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빈 곳의 헤아릴 수 없는 증식_강선학(미술평론가)

빈 곳의 헤아릴 수 없는 증식

                                                                         
- 강선학(미술평론가)
육면체의 장대한 단면도, 어떤 빈 곳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듯 가득차서 어지러운 포만의 구조, 그것이 문성원의 작품을 처음 대했을 때의 인상이다. 그러나 가득 찬 것이 의외로 빈 곳의 구조이며 그가 보아낸 세계임을 가늠하게 한다.
그의 화면 구조의 특징은 무엇보다 조감적인 구성력이다. 위에서 내려다 본 조감은 시선에 드는 모든 입체들의 구체적 실체를 무화시키고 평면화 시킨다. 그리고 비가시적인 어떤 것으로 이동시킨다. 그런 면에서 문성원의 작업은 어떤 현실성, 사물이 가진 구체성의 탐색이거나 그것을 구축하려는 것이 아니다. 높은 시선에서 현실경을 조감하려 한 순간 그는 아무 것도 보지 못한다. 같은 모양, 비슷한 모양들이 맞붙어 있는 거대한 조직, 유기체처럼 번식하거나 증식하는 구조를 보아낼 뿐이다. 그의 작품이 현실경의 조감을 염두에 둔 것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고 있다 하더라도 화면의 구성과는 무관할 수 있다. 다만 공간 체험을 조형화 하는 것은 현실 개연성을 연상하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언급하는 것이다.
그의 화면은 틈만 있으면 자신을 드러내는 힘, 구조의 거대함에 맞닥뜨리게 한다. 내려다 본 입체들이 돌출된 것이 아니라 함몰된 형태들로 보이는 것도 이런 순간이다. 함몰은 일단 평지에 가해지는 힘이다. 그러나 그것은 돌출이라는 상대적 현상을 생성한다. 그것들은 끊임없이 평면과 입체, 채움과 비움이라는 양가성을 요구하는 구조다.
육면체의 내부를 조감하는 시점의 연속, 반복, 배열, 병치로 가득한 화면은 필요에 따라 어디로든 확대할 수 있는 구조를 특징으로 한다. 캔버스를 덧붙이면 무한한 확장이 가능한 화면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작품은 어떤 구체적 공간이나 장소를 상정하지 않는다. 비정형의 이 육면체의 단면도는 자신의 면들이 물고 물리면서 자신의 구조를 반복하고 확대하면서 차이로 화면을 구성한다. 개별적 요소가 전체 구조를 닮으면서 증식하는, 개체이자 전체인 자기복제와 증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완료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미확정의 가능태로 주어진다. 추상적 공간일 뿐이며 현실적 정합성에 구속받지 않는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부조적 평면, 깊이가 얕은 육면체의 단면들로 보이는 입체감의 표현은 단조로운 단축법의 효과를 백분 활용한 것이다. 반복, 확대의 흐름은 운동을 만든다. 비슷한 크기로 계속되다 비틀린 면을 만들고 그 옆으로 작은 육면체의 조감면이 생성된다. 그리고 다시 커지면서 비틀리기를 반복하면서 화면은 종횡으로 횡단해 증식해간다. 좌우, 상하, 어디든 자유롭게 움직이는 운동들이 변주되는 조직이다. 때로 작가는 사선의 움직임을 만들어 화면의 변화를 주기도 한다. 무료할 것 같은 밋밋한 구조의 동질성이 이런 배치로 시선의 다양한 움직임을 만들고 지루함에 빠지지 않게 한다.
그의 화면은 크게 두 가지 색상의 조합이 주조를 이루면서 구성적 공간을 제공한다. 하나는 <기억의 숲.194cm x 376cm>이라는 작품으로 분홍과 연록색이 주조를 이루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부조적인 평면이 연속되고 색상의 변화가 주조를 이루지만 화면 내에 구멍이 없다. 가끔 화면 몇 곳에 검은 색면들이 보이는데 모양이 다른 입방체의 면으로 작동할 뿐 구멍으로서 역할이 아니다. 반복적인 구조로 이어지는 움직임에 변화를 주기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표면의 견고한 구조를 보여주는 특징으로 이루어진 작품이다.
