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자연과 인간의 동화 (同化), 그리고 영속 {永續}을 희구하는 소박한 조형성-박종철

김경원의 ‘자연과 인간의 동화 (同化), 그리고 영속 {永續}을 희구하는 소박한 조형성’

글 : 박종철(미술평론,칼럼니스트)

현란한 기계문명이 안겨주는 안락감의 이면에는 순수를 가장하는 위선과 가식, 불신과 거짓이 자리하며 휴머니즘을 내포하는 소통의 부재도 뒤 따른다.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은 하루도 분주하지 않은 날이 없다. 김경원은 태고 적부터 존재해 온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순수함을 인식하고 자연, 인간, 그리고 자신의 작품이 동화되고 영속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토우土偶와 목조의 형식을 빌려 원시적이면서도 소박한 조형성을 창조해 낸다. 작가는 흙과 나무를 빚어내고 깎아내어 형상화 시킨 작품의 물성과 표피에서 햇빛, 바람, 습기, 먼지까지도 
머무르는 세월의 흐름을 수용하게 하는데 이러란 자연현상의 적용은 작업과정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것은 이미 작가 자신이 선 험하였던 회화적인 조형성도 절제하고 
시간의 흐름으로 인한 자동기술적인 형상성을 창출하는 요인의 단서로 작용한다. 이 시, 공의 경과로 자연스럽게 형성된 흔적들은 오토머티즘Automatism의 결과물로서 
지고지순한 자연현상의 숭고함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으며 나이브아트 Naive Art로서의 형상성과 함께 입체의 표면에서 만들어지는 회화성의 창출에 있어서 그 근간이 되고 있다. 

일찍이 신라시대 토우와 마애불, 한국인의 얼굴에 관심을 가졌던 작가는 문화유산 답사를 위한 스터디그룹에 참여 하기도 했으며 
소위 ‘백제의 미소’ 라고 불리어 지는 충남 서산의 마애삼존 불상과 보원사지 불상에 매료되면서 토우에 심취하여 왔으며 
특히 제작 과정에서 오는 물성과 시, 공간의 상관성에 따르는 영향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토속적이면서도 한국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는 토우는 인류가 시작되면서 생성된 
원시미술Primitive Art과 샤머니즘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작가는 보원사지 불상과 인근에 거주하는 할머니의 닮은 얼굴에서 자연과 인간의 상호적응과 생명력의 기운이 조율되어짐을 인지하기도 했다. 
흑판위의 드로잉과 나무 조각에 심취해 온 작가는 2010년의 토우를 이용한 설치 전에서 ‘클레이 메이트’라는 타이틀 하에 자화상, 집안의 파숫군인 모친, 친가의 인물들과 지인의 제작을 통하여
토우에 인격을 불어 넣기도 하였으며 이웃을 모델로 한 친근한 인물작품들에게도 순박한 호칭이나 명칭을 부여하며 휴머니즘의 이미지를 표상화 하였다. 

인류의 순환을 의미하는 토우의 환생전을 시도하고 토우를 공간사물로서 은닉시키고 토우의 그림자만 표현함으로서 영겁의 신비함과 감동을 승화시키는 연출과 작업에도 몰두하였다.
2008년부터는 목조각을 시작함으로서 평면과 입체를 교차하는 순환적인 미학은 물론 테라코타와는 또 다른 물성의 미학에 진입하였으며 
광학에 바탕을 둔 토르소를 오브제로 한 사진전을 가짐으로서 광범위한 조형성의 영역에 접하기 시작했다. 김경원은 은행나무에 토분과 옻칠을 시도 한다든가, 
목재의 나뭇결에서도, 느티나무의 외피에서도 물성의 아름다움을 찾아내곤 했다. 밤나무에 녹물을 입히고 빙초산을 가하면 철장염이되고 여기에 탄닌산을 바르면 흑단처럼 검정색으로 변화되는 것도 
목조에 입문한 결과로 터득한 방법론이며 엔진 톱을 이용하는 메카니즘과 작가자신의 열정, 감성이 접합됨으로서 평면드로잉에 비해 비교적 용이하지 않은 입체의 조형적 역량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배가되는 것도 작품의 제작과정에서 엿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또 목조에 옻칠, 토분, 버닝Burning등을 가하거나 브러싱 아이론을 가하여 요철을 생성시키거나, 테라코타에 철가루를 입히고... 
부식시켜 텍스쳐와 시각적인 효과를 극대화 시키는 방법론등 재료와 기법에 따른 김경원만의 조형적인 역량을 배양하여 왔다. 

