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김영남의 미술세계-이수천
김영남의 미술세계

전 한국장학회 이사장, 시인 이수천
그림이란 무엇인가. 형체를 평면에서 더욱 생생하게 입체감 있게 표현해 내는 고급 예술일 것이다. 
그림은 「고호」나 「피카소」 같은 대가나 유치원생도 즐길 수 있는 놀이이기도 한 것이다. 최근 인도네시아 마로스 동굴에서 발견된 손자국을 새긴 동굴벽화나 울산 암벽화의 고래, 이집트 피라밋 벽화의 색채의 선명함을 보면서 정작 우리는 무엇을 느끼는가 아름다움 보다는 오래된 것에 대한 놀라움과 그 표현의 창작성에 감탄하게 되지 않던가 
그때 화가라는 말이 있었겠는가
역사시대에 접어 보면서 그림쟁이도 직업인이 되었고 시대가 발전하면서 인류의 미에 대한 보편적 가치가 일반화 되고 그림 그리는 사람이 쟁이라는 독자적 생존영역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그들의 생산물은 상호 비교되고 평가되면서 발전되어 온 것이다. 더불어 그림의 도구와 소재가 점진적으로 발달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이 땅의 서양화 역사를 시간적으로 보면 고희동(1886-1965)의 1914년 “청춘”이란 잡지 표지 그림이 시초인데 불과 백여년에 지나지 않는다. 얼마전 덕수궁에서 전시되었던 ‘한국미술 100년사’에서 뚜렷이 보여지 듯 근대 회화는 서양화의 보급사로 발전된 것이다. 그러나 소위 동양화 수묵화라는 우리의 그림은 「겸재」 「단원」으로 이어지는 대가들의 작품세계로 서양화와 궤를 달리하면서 수준높은 단계로 발전되어 왔다. 지금은 그림 그리는 사람이 수만명을 헤아린다지만 화가를 말할 때 그림을 그려서 밥 먹고 사는 사람 또는 밥 먹고 사는데 그린 그림이 도움이 되는 사람 정도로 정의하면 어떨까
 요즘은 그림 공부를 3-4년 하고 전시회 몇 번 한 주부나 여자까지 화가로 행세를 다하니 화가를 정의하기가 혼란스럽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김영남을 화가로 부른다. 
나는 왜 그를 화가로 부를까 
그는 대학과 대학원에서 미술을 전공 했고 젊은 나이에 목우회 대상, 미술대전 특선 입선 등 70여회의 수상을 한 것으로 안다. 개인전과 초대전을 수차례 하였고 작년에는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로 선정되었다하니 누가 봐도 화가로 불러 손색이 없을 것이다. 내가 화가로 부르지 않을 수 없는 조건을 다 갖추고 있다.
화가 김영남의 작품세계는 어떤 것일까 수년 동안 그의 다양한 작품을 접하면서 나는 무엇을 느꼈을까? 그의 데생과 스케치, 수채화에 이르기까지 수십점을 감상하면서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느낄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었던 걸까 그의 화실에서나 전시장에서 직접 그림을 보면서 느낀 공통적인 감회가 있는 걸까 있다면 무엇일까
첫째 머리에 떠오른 것은 따스함과 율동감 생동감이다.
나는 몇 해 전 한가람 미술관에서 「루오」의 초대전을 본 기억이 있다. 주관 언론사가 몇몇 평론가의 말을 빌어 색채의 마술사라고 상찬을 해 되길래 큰 기대를 갖고 전시장을 찾았는데 아무리 보아도 색채의 마술사라는데는 동의할 수 없어 혼란에 빠진적이 있다. 나에게는 드문 일이지만 거금을 주고 일부러 도록까지 구입하여 보고 또 보아도 독보적 창의성은 인정할 수 있었지만 색채의 마술사라는 말에는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동의할 수 없었다. 물론 안목에 따라 감상수준이 결정되는 것이지만 그림 그 자체보다 미화된 수식어가 그림의 감상을 혼돈에 빠뜨릴 수 있는 좋은 예가 된듯하여 아직도 뒷맛이 개운치 않아 지금도 시간이 나면 도록과 인터넷을 뒤져 본다.
 그런데 김영남의 그림은 색채의 마술사 까지는 안 되어도 색채의 변화무상한 생동감과 색이 주는 언어를 그림 곳곳에 적절한 농도로 퍼즐 맞추듯 안정감 있게 배열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림은 곧 색이 아니겠는가 
색은 그림의 자기표현 언어가 되는 것이다. 그런 색을 군더더기 없이 적재 적소에서 제 목소리를 내게 하고 있으니 그림 자체가 소란이 없고 분란이 없다. 말이 많으면 반대의견으로 충돌이 생겨 시끄러운 법인데 그의 그림에는 시끄러움이 어느 한곳에도 보이지 않고 침묵으로 형태적 화폭에 만 머물고 있는 것도 아니다. 상큼하고 명랑한 언어들이 순리에 맞춰 튀어나오듯 오묘한 화면을 구성하고 있다. 이런 현상들에도 불구하고 그림의 전반적인 흐름은 어느 유파의 흐름을 따랐다거나 의도적인 고집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 흐르는 듯 한 자연스러움과 전체와의 조화가 돋보인다. 화가 김영남은 색채의 마술사 자리로 변동 시킬 필요는 추호도 없다. 색채의 제자리를 찾아줌으로서 색채가 기쁜 마음으로 숨 쉬는 그림을 연출하고 있다고나 할까 