이에 비해 <기억의 울림.194cm x 674cm>이라는 작품은 회색조의 색상이 주조를 이룬다. 이 작품은 앞의 작품과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도 화면 곳곳에 구멍 혹은 창이라 불릴 만한 공간들이 배치되어 있다. 검은 색이지만 <기억의 숲>과 다른 공간을 보여준다. 창문, 혹은 덮개라 부를 만한 구조들이 전체 구조와 어긋나게 돌출되어 있다. 말하자면 구멍에 창문의 역할을 하는 구조들이 대비색을 가지면서 배치된 것이다. 회색의 벽면에 검은 구멍, 그 구멍에 여닫이의 흰색 창문이 반쯤 열려 있는 형용이다. 구체가 없는 그의 화면에서 홀연 구체적 연상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다. 그리고 조감으로 닫힌 공간에서 유일하게 열린 공간의 역할을 한다. 조감적 시선의 공간구성이 도시의 구조적 특징을 표상하는 상징으로 연상되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 구멍은 건물의 창이 아니다. 안에서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시점을 확보하는 창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안팎을 연결하는 열린 공간이지만 이쪽과 저쪽의 경계로서 화면을 설정하고 있다. 안이자 밖인 것으로 화면을 이끌어 간다. 화면 전체가 하나의 현실성을 얻기보다 내면화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같은 구조와 방법을 보이지만 표면에 집중한 <기억의 숲>과 표면의 구조를 안팎의 이중구조임을 암시하는 <기억의 울림>은 완벽하게 다른 구조이다.
구획된 도시 조감도 같은 구조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풍경, 그것은 삶의 장소로서 풍경이 아니라 평면이라는 추상의 공간으로 바뀐 장소이다. 그럼에도 <기억의 거리>니 <기억의 숲>이니 <또 다른 기억><기억의 울림>이라 하지만 실은 도시라는 구체에 이미지를 대고 있지 않다. 기억에 의한 심상에 이미지를 얻고 있다. 기억은 사실 그대로이기보다 왜곡이며 보완이며 재구성에 가깝다. 실체와 기억, 그리고 시간과 공간의 접면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육면체를 해체했을 때 드러나는 내부의 선들과 그 선들에 의해 접히는 육면체는 평면과 입체의 양면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두 세계가 하나임을 보여주는 깨달음에 가깝다. 그에게서 도시의 기억은 도시라는 구체적 장소가 아니라 분해된 선들의 조합으로 평면화 된다. 입체/현실이 조감/평면으로 이동한 것이며 그 이동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를 일깨운다. 평면과 입체, 이 세계와 저 세계, 혹은 낮과 밤, 때로는 한 인간의 삶의 여정에 다름 아닌 문제들이다.
육면체 내부의 주름을 드러내는 것은 하나의 평면 위에 그은 주름의 접힘에 따라 다른 세계가 되는 그런 경험과 인식의 확장이다. 점, 선, 면이라는 평면 위의 단일자는 접히는 선에 따라 입체도 평면도, 이런 것도 저런 것도 된다. 그것은 가역성의 세계이다. 그것은 가득 찬 것들의 빈곳을 보아내는 일이며, 분명하고 명징하게, 유쾌하게 증식하는 빈 곳의 구조를 목격하는 것이다. 의미도 형상도 없는 증식의 구조와 논리만을 보는 것이다. 비어 있지만 끊임없이 증식하는 힘에 대한 목격인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우리에게 던지는 유미적인 구조와 색상의 교란이 주는 이면일 수 있다.
그 “빈 곳의 헤아릴 수 없는 증식”이야말로, 그의 전시를 보고 온 날 밤 늦은 시각 ‘모리스 블랑쇼’를 읽다 손에 잡힌 뜻밖의 만남이었다.
조감은 입체를 평면으로 보게 한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차원의 이동이다. 그 이동은 다시 평면을 입체적 감각으로 재구성하게 한다. 얕은 입방체의 해체가 주는 부조적 구조는 화면을 구성하는 구조이자 세계를 읽어내는 이해의 틀이기도 하다. 그리고 완고한 평면의 구조에 창을 내어 의외의 공간을 던져둔다. 평면의 깊이는 그곳에서 다시 시작된다. 평면에서 입체로, 무한의 공간으로 나아가는 통로인 셈이다. 평면과 입체의 양차원이 맞물려 있는 세계이다.
그러나 그것이 창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창의 시선이 확보되는 곳이 아니라 도리어 안팎의 구별을 무화시키거나 안과 밖이 하나의 공간이라는 점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화면이 이쪽과 저쪽의 경계라는 면에서 현실의 구체성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가지고 있다. 그곳에는 어떤 현실적 의미도 보이지 않는다. 그곳에는 의미가 아니라 구조적 생성만이 있는 스타일이 보일 뿐이다. 그래서 그에게 형식적 미감에 함몰될 수 있다는 위험과 그 위험을 기피하지 않는 내용의 정당성을 확보할 사유의 폭과 깊이를 기대하는 것이다.  

