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매화의 고절한 향기에 취하다-남성숙
매화의 고절한 향기에 취하다_이슬비_무돌아트

매화의 이치를 알기에 매화를 제대로 감상 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매화를 닮고자 하는 사람. 이름 난 작가로서의 성공보다는 작가들에게 존경받기를 바라는 사람. 그에게선 오래된 매화의 고절한 향기가 난다. 깊고 그윽한 정제된 향. 오래되고 느릴수록 좋아지는 게 있다. 세월이 흘러도 빗겨가지 않는 그런 좋음이 있다.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고절한 향을 가진 오견규가 바로 그렇다.


화선지에 먹이 스며들 듯 그는 무한한 사색들을 여과하여 그림에 담는 그 긴 여정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의 그림에선 씨앗이 움을 터 한 송이 한 송이 꽃이 피어나고,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가 모여 숲을 이루고 산을 이루는 느림의 미학을 보인다. 그의 회화의 원천은 지극히 유년의 기억에서부터 시작된다. 전라도 땅에서 자라나 직접 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 곁에서 보고 경험한 기억이 그의 그림에도 살아가는 자세에도 묻어난다. 산인 듯 밭인 듯 낮은 산과 낮은 초가집들. 그는 이렇듯 평범하고 소박한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그것에서 유현(幽玄)함을 발견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전라도적인 것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삶의 자세에도 묻어나 가장 전라도적인것이 바로 그의 삶을 대변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의 회화는 가장 낮고 평범한 것, 자연과 자신에 대한 사색으로부터 온 것이며 그것을 평면으로 안착시키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논리를 만들어낸다. 작가가 경험한 사색의 과정은 동양의 명상적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본연의 이미지로 확대된다.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그림. 하지만 막상 그림 앞에 서면 나지막하니 들려오는 암자의 풍경소리와 싱그러운 풀 내음에 어느덧 동화되어 우리는 사색의 세계를 접한다. 작가는 이미지가 아닌 "본질" 에 주목한다. 무(無)에서 출발한 그의 그림세계는 보이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즐기는 데에 멈추지 않는다. 본연의 모습을 찾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이야 말로 마음의 눈을 즐겁게 하는 것이며 작가가 추구하는 그림의 즐거움이 아닐까. 4~5년 전부터 시작한 매화작업 역시 같은 맥락이다. 그는 매화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매화를 많이 찾게 되면서 그것의 매력에 빠졌다고 한다. "매화는 나이가 들어서야 구부러진다. 때가 되면 꽃을 피워 즐거움을 주고 향을 피워내는 나무다. 나는 그런 매화가 매력적이더라." 라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매화꽃이 피는 이유를 그의 나이 60이 돼서야 알게 되었다고 한다. 매화라는 것이 세월이 쌓여야 온전해지기 때문일까. 그의 매화그림을 보면 용의 몸뚱아리처럼 휘어진 굴곡과 뒤틀려 올라 성긴 가지에 띄엄띄엄 꽃이 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품위다. 그는 단순히 눈을 즐겁게 하는 그림이 아닌, 삶의 철학이 깃든 매화를 그려낸다. 무릇 꽃이 피는 이치는 곧 삶의 이치와 같기 때문에 삶의 도리와 맞물려 그 속에서 철학과 진리를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 그의 매화는 결코 화려하거나 사치스럽지 않다. 한 잎 한 잎 서정이 묻어있다. 무엇하나 이유 없이 그저 그려진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이유를 가지고 피어있다. 꽃이 그저 그 자리에 피었다는 것 자체가 그의 그림을 완성시킨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그저 눈으로 보고 즐기는 것이 아닌 마음으로 보고 즐겨야함을 알아야 한다. 그 이치를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매화의 향과 본연의 세계를 접할 수 있다. 나아가 그의 그림은 무한한 자신에 대한 모색의 표현이다. 그는 그림과 동시에 자신에 대해 꾸준히 탐구하고 고뇌한다. 때문에 아직도 그는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외로움을 즐긴다. 외롭다는 것은 고요한 것이며, 고요한 것은 맑아지는것이기에 그 과정 속에서 자신을 찾으며 꾸준히 작업에 몰두 한다. 그렇기에 작가의 그림은 작가 자신을 대변할 수 밖에 없다.

