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김호성의 작품세계_서양화가 김근영
새벽 2시
따르르릉 따르르릉
이젠 안 봐도 안다. 김호성이다.
‘밥먹어요’ 새벽 2시에 밥먹잔다.
... ...
새벽 2시에 밥을...
나 아직 신혼이다!!! 인간아..인간아..

필자가 이렇게 김호성 작가의 서문을 우스갯소리로 시작하는 것은 그의 고단함을 덜어주기 위함이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간접적으로 피력하고자 함이다.
김호성과는 대학 때부터 인연을 이어오고 있으니 20여년이 지난 시간이다.
그때부터 지금도 그는 늘 바쁘다. 늘 바쁜데 늘 유쾌하다.
미술협회 일이 그러하고 교회일이 그러하며 개인전과 수시로 진행하는 전시회기획과 참여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한곳에서 김호성에게 문제가 될 만큼 커다란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다. 하물며 그 바쁜 시간 속에 가족들에게도 좋은 아빠 좋은 남편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인간 김호성은 그런 사람이다.

작가가 최근과 같은 리얼리즘에 빠져 작품을 시작하던 시기가 이젠 10여년이 되어 가는듯하다. 리얼리즘 작품을 처음 시작하고 전시회를 열었을 때 전시 서문이라고 부끄러운 글을 전해 준 것이 벌써 10여년 전이였고 나름 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터라 쉽게? 글을 풀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그때 보다 덜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닌데 덜 만나고 덜 대화하는 것도 아닌데 사실 그의 작품에 대해 이것저것 떠벌리려니 겁이 난다.
왜 일까? 농익어가는 홍시에 손을 대는 기분이랄까? 아무튼 조심스럽다.
필자는 글쟁이가 아니라는 핑계와 조심스럽다는 포장으로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그의 작품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그의 작품은 두말 할 것도 없이 화면 위에 물감의 물질성을 혼합하여 그리는 행위이며 그중에서도 리얼리즘을 강조하는 형태의 기법을 쓰고 있다. 대부분의 리얼리스트들이 하나의 주제를 정해 놓고 몇 년이고 같은 기법을 통해 작품을 창작해 낸다면 김호성에게는 특이한 점이 하나있다. 바로 다양한 소재를 그린다는 것이다. 그것도 작가 스스로 정해 놓은 기간이 있는 듯 보인다. 과일과 사과로 시작된 정물 형태의 작품들이 어느 순간 인물화로 전환이 되는가 싶더니 유리병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물방울이 맺혀 있기도 한다.
변화하는 리얼리스트라? 많은 리얼리스트들은 하나의 소재-더 작게는 하나의 물체 또는 물질-만을 반복적으로 그려 ‘00그리는 작가하면 누구’라는 인상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김호성에게는 그런 것을 대입하기가 쉽지 않다. 획일화 되어 있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극사실주의자들은 외형상 자신들의 생각과 해석,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 앞에 그려져 있고 우리 옆에 서 있는 작품 자체의 현실성을 통해 사회에 대해 그 무엇을 말하려 한다.
그 무엇이란, 표현으로서의 한계점을 ‘재현’으로서의 예술이라는 새로운 리얼리즘 방법 등을 통해 다시 작품에서의 주제를 되살리며 일체의 일루전(illusion)을 배격, 우리들이 무심코 지나쳐버린 일상속의 사소한 것들에 눈을 돌려 우리 앞에 서 있는 것들의 현실성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얽매이지 않는 리얼리스트는 가능한 일일까?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추상적 정서적 감정을 모두 배재하고 사물의 표피만을 극사실화 시켜 보는 이로 하여금 충격을 주고자 하는 것이 리얼리즘의 본질 아니었나?
리얼리즘은 그 오랜 시간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과시해 왔다. 종종 너무 기계적이어서, 또는 구시대적인 획일주의에 빠져 작가의 개성 상실과 기계 종속적인 입장을 가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자아내게 했으나 현재의 작가에게 이러한 염려는 이미지시대를 고려하지 않은 편견에 불과할 뿐이다. 왜냐하면 지금의 김호성은 단지 사물을 정밀히 그리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작가의 정신세계를 전달하기 위한 그림 그리는 기술(Technique)의 한 가지로서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김호성의 인물화를 유심히 바라볼 필요가 있다.  
카메라 렌즈를 향한 채 한 여인이 풀밭을 걷고 간혹 웃음도 지어 보이며 행복한 모습을 보여 줄 때 김호성의 인물 작품 속에서 보여 지는 그 작품의 재료는 무엇인가? 시선을 바라보는 작가의 얼굴? 그의 관점? 대상의 미소? 그녀의 행복? 작가의 실존 전체? 아니면 그 특정한 행위 장면을 기록한 작품? 그도 아니면 ‘한 인간이 행복하다’는 사실과 그 실제 사건이 한편의 영상처럼 작품으로 제작된 시간?
답은 간단하다. 그 모든 것이 작품에 투여된 재료이다. 동시에 그 모두가 각각의 요소로 재분리 하는 일이 불가능할 정도로 작품 속에서 긴밀하고 중층적으로 구성되고 상호작용한 질료質料들이다. 그 점에서 김호성의 작품에 어떤 것은 물질적이고 어떤 것은 비물질적인지 따지기 어렵다.
즉 작가가 행복한 모습의 여인의 모습을 담은 작품을 단순한 리얼리즘의 한 부분이라 재단 할 수 없다는 점이 여기에 있다.
대신 우리가 김호성의 작품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우리 인간이 관념이 아니라 물질로 이루어진 세계를 벗어 날 수 없는 한 그 어떤 미술도 물질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이다. 질료의 조형적 승화든 정성의 표현이든 일단은 물질로부터 출발하되 김호성의 리얼리즘은 ‘물질의 차원을 고수하면서 비물질적인 감성을 내포하거나 새롭게 표현하고 있다’라는 것이다.

