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민경숙의 회화, 정물화를 재고하다_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가)
민경숙의 회화 
정물화를 재고하다 

-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장르로 치자면 민경숙의 회화는 정물화에 속한다. 영어로는 still life다. 이 말 속엔 흥미로운 사실이 숨겨져 있다. 말 그대로 옮기자면 정적인 생명, 움직임이 없는 생명, 정지된 생명이라는 의미이다. 정지된 생명? 죽음이다. 우리 말로 정물화에 해당하는 영어 still life는 이처럼 그 말 속에 죽음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우연의 일치일까. 서양미술사에서 정물화가 하나의 독립된 장르로서 처음 등장한 것이 바로크 미술에서였다. 바니타스 정물화가 그렇다. 바니타스 그러므로 인생무상이라는 전언을, 메멘토모리 그러므로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고를 정물화에 담아 표현한 것이다. 정물화에 등장하는 생명, 주로 자연은 비록 아름답지만, 모든 생명, 그러므로 자연, 그리고 어쩌면 아름다움마저도 운명적으로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주목한 것이다. 
이처럼 정물화가 상기시키는 죽음의 그림자에 주목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정물화 자체, 그러므로 생명 자체, 자연 자체, 아름다움 자체에 끌린 사람들도 있었다. 자연을 곁에 두고, 보고 즐기고 향유 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에 부응하는 장르 페인팅이 그렇다. 이젤 페인팅과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으로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시장이 형성된 것과 그 시기며 맥을 같이 한다. 그 자체 정물화의 또 다른 쓰임새로 볼 수 있겠다. 이로써 정물화의 감각적 표면을 보는 사람과, 정물화가 상기시키는 이면의 의미를 읽는 부류로 구별해 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여기에 정물화의 또 다른 쓰임새가 있다. 정물화는 그 말 속에 정적인, 움직임이 없는, 정지된, 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바로 정물을 앞에서 보고, 뒤에서 보고, 밑에서 보고, 뒤집어서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움직임이 없으므로 사물 대상의 됨됨이를 파고들기에 그만이라는 말이다. 표면의 감각적 변화를 좇아 자연으로 나간 인상파 화가들에 반대해, 사물의 본질을 추구한 세잔이 그리고 남긴 일련의 정물화가 그렇다. 심지어 풍경을 그릴 때조차, 나아가 사람마저도 세잔의 그림에서는 정물(화)처럼 보인다. 그렇게 세잔이 보기에 정물화는 형식실험을 위한 연구대상이었다. 
이처럼 정물화는 그 이면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감각적 표면이 미적 쾌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사물 대상, 그러므로 어쩌면 세계의 됨됨이를 파고들게 만든다. 서로 구별되면서도 겹치는 정물화의 세 층위로 봐도 되겠다.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는 있겠지만, 민경숙이 그린 일련의 정물화 역시 이 세 층위가 중첩돼 있다. 때로 그의 정물화는 죽음을 상기시키고(역설적이지만, 플라스틱 조화만큼이나 생생한 생화가 그렇다), 더러 감각적 쾌감을 자아낸다(사과나 버찌가 먹고 싶고, 곁에 두고 보고 싶다). 그리고 사물 대상의, 그러므로 어쩌면 세계의 감각적 현상에 대한 형식실험을 엿보게 한다. 주로 사물 대상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일에 빠져들게 만든다. 