토르소의 제작 시에는 단순화와 변형, 강조와 생략을 통해서 소박함과 질박함의 조형성, 소위 나이브아트의 맥을 짚어 갔으며 동체의 외면에 짚이나 왕겨로 열처리를 하여 그을음을 남김으로서 
시공의 경과를 상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그 결과에 따라 자동 기술적으로 이루어 지는 적색상과 불규칙적인 농도, 형상, 색상에서 회화성이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오토머티즘이 갖는 모더니즘과 나이브아트가 갖는 소박성, 회고성의 미학을 동시에 감득할 수 있게 해 주는 단서로 작용한다. 
김경원은 동양적인 관점과 사고에서 인식하는 공간과 선 - 평면의 세계 –을 입체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시, 지각의 다양화와 조형적인 영역의 합목적성에 따르는 물질성의 인식, 
그리고 드로잉의 중요함을 강조하고 물질성과 시각효과의 앙상블을 인식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도 강조한다. 
이것은 입체의 표피적인 물성에 따르는 감촉-Texture-과 회화의 시지각적인 요소인 선, 면, 색, 명암등의 조화와 필적에서 오는 시각적인 효과 –Matiere-의 관계를 주지하는 것으로서 
이미 평면을 선헙적으로 학습했던 작가는 효과적으로 평면과 입체를 아우르고 자신만의 미학적 영역과 그에 따르는 조형적 항목을 확대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을 뒷 바침 해 준다. 
이것은 다양한 드로잉과 형상성의 결과로 제작되어진 입체작품들을 광학적 수단인 조명과 사진을 통한 퍼포먼스와 이벤트로 전환시키는 작가의 역량이 증명하여 준다. 

또 김경원의 편집적인 열의는 자신의 작업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며 성실한 작품생활과도 연결되어진다.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옹담리에 거주하고 있는 주춘영 노인의 삶터와 일대기에 관한 밀착취재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삼국시대 전후의 역사와 민중신화에 관한 탐구, 그리고 그것에 대한 재 조명, 신화적인 것과 신격화된 인간의 모습과 물상을 모티브로 하는 설화와 구비문학등의 요소에서 
생명, 잉태, 에너지, 역사를 감수한다는 작가는 오늘을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들의 형상중에서 자신의 존재를 사유하고 실존적으로 인식해 간다. 
그리고 억 겁의 시공을 거친 자연물처럼 자신의 작품이 영속적으로 존재하기를 원하며 인류와 자연과도 동화되는 것을 희망한다. 

그것은 흙, 나무등의 질박하고 친 자연적인 재료를 활용하고 –태우거나, 묻어두거나, 칠하거나, 깎거나 하는 기법- 바람과 빛 그리고 먼지등의 친 자연적인 요소들이 
작품에 얹어지는 것 까지도 작업과정으로 상정하여 자연의 힘과 자신의 작품이 결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김경원은 2008년부터 조각에만 심취하고 있으며 소박하면서도 질박한 조형성이 특징인 나이브아트에 전념하고 있다. 

특히 삶의 애환과 희노애락등 생활상을 주제로 하면서도 사랑과 포옹을 받고 싶은 보편적인 여심과 그에 따르는 여성성Antifeminism에도 관심을 가지고 표현하고 있으며 
작가 자신의 삶의 과정이나 자녀의 성장 과정등 일상의 모습도 작품에 반영시키고 있다. 원시성과 질박함을 포함하는 조형성을 보여 주는 김경원의 작품에서 
각박한 삶터의 현대인들은 안식 감을 느끼고 자연과 인간의 융화를 위한 유토피아를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작가의 삶이나 조형적인 방식이 한동안 계속될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내면적 변증으로 인하여 또 다른 조형성을 탄생시킬 것인지 주시해본다. 

토우 작가, 김경원 바라보기-신학수

토우 작가, 김경원 바라보기

<들어가며>

 사람들은 보통 예술 작품을 보고 감동했을 때 그 이유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는다. 
그래도 어떤 작품의 감동이 새로운 시도 등의 파격성에서 오는 경우는 감동과 그 이유가 대체로 일치하는 편이지만, 대부분 경우는 감동의 이유를 딱히 짚어내기가 쉽지 않다. 
뭔가 심오해 보이는 단서를 잡으면 철학적인 ‘썰’이라도 한번 풀어볼 텐데, 세상에는 담담하게 덜렁 감동 하나만 던져주는 작품들이 참 많은 것 같다. 
 