작가는 작품을 하기 전 특정 공간에 하나의 현상을 만들고 그 현상을 카메라로 옮긴 후 인화된 사진을 기반으로 작품을 해나간다. 현상과 본질은 서로 다른 대상에 대한 분류다. 현상은 표면 또는 우리가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경험하는 대상이고 본질은 그 현상 아래에 숨어서 직접 만지거나 볼 수 없는 대상이다. 우리가 수집한 방대한 데이터들에는 이 두 가지의 요소가 숨어있다.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들이고 또 하나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눈에 보이는 것들은 관찰을 통해 포착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은 통찰을 통해 얻어 낼 수밖에 없다.
현상이 없으면 본질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없고 본질이 없으면 현상이 유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김호성 작품에 보이는 표면과 작가의 의도가 감위된 의도적 구성은 작품을 이해하데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는 주변의 본질과 현상에 대해 얼마나 정확하게 감상하고 있을까? 본질에 대한 확신이 지나치면 때론 독선과 무지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그리고 현상과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는 기대를 망상이라 칭한다. 김호성의 작품 속 잘 그려진 사물들을 보면서 망상을 찾을 것인지 그 내면에 숨어 있는 작가의 본질을 찾아내는 수고를 감수 할 것인지는 보는 이의 판단의 자유겠지만 단순히 잘 그린 그림으로 치부하기 이전에 다 같이 생각해 봐야 문제가 아닐까?    

 항상 웃음기 넘치는 얼굴 뒤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작업실 길 그 길에 생각나면 수화기를 드는 그와 가끔은 나도 동요하여 늦은 시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들이 종종 있다. 하루 종일 활기차게 웃고 있었을 그의 미소 사이로 보이는 그의 냉철함을 필자는 알고 있다. 그 냉철함이 바로 김호성이 자신의 현재를 바라보는 눈이고 작품을 통찰하는 방법이란 것도 알고 있다. 따스한 시선 속에 자신만의 냉철함을 지니고 그 날카로움으로 자신을 담금질 하는 작가의 모습은 자신의 작품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처럼 부드럽지만은 않다. 스스로를 담금질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는 작품도 생활에서도 리얼리티한 삶을 살고 있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새벽 2시에 울리는 김호성의 신혼집테러? 전화는 하루 종일 미술 협회일과 교회, 여러 전시회의 기획과 참여, 한 가정의 가장역할을 마친 후 그 피곤한 몸을 이끌고 작업실에서 걸려온 전화다. 적어도 내가 아는 인간 김호성은 그런 사람이다.
- 서양화가 김근영