둘째 화면의 구성이 창의적이거나 보편적 미의식에 충실하다는 점이다. 「뭉크」의 소용돌이 치듯 한 그림을 보면 보편적인 미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초현실주의적인 「살바로드 달리」의 작품도 불안한 영혼의 고백인지는 몰라도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한참 보고나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이유를 알게 되고 평론가들의 말에 반신반의하게 된다. 
화가들은 동일한 모델을 그리더라도 모델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개성을 각자의 미묘한 필치와 색채로 매력적인 얼굴로 각색해 낸다. 때로는 모델의 감정을 변화까지도 놀랄정도로 달리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화가의 작가적 에스프리에 감탄할 뿐이다.
김영남의 「비」를 소재로한 다양한 형태의 그림들, 비를 맞고 있는 빌딩이나 가로수, 자동차, 사람,  비온후의 물기 젖은 풍경들, 아직 물방울이 여기저기 붙어 있는 전선아래의 텅 빈 거리들이 멀리 비껴가고 싶은 풍경이 아니라 내 체온이 느껴지는 이웃이 된다.
열정과 냉정이 함께 느껴지는 거리들이 때로는 「콩코드」 광장이 되고 「인천」 연안 부두가 되고 「광화문」 광장이 되는 것은 그의 화면 구성에 대한 치열한 기획성과 미의식 때문일 것이다. 
나는 얼마전 김영남의 「맨드라미」 연작 시리즈를 주의 깊게 관찰한 적이 있다. 「맨드라미」는 여름 꽃이지만 귀하게 여겨지는 꽃은 아니다. 
담벼락 같은데에 아무렇게나 강한 생명력으로 여름 뙤약볕과 맞짱 뜨는 검투사 같은 꽃이다. 꽃술과 줄기가 도전력을 듬뿍 담고 있는 꽃이다.
강력한 붉은 색채가 광선의 각도에 따라 도전과 응전을 번갈아 하면서 활기찬 모습으로 생활에 지친 소시민에게 무한한 용기를 주면서 여름 한낮의 아름다움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 강렬함에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작가의 곱게 그린 장미나 모란 햇볕을 따르는 다양한 해바라기를 보다가 「맨드라미」 시리즈를 통해 변화해 가는 김영남의 미래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한 작품이 미래의 암시적 샘이 되고 있는 것은 작가의 특권인지도 모르겠다. 김영남은 특정한 장르의 구속점이 없이 모든 것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그릴 수 있고 모든 종류로 대상을 전혀 새롭고 독특한 터치로 구성해 낼 수 있는 역량이 있다.
셋째 항상 새로운 것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찾아 나서는 개방성이 화폭에 베어 있다.
나는 그의 화실에서 수채화 몇 점을 보고 새로운 감동을 얻었다. 또 얼마 전에는 지인의 주문으로 완성된 성화 시리즈를 보면서 이 사람의 재능이 어디까지인가 되씹어 본적이 있다.
예술가의 기질이 없는 작가는 사실 그림을 그릴 자격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기질이 있다 해서 다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예술의 최대의 적은 모방적의 절충일 것이다. 상투적인 손재주로 초상화, 풍경화, 소묘를 아름답게 표현 한다 해도 독창적인 감정과 정열 그리고 작가정신에 의해 표현되는 아름다움이 없다면 공허한 환상일 뿐인 것이다. 
김영남의 수채화는 데생이나 색깔의 미묘한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겸허가 숨어 있으며 특히 감탄스러운 점은 적절한 농도와 압축된 치밀하고 논리적인 색조의 완벽한 배치 였다. 가을 풍경 속에 숨 쉬고 있는 행복한 안정감이나 그 분위기 속에 감도는 조화는 시나 산문으로 표현하기는 불가능한 정경이었다.
수채화는 명성을 얻고 있는 몇몇 작가들의 작품은 표현하고 현미경적 흠집을 내려는 것은 아니지만 화면에서 색채가 들떠 있는 듯한 그림을 자주 보고 실망했었는데 김영남의 수채화는 우선 화선지가 물감을 잘 보듬고 있는 듯 전체가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사실 회화는 자연속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전형이 발견되어지지는 않는 것이며 때로는 작가의 깊은 추리력과 내밀한 사상을 담아 내야 하는 작업이다. 김영남에게 자연은 밝은 눈으로 책장을 넘기듯 참고해야할 두꺼운 책일 뿐이다. 그런데 그는 능숙하게 작품의 구성요소를 골고루 담아내는 능력이 있다.
 
