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왜곡된 실제의 경계

왜곡된 실제의 경계

 

작가는 사물이나 풍경 등을 비롯한 실재로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각자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거듭 변화시켜 왜곡된 현상들에 집중한다.
작가는 미술학적 관점에서의 진실로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근거를 고찰한다. 이러한 왜곡현상들은 현대미술에서 다양하게 적용돼 왔으며 때로는 마치 실재보다 왜곡된 결과물이 더욱 진실로 받아들여진 결과를 바탕으로 실재와 왜곡된 실제의 경계(정점)에 대한 문제를 해석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작가의 ‘우리가 바라보는 실재는 과연 진실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연구기도 하다.

실재의 순간을 왜곡된 실제로 전환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모든 작품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물 또는 풍경 등과 같은 실체(實體)를 가지고 있다.형과 색 등의 왜곡을 거쳐 제작된 ‘plastic tree’, ‘bulb’, ‘stained stuff’와 같은 작품은 실재와 시각적으로 차별돼지나 결과적인 인지는 실재와 다름 없는 실제라 할 수 있다.
 


과거 진실로 기록되어졌을 미학에서의 실제(實際)는 타의에 의해 혹은 자의에 의해 제작되어진 기록을 통해 당시의 진실로 대변하여 전해져 내려온다. 모더니즘 이전의 진실은 정치적인 진실과 자연현상에서의 실제들이 진실을 대변하였다. 하지만 모더니즘 이후의 진실은 작가의 왜곡에 의해서 사실처럼 인식하기도 한다. 왜곡된 진실들은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을 거쳐 현대미술로 오면서 작가에 의해 원본 없는 실제가 실재(實在)를 대신하여 변형된 실제들-시뮬라크르(simulacres)이 더욱더 확고히 진실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적용되어진 왜곡현상의 역사적 사례들을 파악하고 당대의 여러 가지 사례들이 어떠한 방법과 개념으로 시대를 대변하였는지를 고찰하고자 하며, 또한 동시대에서 난무하는 다시각적인 왜곡현상들을 직시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사물이나 풍경 등을 비롯한 실재로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각자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거듭 변화시켜 왜곡된 현상들을 미술학적 관점에서의 진실로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근거를 고찰한다. 또한 이러한 왜곡현상들은 현대미술에서 다양하게 적용되어 왔으며 때로는 마치 실재보다 왜곡된 결과물이 더욱 진실로 받아들여진 결과를 바탕으로 실재와 왜곡된 실제의 경계(정점)에 대한 문제를 해석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이러한 측면으로 볼 때 “우리가 바라보는 실재는 과연 진실인가?” 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연구이기도 하다.

실재의 순간을 왜곡된 실제로 전환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실재를 주축으로 하고 있기에 모든 작품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물 또는 풍경 등과 같은 실체(實體)를 가지고 있다. 형과 색 등의 왜곡을 거쳐 제작된 'plastic tree' 'bulb' ‘stained stuff'와 같은 작품은 실재와 시각적으로 차별되어지나, 결과적인 인지는 실재와 다름 없는 실제라 할 수 있다. 이에 이번 작품발표회는 연구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미술학적 차원에서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바라보는 시각적 실재와 기억의 실제는 다르다”는 연구자의 의견을 토대로 제작된 환영(幻影)의 결과물 ‘왜곡된 실제’가 진실로 전달되기를 기대한다. 

시각시각(視覺視覺)] 김려향, stained stuff

시각시각(視覺視覺)] 김려향, stained stuff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경험이다. 과거의 경험을 통해 사물을 받아들인다. 경험치가 없을 때 당혹스럽다. 이런 감정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자신만의 생각을 사물에 투영하는 것이다. 더 좋은 방법은 사물을 규정하려는 생각을 벗는다. 실제 사물을 인식하는 것은 시각이지만 규정하고 결론을 내려는 것은 마음이다.