 추상적이고 직관적인 감동에 대해 우리는 보통 그 이유를 알고 있다고 막연히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해야 할 때가 되서야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비로소 깨닫는다. 
그런 사실을 마주할 때면 우리는 금방 난처해지는데, 바로 김경원 작가의 토우(土偶)를 볼 때도 바로 그런 경우다.
 이 글은 한 사람의 관객의 입장에서, 김경원 작가의 작품에서 느꼈던 ‘따뜻함’이라는 추상적인 감동을 느낀 이유를 차근차근 생각해 본 것이다.
글을 보는 이들이 이러한 견해에 공감을 하든 아니든, 그것을 시작으로 김경원 작가의 작품을 바라보는 자기만의 시선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밤나무 엉덩이, 엉덩이 밤나무>

 작가들은 여러 가지 재료로 작업을 한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사용하는 재료의 특성이 작품의 한계를 규정짓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작가는 보통 재료를 ‘인정’한다. 
김경원 작가 역시 흙이 가지는 느낌과 그 재료로 만들어낼 수 있는 한계, 나무의 느낌과 그 특성, 금속 작업을 할 때의 필요한 작업 환경 등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작업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김경원 작가의 재료는 그 재료로서의 특성, 한계만으로 규정지어지지는 않는다. 
아마 작가는 재료 자체가 작품을 품고 있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보통 제목에 재료명이 들어가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재료는 제목 밑에 간단한 작품 정보로도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경원 작가의 나무 작품 중에는 재료설명은 간단하게 ‘나무’라고만 밝히고 그 제목에 ‘은행’이라든가 ‘느티’, ‘밤나무’ 등의 머리를 달아준 한 무리의 작품들이 있다. 
나무의 원래 이름을 알지 못하는 경우에는 ‘괴목’이라는 머리를 붙이기도 한다. 제법 나무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이라면 재료가 어떤 나무인지는 알 재간도 없고 크게 상관이 있는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재료 자체의 이름과 정체성이 작가에게는 큰 의미가 된다. 그래서 작가의 ‘밤나무엉덩이’라는 작품은 사실 ‘밤나무로 만든 엉덩이’가 아니라 ‘엉덩이 모양의 밤나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비록 제목에서 그 재료의 명칭이 머리말처럼 달려있지 않아도, 김경원 작가의 작품에서 재료란 재료이면서 작품 자체이기도 하다. 
작가는 재료의 특성이 가장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흙에서 나무에서 또 자연에서 얻은 다른 재료들을 윽박지르면서 본인이 만들고 싶은 어떤 형상을 강요하지 않고 그들로만 만들어낼 수 있는 것들을 찾는다. 
그것이 김경원 작가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자연미’와 ‘편안함’의 첫 번째 이유가 아닐까 한다.

<온몸을 다해 표정 짓는, 정교한 입체 캐리커처>
 
 뜬금없이 초상화와 캐리커처를 비교해보자. 작가마다 화풍의 차이는 제쳐두고, 기본적으로 초상화는 어떤 인물의 자체의 묘사에 목적이 있다면, 
반면 캐리커처는 인물 자체의 묘사보다는 인물이 가지는 특징을 부각하는 것에 목적을 둔다. 
 
 김경원 작가의 작품들은 초상화 같기 보다는 마치 대상의 특징과 찰나의 순간,그리고 그 표정을 잡아내는 캐리커처나 크로키와 닮은 점이 많다. 
대상의 이목구비가 비교적 뚜렷한 두상(頭像)작품들도 있지만, 그런 작품들 역시 묘사는 지나치게 정교하거나 과장되지 않고 
필요한 만큼만 구현되어 인물의 특징과 감정을 보다 잘 느낄 수 있도록 이끌어 준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지 않은 작품들 역시 그 이목구비의 얕은 흔적과 턱을 괴거나 기도하고 있는 손 같은 포즈 등에서 그 표정과 감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람들은 웃거나 울 때, 혹은 슬퍼할 때 온몸으로 표정 짓는다. 우리는 보통 상대방의 입가만 올라간 웃음이 진짜 웃음이 아닌 것을 알아챈다. 
감정이란 자기도 모르게 솟구치는 것이어서 그 에너지는 온몸으로 뿜어져 나오는 것을 직감하기 때문이다.
 
 김경원 작가의 작품 중에는 ‘하트 엉덩이’라는 얼굴이 없는 하반신상 하나가 있다. 
상체와 얼굴이 없는 하반신 상이지만, 만약 이 글을 보는 사람이 작품을 따라 엉덩이를 슬쩍 뒤로 내밀고 짝다리를 해 본다면, 
자연스레 양손과 상체의 자세가 어떤지, 또 작품 자체에는 드러나지 없는 얼굴 표정까지 쉽게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해봤다는 이야기다) 
직접 얼굴과 표정을 담아내지 않더라도, 작가는 작품들 속 인체의 미묘한 비대칭과 뒤틀림 속에 감정들을 숨겨놓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찾아내도록 한다. 

 이렇게 작가의 작품들은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아도 한 부분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정교하게 온 힘을 다해 하나의 표정을 짓고 있다. 
김경원 작가의 작품이 형태적으로 단순하고 절제된 소박한 조형미를 가졌다고 해서 그 정교함이 떨어진다고 말 할 수는 없는 이유다. 
의식했든 아니었든 김경원 작가는 어떠한 감정과 그 감정이 자아내는 표정이 어떤 것인지 매우 정확하게 알고 있으며 작가가 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 방식으로 작품 속에서 드러낸 것이다.
 