화면을 채우지 않는 비움의 미학과 꽃을 피우고 풀을 심는 느림의 미학은 그림을 단지 그려내는 것이 아닌 때 묻지 않은 자연으로 회귀하는 동양의 정신과 닮아 있다. 



그는 전라도의 산처럼 집처럼 낮고 낮은 곳에서 피어나고 있다. 그는 고절한 향을 지녔음에도 작업실 한쪽에서 자신을 반성하고 경계하기 위해 오체투지를 한다. 그렇기에 그를 보면 고매(古梅)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매화의 이치를 알기에 매화를 제대로 감상 할 수 있는 사람. 그래서 매화를 닮고자 하는 사람. 이름 난 작가로서의 성공보다는 작가들에게 존경받기를 바라는 사람. 그에게선 오래된 매화의 고절한 향기가 난다. 깊고 그윽한 정제된 향. 그가 쓰고 있는 글 속에 그림이 있고, 그의 그림속에 그가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사람을 감싸 뼛속까지 싱그럽게 한다. 그런 그의 그림과 삶의 지표는 우리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환기시켜주게 된다. 그와의 만남은 짧은 만남이 만드는 진한 기억으로 남아 긴 여운을 남겼다.나는 바란다. 그의 예술과 그의 향을 보다 많은 사람들이 기억할수 있기를...

사랑과 정신, 예술과 심미안을 나누는 이런동행(대동문화 제51호)_남성숙 광주매일신문 논설주간

한국화의 거목 아산 조방원 화백과 제자 목운 오견규씨의 35년 인연-남성숙
한국화의 거목 아산 조방원 화백과 제자 목운 오견규씨의 35년 인연

오십 년 살았건 백 년 살았건 내 몸과 마음, 심지어 영혼까지 흔들어 정연하게 함께 갈 수 있는 동반자가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좋은가. 때로는 부부 못지 않고 혹간 부모와 자식 인연보다 진한 사이, 깊고 넓어서 차마 잴 수 없는 그런 동행이 있다면 삶은 외로울 틈 없을 게다. 한국화의 거목 아산 조방원 화백(84)과 제자 목운 오견규씨(63)의 35년 사귐(?)이 그렇다. 그저 참 좋은 스승과 제자라 하기엔 표현이 모자란다.
그렇다고 끈끈한 정과 질긴 인연이란 표현도 적절치 않다.
부부가 되는 인연은 육천 겁이요, 형제는 칠천 겁, 가족은 팔천 겁, 사제지간은 구천 겁이라고 한다. 일겁은 사방 사십리씩 길이를 가진 상자에 모래알 같은 아주 작은 겨자씨를 한알씩 한알씩 담았다가 가득차면 다시 한알씩 한알씩 꺼내서 상자를 한번 비우는 시간을 말하니, 구천 겁이면 영겁과 다를 바 없다.

-영겹의 세월을 지나 만난 사제지간-
하늘과 땅사이에 인연 아닌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지만 영겁의 세월을 지나 만난 사제지간, 그것도 잘 통하는 사제지간의 인연은 아름다움을 넘어선다. 목운선생이 아산 조방원 화백을 만난 것은 스물 일곱 살때다.
피끓는 젊은 시절 월남전쟁에 참여했다 갓 귀국한 청년 오견규는 화가가 되기로 작정하고 선생님을 찾았다.
늦은 나이에 그림에 관심을 가진데다 언강 생심 미술학원 한번 다닌 적 없고 남들처럼 정규 미술대학은 꿈도 꾸지 못한 놈이 화가가 되겠다고 달겨들었다. 아산 선생님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선생님의 작업실을 들락거린지 일년 여 지났을까. 스승께서 말씀하셨다.
"니가 내 화실 드나들 때 문 여닫는 것을 보았다. 내일부터 화실에 나오너라. 다만 머리 깎고 수행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거라."
그러나 큰스승의 제자 되는 것은 순탄치 않았다. 빌미는 차치하더라도 한 다섯해 가까운 세월 동안 스승은 무관심으로 대하셨다. 인내를 가르치는 시간이었다. 무관심하셨지만 지나놓고 보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계셨던 게다. 심지어는 공모전에 작품을 냈는데, 스승이 아직 멀었다고 상을 깎아버릴 정도였다. 그때 알았다. 스승은 소리내어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마음의 길을 늘 안내하고 있었다는 것을. 어느 길로 가라고 가르치지는 않았지만 나쁜 길로 가는 것은 막아주셨다.

