것이다. 장자가 나비 꿈에서처럼 나와 사물의 구분이 없어지는 것을 경지를 ‘도’라 하였다면, 그러나 그녀의 물상들은 그 경지와 속세의 경계에 서있는 것처럼 불안하기도하다.

 이천십일년 유월의 신문의 1면에서는 구제역, 지진, 쓰나미, 홍수, 방사능비, 중금속황사와 같은 것들이 헤드라인을 장식하기를 멈췄다. 그러나 이젠 기후변화와 대기권오염, 환경파괴 같은 이야기는 신문에서 읽어 내리기보다, 오늘과 내일에 부는 바람과 햇빛, 봄비와 아지랑이, 마을을 굽어 흐르는 물과 땅에서 자라는 모든 것에마저도 두려운 경계를 드러내어야만 한다. 작년 봄볕에 그녀의 작업실 마당에서 자라던 꽃들은 올해도 피었다. 바람도 불고 햇빛도 좋았다, 비도 내리고 땅도 붉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린 부서질 것 같은 자유로운 자연을 망적지적(忘適之適: 넉넉하고 편안하다는 느낌조차 자각치 못하는 경지의 쾌적함)의 순간으로 느끼기엔 오늘의 일상이 왠지 불안하다. 그녀의 소박한 자연들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허문정은 하늘거리는 봄의 원피스를 입은 것처럼 자유 분망한 그녀의 마당에서 자라는 들꽃과 이름 모를 풀들, 그리고 나비와 새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꽃과 풀, 나비의 망적지적의 순간들로 그녀는 불안한 세상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찾아내려고 했나보다. 매일을 일기 쓰듯 그려나가는 꽃잎들과 나비의 날개 짓은 빡빡한 도시에서 누리지 못한 호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이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왠지 오늘이 지나고 나면 누릴 수 없는 햇볕을 아쉬워하며 꽃잎이 타버릴 때까지 헤벌리고 있는 창포는 처연하게 회색빛 화면에 고개를 들고 있다.

  그녀의 작업 과정은 드로잉을 시작해서 판화로 옮겨지는 근원적인 작업들로 이뤄지며, 꽃잎과 나뭇잎을 찍어 내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전의 작업에서 사용하였던 소프트 그라운딩기법은 이번작업에서 더 자주 사용되었고, 그것의 바탕이 되는 종이까지 한지를 사용하여 대상을 드로잉하고 직접 수채하여 배접하는 방식을 사용하였다. 단일한 화면위에 예민하고 섬세한 제작방법으로 표현된 대상들이 자유롭게 배열되고, 선과 색 그리고 물상들이 전경과 배경으로 나누지 않고 구성됨으로서 좀더 자율적인 조형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하나의 화면 속에 표현된 서로 다른 땅에서 자란 것 같은 올망졸망한 풀과 꽃들은 춤을 추듯이 마치 세잔의 탁자위의 사과들처럼 우주 속에 유영하는 행성과 같이 느껴진다. 그것은 도리어 그녀가 사랑하는 풀과 꽃, 나비들을 속박하지 않고 더 자유롭게 소박하게 느끼게 한다.
 
 누군가 “그림은 그리는 자의 것뿐만 아니라 관조하는 자의 것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예술이란 것은 당연히 인간의 삶이나 혹은 자연의 모방이라 할 수 있다. 인간들은 예술을 빌어 자신들의 이야기를, 삶의 모습과 자연의 형사(形寫)를, 우주의 섭리(攝理)를 나타냄으로써 스스로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다스렸으며 역사의 시간을 지탱해 왔다. 삶의 질곡(桎梏)도 세계의 흥망도 관조(觀照)함으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더욱이 인간은 자신의 생(生)을 통해 본능적으로 자기를 보존(保存)하고자 하는 그리고 그것을 상선(上善)하는 방법을 깨달아 간다.

  허문정, 그녀가 꽃과 풀, 나비들이 하나가 되어 더 이상 두려움이 없는 자연의 자유로움을 표현하는 것처럼, 오늘, 자연이 내보이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함을 자연을 통해 오감으로 느끼는 방법을 깨달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근원에서부터 자유롭고 넉넉한 그리고 생생한 자연을 그녀만큼이나 우리도 소망하지 않는가?
사적(私的)인 대상물로써의 자연_성원선
사적(私的)인 대상물로써의 자연

- 성원선 | 미술작가
  따뜻한 햇살과 푸른 하늘을 머리에 이고 그녀의 작업실을 찾았다. 그녀의 집 앞을 지키고 있는 흰둥이는 꼬리를 흔들고 옹기종기 붙어서 있는 수선화, 맨드라미 토분들 사이에서 들꽃들이 살랑거린다. 푸른 하늘과 전나무 향기를 배경으로 햇살과 바람이 자유로이 드나드는 그녀의 집, 현관 앞 처마아래 조그만 공간에 자리를 내어 그녀와 마주 앉았다. 그곳이 그녀의 작업실이다. 얼마 전 그곳에 유리로 된 천장을 현관 밖 처마와 집의 외벽을 이어 붙여서 작업을 할 때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황급히 집안으로 피신해 가지 않아도 된다며, 그녀는 해맑게 웃는다.