 김경원 작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이미 토우를 만들고 전시했지만 그때는 작품들의 크기가 작고 아담한 편이었다. 
그런데 2006년 여름에 있었던 <숨을. 쉬고. 있는>展을 보면 그간 토우를 만들어 오면서도 작가가 여전히 부피감과 에너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전시에서는 작가는 주로 커다란 캔버스에 강렬한 색체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풍만한 토우 여신상들을 연상시키는 평면 작품들을 많이 선보였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그 이후부터 작가는 크기와 형태가 다양한 최근 같은 입체 작품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는데, 작품들 속에서 감정의 에너지와 표정은 이전보다 더욱 풍부해졌다.

<영원한 테마, 사람에 대한 겸손함>

 감정과 표정에 대한 이해는 김경원 작가의 타고난 재능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은 비단 타고난 감각에 의존하지 않고 꾸준히 작가가 사람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생각하며 발전시킨 결과물이다. 
작가는 대학시절부터 꾸준히 늘 많은 작품을 그리고 만들어왔는데, 그 중 특히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인체(특히 여체)나 인물들이다. 
사람의 아름다움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생각하면서 작가는 본인의 자아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하였는데, 그 결과 여성성과 모성에 관한 다양한 작품들이 탄생하였다. 
그러나 작가는 그 고민을 작가 내부에서의 성찰로 그치지 않고 종교적인 성찰과 우리나라의 유물과 신화를 찾아나서는 여정으로도 발전시켰다. 
작가는 신화를 어떤 존재에 얽힌 개별적인 이야기이며 그런 이야기를 부여하는 것이 개별성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작가는 자신의 신화적 성찰을 작업에 투영시켜 ‘가족’이라던가 ‘친구’라는 집합명사로 뭉뚱그려져 있던 사람들을 마침내 하나하나의 개별적 존재로 떼어놓기 시작했다. 
그 결과 아버지, 어머니, 외할머니의 모습, 자녀인 윤조와 윤재, 심퉁이와 까칠이로 나타나는 녹록치 않은 요새 아이들의 모습이 각자의 이야기가 되어 탄생하게 된다.  

 그런 노력을 멈추지 않고 더욱 발전시켜 작가는 지난 2009년 늦가을 경기도 양평의 양서면으로 떠나 한달 남짓한 기간 동안 
그곳에 사시는 노인 분들의 삶을 크로키 형식으로 기록하여 전시하기도 하였다. 
어떤 것을 상상하여 만들어내기 보다 실재하는 것을 찾아 그 삶을 성실히 기록하고 이해하는데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겸손함은, 
작가가 작품의 재료뿐만 아니라 그 주제에 대해서도 깊은 경외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와 사람 그리고 작품이 관계를 맺는 세상>

 작가는 주변의 존재를 돌아보는 여정을 떠나면서도 여전히 이전의 고민들을 놓기는커녕 더 깊은 탐구의 계기로 삼았고, 
그 결과 여성성과 모성에 대한 더 깊은 통찰을 드러낸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빚는 재료를 존중하고 또 자신의 곁에 있는 사람들과 그들이 간직한 이야기와 표정을 존중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작가는 작가 자신에 대해, 
그리고 작가 자신이 놓여있는 존재의 상황과 환경에 대해서 더욱 따뜻한 눈으로 다시 바라보게 되었던 것 같다.  
작가의 근작 중에는 메소포타미아의 여신상처럼 여전히 풍만한 에너지를 자랑하는 <불탄 느티>도 있지만, 
다른 작품에서는 또 작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인의 모습도 드러나곤 한다. 
가녀린 어깨에 날렵하고 세련된 젊은 현대 여성의 상체와 풍만한 하복부와 둔부가 이어진 여러 작품들은, 
소녀 같은 감성을 여전히 그리워하면서도 모성의 당당함을 자랑스러워하는 작가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것들은 작가가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가치관이기도 하며, 또한 작가가 살아온 삶의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개인적인 성찰과 바람을 가지면서도, 김경원 작가도 우리들처럼 한 개인으로, 여성으로, 어머니로, 아내로, 또 여러 관계 내에서의 구성원으로 다시 또 돌아온다. 
작가의 작품들은 작가 자신을 구성하는 수많은 관계들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보듬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작가에게 관계란 비단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나는 2011년 겨울에도 간단하게 김경원 작가의 작품을 소개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 글 중의 일부를 소개한다.

 무엇보다 김경원 작가의 작품이 아름다운 것은 작품 속에 담겨있는 사람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자신의 모습을 담은 토우가 따뜻한 볕을 받으며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는 모습이 예쁘게 비치길 바라는 마음에서 만든 녹슨 철판 받침이라든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모습에서 20년 전의 모습을 떠올리고 그 시절을 다시 순수하게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쉽게 만들어낼 수 없다  

 김경원 작가의 매력은 작품 자체에서도 느낄 수 있지만, 작품을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그것이 부족한 환경에서나마 행복하고 씩씩하게 살아가도록 바라는 따뜻한 마음에서도 또한 깊이 느낄 수 있다.

