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숨-두번째 이야기>, 증발하는 시뮬라크르 풍경-주성열
<숨-두번째 이야기>, 증발하는 시뮬라크르 풍경
- 이운갑 개인전에 부쳐 II



주성열(예술철학/미술비평, 세종대 겸임교수)


들숨 - 가라앉는 이미지

세상의 끝을 가정하는 사람이 매 순간을 경건하게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그 과정에서 어떤 곤궁한 생활도 그 끝은 순결하고 숭고한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세상에 대한 적막한 심정이 그림을 그리게 만들었기에 그러므로 남아있는 삶에 의지하여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세상을 포용하면서 동시에 순수하게 남으려는 의지를 표현해 낼 것이라 믿어진다.  
<이운갑 개인전에 부쳐-숨 I> 평문 발췌.

‘숨’이라 명명하게 된 이운갑의 작업이 또 다른 ‘호흡’을 준비하고 있다. 첫 번째 ‘숨’ 전시에서의 바닷가재나 땅강아지의 은유적 변신이 작가 내면의 정체성이자 생명이 지닌 숭고함에 대한 고찰이었다면, 두 번째 숨고르기인 이번 전시는 현재의 삶을 반영함과 동시에 자연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를 목적으로 구성된다. 전자에서 일탈을 성취한 인물들의 이면에 존재하는 처절한 고독과 상처를 이해하고자 했다면, 이번에는 그간 아픔을 밀어내는 심정으로 멀리하던 풍경을 명상적으로 보여주면서 삶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바닷가재의 욕망에 자신의 내면을 투영했던 이운갑은 이제 특별한 감성을 통해 의식과 대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하려는 시도에서 새롭게 출발한다. 

최근의 작품들은 주체와 대상이 불명확하므로 지시와 환원이 어려운 환상성을 확보한다. 다소 심심해 보이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거나 너무 익숙해서 상념의 범주에 넣지 않고 있는 것들을 다루기 때문일 테지만 낯선 조합에서 오는 생경함마저 평이한 느낌으로 편입해버려 의도가 불분명해질 우려가 없지 않다. 사실 세상을 이끄는 진리나 지혜로움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거나 매우 익숙한 것에서 출발하지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이 당연한 말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곤혹이 따르는 것처럼 일련의 인식 과정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처럼 이운갑의 작업은 너무 평범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풍경을 주시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가까운 곳에서 우연히 발견한 풍경을 맨 먼저 탐구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가 선택한 사소한 소재들은 선입견적 판단으로는 평범해 보이다가 불편하고 당혹스러운 느낌으로 확대되면서, 그것이 곧 유토피아를 그리워하는 작가의 태도임을 이해시키려고 감상자 앞으로 성큼 다가선다. ‘예술은 있었던 경험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경험을 창조하는 것’이라는 들뢰즈의 말처럼.

리듬감 있는 깊은 호흡은 우리의 정신 상태를 어김없이 반영한다. 이운갑은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기 위해 호흡을 달리하는 방식으로 감성을 재분배하고 이중으로 분할하여 한 화면에 동시에 나타낸다. 이중의 풍경을 통해 자아 위에 또 다른 자아를 반영하는 이것은 진실을 말하기 위한 가장 소극적인 방법일 것이지만, 그림으로 깊은 속내를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그의 여정은 이어질 것이므로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 정화된 풍경은 실재의 삶과 마음속의 삶이 하나의 이미지로 통합된 풍경이므로 상하의 구분이 중요하지 않다. 생명을 유지하는 리듬 그 자체인 ‘숨’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매 순간 인식하고 있지는 않은 것처럼 이운갑의 풍경 또한 바라보고 있다는 의식의 끈을 발견하기 어려울 수 있다. 감각적인 대상과 관념적인 대상과의 연결에서 오는 낯선 풍경인 탈(脫)이미지, 초(超)이미지가 데페이즈망의 어긋난 형식과 닮아 있는 그의 그림의 속성 때문일 것이다.  


