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정착(定着)과 유랑(流浪) 사이-최종상
  정착(定着)과 유랑(流浪) 사이
    - 뿌리박힌 것들의 나들이
                                                                       최종상


 작업을 한다는 것은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문제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자신을 자신과 타인에게 납득시킬 수 있게끔 드러낼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개성적인 응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업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상투적인 인습과 싸우고 있다는 확인이다. 이것은 불가해한 삶을 이해하려는 작가의 끈질긴 노력이 그 정서적 대응물을 획득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순옥의 작업의 주된 대상물인 배추는, 작가의 어떠한 육체적, 심리적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등장한다. 배추의 풍만한 모습들은 햇빛에 몸이 팅팅 불은 모습일 수도 있고, 들판이나 도시는 풍요를 제공해 주는 대상이 아니라 수탈자의 민낯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한 이유로 근본적인 결핍의 존재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진다. 
 결핍으로서의 존재는 모든 것이 너무 지나치게 절실한 의미를 갖고, 그 의식의 세계 속에서 질서정연하게 자리 잡는다. 결핍을 사랑하거나 그 결핍에 경도된다는 것은 욕망이 드러나는 과정이 아니라, 스스로가 살아가야 하는 세계에 의미를 주고자 애를 쓴다는 것이다. 이 애씀의 과정들은
현실과의 화해는 가능한가라는 의문을 유발한다.  즉 현실과 관념의 단속지점을 발견한 것이다. 
 현실에서는 결코 불연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순옥의 작업들은 현실의 연속성을 인지하는 그 순간 불연속성을 발견한다. 청춘과 노인의 차이는 어느 부분에서 구분되는지, 도시와 교외의 경계선은 어디인지 모호하다. 그러므로 뿌리박힌 것들과 떠도는 것들, 정착과 유랑의 경계성을 모호하게 만드는 작업들이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주는 인순옥의 작품세계의 안쪽에는 ‘파란 슬픔’으로 부를 수 있는 파토스(Pathos)적인 시선을 볼 수 있다. 노드럽 프라이(Northrop Frye)가 제시했던 것처럼 이러한 시선은 여성성이 주된 정서이다.
또한 이것은 동양적 사고의 애이불비(哀而不悲)의 세계관과도 유사하다. 그러나 인순옥은 이 지점에서 더 나아가 대상들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한다. 주된 오브제인 배추에 나타나는 표정들이 그러하고 도자기에 표현된 웃음들의 형태가 그러하다. 슬픔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가 유머이지만 그것은 발현되고 나면 다시 좀 더 엷은 형태의 슬픔으로 존재하므로 이것을 희석 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유머가 가지는 긍정적인 힘을 재차 믿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허황된 반복을 요구할지라도. 이것이 바로 인순옥이 다루는 배추에 치장을 한 얼굴들이 웃으며 등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하여, 인순옥은 배추에 대한 모노그래퍼(monographer)이다. 배추의 파토스를 맹목적으로 숭배하려는 경향을 경계하면서 그 개념들을 화석화 시키는 순수 논리의 맹목성을 경계하는 모습들이 나타나는 것은 얼굴의 모습들이다. 이것은 일종의 카이로스(kairos) 즉 과녁이 된다. 배추에 얼굴이 드러남으로 해서 헤어밴드라는 장치에서 보이 듯 묶여있고 뿌리박힌 것들의 슬픔은 재해석되어 화장이나 장신구의 효과를 나타내는 것이다. 우리들이 통상적으로 저지르곤 하는 ‘경멸 섞인 관대함의 한 형태인 주의 깊은 배려’의 위선성에 대하여 통렬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인순옥의 複話術, 그리고 또 하나의 알레고리-이재언
인순옥의 複話術, 그리고 또 하나의 알레고리