<사람, 흙사람 속으로 >
  
 김경원 작가는 재료를 작품의 재료로써가 아닌 스스로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존재로 인정한다. 
그리고 그것에 사랑하는 자신과 주변의 인물들의 형상을 투영하고, 거기에 인간적인 감정과 표정을 편안하고도 정교하게 드러낸다. 
또한 작가는 작품들이 완성된 순간 이후에도 작품들을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않고 그것들을 위해 고민하고, 자연스레 나이 들어가는 것을 바라본다. 
김경원 작가의 작품들 속에선 늘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든가 바라봄, 그리고 배려 같은 것이 은은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모습이 좀 더 진실하게 느껴지는 까닭은 작가 역시 여러 가지 모습의 작품으로 그 사이에 서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작품을 만들어내고 키워내는 조물주이면서도 만들어낸 작품들 사이에서 자신도 하나의 피조물의 형상으로 서서 이해받고 위안 받기 바라는 마음이, 
마치 사랑하는 아들딸을 억척스레 키워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자신의 외로움을 이해받기를 원하는 엄마들의 모습을 좀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마침 최근 열린 작가의 전시명은 <사람, 흙사람 속으로>였다.

<나가며>

 위에서 쓴 이야기는 김경원 작가의 작품 속에서 글쓴이가 느낀 따뜻함의 이유를 기록한 것이다. 
위와 같은 글쓴이 나름의 이해는 작가는 의도하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으며, 또한 당연히 작가의 작품을 보는 많은 분들의 느낌과는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앞서 언급했듯, 김경원 작가에 대한 어느 정도 완결된 관점을 만들어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기에 글을 읽는 사람들이 김경원 작가와 작품에 대해 쉽고 편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계기가 되는 것으로 만족한다. 
사람은 이해든 오해든 다른 사람들과의 많은 이야기와 소통 속에서 자라나는 것이고, 김경원 작가 역시 자신의 작업과 작품들이 많은 소통 속에서 자라나길 바랄 것이기 때문이다.


2013. 겨울. 신학수 씀.

마더 마리아-신학수

마더 마리아 展(가제)

<마더 마리아의 의미>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이나 슬픔은 무엇일까, 또한 인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요즘 이런 질문을 던진다면 사람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비롯된 다양한 대답을 내어놓을 수 있겠지만, 이렇게 되기까지는 역사적으로 지나간 수많은 사고적 전기(思考的 轉機)가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 로마의 식민통치와 유대교의 강력한 종교적 권위, 현재의 중동 문화보다도 몇 갑절이나 심한 극단적인 가부장제 문화에 놓여있었던 
팔레스타인 지방을 배경으로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성모마리아(이하 성모) 역시 그런 커다란 전기(轉機)를 마련해준 인물이다.
 
 신약성서에서 신(神)은 인간을 사랑하기에 인간의 모습으로 내려와 인간의 죄를 대신해 처참한 모욕과 고통을 당하며 죽고 부활로써 영광을 되찾는다. 
신은 인간에게 ‘서로 사랑하라’라는 계명과 함께 믿음을 요구하는데, 천주교회에서 성모는 그러한 신에 뜻에 부합하는 신앙의 모범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성모는 본인이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도 신의 요구에 기꺼이 ‘처녀 수태’를 받아들였고, 무엇보다 비록 신이지만 또한 자신이 낳아 기른 아들이 엄청난 고통 속에 죽임을 당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성모가 그러한 극한의 슬픔을 받아들인 이유는 오로지 신과 신의 부활에 대한 절대적 믿음 때문이었다.
 
 신약성서에서 신은 스스로를 가장 가혹한 죽음으로 내몰아 세상에 대한 용서를 완성하면서도 또한 역설적으로 인간들 역시 신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신약성서의 위대한 점 중 하나는 인간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극단과 그로 비롯된 신앙 완성의 과정을 어떤 대단한 사람을 들어 보여준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한 여인을 내세워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성모는 약 2000년 전 태동하던 크리스트교가 인간을 이해하는데 있어 당시의 다른 종교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깊이가 있었다는 증거인 것이다. 
그래서 굳이 단순히 성모의 의미를 천주교회 내에 국한시키기보다 성모의 등장을 인간의 이해의 폭을 넓히는 인간 역사의 커다란 한 노력으로 바라보았음 하는 것이다.
 