하이테크 음모론- ‘사과’와 ‘베리 칩’-조상영
하이테크 음모론- ‘사과’와 ‘베리 칩’

조상영 (미술학 박사, 미술비평)

김호성은 작품에는 늘 사과가 등장한다. 아담과 이브가 먹었다는 선악과(작가는 사과를 선악과로 제시한다), 뉴턴의 사과, 윌리엄 텔의 사과, 백설공주의 사과, 세잔의 사과 등... 사과라는 과일은 재미있게도 수많은 신학, 문학, 사회, 과학, 예술의 한 중심에 등장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래서 김호성은 줄곧 사과에 얽힌 사건의 배후에는 늘 인간의 욕망이나 음모, 발견, 혁명, 등이 있음을 직시하고 사과+사람을 합성한 ‘사과람’으로 자신의 작품론을 펼쳐왔다. 

이번 개인전에서 작가의 사과는 ‘하이테크 음모론’과 연결되어 있다. 아담과 이브로 인해  인간의 원죄 즉 ‘영적 짤림’ 현상이 온 세계와 모든 인간으로 이어졌다면, 매끈한 사과를 잠식하고 있는 바코드와 베리 칩 이미지는 제2의 선악과로 기능한다.
그래서 작가의 사과는 세잔이 추상으로 나아가고자 했던 다시각적이고 조형적인 사과나 미래주의 작가들이 탐닉했던 세계관과도 거리가 멀다. 작가는 아담과 이브가 맛보았음직한 선악과를 사과로 상징화 시키면서, 그들의 영적 짤림 현상을 가져오게 했던 사과의 표면을 먹음직도 하며 보기에 아름답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표현하는 데 주력하고자 일루전을 극대화 시키고 있을 뿐이다. 사과의 표피 안에는 어떤 것이 들어있는지 모르지만 누구든 손을 뻗어 한입 깨물고 싶어질 충동이 일만큼 말이다.  

작가가 드러낸 사과 표면은 뭔지 모를 기분 나쁜 꼬드김과 함께 바코드와 베리칩 이미지들로 중첩되어 제시되고 있다. 베리 칩은 유비쿼터스 기술과 연결된 인체 네트워크 구축을 기반으로 하여 사람과 동물, 사물을 통합하는 핵심 기술이다. 현재 사람, 동물, 사물이 언제 어디서나 커뮤니케이션 되게 하기 위해 정보통신기기와 컴퓨터 기술을 통합하고 있는데, 어쩌면 지금의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를 거쳐 ‘호모 사이보그’로 불리는 ‘포스트 휴먼’ 상태에 이르렀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베리 칩을 인체에 삽입하라는 시행법령이 2010년 3월 21일 미국건강보험 개혁안 내에 포함되어 통과했기 때문이다. 베리 칩의 5가지 용도는 128개 DNA 코드가 내장된 의료용, GPS 기능이 내장된 추적과 보안, 어린이 유괴방지 그리고 사고파는 상거래를 할 수 있는 현금인출용으로써 인간의 모든 활동에 통합적으로 사용되며, 이식하는 위치는 오른손이나 이마로 명시되어 있다. 
이는 마치 1968년 윌리엄 깁슨의 소설 『뉴로맨서』에서 인간에게 초감각을 심는다는 내용과 유사한데, 또 다른 측면에서는 ‘666’ 예언과 맞닿아 있다고 추측된다. 인간의 첫 번째 영적 짤림을 사과가 주도했다면, 제2의 영적 짤림은 베리 칩에 의해 주도될 것이기 때문인데, 사이보그 분야의 대표 과학자인 케빈 워릭은 사이보그를 ‘반 동물, 반 기계이고, 그 능력이 평범한 범위를 넘어서는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작가의 작업은 일반적인 정물화 개념을 훨씬 벗어나 유기체와 기계가 결합된 변환인간의 단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래서 베리 칩은 니체가 말한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려는지 모른다.  
동시대는 신체와 기계가 공진화 되면서 합성, 조립, 해체, 강화라는 측면에서 ‘신체=기계’ 등식이 성립되고 있다. 알뤼께르 로잔스톤은 사이보그 신체에 대해서 “디지털 적으로 다시 계산된 육화, 그 밀도 있는 욕망의 공간 ... 즉 사이버스페이스에 들어간다는 것은, 바로 그 공간을 신체적으로 짊어진다는 의미이다. ... 그리하여 사이버스페이스는 솝책의 말대로 몸의 영혼을 벗겨내고, 동시에 그 영혼을 번쩍이는 표면과 현란한 색을 지닌 사이보그로 다시 만들어냄을 의미한다”고 말했듯, 베리 칩은 원죄로 각인된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망각하게 하여 '새 세계질서(New World order)'에 적응토록 할 것이라 보여 지고 있다.
이제 김호성이 갖는 사과와 베리 칩에 대한 예술적 사유와 경고는 앞으로 펼쳐질 포스트 휴먼 징후들을 시각화 시키는데 중요한 스펙트럼으로 작용할 것이다.