-스승이 내리신 초록색 음각이 눈 같이 형형한 벼루-
어느땐 가공모전에 입상하고 인사를 드리러 가면서 변변치 못한 선물을 들고 갔다. 그러나 스승은 그 선물 위에다 선생님의 선물을 얹어 되돌려보내면서 "나에게 이런 선물 하지 마라. 그리고 네가 내 나이쯤 제자를 두게 되면 나에게 주려했던 것을 네 제자에게 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던 스승님이 어느날, 고이 간직한 벼루를 제자에게 내려주었다. 벼루 뚜껑에는 일생묵노(一生墨奴)라고 새겨져 있었다. 초록색 음각이 스승의 눈 같이 형형한 벼루. 스승은 화업의 길을 가고 있는 제자에게 '평생 먹과 함께 하라'는 뜻으로 소중한 벼루를 내 준 것이다.
이제 노환으로 고생하는 스승을 보면 제자는 맘이 아린다. 계율을 행하는 듯 가을 서리처럼 단호하고 타인에게 춘풍같이, 가족에겐 검박함으로, 작품을 대할 땐 선정에 드신 듯 도의 경지에서 한 획 한 획 붓질을 하시던 스승님...
어느날 가자기 "견규야, 우리 산에나 올라 가자." 하시더니 산 언저리에서 "이곳이다. 봉분은 쓰지 말고 평장으로 해라. 바람은 지나가게 해야제." 하시는데 왈칼 눈물이 쏟아질 뻔 했다.
젊었을때 90kg에 이르던 몸무게는 지금 당뇨로 인해 50kg으로 줄어든 스승. 당뇨 합병증으로 동공의 실핏줄이 팽창해 앞이 잘 보이지 않고 귀가 잘 들리지 않지만 여전히 붓을 들고 계시는 스승은 초인적인 수행자의 모습 그대로다.

아산 조방원 화백은 시력이 조금 회복되면 달마도를 그리신다. 어려운 시절 힘겹게 살아가는 중생이 부디 반야의 바다에 이르고 열반의 언덕에 오르기를 축원하는 마음에서 그리 한단다. '걷고 눕고 앉고 서 있는 곳이 바로 깨달음의 도량' 이라고 한 달마의 깨달음을 알고 모든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자신의 본분사와 자신의 소임에 충실하면서 성불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란다.

-어떤 형식도 싫어하고 오직 간소한 즐거움으로 사는 삶-
시력이 조금 회복되면 달마도를 그리신다. 어려운 시절 힘겹게 살아가는 중생이 부디 반야의 바다에 이르고 열반의 언덕에 오르기를 축원하는 마음에서 그리 한단다. '걷고 눕고 앉고 서 있는 곳이 바로 깨달음의 도량' 이라고 한 달마의 깨달음을 알고 모든 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대로 자신의 본분사와 자신의 소임에 충실하면서 성불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란다.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스승은 환갑을 넘긴 제자의 눈으로 볼 때 
'간소정익'(簡素靜謚)한 분이다. 어떤 형식과 의례도 싫어하고 오직 간소한 즐거움으로 사신분. "그림은 자기 그림자와 비슷하다. 그림을 잘 그리기보다는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손재주는 얼핏 남의 눈을 기쁘게 할 지 몰라도 남의 마음을 기쁘게 하거나 감동시킬 수 없다."
스승은 지금 심안으로 그림을 그린다. 마음을 그리는 그림은 더 절제 있고 감동적이다. 요즘 스승을 보면서 '무현금'을 떠올린다. 줄 없는 가야금. 한동안 '무연금'을 화실에 걸어놓고 그 음색을 느껴보려 했다. 거문고의 줄과 손이 만나 한때 깊은 음색을 냈지만, 줄 없는 거문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손과 줄이 만난 인연은 잠깐 이었지만 줄이 있으나 없으나 그 소리가 영원히 들리는듯... 스승과 제자의 깊은 교감도 바로 그런 것 아닐까.