넷째 겸손한 우호적 교감과 태도가 그림을 살아 있게 한다. 흔히 우리는 예술 작품을 평할 때 생명력을 언급하는데 예술작품에 생명역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지속성과 활력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내면적 느낌으로 이해해도 되는 것인가 아니면 작품에서 분출되는 불꽃같은 에너지를 말하는 걸까 그림의 어떤 부분은 그 부분에 독특한 색조가 있고 그것이 실마리가 되어 다른 부분을 지배하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황금색이나 붉은 색은 부와 명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지 않는가 한 작품에서 지배하는 색깔은 분위기에 따라 그림의 성격이 달라 질수도 있는 것이다.
김영남의 그림 색상들은 상호 충돌 하듯 교감한다. 그렇다고 시들시들한게 생명력을 퇴보 시키면서 색채가 갖고 있는 개성을 잃는 일은 더욱 없다.
색과 색이 서로 교감하면서 자신이 추구해온 매력적인 극점을 향해 열정적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의 비를 소재로한 풍경들에서 바탕으로 놓여진 깊은 촉감들을 보고 있으면 전혀 새롭고 아주 독특한 감정과 시적 사고가 일어나게 된다. 
김영남은 암시적 화가이기도 하다. 
때로는 황량하기 조차한 도시의 삶과 풍경은 불행하게도 비를 맞고 더욱 암울해 질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현장 속에서도 교묘하게 미학적 신비감을 창출해내는 재주를 갖고 있다. 이는 색의 교감을 통해 환상적 간결함과 강렬한 우수를 파고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르네상스 이래 오랜 기간 동안 선과 색의 대결이 인상주의를 통해 색의 승리로 정리되어 왔듯이 현대 미술에서 색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것이 없다. 현대의 추상미술이 주제가 없어지면서 평면성을 위주로 화가는 무엇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선, 색, 면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작업이 바로 특징이 되다싶이 하고 있지 않는가  김영남의 콤포지션은 분명 구상화의 범주를 일탈하지 않으면서 현대미술의 특징을 잘 살려 상상의 세계를 마음껏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다섯째 탁월한 감각이랄까 천부적 소질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악의꽃’으로 유명한 「보들레르」가 19세기 인상주의 작가들을 향해 「오늘 날의 화가들 중에서 철학자나 시인 또는 학자를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사리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화가들에게 종교나 시 또 일반적인 학문에 좀더 관심을 가져 달라고 당부하는 것은 부당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말한적이 있다. 나는 이시대 한국작가는 물론 화가 김영남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 싶다. 나는 예술가가 일상속에서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모든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사실 그림은 깊은 추리력의 산물이며 한점의 그림 일지라도 작가의 내밀한 사상을 그 속에 재현하여 화면을 창조주처럼 지배해야 된다고 믿고 있다. 
서양미술사에서 본 수 많은 천재 작가들의 작품은 영감과 성서에서 비롯한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낭만주의 이래 천부적인 작가의 작품들은 시대상을 고통과 정열을 통해 온몸으로 터득하고 있는 작품들이 많다. 동양 예술사에서 전형이 되다 싶이한 당나라 사공도(司空圖,837~908)의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을 통해
「겸재」가 그의 예술혼을 담금질 했듯이 한국예술도 시대정신과 함께 역사 의식속에 녹아 있는 작품들이 반드시 나올 것으로 믿는다. 「장욱진」이나 「이우환」의 창조성이 더욱 빛나는 점도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이 그들의 작품에 녹아 있다는 점일 것이다.
화가 김영남의 작품들은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현대 한국회화의 중심 세계로 향해 밀여 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김영남의 그림을 지켜보면서 그는 타고난 천재성을 가진 작가로는 보지는 않지만 천부적 소질을 지녔다는 점을 감히 말하고 싶다. 천재작가의 필수 조건은 창작이라는 엄청난 작업에 온몸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피카소」는 생애를 통해 1만 3천 5백여점의 그림을 비롯해 3만여점의 창작품을 홍수처럼 쏟아 냈고 「고호」는 신체의 일부를 훼손하지 않았던가 
천부적 소질은 살리는 길은 창작의 늪에 빠지는 일일 것이다. 허기져 허우적 거릴때 빠져나갈 길은 상상력이 키우는 것 밖에 없을 것이다. 김영남의 상상력에 대한 공복감이 철학과 문학과 역사를 통해 채워질 것으로 기대한다.