날숨과 들숨 - 몽상적인 시뮬라크르 이미지

붓끝에서 태어난 풍경이 자신이 헤치고 나온 가시밭길처럼 슬픔과 위로가 깃든 경건한 분위기이기를 바라고 있다. 적막함은 모든 인간이 광활한 자연 앞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초라함일 테지만, 자연의 황폐함을 바라보는 일은 인간의 어두운 과거와 하얀 미래가 함께 내장 된 곳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분노를 포함하고 있음이다.
<이운갑 개인전에 부쳐-숨 I> 평문 발췌.

화면은 한순간도 멈출 수 없는 규칙적이고도 촘촘한 들숨과 날숨으로 직조되어 있다. 들숨의 현실적인 재현과 날숨의 내재적인 풍경은 호흡을 통해 현재의 순간을 몽상적인 풍경으로 만드는 근원이다. 그에게 풍경은 이처럼 과거도 미래도 아닌  환영적 호흡을 통해 현실과 교감하면서 시작되는데, 세포 내에서도 호흡이 이뤄지는 것처럼 사물을 대하는 방식은 감각을 통한 간접적 인식이자 영적인 리듬과 울림의 반영이다. 발음은 구강에서 만드는 외재적인 표현수단이고, 소리는 단전을 돌아 나오는 내재적인 것이다. ‘마음의 자리, 견성의 자리는 단전에 있다’는 달마대사의 말처럼 소리는 호흡을 따라 깊은 곳에 도달하여 나오는 것이다. 갓 태어나는 아기가 배로 호흡하는 것과 같은 이치인데, 호흡을 통해 몸이 열려 악기가 되고 그 열린 공간에 울림이 만들어지는 이치이다. 이운갑의 그림은 이러한 호흡의 원리와 유사성을 지닌다. 때문에 외적 호흡이 반영된 그림은 새롭고 깊은 들숨으로 인해 몽롱해질 운명에 처하기도 한다.  
  
작가는 습성적으로 황량하고 허망해 보이는 풍경에 시선을 둔다. 반영된 이미지는 바로 서기도 거꾸로 서기도 하는 위반으로 의도적인 불편함을 만들고, 그리고는 서서히 증발한다.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희미한 효과와 상호충돌로 빚어지는 ‘낯설게 하기’는 비밀을 반 정도만 드러내는 다중성을 추구한다. 메마른 풍경이 서로 충돌하는 부분은 미지의 시공간과 연결되어 있다는 특별한 느낌으로 읽혀지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냉동고에서 말라가는 것처럼 차갑게 와 닿는 것은 자연을 현실감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처럼 눈을 감고 만나게 되는 자아의 일부는 타자화를 거부한다. 탈색으로 실재가 결여되고, 메아리에 묻어 되돌아오는 그리움처럼 안타까움과 서러움이 보편적 고뇌로 다가온다. 경험의 재구성이자 기호로서의 풍경은 이처럼 실재와는 유사성이 없는 시뮬라르크로서 성장과 쇠락의 교체가 연이어 이뤄진다. 

반영이 적용된 공간은 신비로운 주술과 생명의 희망을 담은 가상의 환영적 공간으로 전환되어 은밀히 부활을 꿈꾸거나 희망의 서정을 드러내고 시적 상태의 재현을 도모하게 한다. 신경정신의학에서는 의식적으로 트랜스(환각) 상태에 들어가면 엔터옵티크(enteroptic)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고 한다. 작가 또한 특별한 경우를 통해 이러한 시각적 환각을 체험했을 수도 있다. 우연한 만남에서 자신의 정서와 결합하는 요소를 인지하고 대상과의 결합이 지각의 복합체가 되어 물적 이미지 생산을 도왔을 것이다. 관찰자로서 그리고 조작하는 사람으로서의 이중적 의미는 예술가 본연의 자세이다.  