그림에서도 확인되는 것이지만, 작가는 사과와 포도, 체리와 딸기 같은 과일을 그린다. 장미와 국화 그리고 서양란 같은 알만한 꽃을 그린다. 전작에서 보면 유리병과 인형, 장난감과 책, 그리고 색색의 잉크가 들어있는 잉크병과 같은 각종 생활 오브제도 그렸다. 하나같이 소재의 실체가 손에 잡힐 듯 오롯한 것이 소재주의로 볼 만한 회화적 경향성이 엿보인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특정 소재를 잘 그린 그림, 특정 소재에 방점이 찍힌 그림, 특정 소재에 관한 한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그림, 특정 소재를 브랜드화한 그림, 그러므로 소재주의 그림인가. 그게 단가. 그렇지는 않다. 소재주의는 분명 작가의 그림의 한 부분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건 다만 부분일 뿐, 구실일 뿐, 어쩌면 작가의 그림에 주목하도록 유도(유혹?)하는 입문 과정일 뿐, 다른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알다시피 그 다른 무언가가 그림에서 결정적이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에서 그 다른 무언가가 뭔지를 밝히는 것이 관건일 것이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 소재는 외관상 소재주의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특정 소재에 구애받지 않아도 될 만큼, 사실상 어떤 소재여도 무방할 만큼 어느 정도 혹은 상당할 정도로 임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적어도 소재에 관한 한, 혹은 소재를 재현하는 능력에 관한 한 작가에게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인다. 모르긴 해도 차후에 작가는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볼 요량으로 이 소재에서 저 소재로 옮겨갈 것이고, 그렇게 자기표현 영역을 확장하거나 심화할 것이다. 그리고 그 확장과 심화는 단순히 소재를 재현하는 능력을 넘어선 것이 될 것이다. 넘어선? 그건 아무래도 의미가 될 것이다. 어떻게 보다는 왜, 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특이한 것은 하나같이 이 자연물과 오브제들을 그 속이 훤히 비쳐 보이는 투명한 비닐 소재에 담아낸 것이다. 작가는 제목을 하나같이 주머니라고 부르는데, 아마도 그림에서 보이는 정황 그대로일 것이다. 그리고 때로 사물 대상을 싼 비닐 소재, 작가의 말대로라면 주머니를 노끈이나 매듭으로 묶는다. 그래서일까. 혹자는 작가의 그림을 선물이라고 명명하는데, 실제로도 그렇게 보인다. 꽃집에서 내주는 꽃다발이나, 선물 가게에서 볼 법한 포장된 선물 그대로다. 실제로도 작가의 작업에서 선물이 갖는 의미는 남다른 부분이 있을 것이다. 정물화의 세 층위 중, 자연을 곁에 두고 보고 즐기고 싶은 욕망과도, 그렇게 감각적 쾌감을 즐기고 향유하는 경우에도 부합할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작가는 자연을 소재로 한 자신의 그림을 매개로 다름 아닌 그 욕망, 그 향유를 선물한다는 의미를 담았을 것이다. 
한편으로 작가의 그림에는 선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노끈이나 매듭이 없는 경우, 사물 대상을 담은 비닐봉지만 덩그렇게 제시된 경우, 그렇게 위쪽이 열린 채로 노출된 경우가 적지 않다. 물론 뭔가를 비닐봉지에 담아낸 정황 자체를 이미 선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선물에 담아낸 작가의 애틋한 마음과 함께, 어쩌면 이보다 더 결정적일 수 있는 또 다른 뭔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더욱이 봉지 바닥에는 물마저 담겨 있다. 더 싱싱해 보이게 의도한 것일까. 실제로도 때로 꽃다발 속에 미량의 물이 담겨오는 경우가 있지만, 그건 지엽적인 경우로 보인다. 