-스승은 달마도를 그리고 제자는 매화를 즐겨그려-
영화 '워낭소리' 주인공인 40살 먹은 소와 80넘은 할아버지의 말없는 
'조화'처럼 아산 선생과 목운 선생이 함께 걷는 길은 길고도 질기다. 
영화 '워낭소리'에서 평생 땅을 지키며 살아온 농부 최 노인에겐 30년을 부려온 소 한 마리가 있다. 소의 수명은 보통 15년, 그런데 이 소의 나이는 무려 마흔살. 살아있다는게 믿기지 않는 이 소는 최 노인의 베스트 프렌드이며, 최고의 농기구이고, 유일한 자가용이다. 귀가 잘 안 들리는 최 노인이지만 희미한 소의 워낭 소리도 귀신같이 듣고 한 쪽 다리가 불편하지만 소 먹일 풀을 베기 위해 매일 산을 오른다. 심지어 소에게 해가 갈까 논에 농약을 치지 않는 고집쟁이다. 소 역시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최 노인이 고삐를 잡으면 산 같은 나뭇짐도 마다 않고 나른다.
무뚝뚝한 노인과 무덤덤한 소. 둘은 모두가 인정하는 환상의 친구다.
요즘 스승은 달마도를 그리고 제자는 매화를 즐겨 그리고 있다. 스승은 달마도를 통해 세상을 구제하려 하고, 제자는 눈바람 뚫고 고혹한 자태를 자랑하는 매화를 통해 부처의 마음을 헤아리려 한다. 30년 넘게 덤덤하게 스승의 뒤를 따라온 제자는 팔순을 넘기고서 "이제야 그림 알 것 같다."는 스승 앞에서 희끗해진 자신의 머리를 쓸어내린다.
목운 선생은 19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아산에게 아버지 이상의 사랑과 정을 느꼈으니 스승이 아니라 아버지 이상의 아버지다.
사랑과 정신, 예술과 심미안을 나눈 이런 동행 멋지지 않은가?.

글:남성숙 광주매일 신문 논설주간

송광사 풍경과 정신 담아낸 수묵화-백승현
송광사 풍경과 정신 담아낸 수묵화

백승현(대동문화 편집장)