이운갑 풍경에서의 전체적인 느낌은 중얼거림이다. 주체와 대상이 숨겨져 있거나 사라지고 없는 화면에서는 들뢰즈의 ‘익명적 중얼거림’처럼 사소한 중얼거림이 두런두런 들려온다. 나를 이송하던 나룻배도 자동차도 멈춰있는 풍경에는 비밀스러운 상처를 간직한 듯 ‘있었던 세계’와 ‘있는 세계’가 함께 소통한다. 미켈란젤로는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같은 시간이라도 어떤 때는 기꺼이 환각에 눈이 멀 수 있고, 보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을 관조하게 될 수도 있다’고 증언한다. 이운갑 또한 객관적이고 주관적인 요인들에 의해 수시로 달라지는 가변적 지각이미지를 자신의 조형언어로 활용한다. 배경은 혼미하기는 하지만 허약하다기보다는, 말할 수 없음에 침묵하면서 아직 발을 사다리에서 떼지 못한 채 망설이는 주체를 뒷받침하는 역할에 충실해 보인다. 배를 타거나 사다리를 오른다고 해서 끝이 나는 건 아니다. 배에서 내려 발이 땅에 닿는 순간 이곳에서 저곳으로의 이동이 완성된다. 




날숨 - 증발하는 이미지

이운갑의 풍경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져버린 신비함이 있다. 두 세상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 하지만 죽음을 통해 삶을 풍요하게 만들고 삶을 통해 죽음을 긍정하게 만드는 모순 또한 존재한다. 죽음은 삶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있다는 점에서 죽음을 포용한 삶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어 오히려 삶에 대한 이해와 사랑의 폭을 넓히는 계기로 작용한다. 
<이운갑 개인전에 부쳐-숨 I> 평문 발췌.
 
어떤 상황을 관찰한다는 것에는 그 일을 통한 변화의 조짐이 포함되어 있다. 그림의 객관성 또한 어떤 상황의 관찰에 의한 결과인데 자신의 고통을, 자신의 관계를 고백하는 것처럼 감추면서 드러내는 방식에는 여전히 어떤 상황으로부터 놓여나지 못한 심려가 느껴진다. 녹슨 펌프는 폐기될 수밖에 없음에도 잃어버린 현실의 부재에 끊임없이 반응하는 태도는 앞의 일이 뒤의 일보다 덜 아프다는 전제와 연관이 있다. 묘사에 치중하는 것과 사실을 묘사하는 것은 다르다. 그래서 작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겪는 작가의 체험이 진정임을 알고도 감상자는 작가 자신처럼 불안하다. 

친화력을 가지고 엄숙한 성찰을 기본으로 하는 삶의 태도는 자신보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을 더 견디지 못하는 성격에서 잘 드러난다. 작가의 섬세함은 갇혀 있는 기적을 사물 속에서 열어내는 무기이다.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삶의 쓰라린 정경 앞에서 좌절을 겪을 때마다 예술에 대한 생생한 그리움이 그를 엄습했다는 것이다. 아폴리네르는 ‘정신이 메마를 때는 아무 말이나 써놓고 곧장 앞으로 나가라!’고 독려한다. 이제야 비로소 슬픔의 시간이 사라지고 멈추지 않은 열정과 깨어있는 정신으로 진정한 자신의 힘이 내장된 곳을 향하는 그에게 비현실적 이미지는 의미이며, 형식이 곧 내용이 된다. 