 

기억은 시간속에 머문다.3

기억은 시간속에 머문다.3

 

문성원 작가는 시간을 연구하는 대표적인 작가이며, 현재(現在)와 과거(過去) 시간 속에  머물러 있는 기억의 잔상(殘像)은 서로 소통을 통해서 과거에 머물러 있다가 현재의 시간으로 소환되어 추억(追憶)이란 단어로 회상(回想)된다.

무한대의 시간 속에 나는 태어났다. 그리고 그 시간 사이사이에 기억의 흔적들을 축적(蓄積)한다. 세월이 시간의 탑을 쌓듯 기억의 잔해(殘骸)들로 기억의 탑을 쌓는다.

본인이 존재한 시간대에서 발생하는 삶이 하루하루 기억과 추억으로 머릿속에 기록된다.

현재의 시간은 현재와 과거가 동시에 공존하는 찰나와도 같다.

현재의 시간이 몇 초 뒤 과거로 변해버린다. 그리고 곧 미래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현재의 삶이 모여 과거의 시간으로 변해가고, 이러한 산물(産物)들이 미래의 시간에  영향을 미치며 긍정과 부정이 함께 존재한다.

개인의 과거 기억의 부산물(副産物)이 미래다.

과거의 수천수만 겹의 시간이 쌓이고 그 시간 위에 기억이 겹겹이 쌓인다.

현재의 시간에서 과거의 시간이 겹겹이 쌓인 모습을 색면으로 겹쳐 표현하였고, 그 색면 사이 검정색 공간은 과거의 시간 속에 잠들어 있는 기억의 무형적 형상을 도식적으로 그려 놓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시간과 기억에 대해 고민과 반성 없이 앞만 보고 살아간다.

자아성찰(自我省察)을 통해 자신의 삶이 올바른 방향(方向)으로 흘러가는지 고민이 필요하다.


기억은 시간속에 머문다.2

기억은 시간속에 머문다.2

 

우주(宇宙)에는 무한대(無限大)의 시간이 존재(存在)한다. 무한대의 시간속에서 우리는 잠시 머물다사라진다. 우리의 선조(先祖)들의 삶이 모여 역사(歷史)를 이룬다. 무한대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역사가 탄생(誕生)하고, 소멸(消滅)한다. 시간은 추상적(抽象的) 언어(言語)이며 시간을 통해 기억이 형성(形成)된다. 이러한 기억도 추상적 형상이라 구체적 이미지는 없다. 개인의 감정 상태와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동일한 내용이라도 그 당시의 감정 상태에 따라 각각 다르게 느껴진다. 각자의 삶 속에서 과거(過去)로 변해버린 시간이 기억(記憶)의 추상적 형상으로 자신들의 머릿속에 머문다. 이러한 기억은 때때로 위로와 미래의 방향성(方向性)을 선사하기도 한다. 하루 하루의 우리들의 삶이 모여 현재(現在)의 나 자신을 만들고, 현재의 시간이 쌓여 미래(未來)의나 자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과거라는 단어 속에 잠들어 있는 기억... 현재(現在) 진행되고 있는 시간 속의 삶. 과거(過去)와 현재(現在)의 시간이 모여 우리의 미래(未來)의 시간을 결정한다.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개인들의 기억과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시간.... 무한대의 시간 속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인생(人生)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의 기억을 유형(有形)의 형상(刑象)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 개인의 탄생(誕生)과 동시에 한겹 한겹 쌓인 무한대의 시간을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의 공간해석으로 기억의 축척(縮尺)을 입체적 느낌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억은 시간속에 머문다.1

기억은 시간속에 머문다.1

 

우주(宇宙)에는 무한대(無限大)의 시간이 존재(存在)한다. 무한대의 시간속에서 우리는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우리의 선조(先祖)들의 삶이 모여 역사(歷史)를 이룬다.무한대의 시간 속에서 우리의 역사가 탄생(誕生)하고, 소멸(消滅)한다. 시간은 추상적(抽象的) 언어(言語)이며 시간을 통해 기억이 형성(形成)된다. 이러한 기억도 추상적 형상이라 구체적 이미지는 없다. 개인의 감정 상태와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동일한 내용이라도 그 당시의 감정 상태에 따라 각각 다르게 느껴진다. 각자의 삶 속에서 과거(過去)로 변해버린 시간이 기억(記憶)의 추상적 형상으로 자신들의 머릿속에머문다. 이러한 기억은 때때로 위로와 미래의 방향성(方向性)을 선사하기도 한다.하루하루의 우리들의 삶이 모여 현재(現在)의 나 자신을 만들고, 현재의 시간이 쌓여 미래(未來)의나 자신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과거라는 단어 속에 잠들어 있는 기억...