김영남의 그림은 비가와도 화려하다-이수천
김영남의 그림은 비가와도 화려하다.

이수천 (시인, 전한국장학회 이사장)

그의 소나기 연작 시리즈를 보고 있으면 자연만 표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빌딩과 자동차와 심지어 누워있는 도로까지 표정이 있다. 
표정이 있다는 말은 살아 숨 쉰다는 의미가 된다. 보통 사람들은 소나기가
오면 마치 현실을 도피하듯 눈을 내려 깔고 몸을 피하지만 김영남은 오히려
눈을 치켜뜨고 보물찾기 하듯 대상을 바라보며 빛이 없는 공간에서 빛을
만들어 내고 희망을 이끌어 내어 새로운 그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한다. 
왜 그는 비에 젖은 도시의 풍경에서 번민하는 것일까 
옛부터 동양에서의 비는 만물의 생성을 촉구하는 자비로운 손길로 느껴져 
왔다. 김영남은 사물의 객관적 속성에 비의 생명력을 더하여 재구성해 
냄으로서 우리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미적 재능이 있다. 그의 미학적 
지향점은 생명력이다. 이 생명력은 그의 명료한 색상을 통해 논리적 해석의 
차원을 뛰어 넘는다. 휴머니즘과 철학이 없는 예술은 공허하다. 현대회화는 
색의 재현이 아니라 재료를 통해 사물을 재구성해내는 자아의 실현이 
주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폭력처럼 우리를 포위하고 있는 도시의 
공간에서도 자연과 인공구조물의 차별을 거부하고 생명체로서의 공존을 
부르짖는 소나기는 분명 김영남의 독창적인 미학적 언어다. 
그리고 김영남의 풍경, 인물, 꽃들이 품어내는 색채의 미학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특별한 조짐을 느낄 수 있다. 
그는 현대화가 갖는 정통성의 일탈을 거부하면서도 진부한 타령조의 창작을 
철저히 외면한다. 색채의 조화가 항상 새로운 것처럼 느껴지는 따뜻한 그의 
예술세계는 심상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예술적 재능일까 나는 
단연코 심상과 예술적 재능의 만남이 폭풍처럼 소나기처럼 향후 우리를 
더욱 흠뻑 젖게 만들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 