그럼, 작가의 그림에서 물이 갖는 보다 실질적인 의미는 뭔가. 무의식이다. 무의식? 물은 흔히 무의식을 표상한다. 그렇다면 작가는 자신의 그림의 한 부분으로서 무의식을 끌어들인 것일까. 그렇다고 단정하기는 쉽지 않다. 작가가 구사하는 방법론에 해당하는 극사실주의는 철저하게 사물 대상의 감각적인 표면 현상에 천착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작가의 그림과 무의식의 연관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은 잠재적인 한 가능성 정도로만 간주하고 싶다. 차후에 작가가 자신의 그림을 의미론적으로 확장하고 심화하기 위한 계기로서 발전시킬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무의식이 아니라면, 뭔가. 반영과 반사, 굴절과 왜곡이다. 투명한 비닐봉지는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고, 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안쪽과 마찬가지로 외부 환경도 반영한다. 이처럼 안과 밖의 경계를 세우면서 지우는 이율배반적인 성질, 의미론적으로 양가성이야말로 어쩌면 작가가 그림에 비닐봉지를 도입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비닐봉지를 싸거나 묶으면, 그 과정에서 수많은 자잘한 굴곡이며 면들이 생겨나고, 그 면들마다 빛과 그림자, 음과 영에 반응하는 성질이 다 다르다. 철저하게 사물 대상의 표면에서 일어나는, 가히 현란하다고 할 만한, 이러한 자연현상에 대해서는 일종의 감각적 유희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아마도 그 자체가 작가를 매료시켰을 것이다. 바로 정물화의 세 층위 중 사물 대상의, 그러므로 어쩌면 세계의 됨됨이를 파고드는 호기심도 자극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물이 만든 반영과 반사, 굴절과 왜곡이 가세하면서 작가의 형식실험을 추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에서도 확인되는 것이지만, 작가의 그림은 극사실주의 회화에 속한다. 극사실주의는 사실주의와의 관계로부터 파생되고, 그 관계로부터 의미심장한 미학적 관심사가 나온다. 이를테면 사실주의를 지극히 발전시키다 보면, 언젠가 사실을 넘어서는 경계가 나온다. 마찬가지로 현실주의를 지극히 밀어붙이다 보면, 불현듯 현실을 초월하게 된다. 이로부터 극사실주의가, 그리고 초현실주의가 유래한다. 바로 현실과 비현실의 관계가 전도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마치 그림 같은 풍경을 의미하는 픽처레스크가 그렇다. 그림 같은 풍경에서 그림은 풍경의 가치를 재는 척도가 되고, 허구(아니면 재현된 현실)가 현실(혹은 현실 자체)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작가의 그림에서 그 경우를 찾아보자면, 특히 꽃 그림이 그렇다. 작가의 꽃 그림은 생생한 나머지, 마치, 조화 같다. 생생한 채로, 정지된, 조화 같다. 절정에 이른 생화마저도 왠지 부패할 기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과는 비교된다. 재현된 생화가 마침내 생화를 넘어섰다고나 할까. 생화는 유한하다. 그러므로 조화는 어쩌면 유한한 생명을 간직한 채 시간을 정지시키고 싶은, 그렇게 유한을 무한으로 가장(그리고 연장)하고 싶은 불가능한 욕망을, 그러므로 어쩌면 죽음을 표상할 수 있다. 그렇게 작가의 그림에서 정물화의 세 층위가 완성되거나, 최소한 제안 된다. 무의식이 그런 것처럼, 아직은 잠재적인 경우에 머물러 있지만, 언젠가 작가의 그림을 변화시킬 의미론적 계기로 작동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적 구상회화, 또 하나의 일상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욕망_박소희(조형예술학 박사)
“사실적 구상회화, 또 하나의 일상 그리고 그 이면에 숨겨진 욕망”