변화한다는 것이 어찌 즐겁기만 한 일일까?-김근영
김호성 개인전에 몇 마디 보테기..

변화한다는 것이 어찌 즐겁기만 한 일일까?

 작가 김호성은 늘 밝다. 항상 주변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내며 어느 자리에서든 특유의 친화력으로 자신의 의견보다는 타인의 의견을 존중 할 줄 아는 그런 인물이다..물론 이런 그의 성품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며 지인들이 그를 좋아하며 따르는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 이다. 자칫 그의 모습은 타인에게나 자신에게도 때론 가볍거나 때론 두루뭉술한 모습으로 보여 지기 십상이다. 
그런 이미지는 목자집안이라는 특수성을 지닌 작가의 환경적 성품에서 나오는 온화함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보이는 행동만으로 김호성의 작가적 기질을 판단하는 것은 큰 착각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온화함을 찾아볼 수 없다. 철저하고 냉철하며 철저히 계산적이다.
그런 그가  최근 자신의 작품을 통해 날카로운 가시 하나를 세우기 시작했다. 

한 4,5년 전쯤으로 기억된다. 작가 김호성의 그림에 변화가 시작된 것은... 이러한 변화는 현대미술의 변화의 흐름에서 본다면 미미한 것일지 모르나 작가 본인에게는 커다란 모험이요 큰 변화였음에는 틀림없다. 색채와 평면적 구성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작가의 공간적 미술의 범위에서 작가의 탈출은 일단 양팔 벌려 축하할일이다.  2006첫 개인전을 뒤돌아보면 현재의 작가는 분명 다른 사람이며 다른 작품을 그리고 있는 사람이다. 지극히 자연적이던 그의 작품들이 어느 순간 인간본연의 모습을 찾고자 하는 노력이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그 시발점은 그전과 동일한 방법으로서 자연에서 차용한 매개체(사과)를 사용한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한 점이 있다 그러나 그가 보여준 방법론은 확실히 그전의 것과는 차별화 되는 것이어서 주변을 당혹케 했던 기억이 있다. 물감의 조합을 통해 자연을 재현하던 그의 과거 그림과 현재의 극사실주의의 성격이 강한 그의 그림을 비교해 보자면 물감의 조합은 단순해졌으나 세밀해졌으며 그 내면에 보이는 사물의 집중력은 더욱 높아졌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작가는 모험을 하고 있다. 대다수의 극 사실주의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서 방법론적 해석에 급급한 반면 작가는 의미론적 해석이 우선 시 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즉 극 사실주의에서 말하는 감정이입의 철저한 배제라는 원칙은 작가는 벗어나려 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작가에게 커다란 독이 될 수 있는 문제점을 지닌다. 하지만 필자는 모든 상황을 열어두고 작가를 지켜보고자 하며 작품 관람객들에게 외람되지만 정중히 동참하기를 바래본다. 아직도 발전하고 있으며 적어도 필자가 알고 있는 리얼리즘을 표방하는 작가들 중에서 가장 순수한 모습을 김호성은 지녔기 때문이며 늘 변화하려는 그이기에 더욱더 그에게는 용기와 격려가 필요한 시기이다.  