화가 인순옥의 화면에서 배추 이미지를 본 것도 얼추 10년이 되어가고 있다. 2004년의 작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삭막한 도시 풍경 속에 거대한 배추 이미지가 등장한 그림을 처음 접했을 때, 생경하면서도 단도직입적인 명쾌함과 싱싱함이 강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당시 묘한 오버랩을 이루는 뉴스 장면이 떠올려졌다. 힘들게 가꾸어온 배추밭을 갈아엎으면서 가격 폭락에 분노를 표하던 농부의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다. 때마침 그러한 농업 현실을 대변하고 농성이라도 하듯, 화면 속의 ‘배추’는 꼿꼿하고 비장하게 대도시 한 복판을 점거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정말이지 카리스마 넘치는 그 자태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통쾌함과 후련함을 느꼈던 것은 나만의 느낌이었을까. 
당시의 이러한 해석과 파장은 다분히 그 시대의 상황이 반영된 결과일 수도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까지 작가가 직접적인 사회 비판적 담론을 그림에서 다루는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익히 보았듯이 전혀 이질적인 두 가지 이상의 코드가 대비적으로 공존하는 데페이즈망 효과를 특히 즐겨 구사해 왔다. 이전의 ‘기억된 공간’이나 ‘하늘 꽃’ 연작에서도 그렇고 처음 배추를 그린 ‘샘’ 연작에서도 그렇다. 어떤 메시지를 하나의 채널로 고정하기 보다는 다중코드 속에서 다의적으로 해석 가능한 알레고리적인 서사 구조가 基底에 자리 잡고 있다. ‘별 것 아닌 별 것’이라는 최종상님의 말마따나 ‘대상 이상의 대상’이 된 배추는 지금까지 ‘인순옥’표 미장센의 주역이었다. 

배추 그림 그린 지 거의 십년에 이르는 동안 작가는 다채로운 시도와 변화를 거듭하면서, ‘배추작가’라는 닉네임에 걸맞은 성취들을 보여주었다. 작가는 ‘샘’ 연작 외에도 새로운 연작들을 잇달아 발표한 바 있다. ‘숲-대화’ 연작에서는 우리 공동체가 안식하는 숲으로서 그려지고 있다. ‘샘’시리즈에서 도시풍경이 있다면, 여기서는 指紋과도 같은 선묘들이 주어진다. 이는 사람/숲(배추)이라는 조합에 변수이거나 아니면 해석학적 균형추로 작용하는 의미소가 아닐까. ‘숲-대화’ 연작에 몰두하고 있는 때 또 하나의 연작이 병행되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몸꽃’시리즈이다. 
배추를 꽃으로 바라보면서 그린 것으로, 몸 자체가 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인순옥 작가의 ‘몸꽃’을 보면서 김춘수 님의 ‘꽃’을 패러디하고 싶어졌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먹거리(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인순옥 작가가 배추를 꽃이라 부르는 순간 배추는 몽환적인 꽃으로 변했다. 주체의 인식이 존재를 결정한다는 식의 사변까지는 아니어도, 대상 자체를 타성적으로만 이해해왔던 관행에 변화를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섯 번째 개인전을 앞둔 작가의 배추 그림들은 ‘복화술’ 연작이라 할 수 있다. 이전의 연작들과 비교하면 훨씬 편안하고 자연스러움이 지나쳐 단순한 서술적 재현으로 회귀한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물론 작가가 항상 즐겨 구사한 데페이즈망으로 다시 복귀한 것일 수도 있다. 여전히 불국사 마당이나 충주호반 자갈밭 같은 곳에 등장하는 배추 이미지는 생경한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이전의 도시 풍경과 비교해 그 강렬성이나 파장이 무뎌진 것이기는 해도 데페이즈망의 프로토콜은 유효한 상태이다. 따라서 작가가 오랫동안 유지해 온 원안 그대로 그 조합과 상징의 의미를 작가가 정한 관례대로 받아들여도 큰 무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도 문득 어떤 미장센으로서의 특수한(혹은 의도적 우연에 따른) 설정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작가는 이러한 디테일에까지 교감하고 소통하기를 기대한다. 의인화, 이를 테면 배추들이 인간의 격을 빌어 행위하거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들을 유추해내는 데 약간의 ‘뜸’이 필요하기는 하나, ‘숨은 그림 찾기’ 같은 탐색이 완료되면 예기치 않은 유머러스한 반전의 소리를 듣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인순옥 작가의 그림이 들려주는 복화술이다. 숨어 있는 서사를 탐색해 보면 배추들의 군상은 주로 가족상들로, 공놀이 하는 모습, 충주댐을 배경으로 아기를 안아든 아빠의 모습, 경주 수학여행 장면, 경기를 앞둔 선수들이 파이팅하는 모습.....등이 스치듯 지나간다. 대상들의 이미지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 구조 자체가 이제 외마디 소리조차도 흘려들어서는 안 되는 복화술적 컨텍스트로 진입해 있다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인순옥 작가의 그림들을 반추해 보면 과거부터 지금까지 변함없이 견지하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크게 달라진 점들 또한 적지 않다. 과거의 ‘무덤’ 시리즈나 ‘하늘 꽃’, ‘기억된 공간’ 시리즈에서는 진지하고 비장한 아우라를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다 배추 이미지를 도입하고서부터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화면이 훨씬 싱싱하고 밝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최근 들어서는 이제 유머나 위트가 조금씩 묻어나는 컨텍스트로 탈바꿈해가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다. 복화술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듯 유머러스한 작업은 이미 입체 흙작업 혹은 陶彫에서 선보인 바가 있었다. 물레 성형된 흙 구조에 다양한 얼굴 표정을 드리운 작업이다. 슬프거나 진지한 표정까지도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유쾌함이 돋보인다. 이번 전시에서는 전시하지 않지만, 강에서 채집한 자연석에 그려 넣은 얼굴 시리즈 역시 유쾌한 웃음을 짓게 하는 시리즈이다. 돌의 생김에 따라 맞는 얼굴을 그려 넣음으로써 그 오브제를 자연스럽게 해석하고 표현해내는 것이다. 확실히 작가는 연륜이 쌓여가면서 관객을 편하게 해주는 여유를 갖게 되었으며, 어떻게 하면 소통과 교감을 원활히 할 수 있는지에 눈을 떴다고 할 수 있다. 이 얼마나 반가운 변신인가.