 

그 마음을 놓으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 예술의 속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깨거나 벗어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김려향 작가의 작품 ‘stained stuff’로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일까에서 감상의 출발을 잡으면 어떨까. ‘이것이 대체 무엇일까’로 접근을 하면 사물의 속성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왜 작가는 이런 작품을 세상에 내놓았을까. 그렇게 좁혀보자. 그럼 자신만의 다양한 실제를 만날 수 있다. 나는 이 작품에서 우울함을 뚫은 숨구멍이 느껴진다.

 

김희정 대전 미룸갤러리 관장

내가 그린 그 그림은 내가 그냥 그린 그림이다-최연선

 

“내가 그린 그 그림은 내가 그냥 그린 그림이다...”

독립큐레이터 최연선

 

누구나 한번쯤 어린 시절 좋아하는 대상을 그림으로 그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말이다.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도구와 색채를 선택하여 자신만의 방법으로 표현하며 주문을 외운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싶어”“나는 만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나는 이곳에 가고 싶어” 라고 말이다. 어른이 된 지금도 여전히 “...싶어” 라는 주문을 외우고 산다.

 

 

김려향 작가 또한 그런 사람들 중 한사람이고 그 또한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렇듯이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그림쟁이다. 

그의 작업실에 처음 들어섰을 때 마치 보물 창고에 온 것 같았고 여느 작가의 작업공간과 비슷해 보였지만 소소한 볼거리들이 작가의 작품세계를 반영하는 듯하였다. 그는 음악을 좋아한다고 했다.

특히나 오랜 세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을 같은 손질된 레코드 플레이어에서는 마치 비틀즈의 예스터데이가 흘러나올 것 같았다. 

조금은 고집스럽기도 해보이는 그의 성격에서 순수한 순정을 느꼇다고나 할까... 작가는 사물의 보이는 이미지를 좋아한다고 했다. 

어떠한 도구 자체의 형태의 아름다움에 반하고 사용 되었을때의 또 다른 생명력에 다시 한번 반한다고 했다. 

그래서 이전의 작업 내용들은 심미성도 있고 불을 밝히는 생명력이 있는 전구에 반하여 작업을 했었다. 

 

그런데 그가 이번 전시에서는 또 다른 작품들을 선보인다. 

작품에서도 보이듯이 서로가 전혀 연계성 없어 보이는듯한 것들로 제각기 소재로 삼았지만 여전히 좋아하는 대상의 보이는 이미지를 그의 방식으로 재현하였다. 

그가 지금의 작업실로 옮기기 전에는 자연을 그림으로 옮긴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사진을 찍어야 하는 수고스러움도 있겠지만 

직접 보고 느끼면서 그린 것이 아니라면 진정성이 없어보였다고 느꼈을 것이다. 자연만큼이나 그 자체가 주는 느낌을 

과연 사진으로 찍어 캔버스에 옮기는 것이 자연이 주는 신선함과 마주했을 때의 그 감정이 그대로 전달 될 리 만무하다. 

그런데 지금의 작업실에서 보이는 작은 숲은 그에게 교감 할 수 있는 소재가 되었고 항상 제자리를 지키며 자기 할 도리를 다하는 나무를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본 것이다. 

하이브리드 카가 공존하는 시대에서 지금은 단종된 구형 코란도를 그림 속에서 나마 추억하고 싶은 작가의 애마였던 차에 대한 그리움과 여전히 타고 싶은 동경의 대상으로서 표현한 듯하다. 

그리고 보면 작가는 시대에 앞서가려고 하고 빠른 것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 조금은 다른 성향을 가진 듯하다. 

옛것을 그리워하고 태어나기 이전의 예술과 문명을 숭배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렇다고 그의 그림이 구시대적 삶을 보여주는 단순히 재현에만 그치는 풍경화는 아니다. 오히려 자칫 잘못하면 촌스러울 수 있는 구체적인 묘사를 절제하고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의 색감이 아닌 환상적이거나 상상적인 것에 가깝다.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작가의 지난 시간은 그가 탔었던 차라면 현실에 존재하는 나무는 

보고 지나가는 순간 흩날리는 꽃잎들은 곧 과거가 되어버린다. 세월은 곧 불투명한 이미지로서 흔적만 남아있는 이미지의 숙명의 단적인 모습을 모여주기도 한다.