비오는 날로부터-김성호

비오는 날로부터
 
글 . 평론가  김성호 

 비오는 날은 풍경과 사물들을 달리 보이게 한다. 빗줄기가 관조의 대상들을 적셔 채도와 명도를 가라앉힐 뿐만 아니라 사물과 사물의 또렷한 경계를 흐리게 하거나 뭉개버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빗줄기가 몰고오는 습기가 건조하거나 쾌청했던 일상의 관성적인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탓에 비오는 날은 들더있거나 분주했던 우리들의 심리적인 상태를 차분하게 만들거나 사색의
시간으로 인도 하면서풍경과 사물들을 달리 보이게 한다. 풍경과 사물들이 저마다 보는 이에 따라 각기 다른 감성의 옷들을 입고 감정이입된 상태로 변주되는 까닭이다. 
화가 김영남은 이러한 비오는 날의 풍경과 사물들을 화폭에 담는다. 특히 비오는 날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앞 차창을 통해서 보이는 일상의 풍경들을 그린다. 그런 점에서 사물과 작가의 눈 사이에는 '비'라는 자연적 매개체 외에도 '유리창'이라는 인공적 매개체가 개입하고 있음을 우리는 쉬이 알 수 있다. '비가 내리다'라는 자연현상이 우리에게 일개우는 심리적 전유의 폭을 상상할 때 '비를 통해서 '사물보기'를 시도하는 화가의 시지각 행위는 감정 이입의 심리 범주를 증폭시킬 뿐 아니라 '사물을 달리 보기' 하려는 화가의 적극적인 의지마저 가늠하게 한다. 게다가 이것에 부가되는 '유리창을 통해서 '사물보기'라는 화가의 시지각 행위는 상투적인 재현회화의 관성으로부터 탈주하려는 작가의 창작에 대한 깊은 사유가 도달한 지점에서 자리를 잡은 그만의 사회적 전략이 된다.
  
 차량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투과해서 바라보는 거리의 풍경과 사물들은 그의 그림에서 모두 온전한 형체를 잃고 뭉개져 있다. 사물에 대한 일루전을 창출하는 것이 목적이었던 재현 이미지의 위상을 전복시키는 그의 탈주의 전략이 작가의 진술대로 '대상을 부수기' 함으로써 가능해진 셈이다. 즉, 빗방울과 유리창에 의해서 일그러진 풍경과 사물들이 작가에 의해 다시 부서지면서 실재의 이미지가 해체되고 이 해체된 풍경의 이미지들이 작가의 거듭되는 붓질 속에서 다시 꿈틀거리면서 살아나 회하의 표층 위에 비로소 실재의 의미항을 올려놓게 되는 것이다. 이 처럼, 평소에 이미지 아래 잠자고 있던 사물의 실재적 본성은 화가 김영남에게 있어 '비오는 날로부터 되살아난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다.
  