미세한 조짐을 반복해서 바라보다 보면 의도하지 않더라도 예전보다는 좀 더 현실 가까이에서 삶에 대한 구체성을 검토 중인 그를 파악할 수 있다. 모파상(G. de Maupassant)은 “표현하고 싶은 것이면 어느 것이건 충분히 오랫동안 주의를 기울여 살핌으로써 이제까지 아무도 본 적도 말한 적도 없는 어떤 모습을 거기서 발견해 내는 것이다”라는 말로 누적된 인식의 진전을 확신하고 있다. 다만 풍선을 가득 채운 것이 바람이 아닐까 하는 우려는 형식화되지 않는 것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무의식적 표현에 대한 불안정 때문이다. 의식을 뒤로 두고 상투적인 풍경을 앞세우는데, 언급했던 대로 이러한 형식은 지향했던 바를 이루거나 관객을 그림 앞으로 이끌기에는 다소 힘이 부족해 보인다. 이들을 특별한 회화적 이미지로 환원하기 위해서는 작가 특유의 깊고 긴 호흡을 한 단계 더 거쳐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미세한 감성의 자아가 빠져나간 풍경은 서정적이지만 상투적이며, 자유롭지만 모호한 투명인간이 되어버린 작가의 모습은 사라진 곳 멀리에서 간혹 비춰진다. 당도 높은 과일이 벌레에 갉아 먹혀 상처가 나고 썩게 되는 법이다. 삶은 안에서 들여다보고 외부세계로 적극 표출되어야 하며, 품고 있으면 안 되는 달콤해진 독들은 토해내야 한다. 일전에 예술 작품의 이미지가 허구의 세계이지 세상을 바꾸는 실천적인 힘이 아니라는 입장을 피력한 바 있는데 그렇다고 세상을 반영하지도 제시할 수도 없는 무기력의 세계라는 말은 아니다. 감각의 상실은 의식이 낮잠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쇠락을 의미한다. ■

물구나무로 서서 죽음을 응시하는 심안(心眼)-주성열
이운갑 개인전에 부쳐
- 물구나무로 서서 죽음을 응시하는 심안(心眼)  -

모래에서 끝나는 육체, 모래에서 다시 시작하지 못하고 모래로 흘러 다니는 육체, 더 쪼갤 수 없이 잘게 쪼개져서 사막을 흘러 다니고 바람에 불려 다니는, 더 이상 육체라고 부를 수 없는 육체, 방황하는 모래들, 표류하는 모래들, 폭풍에 들려 빈 하늘에서 빈 하늘로 떼 지어 날아가는 모래들, 누구의 것도 아닌, 그 누구의 뼈도, 그 누구의 살도 아닌.....최승호 <모래인간> 부분 


들어서며

그의 오랜 머뭇거림은 대상의 존재에 대한 자각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살았던 증거일 것이다. 체험에서 인식으로 옮아가는 작품의 형식은 오랜 기다림의 결론이며, 변화는 그리움과 아쉬움의 반영이다.  2003년 개인전 이후로 작가는 슬프고 기막힌 일들을 만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고 짧지 않은 시간을 생을 환멸하며 보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얻은 심안(心眼)으로 자연현상 배후에 있는 초월적 세계를 파악하고 조형화하려는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특정한 자극에 과민해진 상태에서 공평하지 못한 상황에 반응하는 신체를 근거로 한 작품들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연결되었다. 말하자면 사랑의 가능성을 일깨우는 힘겨운 조건을 형상화하여 잃어버린 순간들을 재조합해서 보여주는데, 이러한 고뇌의 결과는 어떤 경우든 부재에 대한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단단해졌으리라 자부했으나 초월적 이미지를 일상의 체험 속에 고정시키려는 노력은 부족한 탄력으로 버석거린다. 슬픈 몽상은 이성을  견지하며, 삶의 경계에서 체험한 죽음은 그 자체로 삶의 한 형식이 되고 만다. 그러나 세상의 끝을 가정하는 사람이 매 순간을 경건하게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그 과정에서 어떤 곤궁한 생활도 그 끝은 순결하고 숭고한 가치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인생에서 이치의 깨달음이란 아마도 포기의 다른 이름이다. 결국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사람에게서, 자연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자연으로부터 위로를 받아야 한다.