현재(現在) 진행되고 있는 시간 속의 삶 과거(過去)와 현재(現在)의 시간이 모여 우리의 미래(未來)의 시간을 결정한다. 시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개인들의 기억과 기억 속에 잠들어 있는 시간....무한대의 시간 속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인생(人生)이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의 기억을 유형(有形)의 형상(刑象)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 개인의 탄생(誕生)과 동시에 한겹 한겹 쌓인 무한대의 시간을 2차원의 평면 위에 3차원의 공간해석으로 기억의 축척(縮尺)을 입체적 느낌으로 표현하고 있다.

기억의 시간은 가고

기억의 시간은 가고

 

문성원작가의  작품은 시간을 테마로 이루어지며, 대주제인 과거, 현재, 미래에서 출발하여 소주제로 스토리의 영역을 좁혀 가고 있다. 

1992년에서  2005년까지는 현재의 시간을, 2006년에서  2009년까지 미래의 시간, 2010년에서 현재까지 과거로 변해버린 시간을 주제로 스토리를 구성중이다.

현재의  찰나와 같은 시간은 과거로 변해버린다.

사람들은 현재의 시간 속에서 과거의 기억을 회상이란 단어로 소환한다.

개인의 머릿속에는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서로 뒤엉켜 존재하며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만들어낸 기억의 공간 속에서 함께 소통하며 공존한다.

 

 문성원의 작품은 2 차원의 평면 위에 3 차원의 입체적 공간을 형성하고 있으며, 조각의 3 차원의 입체 공간을 4 차원의 영역으로 확장시켜 2 차원의 평면 위에 입체감을 극대화 시켰다. 이 작품 스타일은 현대사회의 새로운 미술 양식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현대미술관 미술은행에 3점이나 소장되어 있으며,  TV 드라마에 15회 협찬 되었다. 일본 미술 평론가 미야타 테츠야 교수는  '시대를 초극하는 문성원의 예술'이란 주제의 평론글에서 문성원 작가는 미래에서 온 작가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3차원의 입체 공간에서 4차원의 입체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디자인적 요소를 잘 접목하여 현대미술의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다. 이 분야에서는 선두주자에 속하는 한분이라 볼 수 있다.

기억의 장소에서 감취진 일기 보기-송만용

기억의 장소에서 감취진 일기 보기...(2012년 미술과 비평 수록 글 중에서)
                                                          송만용(미술평론가, 동서대)