                                                       이     재     언 (미술평론가)
자유의 문으로 가는 계단-이홍원
 
인순옥 3회 개인전에 부쳐 - 자유의 문으로 가는 계단

작가 인순옥의 작품 성향에 대해서 많은 평론가와 주변의 지인들은 단순히 ‘무의식의 세계’, ‘초현실주의적 경향’으로 정의를 내리곤 한다. 프로이드가 말하는 id의 세계, ego의 세계를 빌어 작가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런 얘기들은 부분에 지날지 모른다. 작가가 얘기 하고자하는 바는 그리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않다. 식자들이 어렵게 풀어 놓고 있을 뿐, 어쩌면 아주 단순 명료하다. 작가는 이전의 작업에서 모든 것을 잊고 쉬고 싶을 때, 무덤을 그렸다. 흔히들 죽어서야 비로써 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작가는 그림에 그대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어느 날, 운전을 하다가 배추밭의 배추가 놓여 있을 때는 잠시 멈춰 서서 열심히 배추를 드로잉 한다. 그리고 그것을 화면에 옮긴다. 세상이 복잡하고 어지럽게 돌아간다 하더라도 묵묵히 자신의 생명력을 키워가는 ‘배추’가 작가의 눈을 멈춰 세우는 것이다. 배경은 어지럽게 엮인 배관의 모습과 빌딩의 모습이 현실로 존재하고 배추는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그려진다. 그것에 얼마나 어려운 철학이나 이즘이 필요 하겠는가?  르네 마그리트가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말 했듯이 ‘인순옥의 배추’역시 ‘이것은 배추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 배추는 작가 본인일 수, 다른 수많은 의미의 무엇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되짚어 보면 결국 ‘이것이 배추다.’라는 의미를 내포 하는 다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작가는 일상의 현실을 벗어나 날개를 달고 한 없이 자유롭게 하늘을 부유하고 싶어 한다.  파란 하늘에 걸린 조각구름은 자신을 그 곳에 데려다 줄 무한 전도체의 의미를 지닌다. ‘구름’과 함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구’는 어디론가 굴러갈 것 같고 문 안으로 들어갈 것 같다. 구의 역할은 화면 안에서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그리고 그림 속 그림으로 인도 하는 역할과 함께 ‘무한’의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작가가 꿈꾸는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절차가 필요 하다. 마치 우리가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기차역에 가서 표를 사듯이, 작가가 보여주는 세상을 따라 가고 싶다면 대개는 계단을 따라 가서 그 곳을 들어서는 문을 열어야 한다.  일단, 그 문을 열고 들어서면 우리는 해방감을 맛보게 된다. 인류는 욕망과 이성에 추를 달아 놓고 기울기를 체크 한다. 서구 모던의 시대는 이성과 합리주의적 사고에 의존했으나 그 이후로는 ‘탈이성’ 즉, 욕망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포스트모던의 시대를 열었다. 어쩌면 서구 근대의 낭만주의적 사고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겠다. 훨씬 휴머니즘적이고 인간 본성을 그리워하는 이즘의 산물인 것이다. 서구 문명이 만들어 놓은 비인간화에 대한 지독한 반발심이기도 한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 인순옥의 작품은 들뢰즈가 말하는 ‘탈영토화 deterritorialization’, ‘탈코드화 decoding’에 대한 얘기와 욕망에 중심을 둔 이론으로 엮어갈 수 있겠으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우선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은 환상을 객관화 시키는 작업에서 ‘인순옥’의 작품이 닮아있긴 하지만 ‘달리’는 알다시피 평소 신경증적 증세와 노이로제에 시달린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억압된 욕망과 꿈의 풍경을 그림에 담아 해소 했었다.’ 라고 한다면 작가 ‘인순옥’은 객관화된 욕망을 일반 대중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풀고자 함의 의도가 더 크다. 