 성모는 신이 요구하는 절대적인 신앙과 자신의 생명 사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지극한 모성(母性)과 신앙 사이에 놓여 있는 인물이다. 양상은 조금 다를지 모르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어머니들 역시 자아실현의 열망과 현실, 세상사의 괴로움과 모성(母性) 사이에 놓여 있다. 
그러나 성모가 신앙을 완성해가는 과정과 평범한 엄마들이 삶의 시간을 걸어가는 여정에는 숙명처럼 안고 가야만 하는 모성이 존재한다. 
여성에게 모성만이 절대적인 가치가 아닌 세상이며 당연히 그것을 강요해선 안 되지만, 일단 ‘엄마’가 되는 순간 여성들은 자아와 모성, 세상과 모성 사이의 큰 갈등 속에 휩쓸리게 된다. 
 
 김경원 작가 역시 스스로 저런 갈등의 어디쯤에 자신도 던져져 있음을 늘 생각하며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 역시 오랫동안 해왔는데, 
이번 <마더 마리아> 展은 깊은 고민 끝에 작가 본인의 정체성에 대해 내린 가장 최근의 정의(定意)이다. 

<따뜻하고 여린 토우(土偶) 엄마, 김경원>

 김경원 작가는 회화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10여 년 전부터는 토우를 중심으로 나무, 금속, 석고 등의 작업까지 영역을 넓혀 왕성한 전시활동을 하고 있다. 
작가는 작품 활동의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사람’을 주제로 작품들을 만들어왔는데, 토우를 만들게 된 계기 역시 흙이라는 질료의 존재가 지니는 어눌함과 설익음이 
‘사람’을 표현하기에 안성맞춤인 재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김경원 작가는 한결같은 주제의식 속에서 그 주제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재료와 작업 방식을 계속 찾아오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경원 작가가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어떤 사람의 형상이 아니라 그 이미지라는 점에서 초상화라기보다는 ‘캐리커처’에 가깝다. 
캐리커처는 대상의 정밀한 재현이 아니라 대상이 가진 특징을 잡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데 김경원 작가의 작품들은 작품의 소재가 된 대상들의 특징과 감정의 모습, 표정들을 
가장 단순하고도 한눈에 들어오도록 만든다. 작가의 작품들은 각자의 형상 내에서 소박해 보이지만 실은 매우 정교하게 하나의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것은 단순화된 얼굴의 표정일 수도 있고 작품 전체의 몸짓이 드러내는 표정이기도 하다. 
김경원 작가의 작품들이 지닌 표정과 몸짓은 매우 정교하게 사람을 묘사한 작품들보다도 더욱 그 대상의 성격과 감정이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러한 일이 가능한 것은 우선은 작가가 타고난 사람의 감정과 표정에 대한 이해 때문일 것이지만 무엇보다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꾸준히 작가가 애정을 가지고 사람이나 주변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처음 작가 자신에게서 출발한 관찰의 범위는 서서히 작가 자신에서 주변으로 확대되어 가족과 이웃으로 향하고 있음을 그간의 작업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김경원 작가는 살면서 자연스레 만나게 된 사람들을 소극적으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모르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기까지 하는데, 
2009년 늦가을에 경기도 양평의 양서면으로 떠나 한 달 남짓한 기가 동안 그곳에 사시는 노인 분들의 삶을 크로키 형식으로 기록하고 전시한 것은 그 노력 중 하나이다. 
앉은 자리에서 상상하기보다 실재하는 것을 찾고 그 삶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겸손함은 작가가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깊은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사람을 찾아나서는 작가의 여정은 물론 작가 자신을 찾아나서는 여정이기도 했다. 
그동안 작가는 여러 작품을 통해서 작가 스스로의 못다 이룬 소녀로서의 열망을 드러내기도 하고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인정함으로써 화해를 시도하기도 한다. 
그리고 삶 속에서 자신을 굴려가고 있는 것들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하는데, 숱한 사람들과의 관계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정체성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바로 작가 자신이 ‘엄마’라는 사실이었다고 한다.

<찌들고 꿈꾸며, 여리고 강한, 못났지만 아름다운>

 2013년 가을에 있었던 <사람, 흙 사람 속으로>展에서 문득 작가는 어느 틈엔가 토우들 사이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작가는 흙을 재료로써가 아닌 그 스스로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그 속에 사랑하는 자신과 주변의 인물들을 투영하고, 
거기에 그 인물의 성격과 표정과 몸짓을 가장 단순하면서 정교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작가는 작품들이 완성된 후에도 손에서 그것을 놓아버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가장 예쁘게 보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고, 또한 나이가 들어감을 자연스레 바라본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 속에서 작품을 ‘엄마’로서 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작가는 현실과 작업 모두에서 엄마로서의 자신을 좀 더 깊이 생각해보게 된 작가는 
어머니의 길을 걸었던, 또 걷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떠올리고 그들의 삶에서 지극히 인간적이며 때로는 인간을 초월하는 모순의 위대함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세상에 존재하고 존재했던 수많은 ‘엄마’라는 존재가 그려내는 삶의 자취를 그려낸 일종의 신화(神話)이다. 
자식에 대한 너무도 깊은 사랑이 있었기에 그것을 통해 역설적으로 신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인 성모 마리아가 있었고, 
억척스럽게 세상과 싸우며 자신을 버리고 자식을 키워냈던 엄마들이 있었다. 그 주변에는 엄마의 삶을 빨아먹으며 엄마가 죽어가는 만큼 자라나는 자식들과 주변이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작가는 ‘엄마’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삶의 모습을 작가는 가식 없이 담담하게 늘어놓는다. 
 