구상화가로서 작가는 주로 자연의 서정적 풍경을 소재로 삼아왔다. 이제 가던 길을 멈추고 새로운 길에 오르는 것은 익숙해진 길 앞에서는 열정이 줄기차지 않았음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것이 세상일에는 미숙할 수 있다는 의미임을,  그림 그리는 일이 오히려 그림에 상처를 주고 있다는 근심은 간직하고픈 열망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사물화 되고 마멸되는 삶의 과정에서 고뇌하는 자의식과 예지력이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고 인습화된 조형언어에 대한 강박증을 걷어내려는 중일 것이라 진단한다.  

기억한다는 것은 최초의 순결한 정열 속에 오래도록 머무는 것을 의미하지만, 주변을 마모시키는 모든 것을 깊이 인식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 모든 현실의 두터움이 그림의 깊이가 되고, 세월과 함께 확장된 삶의 순결함에 유약한 마음이 가시화될 것이라 믿는다. 세상에 대한 적막한 심정이 그림을 그리게 만들었기에 그러므로 남아있는 삶에 의지하여 힘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세상을 포용하면서 동시에 순수하게 남으려는 의지를 표현해 낼 것이라 믿어진다. 

다가서기

작품 대부분은 견고한 껍질을 지닌 바닷가재나 땅강아지의 그로테스크(grotesque)한 이미지가 숭고한 방식으로 허공에 놓여 있는 방식이며, 다르게는 현기증을 일으키는 반영의 허상 속에 몽환적 이미지가 당당하게 위치한다. 작가에게 바닷가재와 같은 갑각류는 마음의 창을 대변하는, 생명이 죽음과 같은 상태에 이른다는 깨달음의 독백이다. 이는 어떤 삶도 감히 넘나들 수 없는 혹은 침투 불가능한 방식으로 어느 날 그에게 열렸다. 견고하게 부풀어 방부처리 된 가재껍질에 응축된 에너지는 불가능해진 삶을 간직한 채 자신을 제거해감으로써 삶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한다고 작가는 유추한다. 현실의 두터움과 단단함은 외적인 존재를 지우다보면 더 이상 부재로 바꿀 수 없는 존재의 핵심에 도달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명상으로 떠올린 생명체를 형상화한 이미지는 사막 위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구도자 혹은 선지자의 모습처럼 숭고하다. 때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렸던 성자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가능성의 대상으로서 작업의 중심 역할을 하는 강렬한 생명체들은 인간으로부터 죽음을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보편적 맥락까지 이끌어 죽음과 소멸에 대한 내적충동을 강렬하게 시사한다. 이는 소멸되어가는 자연을 풍경 앞에 내세워 산업 폐해의 위험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려는 의도이며, 존재의 쇠락을 통해 끊임없이 창조와 변화와 생성이 지속됨을 인식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삼라만상이 문드러지는 세계 안에도 존재의 핵 같은 것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죽음은 자주 그에 대한 일종의 방패 막 구실을 한다. 초토화된 폐허의 땅에서 풀들이 일어서는 것처럼. 

이러한 일련의 연작들은 지극한 은유를 포함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시각적 정보 그 이상의 논리가 있어야 이해가 가능하다. 이를테면 적절한 방식으로 연출된 공간에서 형태가 해체된 모래와 같은 존재, 육체가 증발하고 소멸한 개체의 형태 등으로 자연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상실해 가는 주변 존재의 비극을 인지하는 방법을 말한다. 자아의 통일성을 잃고 분열된 개체의 모습으로 쇠락해가는 존재를 파악하려면 그것에 내재된 비극성과 통찰의 배경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존재 저마다의 특수성을 보편성으로 이끌어 가려는 작가의 의도를 엿보는 것은 그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전제 하에 그 다음 단계에서 가능하다. 

변덕스러우면서도 예리한 상상력은 주위를 빛나는 카오스로 구성하고 현기증과 혼란의 감각에서 즐거움과 쾌감을 느끼는 유희적인 놀이와 유사하다. 그 반짝거림에도 불구하고 유기적인 연속성을 깨뜨리는 불안정한 차원의 이미지, 형태를 명확히 가늠하기 어려운 이미지들, 불행한 기억과 상처를 가진 사람의 그렁거리는 눈망울에 맺힌 이미지의 왜상(anamorphosis)처럼 작가는 세상을 그렇게 아프게 바라보고 있다. 