 존재하는 사물을 잘 그리는 것은 기능적으로 매우 뛰어난 행위이며 보는 이 로 하여금 놀라움을 주고는 한다. 좀 더 진보하여 존재하는 사물들을 제구성하여 잘 그려내는 것은 작가 스스로의 적극적인 대입을 나타내고자하는 행위이다. 존재하지 않는 리얼리티는 과연 존재 할 수 있을 것인가?? 카메라 옴스큐라의 발견이후 다양한 시각 매체의 착시현상을 통해 조금씩 리얼리즘에도 변화가 오고 있는 이 시점에 작가에게 다음과 같은 쿠르베의 말을 뛰어넘는 상상력이 감이되길 바란다. 

"나에게 천사를 그리라 요구한다면 실존하는 천사를 보여달라."-쿠르베-
 
즉 현실을 주관적으로 변형,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예술의 형태가 사실주의 작가이자 스스로 리얼리스트라 칭했던 쿠르베의 입장이라면 작가는 자신의 감각과 주장을 사물의 본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작가는 최근 연출이라는 특수 상황을 스스로 재현는 방법을 쓰고 있다. 
 어떤 이성적 감정도 허락되지 않던 기존의 리얼리즘의 특징의 경계선에 작가는 어찌 보면 위태롭게 서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작 작가 자체는 이러한 상황을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감정의 배제를 통해 리얼리즘을 완성하기 보다는 적극적인 감정이입을 원하고 있다. 이런 작가의 화면 구성은 리얼리즘의 맥락 보다는 초현실주의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겠으나  앞에서도 밝힌바와 같이 점점 더 다양해지는 매체들의 (순간적 또는 철저히 계산된 합성)특징을 살리는 것이 현대의 리얼리즘의 성향 인만큼 좀 더 두고 볼일이다. 

 작가의 최근작들(적어도 사물의 표면을 그릴 때 극사실주의 방식을 따른..)을 보면  사과가 자주 등장하는데 처음 시도된 작품들은 투영 시리즈였다. 이때의 작품들은 단순한 정물의 형태로서 사과뿐 아니라 다양한 과일들을 작가의 의도적인 배치를 통해 나타낸 작품들이였고 차후에 ‘공주의 눈물’ 시리즈로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사과라는 하나의 매개체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게 된다. 최근의 기호적인 측면에서의 사과에 이르기 까지 같은 사물을 끊임없이 등장시키면서도 매번 다른 생각과 내용을 담는다. 작가는 과일 중에서 사과가 지니는 역사적, 신학적, 과학적 사실들에 매료 된듯하다. 이는 사물의 표면에 나타나는 성질만을 집요하게 표현하고 작가의 기능적인측면만을 작가 스스로가 강조하지 않는다는 단편적인 예일 것이다. 늘 생각하고 변화를 추구한다는 반증일 것이다.

 변화하는 리얼리스트는 위험하다. 위태롭다. 그러나 작가의 상상력이 감위 되었을 때 리얼리즘의 제한적 한계의 범위도 허물어질 수 있고 누군가에 의해 허물어져야만 더 광범위해지지 않을까? 이런 도전에 과감히 나선 작가에게 박수를 보낸다.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들이 작가가 의도했던 데로 대중들과 제대로 된 소통의 방법이길 기대하며 사실적 표현력위에 내포된 의도가 숨김없이 보여지 길 바란다. 

       김호성 개인전에 붙여....
(서양화가 김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