 비가 없는 비오는 풍경
그런데, 비가 오는 그의 풍경에는 비가 없다. 우리들이 비오는 풍경들에서 흔히 발견하게 되는 빗줄기 혹은 차창에 떨어져 미끄러져 내려가고 있는 빗방울의 흔적들을 그의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하얀 하늘과 흔들리는 사물들이 일렁이는 풍경만이 화면 위에 넘실대고 있을 따름이다. 풍경과 작가의 눈 사이에 개입하고 있는 '비'라는 자연 매개체나 '차창의 유리' 라는 인공의 매개체를 화가 김영남이 시지각의 대상인 풍경과 납작하게 달라붙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 속에는 빗물에는 번질거리는 아스팔트 도로, 비를 맞고 있거나 비를 관통해서 바라보는 가로수나 빌딩과 같은 풍경이 차창 위에 한덩어리로 얼룩져서 부서져 내린다. 그래서 그의 회화는 더러는 깃털의 나부낌 같기도 하고 물속에 빠진 풍경 같기도하고 더러는 초점 안 맞는 안경을 쓰고 바라보는 풍경 같기도 하다.
 우리는 이러한 그의 회화에서 비, 차창이라는 매개체가 풍경과 납작하게 달라붙어 그 상호간 경계를 흩뜨려냄으로써 유발시키는 실재와 이미지간의 첨예한 미학적 관점을 읽어낼 수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미적 대상의 실체적 이미지는 보이지 않음에도 오히려 그 실재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되는 실재와 이미지를 둘러싸고잇는 '존재의 현현(顯現)'  관한 지점이다. 그의 그림에서처럼 '비(雨)의 이미지가 없는 비오는 풍경'이 '비의 이미지가 있는 비오는 풍경' 보다 '비의 실존성'이 더 강력하게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부재가 오히려 그것의 실존성을 강화시켜내는 셈이다. 풀어쓰면 '부재 자체가 그것의 리얼리티를 더 가짐'을 의미하며 일상어법으로  말하면 '없음에도 더 진짜가(혹은 더 진짜처럼) 되는 것'이다.
  
  인공의 풍경에 담아내는 자연
작가 김영남은 주행 중인 차 안에서 도로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들을 스트레이트 포토의 방식으로 포착하고 이것을 다시 그림으로 옮겨낸다. 대상의 일루전을 창출하는데 관심을 두지 않는 까닭에 그의 '사진으로부터 옮겨내는 그림' 이란 재현의 형식만을 빌려 창출한 비(非)일루전의 풍경들이다. 부서지고 헝클어진 채 물결처럼 혹은 바람처럼 일렁이는 풍경들은 작가의 감성 표출의 의지를 건네게 해주는 '통로'로 기능한다. 비오는 날 도로를 둘러싼 일상의 도큐멘터리 사진 이미지가 작가에 의해 다시 회화적 언어로 번안되면서 풍경의 객관적 리얼리티는 탈각되고 풍경에 내재되어 있던 사물의 본성이 되살아나면서 감성적 표현의 회화로 변모하게 된 것이다.
 그것들은 때로는 도시,때로는 시골로 각기 상이하지만 언제나 인공의 풍경들이다. 생각해보자. 경계의 지점을 형성키니는 '길(路)이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고 다듬어진' 인공의 풍경이다. 그 길을 화면의 중심에 둔 채 작가 김영남이 담아내는 비오는 풍경은 아스팔트 도로와 주행하는 자동차, 흔들리는 신호등 불빛, 주변의 희뿌연 건물들과 빗물이 뒤엉켜 만들어내는 문명의 인공 이미지들이다.
 그런데 작가의 화폭에서 이런 인공 이미지들은 마치 자연의 풍경처럼 전치된다. 앞차가 벌겋게 밝혀내는 후미등은 바람에 흔들리는 붉은 꽃송이들처럼 보이고, 번질거리는 아스팔트길에 비추는 불빛들은 흔들리는 분방한 작가의 붓질에 의해서 부서져 내리는 것 같은 거리의 빌딩들은 더러 원경에 드러나 있는 산의 형세를 드러내기도 하고,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 도로는 수심이 깊은 강물의 한쪽 언저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로는 배경과 사물들이 섞여 들고 때로는 인공과 자연의 풍경들이 한 덩어리처럼 뭉쳐지다 이내 부서져 내리며 상호간의 경계를 해체시키고 마는 그의 회화는 인공의 풍경에 담아내는 자연의 정수에 다름아니다. 특히 소나기를 sonagi로 영문 표기하는 식으로 화면 곳곳에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그의 번뜩이는 재치와 분방한 자유로움은 실제로 회화적 언어에서도 나타나 딱딱한 인공 풍경들의 경꼐를 해체시키면서 인공의 것을 자연의 유기적인 풍경들로 치환시켜낸다.
  