누구나 꿈을 꾼다. 그렇지만 꿈은 아폴론의 황금마차를 보면 사라지는 것. 그래서 꿈은 신기루. 꿈은 이슬. 사라졌다해도 다시 나타나는 역전된 욕망의 또 다른 이름. 그렇지만 다시 나타나는 꿈은 이전의 꿈이 아니다. 새로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꿈을 꾸길 원하고 꿈은 이루어진다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꿈은 현실화 될 수 없기에 아름다운 것이다. 왜냐하면 꿈이 현실이 되길 바라면서도 꿈이길 바라는 소심함이 우리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술가들이다. 표현하고 싶은 혹은 만들고 싶은 욕망이 예술가의 꿈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꿈을 좋아한다. 그러나 꿈의 잡히지 않는 이미지를 쫓을 때, 꿈이 신기루가 되어 사라질 때 ... 예술가들은 슬퍼진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마법을 믿는다.
축척된 기억속에서 꿈은 존재하고 그 기억은 시간과 공간의 경험에서 출발하는 것은 자명한 이치. 그래서 꿈의 파노라마는 우리 인식의 기억속에서 활성화된 그 무엇. 이렇게 기억으로 떠오른다는 것은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 무엇인가 새로운 가치를 얻는 것. 즉 시간과 공간속에서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하고 탐구할 수 있는 것은 어찌보면 예술가만이 즐길 수 있는 영광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기억속에서의 장소와 시간속에서 의미와 불편한 읽기를 추구하는 작가 문성원을 찾아보자!
그의 찌그러진 사각형의 연속은 기억속의 시간의 일기이다. 시간의 일기는 하나의 거울이다.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 웃는 것은 나이고 거울은 그저 투영할 뿐이다. 그 대상이 무엇이던간에... 관계의 반영이 거울이 할일. 꿈은 거울에 반영되지 않는다. 단지 나에 의해 표출될 뿐이다. 그래서 문성원은 삶이라는 시간의 흔적을 사각형의 공간으로 설정하고 반복과 리듬을 통해 기억의 지도를 그리려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가노트를 보면, “개인의 시간 개념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시간으로 볼 수 있다. 자신들의 삶속의 모든 사건(事件)을 날짜로 표시하며 기억한다. ... 이러한 경험(經驗)의 이미지들을 축적하여 공간성과 시간의 흔적을 통해 경험이란 단어를 기하학적 형태로 단순화하여 화면 위에 재구성하고, 순수 조형의 요소 점(點), 선(線), 면(面)중 면의 요소인 다양한 크기(입체적 기하학적 형상)와 형상성의 조합, 색감의 반복적 배열과정을 통하여 화면위에 재구성하여 하나의 거대한 기억의 지도(地圖)나, 도시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문성원의 작품에서 기억의 장소로써 사각형. 그 속에서 각자 갖는 스토리가 다른 사각형 그 관계의 지도가 문성원의 기억의 지형도인 것이다. 그의 <기억의 또 다른 공간>과 <기억의 숲>이라는 작품을 보면 이러한 그의 사고를 잘 읽을 수 있다. 이때 기억의 지형도는 그 어떤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때 기억의 공간은 그저 비어있는 단순한 공허(空虛)이거나 무제한적인 용기(容器)가 아니며 주체에 의해 인식되고 질서가 부여된 내향적 공간으로 체험되는 상징적, 심리적 공간이 된다. 마치 정중화님의 <아름다운 기억>이라는 시에서 나오는 것처럼 ‘잊을 수 없는 추억’과 ‘시간의 말없음’이 있는 것이 아닐까?
많은 세월이 흘렀나봅니다/ 슬픔이 너무 깊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허공만 바라보던 시간이었습니다/ 잊을 수 없는 추억 속/떠오르던 기억들/그리움에 들떠/함께 하던 거리를 걸었습니다/세월은 덧없이 흘러/ 이젠 아득하게 느껴지는,/시간의 말없음이/모든 걸 잊게 하나봅니다/잊는다는 것은 추억을 만든다지만/낯선 바람이 어깨를 스칠 때/왠지 허전함을 느낍니다/
당신과 함께 하던 기억은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특히 <기억의 울림>, <기억의 공간>, <기억의 도시>같은 작품에서 보면 <기억의 구조>와 같은 작품과는 달리 공간속에서 메시지처럼 보이는 하얀 그 무엇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읽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본인만이 아는 비밀일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법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문성원은 기억의 장소에 대한 일기를 허용하고 있지 않다. 단지 기억의 장소를 메시지가 있음을 알릴뿐이다. 그래서 그는 불친절한 작가이다. 마법이 필요하다. 아쉬움은 자신만의 기억속의 어법이 시대정신과 우리 모두에게 감동을 주는 그 메시지가 되었으면 한다. 그래서 기다려보자! 언젠간 봉인이 풀릴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우릴 이끌 것이다.

 

작품설명_기억의 저넘어 (사면의 기억)
▶작품 설명

시간을 분류할 때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눈다.
현재의 시간이 지나 과거가 되고, 현재에 일어난 모든 순간의 삶은 기억으로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문다.
개인의 기억은 그 순간의 감정이나 상황에 따라 관점이 왜곡되거나 변형될 수 있다. 
이 작품은 기억을 다양한 관점에서 내려다본 형상으로 사면의 공간엔 동일 시간대의 사건들도 개인의 감정, 해석 방법에 따라 과거 기억의 관점이 다른 것이다. 현재에서 과거로 이어지는 시간의 배열을 색과 면의 중첩된 공간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 공간 사이사이에 자신들의 과거 기억들이 잠들어있는 공간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탄생과 동시에 하루하루 생겨나는 일상들을 머릿속에 기억이란 단어로 쌓고 있다. 기억은 무형이라 형상이 없다. 그래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수많은 기억은 우리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며 과거의 회상을 통해 현재의 시간으로 소환되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간은 우리가 잠시 머물다 가는 찰나와 같은 시간이며, 그 속에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