배경은 황사로 혼탁해진 대기와 환경오염의 상황을 은유적으로 묘사하는데 시인 최승호가 ‘모래인간’에서 표현한 ‘더 쪼갤 수 없이 잘게 쪼개져서 사막을 흘러 다니고 바람에 불려 다니는, 더 이상 육체라고 부를 수 없는 육체’처럼 인간이 덧없이 표류하고 해체되는 상황을 진단하고 있다. 원래의 빛인 생동하는 푸른빛을 잃은 채 황사로 뒤덮혀 버린 하늘은 먼지를 털어내려 애쓰지만, 그 먼지는 이미 몸 전체를 이루고 있다. 단단한 각오들이 삶 속에서 모래처럼 해체되고, 아름다운 것들과 사악한 모든 것이 현실에서 균질화 되었음을 에둘러 말하고 있는 부분이다. 때로는 배경이 그림 전체의 메시지가 되기도 한다.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의 구분이 무너진 도시, 물신화된 도시에서 외경심을 찾을 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진정한 소통 또한 소멸되어 있다. 값진 희생이 줄을 잇고 있지만 그 어떤 것도 주의를 끌지 못한다. 이미 서로서로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림은 또한 이중인화(dissolving view) 형식을 취한다. 왜곡(anamorphosis)된 상으로 미끄러지는 도시 풍경은 자기 반영 이미지와 맞닥뜨리는 것을 두려워한다. 보이는 순간에 보이는 모든 것은 즉각성의 기만일 뿐이고, 안개처럼 산란하거나 황폐해진 현실은 현실이면서 낯선 현실로 비켜 서 있다. 살아온 날들에서 남은 기억의 응어리와 현기증이 차디찬 바닥으로 내려가 깔린다. 바닥의 본질은 내려앉는 무게를 감당하고 품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화면의 바닥은 마치 품에 안겨오는 존재를 밀어내듯 차갑게 반영한다. 

이러한 불침투성의 세계에 작가는 상처받기 쉬운 삶의 여린 부분을 덧입혀 표현하고 있다. 사물의 물질성이 비물질화로,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해체되고 재구성되는 초현실적 풍경으로 현실의 논리는 거듭 부정된다. 삶의 화사한 외양은 거침없이 찢겨나가며, 사회적 규범과 질서는 무시되거나 전복된다. 공중에 머물러 있는 생명체는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고 시간의 흐름을 거역하는 긴장감을 보여준다. 죽음을 향해 소멸해 가는 것이 생명체의 당연한 질서임에도 불구하고 해체된 존재들은 새로운 삶을 꿈꾸고 지향하는 모습으로 거듭난다. 그러한 과정을 모두 거친 후에야 시공간을 벗어난 황홀한 느낌과 함께 비로소 죽음의 종말을 생각할 것인가. 

무기력한 땅강아지와 속이 텅 빈 바닷가재로 형상화된 그로테스크한 이미지들은 파괴된 인간성의 참담함을 나타내고 있다. 장수를 누려야 하는 생명체들은 견고한 껍질을 지니고 있지만 무기력하고 순응적인 모습이다. 교환가치로 전락한 시대에 사물의 고유성과 인간의 고유성은 허위의식에 사로잡혀 있고, 바닷가재 혹은 땅강아지는 희생자로서 사회적 표현에 성공하지 못하는 재능은 결국 성장이 아니라 자기 파괴에 이르고 만다는 단단한 경구가 된다.