 무엇보다 자기가 가장 소중하고 자신을 챙기는 것이 똑똑하고 현명한 것으로 여겨지는 요즘 세상에서, 
어떻게 보면 ‘촌스럽게도’ 작가는 너무도 당당하게 자신의 정체성이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녀를 키워내는 것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하는 아들딸들을 억척스레 키워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들에 자신의 외로움을 이해받기를 원하는 바라는 역사와 세상의 수많은 엄마들 사이에서 작가도 작품 하나가 되어 어디쯤 서있는 것 같다.

자라나는 에너지-유진상
김경원의 그림 : 자라나는 에너지 (2006 숨을. 쉬고. 있는)

글. 유진상 (미술평론가, 계원조형예술대학 교수)

김경원은 주로 인물의 신체와 그것이 담고 있는 표정을 드로잉, 채색화 그리고 입체적인 조형을 통해 표현한다. 이 작품들은 때로는 직접 모델을 보고 그린 사생이나 
다른 이미지들에서 연상한 이미지들로 이루어진 것들로, 모두 조형적인 구성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재료들을 복합적으로 사용하면서 만든 것들이다. 이 작품들은 어떻게 보면 
아직 아카데믹한 구성의 흐름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들이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작가 자신의 삶의 여정에서 비롯된 직접적인 기록들을 담고 있어 
작품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김경원은 오랫동안 토우를 만들어왔다. 그의 토우들은 뮐렌도르프의 비너스에서 신라의 토우에 이르기까지 
과거의 조상(彫像)들에서 볼 수 있었던 고졸(古拙)한 사실성에 천착하면서 단순하고 소박한, 거친 형태 속에 담긴 생생한 인상을 보여주어 왔다. 
아마도 근작에서 보여지는 임신한 여성을 주제로 한 연작들은 이러한 작업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들 가운데는 루이즈 부르조아(Louise Bourgeois)의 초기 드로잉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있다. 간결하고도 과감하게 감정의 본질만 남겨둔 채 
나머지의 불필요한 묘사들을 생략하고 있는 이 드로잉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작가의 창작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역시 기술적인 측면이라기보다는 
지금 현재의 삶에서 우러나오는 형태에 대한 감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최근의 그의 드로잉에서 여성의 몸은 때로는 커다란 덩어리거나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얼룩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다양한 원근법적 시점에서 바라본 몸은 때로는 임신으로 인한 생리적 변화의 결과로 풍만하게 부풀어 있거나 반대로 넓적하게 펼쳐진 표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떤 그림에서는 아주 엷게 칠해진 윤곽선만 보일 뿐 신체의 볼륨은 최대한 함축적인 빈 공간처럼 남겨져 있기도 하다. 어떤 것들은 포트리에(J. Fautrier)의 화면처럼 
두께를 지닌 얼룩을 통해 실존적인 몸의 감정을 드러내기도 한다. 공통적인 것은 작가가 회화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전달할 때 그가 다루려고 하는 것이 
시각적으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기호와 같은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신체가 처했던 감정을 둘러싸고 있던 물리적 상황이 어떠했던 것일까를 그림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김경원의 작품들은 추구하고 있는 이미지의 지평을 구체적으로 예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가능성은 작가 자신의 신체에 대한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에서 
매우 커다란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그의 작품들이 조각에서 점점 더 회화적인 공간으로 옮겨가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조각의 사실성을 2차원 평면에서 회화적 환영이 아닌 물질적 실재로 재현하려 하는듯한 노력은 그 자체로 커다란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자신은 이것을 그가 수없이 만든 토우들에서 발견한 ‘자라나는 에너지’라고 부른다. 
고대의 이미지들이 시각적 치유의 에너지를 지녔던 것처럼 작가 스스로 진정성에 다가갈 때 비로소 그림에서 호출되는 이러한 에너지야말로 김경원이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중요한 주제를 다루는 많은 화가들이 그러해야 하는 것처럼 김경원 역시 작업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 작업에의 주관적 몰입 뿐 아니라
다양한 참조들을 통해 자신이 만드는 작품의 위상을 정확하게 바라보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될 듯하다. 물론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고도 가장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예술가에게 있어 자신의 창작에 대한 다양하고도 객관적인 비평적 평가는 그것을 통한 성공보다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그의 창작이 작가 스스로 결집시킨 작업의 일관성 속에서 형태의 정화를 이루어내었으면 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그 역시 진정한 작가의 기쁨을 느끼게 되기를 바란다.