 박소희(조형예술학 박사)

민경숙작가의 극사실주의 회화는 현대미술에 독자적인 한국적 흐름을 계승하면서 팝적인 요소들을 부가시켜 서구와는 다른 방식의 극사실주의를 추구하고 있다.  즉 국내에서는 1970년대 중반부터 서구의 극사실주의를 모방하는 형태로 시작되었으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독특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은 당시 젊은 작가들에게 있어 새로운 돌파구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는 전면적인 수용이 아닌 새로운 조형어법에 대한 부분적 수용이다. 국내의 극사실주의 회화는 서구의 하이퍼리얼리즘처럼 냉정한 눈으로 현실을 조망하는 것이 아니기에  해석의 여지가 남아있는 작가의 주관성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어떠한 공통적인 흐름에서 극사실주의를 설명하기 보다는 작가 개인적인 특징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전통적 사진스러움을 버리고 타 영역인 회화주의의 옷을 입은 일명 그림 같은 사진, 카메라 렌즈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었던 사실성을 재현한 사진 같은 그림들은 한국 극사실화의 정체성을 담고 좀 더 독자적인 표현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이것이 극사실주의가 여전히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민경숙작가는 자신이 늘 보아 왔거나, 체험을 통해 친근하게 느끼는 것 혹은 일상의 사소한 느낌에서 소재나 모티프를 얻는다. 특히 작가는 일상적인 소재인 과일, 채소, 꽃 ,병, 인형 등이 투명한 비닐 포장 주머니 속에 들어있는 이러한 오브제들을 사진과 회화의 정체성과 관계론에 대해 재조명하는 것으로 전시 작품들은 표면상 사진은 회화에 가깝게, 회화는 사진에 가깝게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작가 자신의 이야기나 그 속에 담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으로부터 우리는, 작가의 정체성을 읽을 수 있으며, 거기에서 공감을 얻을 때 마음이 움직이게 된다. “예술작품은 늘 우리에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고 발레리는 말한 바 있다. 따라서 회화란 우리가 식별해 낼 수 있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가 느낀 감동이나 감각 그 자체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민경숙작가는 사진처럼 정밀한 묘사의 방법을 통해 ‘그리는 것’ 그 자체를 즐기며, ‘그리는 법’ 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민경숙작가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그리느냐' 보다는 '무엇을 그리는가' 이다. 자신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투명 비닐주머니로 포장된 병(Bottle)은 현대의 대량복제사회의 아이콘으로 즉 이 시대를 투영하는 매개체로서 현실적 문제를 인식하기 위한 상징적 기호이며, 또한 투명 비닐주머니로 포장된 꽃, 과일, 채소 등을 조형적 이미지로 삼아 현실이나 상황 자체를 오브제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인형은 예부터 인간의 꿈을 대행하는 의미를 지녀 왔다. 영생을 꿈꿨던 왕들이 토우 인형을 통해 이승에서의 생활을 저승까지 연장시킨 것이나, 바람이나 소망을 담아내는 주술적 역할을 맡은 것도 인형이었다. 작가가 투명 비닐주머니로 포장된 인형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성이 갖고 있는 외로움, 과보호 속에 자란 그 또래 여성이 느끼는 환상 같은 꿈. 그런 것이다. 꿈은 꾸지만 실행하지 못하는 소심함. 속으로만 되뇌면서 표현하지 못하는 수줍음. 생각은 많지만 정작 현실로 옮기지 못하고 마는 소극성. 이렇게 자라난 젊은이들의 모습을 투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한다. 투명 비닐주머니는 그 투명성으로 인해 오브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투과 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형상을 굴절시키거나 왜곡시키기도 한다. 작가는 사실적인 재현의 방식을 택하면서도 투명 비닐이라는 소재를 통해 여과된 형태가 시각적으로 변형된 장면을 담아낸다. 투명 비닐주머니로 포장된 오브제들을 클로즈업하여 화면 안에 보존함으로써 쉽게 쓰이고 버려지는 존재들이 익숙한 의미를 벗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지점에서 다시 존재하도록 한다. 익숙하고 평범한 것들이 그림 안에서 다른 무언가로 다시 인식 될 수 있기를 바라며, 형상의 모방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실제와 이미지 그리고 본질까지 수용하는 격상된 오브제의 재현을 보여주고 있다.
최석태 평론글
민경숙이 그려 보내준 선물을 받으며  


민경숙의 그림은 선물이다. 그 그림을 보거나, 가지게 된 사람에게 주는 선물이다. 당신에게 드립니다, 당신에게 드리니 보소서, 또는 가지소서 하는.

셀로판지 봉투에 넣어져 주어지는 선물은 우리를 기쁘게 할 것이 틀림없다. 먹을 수 있거나, 쳐다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가지고 놀 수도 있는 것이니. 그 속에는 갖가지 과일이나 꽃, 장난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과일은 보아서도 흐뭇하지만 먹을 수 있는 것이므로 만족감을 준다. 꽃은! 장난감 또한 어른의 경우라도 지나간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므로 우리를 들뜨게 한다.  