작가는 불순하고 추악한 현실에서 생명이 거기 있다는 것으로의 긍정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부정으로 대응한다. 작가의 나레이션(narration)은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진중한 자세로 마지막 남은 생명을 추스르고, 소멸을 선택한 생명체들의 슬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거기에 ‘하나의 풍경으로 도시화 되어버린 지구촌 물질문명에 대한 고발’이라는 식상한 프래카드(placard)를 내걸기에는 관념의 무게가 상당하지만, 인식의 거대한 동굴을 지난 개인의 성찰이 터득한 의미라는 측면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식상함이 곧 보편성이기 때문이다.   

나가며

이운갑의 풍경에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사라져버린 신비함이 있다. 두 세상 사이에서 오도가도 못 하지만 죽음을 통해 삶을 풍요하게 만들고 삶을 통해 죽음을 긍정하게 만드는 모순 또한 존재한다. 죽음은 삶과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있다는 점에서 죽음을 포용한 삶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어 오히려 삶에 대한 이해와 사랑의 폭을 넓히는 계기로 작용한다. 
그러므로 실질적인 작업 또한 눈앞의 자연을 조합하고 재현하기에 앞서 정신적인 가치를 구현하고 인식의 범위를 확장시킴으로써 현시적 상징(presentational symbol)으로 자연 밖에 존재하는 관찰자로서가 아니라 자연 안에 존재하는 조화로운 세계에 순응하는 자연중심의 태도로 자연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를 목적으로 한다. 이제 자연으로 들어 설 때 작가는 자신이 세상만큼 넓어졌음을 인식한다. 자연을 형식적으로 표현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연에 동의를 구하는 태도는 표현하는 바가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기능이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 간절함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정직한 풍경화에 대한 그리움이 없지 않지만 시대적인 상황과 관계에 대한 고독의 결실을 선택해 특별한 주기를 가지려는 의도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모진 사막을 건너온 사람처럼 고독한 길을 선택하여 고독의 질을 바꾼 결과물이며, 새로이 사는 인생의 분신들이다. 삶은 그것이 아무리 초라하고 지리멸렬할지라도 부스러진 온갖 파편을 긁어모아 우주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회복하고 나면 두 세계 간의 통로가 뚫리게 마련이다. 
이제 작가는 삶에 대한 시선을 내면으로 옮긴다. 삶을 안에서 바라보지 못하는 눈은 결국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새벽을 비추는 여명은 어둠을 뚫고 불길한 모든 것을 밟고 일어나며, 상승의 끝에도 하강의 끝에도 초월은 있을 것이다. 그림은 죽음 너머 세계의 통로를 열고 그 죽음을 연습한다. 거꾸로 선 꿈을 위해 오래 간직해온 정열이 스스로 일어나 펄럭인다. 

그는 그림의 당위성을 위해 암담한 조건들을 철저하게 파악하고 가능한 실천 강령에 따른다. 그래서 붓끝에서 태어난 풍경이 자신이 헤치고 나온 가시밭길처럼 슬픔과 위로가 깃든 경건한 분위기이기를 바라고 있다. 적막함은 모든 인간이 광활한 자연 앞에서 느낄 수밖에 없는 초라함일 테지만, 자연의 황폐함을 바라보는 일은 인간의 어두운 과거와 하얀 미래가 함께 내장 된 곳이기에 포기할 수 없는 분노를 포함하고 있음이다. 
또한 작가는 본질을 찾아 항해하는 각성한 자아로서 에코토피아의 풍경화를 기대한다. 조형성이 부족할 때는 의미에 기대게 되지만, 소재와 방법을 결정하고 확신이 들면 직관적인 형태로 인간의 내면적 감정세계를 표현하려 하게 된다. 그러나 예술 작품은 감정적 이미지의 단순한 논리적 허구이며, 대중의 가치행동을 유발하려는 실천적인 힘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림에서 느껴지는 피로감이 그러한 후유증이 아니기를 바란다. 작가가 스스로의 성에 갇혀있는 동안에도 대중의 미의식은 빠르게 심층적으로 변해갈 것이므로. ■
주성열(예술철학, 세종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