사람안에 또 사람이-박성원

사람안에 또 사람이(1997)

김경원이 가장 관심을 갖는 소재는 ‘사람들’이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하면서, 어떤 공간을 그린다 할 때도 그녀의 그림에는 반드시 사람이 등장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공간은 사람이 부대끼고, 서로 숨쉬는 삶의 터전이다. 공간이 있기에 사람이 존재하지만 한편 사람들이 있기에 공간도 존재하는 것이다.

김경원의 그림 속 사람들은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닌 실제로 지금까지 만났던 과거와 현재의 사람들이다. 
그녀와 만나고 마음을 나눈 사람들을 통해서 그녀는 사람들 속에 간직된 선량함을 읽겠건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녀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선량한 심성을 믿으며 세상을 바라본다. 
그림속의 사람들은 대부분 웃고 있다. 만가지 표정에는 수많은 감정들이 녹아있다. 그녀는 얼굴을 통해서 수 많은 감정을 읽어낸다. 그리고 화면에 담는다.

그녀의 인간 탐구 과정은 여행, 답사, 유적순례와 더불어 이루어졌다. 역사의 흔적을 순례하면서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고 우리네 조상들의 얼굴을 본다. 
여행을 통해서 오늘 숨쉬며 살아가는 흙에 펼친다. 김경원은 부지런하게 만남을 경험한다. 살아있는 오늘의 사람이던, 과거의 흔적 - 바위에 새겨진 불상이건, 장승이건 만나는 대상과 우선은 
마음과 감정이 통해야 한다. 반드시 마음과 감정이 먼저이다. 감응이 배제된 ‘인체’에서는 ‘마음’을 느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인물 그림들을 나는 ‘인물’ 보다는 ‘사람들’로 말하고 싶다.

동양에서 인물, 특히 초상화를 그릴 때는 반드시 그 안에 ‘마음과 정신을 담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전신(傳神)’이라고 한다. 김경원은 일상에서 따뜻한 사람들을 경험한 모든 순간순간을 스케치해 담고, 
바로 이 ‘전신’, 마음과 정신을 담기 위해서 많은 공부를 해 왔다. ‘전신’의 요체는 ‘눈’ 이다. ‘눈’에서 어떤 표정을 담음으로써 상대방이 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인물화를 느끼고 즐길 수 있는 핵심이라고 본다. 김경원의 그림은 한 순간의 크로키, 스케치를 그려놓은 듯 하지만 ‘눈’의 표정을 통해서 확실하게 사람의 인상과 느낌을 뽑아낸다.

그녀는 최대한 간단한 표현방식 - 몇 번의 붓놀림 만으로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낸다. 원 모습, 원 얼굴의 형태에 대한 구체적 묘사는 최소한으로 줄인다. 
약간의 변형은 있으나 그 사람이 가진 특징과 성격을 결코 놓치지 않고 아주 간략하고 단순하게 보여준다.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본질에 가깝다. 복잡한 설명은 과감하게 생략한다. 그녀의 소박한 그림은 바로 이 점을 바탕으로 철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대학원 시절의 것과 비교하여 최근의 그녀의 그림들을 보면 무언가 변한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변화는 ‘핵심을 위해서 부차적인 것은 확실히 생략해 버리는’ 그녀의 작업 태도에서 온 것이다. 
몸, 주위배경, 이 모든 것이 모두 부차적이다. 핵심과 본질은 모두 얼굴에 맞춰져 있다.

나는 그녀의 작품 ‘외할머니’가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의 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언젠가 ‘걸작’이라는 것이 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대답은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작품’이었다. 김경원의 ‘외할머니’는 그녀의 어릴적 추억, 흙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있다. 
그녀에게 있어서 할머니는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김경원만의 마음의 고향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그림을 보면 푸근함, 따뜻함을 느낀 동시에 그 눈매에서 회한 같은 것을 느꼈다. 그림 속 인물들의 마음을 읽어내면서 나 자신의 마음을 그 안에 집어넣고 있었던 것 같다.

이제 김경원이 왜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는지를 알 것 같다. 그녀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화폭에 ‘전신’하는 것은 어쩌면 그녀 자신을 ‘전신’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녀는 사람들의 마음, 따뜻함, 정을 그려내고 거기에서 자신의 얼굴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림을 보는 우리들은 우리 자신의 감정을 집어넣고 우리의 얼굴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녀 그림, 사람들의 ‘얼굴’은 아마도 내 마음을 읽어낼 수 있도록 마련한 공간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림 속 얼굴들을 통해서 과거, 현재의 사람들을 만나고 작가 김경원을 만나고, 그리고 나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글. 박성원(연세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