  그녀의 작업은 마치 그녀의 작업실처럼 자연 속에서 자연답게 그려진 모습을 담는다. 겨우 2평 남짓한 그 작업실에 앉아서 햇살이 좋으면 좋은 대로, 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그녀를 둘러싼 그녀가 좋아하는 수선화를 그려내고, 나팔꽃을 관찰하며 들꽃들을 바라본다. 어디선가 얻어온 씨앗을 틔워 1m 남짓 자라난 맨드라미와 봉숭아는 그녀의 작업 공간을 둘러가며 줄을 서 환하게 피어있다. 그녀가 작업을 구상하고 종이위에 그녀의 주변의 대상들을 옮겨놓을 때에도 열 지어 서있는 그 꽃들은 때로는 모델처럼, 때로는 관객처럼 그곳에 서 있었을 것이었다.

  그녀의 작업과정은 이젤과 캔버스를 짊어지고 자연 속으로 뛰어든 인상파의 화가들처럼 자연 속으로 침투하여 자연에서 시작되고, 그곳에서 완성된다. 자연의 사물들을 그녀의 드로잉 노트에 옮겨오고, 드로잉들은 연필로 유산지 위에 그려지거나, 사진으로 필름화하여 동판에 전사되어 에칭(Etching) 된다. 그녀가 담아내는 자연의 사물들은 애쿼틴트(Aquatint)를 사용한 소프트 그라운딩(soft grounding) 기법을 통해서 우연한 흔적과 부드러운 채색의 느낌을 얻어내고 수묵화와 같은 필력들이 판화로 제작된다. 이러한 제작과정의 결과들은 “찍어내다”란 의미와 함께 우연하며 자연스러운 그녀만의 표현의 특징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판화작업을 위한 드로잉들은 그저 아이디어를 담는 수단이나 사물의 묘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작업으로 탄생한다.

  이번에 전시될 그녀의 채색된 드로잉들은 판화작업의 연장선에서 선적인 표현만 아니라 양감과 색을 포용한 사실로써 자연의 대상을 더욱 구체화 한다. 콩 즙을 입힌 한지를 배접하여 만든 그림판과 종이를 배접하여 수채로 채색한 그림판은 은은한 자연을 향으로 담은 것처럼 비춰지고, 오롯이 보랏빛 입술을 내밀고 있는 창포, 붉게 풀어헤친 맨드라미, 빨간 손톱을 내보이는 칸나, 새치름한 들꽃들의 꽃잎들은 단순한 화면구성을 통해 대상을 사실 보다 더 도드라지게 한다. 사물의 외관에 대하여 그녀는 그림 속에서 자연을 오브제로서 등가의 위치에 놓았고, 그림 속에 언급되어 있는 사물들로 정신을 움직이게 하는 외관의 환영을 만들어 내었다. 그녀는 종이위에 찍혀진 맨드라미와 수선화, 봉숭아 같은 흔하디흔한 꽃들을 자연의 사실대상으로서만이 아닌, 그녀의 삶에 대한 열정을 통해 관철된 독특한 감성을 지닌 대상으로 나타낸다. 맨드라미의 쭈글쭈글한 꽃잎들은 자글자글 주름을 얼굴에 얹은 여인 같기도 하고, 만개하여 터질 듯한 분홍색의 풍만한 맨드라미는 한껏 부풀어 있는 심장 같기도 하며, 말라가는 듯한 잎을 내려트리며 무겁고 두터운 주름을 가진 진홍색 맨드라미는 사그라짐을 넘어 새로운 생명의 잎을 뿌리를 통해 태어나게 한다. 그녀의 맨드라미들은 마치 자연의 대상을 숨쉬게 하는 어머니와 같은 대지의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때로는 그 풍만한 맨드라미에 나비가 앉아 있고, 만개한 국화 꽃술 속에는 무당벌레가 숨어있기도 하다. 그녀의 그림 속에 꽃과 함께 나타나는 나비, 무당벌레, 새들은 자연 속에서 발생되는 사실이면서도, 사물과 사물과의 관계를 통해 사물과 그 주변의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 사실 묘사의 틀을 벗어나 그림 속 대상에 이야기를 담아내는 심상의 도구이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어머니이자 아내였고, 그리고 화가였다. 16세기 중반 조선 유교시대에서 여성으로써 붓을 잡고 자신만의 색채를 간직하며 화가로 우리의 미술사에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은 어쩌면 장식이 없고 소박한 그리고 이념적 해석을 불가할 자연그대로의 생명력을 섬세하고 품격 있는 필력과 색으로 담아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이자 아내 그리고 작가인 허문정, 그녀의 소박한 꽃, 나비, 벌레와 새들이 ‘초충도’의 그것들과 무엇이 다르랴, 그녀는 자신 스스로를 투영하는 「사적인 대상물」로써 자연을 정물적 가치로 나타낸다. 그녀의 삶을 통해 경험되는 자연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수용의 자세를 거추장스러운 장식 없이 그려내고, 오감으로 느껴지는 자연의 생명력을 과장 하지 않는 소소함으로 담아내는 그녀의 미적감성들은 자연의 사물들이 상처와 무상함조차 숨기지 않고 자연의 사실을 넘어서 종이위에 새로운 이상향(理想鄕)을 꿈꾸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