 비정형성의 '또 다른 재현'
 정형성을 부수고 비정형성의 본질을 일깨워내려고 부단히 앴느느 김영남의 회화에는 풍경과 사물의 본성이 부서져 내리는 회화의 지층 위에서 사뿐히 되살아난다.
형식은 재현이지만 내용은 비재현이며, 형식은 외피를 담아내는 구상이지만 내용은 정신을 담아내는 추상처럼 말이다. 비정형성은 기실 풍경과 사물의 본성으로 유기적인 자연의 속성과 교차하면서 성장의 단계를 예단할 수 없는 변성(變性)의 생명력을 드러낸다. 그것에는 꿈틀거리는 생명의 근원처럼 넘실대는 생동의 기(氣)로 가득하다.
  그런 면에서 김영남의 정형적 틀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정형적 풍경들이 생동의 기로 가득한 비정형 풍경으로 변주되는 까닭은 인공풍경에 감성을 실어내는 작가의 분출되는 표현의지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업은 비정형성의 또다른 재현이라 할 만하다. 이제 그에게 관건은 다른 재현을 위한 의미 있는 구성의 체계, 예를 들면 또 다른 프레임의 구성과 같은 변주의 증폭에 대한 요청과 같은 것이다.
 
가장 안온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때가..-안영주

 안영주 (방송인)

 

 가장 안온한 기분을 느낄 수 있을 때가 비 오는 날  차안에서라는 말을 어떤 선배가 하였다. 그래서 비가 오는 날 퇴근길은 늘 가던 길이 아니고 좀은 한적한 길을 돌아 돌아서 집으로 간다고 했다. 

그렇게 돌아 돌아서 비오는 거리를 가다보면 그 거리가  예전과 달라 보이기도하고 빗방울에 적셔진 거리가 풍경처럼 다가온다고 했다.

여름날 메마른 도시를 촉촉이 적시는 비는 도시의 풍경을 한 순간 아련하게 잠기게 하는 묘한 힘을 지녔다. 

   

차창으로 흐르는 빗줄기와  빗줄기에 흔들리며 지나가는 아파트와 가로수들....... 

이렇게 도시의 비오는 풍경을  화가 김 영남은 작년부터 그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차를 타고 비오는 거리를 지나다  문득 비 내리는 도시가 그에게도 풍경처럼 다가왔으리라 싶다. 

어떤 그림은 거센 비가 내리는 듯  어둡고  어지럽기도 하고 또 어떤  그림은 초여름의  단비였는지 거리가 말갛게 다가오기도하며 비오는 날 누군가와 함께했던 그 다정했던 시간 속으로 가듯  추억에  잠기게도 한다. 

 

화가 김영남의 비오는 날 연작들은  차안에서 바라 본 거리의 풍경이라 어딘가로 가고 있는  차들이 등장 한다. 

그림을 보던 사람 중엔 짖궂게  어? 내 차가 저기 있네?  저 차는 차종이 뭐다 라며 즐거워 하기도 하는데 이것 또한 그림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장치 같아서  살짝 미소 짓게 한다. 

         

비가 내리는 도시에서  어디론가 가는  차들과  스쳐지나가는 거리도 내가 비를 맞지 않고 나 역시 어디론가 가고 있기 때문에 비 내리는 날 차안은 안온하게 느껴지고  도시의 거리역시 풍경처럼 다가올 수 있지 않을까..... 

그림속의 차들을 보며 생각한다. 

갈 곳이 있어서 그곳을 향해 가고 있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것도 비 내리는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