지극히 개인적인 것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기에 작품을 가만히 드려다 보면 욕망에 앞서 ‘이성’이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예를 들자면 도시 위에 떠 있는 붉은 반구의 의자는 사회적 불안함을 표현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림을 보는 모든 일반인들과 함께 공감하고자 하는 의도가 짙다. 물론, 생소함의 상황설정으로 인해 새로운 이미지를 주는 ‘데페이즈망 Depaysement’의 느낌은 그런 형식들을 따르고 있지만‘마그리트’철학의 중심적 내용과 ‘정신의 본래 힘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합리성이나 윤리와 같은 억압기제로부터의 해방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던 ‘앙드레 브르통’등의 일반적인 초현실주의 작품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일상에서 작가가 염원하는 이상세계를 작품에 담아 관객을 이끌어 주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서 바다 위에 떠 있는 와인글라스와 제라니움이 있는 작품은 묘한 인상을 준다. 이 모두 작가가 꿈꾸는 ‘휴식’을 상징하는 이미지 들이다. 유리잔 속의 하늘 풍경은 작가가 생각하는 또 다른 하늘(세상)을 표현하는 것이며, 스스로 화면 바깥세상으로 넘쳐흘러 버리는 바닷물은 답답한 현실에서 벗어나고픈 욕구를 떨쳐 버리고 싶은 심경을 내비치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바다와 맞닿은 ‘하늘’, ‘구’, ‘구름’은 이상세계를 향해 여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주목해 봐야할 점은 이중, 삼중의 구조적 장치를 시도함이라 하겠다. 그것은 단순한 평면에서 벗어나 입체로의 확장과 설치적 방법을 도입하고 있다는 사실 이다. 사각의 육면체에 하늘을 표현하고 무한 공간의 느낌을 담아내면서 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만들어 놓는가 하면 캔버스 위에 ‘화분’을 설치하여 작품에서 생물이 자라도록 한다는 점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무생물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작업에 식상함을 느낀 것이다. 문제의 실마리를 생명체를 피워내는 것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이는 ‘환상’에서 ‘실제’에 도전한다는 선전포고인 것이다. 최근작 이전에 이미 작가는 캔버스 화면의 정면성에 한계를 느끼고 캔버스 둘레면 까지 표현을 연장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작가의 욕구를 채우지 못했던 것 같다. 지난 전시에서는 작품과 설치를 병렬하여 착시를 일으키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방안의 풍경을 그려 놓고 앞에는 실제 멍석을 깔아 놓는다든지 해서 보는 이들에게 착시경험과 함께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게끔 유도하는 작업을 선보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이 만든 캔버스 윗면에 화초를 심는가 하면 정육면체 화면을 만들어 여러 각도에서 작품을 동시에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 다시 말해서 각 면의 이미지가 연상 작용을 일으키도록 유도함으로써 색다른 경험과 느낌을 주고자 의도한 것이다.

  작가 ‘인순옥’의 작품에 대해서 다시 정리해 보자면, 보다 적극적인 ‘자위와 공감 그리고 소통’이다. ‘작업을 하면서 작가 스스로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어떻게 하면 작가가 그려 놓은 세계에 보는 이들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는 표현 형식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겪는 삶의 고통과 외로움에서 벗어나 보자는 것이다. 눈에 보여지는 작품 형식은 단지 설정이고 표현 수단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작가는 자신이 자신에게 안식을 주고자 함이며 더 나아가 주변인들에게 그것을 나눠주고 싶어 한다. 
작품에 놓인 계단을 따라, 작가가 마련해 놓은 세계로 넋을 놓고 들어가 보자. 
숨을 죽이고 조심스레 문을 열어 보자!
                            

 글. 독립큐레이터/ 자인아트하우스 기획실장 이홍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