 

그는 음악뿐만이 아니라 스포츠 또한 무척 좋아한다고 했다. 특히나 축구장 야구장의 마운드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 하면 텅 빈 객석일지라도 벅찬 가슴을 느끼는 사람일 것이다. 

그것이 물론 경기를 좋아하고 경기하는 모습이 그려져서 일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경기장의 이미지 자체를 너무나도 좋아하기 때문이다. 

변형도 없이 또는 너무 똑같이 그리려고도 하지 않고 작가는 마음으로 본 경기장의 모습을 화면에 형상화 함으로서 “나는 그냥 경기장의 형태와 느낌이 좋아서 그렸을 뿐이다” 라고 말하는 듯하다. 

또한 무심하게 툭 그려 넣은 듯한 구름으로도 볼 수 있을법한 표상들이 원래의 이미지를 부셔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러 한 장치는 오랜 시간 연마해온 대상의 재현적 표현 방식이고

 

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 것이다. 그 누군가가 후자의 말을 한다면 그의 의도적인 해체 작업은 성공한 것이다. 김려향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어떻게 보면 그의 그림에는 내용이 없다. 

그렇다고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지도 않았고 억지로 유도하지도 않는다. 다만 제시한 이미지 뒤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사람들은 이미지를 보면서 경험에서 비롯된 무엇인가를 떠올리고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 또한 그림의 기법을 주저리 서술하지는 않으려고 한다. 그림을 보면서 무슨 재료로 그렸는지 숨어있는 주제 따위나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지 말고 

눈으로 보았을 때 즐길 수 있는 그냥 그림을 그리고자 했고 저마다 각자의 생각이 있듯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제각기 생각할 수 있게끔 여운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지나간 추억이든 다가올 미래의 상상이든 작가는 우리에게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듯 하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창조적 행위 자체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는 화가이다. 결국 자신의 추억, 기억들을 수집하는 행위일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그림은 개인적인 삶과 환경일지라도 보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교감한다면 진정성이 느껴지는 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떠한 재현도 실제가 될 수 없고 어떠한 추상도 실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것은 곧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작품의 세계관일 것이다.

 

‘왜곡된 실제의 경계’…김려향 대전 이공갤러리 개인전
‘왜곡된 실제의 경계’…김려향 대전 이공갤러리 개인전

김려향 작가가 내달 6일부터 12일까지 대전 이공갤러리에서 개인전 ‘왜곡된 실제의 경계(정점)’을 전시한다. 이번 전시는 사물이나 풍경 등을 비롯한 실재로 눈으로 보이는 것들이 각자의 주관적인 관점에서 거듭 변화시켜 왜곡된 현상들에 집중한다.

작가는 미술학적 관점에서의 진실로 변화하는 과정에 대한 근거를 고찰한다. 이러한 왜곡현상들은 현대미술에서 다양하게 적용돼 왔으며 때로는 마치 실재보다 왜곡된 결과물이 더욱 진실로 받아들여진 결과를 바탕으로 실재와 왜곡된 실제의 경계(정점)에 대한 문제를 해석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작가의 ‘우리가 바라보는 실재는 과연 진실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에 대한 연구기도 하다.

실재의 순간을 왜곡된 실제로 전환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모든 작품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사물 또는 풍경 등과 같은 실체(實體)를 가지고 있다.형과 색 등의 왜곡을 거쳐 제작된 ‘plastic tree’, ‘bulb’, ‘stained stuff’와 같은 작품은 실재와 시각적으로 차별돼지나 결과적인 인지는 실재와 다름 없는 실제라 할 수 있다. 최윤서 기자 cys@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