과일이나 꽃들은 셀로판지로 만들어진 봉투에 담겨져 댕기로 묶었다. 여기에 때로 물이 약간 담겨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더욱 영롱하다. 더욱 싱싱한 느낌의 선물을 받은 느낌이란!

셀로판지 포장은 우리가 꽃가게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미리 싸둔 것도 있고, 값을 치루면 비로소 일정량을 싸 준다. 이것의 기능은? 가볍게 스치기만 해도 상해 망치기 쉬운 것을 막아주는 것 아닐까? 이 뿐인가? 동시에 투명한 막을 통해 꽃이 보이니 우리가 느끼는 아름다움을 극대화한다. 셀로판지를 통해 보는 대상은 실물 보다 더욱 명료하다. 사전을 참고하면 셀로판지는 무색투명하다고 하였다.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투명하다고 해도 몇 장을 겹치면 흐려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홑겹이라도 약간은 어두우므로 셀로판지를 통해 보는 사물은 좀 더 무게 있어 보이게 되므로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꽃집에서 꽃을 살 때 셀로판지에 싸인 꽃을 받아들 때의 기분 좋은 느낌이 민경숙의 그림에는 있는 것이다.

민경숙의 그림은 잘 그렸다는 느낌을 준다.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고 만들기를 즐길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 분명하며, 대단히 열심히 그리고 만들어 숙련되었다. 미술대학시절부터 20회를 넘는 공모전 응모, 비슷한 숫자의 개인전 개최 경력으로 그녀가 얼마나 독실한 미술가 지망생이었는지 알게 한다.

그녀가 주는 요사이 주는 선물은 투명한 주머니에 담아져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이 선물은 천이나 가죽으로 된 주머니에 담겨 있었다.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이 선물을 민경숙은 꽤나 오랫동안 그리거나 만들었다. 실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보여지는 이 선물은 그 속에 든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이를 보는 사람이 짐작하게 하려고 그랬는지 주머니 거죽에 이런 저런 것을 그려 넣거나 바느질해 나타내었다. 그 결과는? 의도와 달리 감상적인 것을 넘지 못했다. 창문, 의자, 나무 등은 우리에게 가리키는 것 이상의 감정적인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런 단절을 느낀 그녀는 엄청난 고민에 빠졌다고 한다. 그랬을 것이다. 내가 하고픈 말을 하지만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알았을 때의 절망감은, 무섭지 않은가? 시각예술은 소통의 주요 수단이다. 그녀가 내온 해결책은 그 주머니를 투명한 것으로 바꾸는 것이었다. 셀로판지가 그래서 나타났다. 변화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한편 그 속에 넣어 보내는 것 또한 바뀌었다. 감상적인 느낌을 주는 대상이 아니라 전통적인 정물에서 다루어지는 과일, 꽃 등으로.

민경숙의 선물은 충분한가? 엄청난 작업량과 고뇌를 거친 작업은 흠 잡을 데가 없다. 그러나 북아메리카나 유럽의 느낌이 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나는 민경숙이 보내는 선물이 앞으로 더욱 존재감이 높아질 것이라고 여긴다. 세잔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모면한 이탈리아 이민자인 중학생 에밀 졸라가 고맙다며 세잔에게 건네준 사과는 세잔에 의해 놀라운 사과가 되었다.  세상을 움직인 사과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민경숙의 선물도 더욱 잊을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가리라.

유화에 이름 쓰기를 알파벳으로 하는 대부분의 한국인 화가와 달리 한자를 고집하는 것도 눈여겨 볼 부분이다. 심지어 서양화라 부르면서 서양화가라고 하는 직함을 내세운다. 그녀의 이름 쓰기는 자신만의 유화, 우리들의 유화로 나아가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그녀가 앞으로 다다를 경지는 자신의 유화를 높이 사는 사람들의 오래된 감성에 더욱 가까이 다가갈 것이 예감된다. 민경숙의 유화가 잊을 수 없는 것이 되는 것을 확신한다.

 최석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