송광사 성보박물관에서 오는 5월 1일부터 7월 31일까지 목운木雲 오견규의 수묵화 전시회가 열린다. 전시 주제는 '송광사 가는 길.' 목운은 그동안 송광사보 표지화를 한 해 남짓 그려오면서 송광사의 풍경과 정신을 화폭에 옮겨운 인연으로 이번에 30여점의 작품을 선보이게 된다
목운은 수묵화가로 아산雅山 조방원趙邦元 선생의 제자이다.
목운은 1975년 스물일곱의 나이에 화필경력 전무의 상태로 아산 선생을 찾아가 제자 되기를 청했다. 아산 선생은 일 년여를 지켜보다가 "니가 내 화실을 드나들 때 문 여닫는 것을 보았다. 내일부터 화실에 나오너라. 다만 머리 깎고 수행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거라."고 말하며 제자로 거두어주셨다
사승師僧이 제자를 인가하는 장면과 비슷하다. 목운은 이후로 아산을 지금껏 모시며 이 화두 하나를 마음에 두고 그림을 그렸다. 
'수행하는 사람처럼 그림을 그려라.'
스승 아산은 또 목운에게 '그림을 그릴 때는 붓으로가 아니라 마음으로 그려라'고 비법을 전수해 주었다. 이른바 심외무법心外無法인데 '마음밖에는 다른 법이 없다.' 즉 '마음이 곧 길이고 시작이고 끛이다.' 라는 것이다. 마음 외에 구할 것이 무엇이 있는가? 아니 마음마저도 구할 것이 없다는 것이 부처의 말씀인데, 그래서 목운의 그림은 禪의 기운이 그득하다.
그림법畵法보다는 마음법心法을 중요하게 여긴다.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목운은 스스로를 평평범범平平凡凡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목운의 생활은 범범凡凡하고 생각은 평평平平하다. 청빈하고 고요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이 목운이다. 묵묵히 자기 길을 가면서 편안하고 여유가 넘친다.
목운은 그림을 그릴 때 대상을 가장 편안한 위치에서 관찰한다.
목운은 자기가 그리는 그림의 대상을 자기 식대로 그냥 '애린'이라고 부르는데 그것들은 초가집, 들길, 논, 밭, 바람, 햇살, 나무, 구름, 하늘,낮달
, 새, 물고기, 가축, 새싹, 꽃, 샘물 등이다.
이렇게 가난하고 촌스럽고 순수하고 정겨운 것들, 우리들이 점점 잃어가는
것들을 화폭에 불러 별다른 수식없이 그것들을 배치하고 나머지는 여백으로 남겨둔다.
먹빛의 농담을 적절히 활용하고 채색을 이요해 부드러운 구도로 경쾌하게 붓을 움직여 그린다. 그래서 오견규의 그림을 다른 사람들은 '토속적이고 한국적인 자연과 정서를 소박하게 그리는 서권기書拳氣 있는 그림'이라고 평한다
서권기라는 말은 그림에서 책의 기가 풍긴다는 말인데, 여기에 문자의 향기가 난다는 '문자향文字香'을 덧붙인다. 문인화가의 그림에는 그림과 글씨가 시가 이렇듯 조화롭게 어울려야 하는데 목운이 그렇다.
남종화의 전통을 현대로 넘겨주고 있는 화가이다.
화가는 삶이 곧 그림이고, 화가의 인격이 곧 그가 그린 그림의 격이다.
목운은 선비 정신의 곧음, 노장 사상의 무애無碍, 불가佛家의 선禪 사상과 무소유를 실천하려고 수행하고 있으며 이런 삶의 태도가 그림에도 담겨 있어 철학적이다. 절제와 관조, 그리고 조화와 균형의 철학이다.
목운木雲이라는 호는 '나무와 구름' 또는 '나무 위의 구름', '나무에 구름이듯'이라는 뜻인데, 어떤 듯으로 풀든 상관없이 목운의 그림과 삶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곧고 자유롭다.
운수납자처럼 살고, 수행자처럼 그리는 목운의 그림이 송광사와 어울리지 않을 수 없다. 목운은 송광사보의 표지화를 그리기 훨씬 이전부터 송광사에 자주 들러 '거룩하신 붓다님', '숭고하신 다르마님', '높으신 쌍가님'에 감화 받은 바가 많았다. 그리고 송광사는 승보종찰 다운 본래 면목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찰이기 때문에 그림의 소재가 아주 많았다.
수선사, 세월각, 척주당, 고향수, 삼청교, 침계루 등의 송광사 여러 모습과 스님들의 모습까지 여실히 나타난 그리고 송광사의 법다운 정신들이 오롯이 담긴 그림들이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걸리게 된것이다.
송광사 사부대중들과 송광사를 찾은 모든 사람들 심지어 새들이나 꽃들도 성보박물관 안을 기웃거릴 것이다.
송광사 가는 법희法喜가 하나 더 늘어나는 셈이다.


木雲오견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정신세계-장경화
木雲오견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정신세계

장경화

"나는 이름난 작가보다 존경받는 작가로 남는 것이 나의 화두입니다"라고 말하는 목운 오견규는 먹의 두터움과 잔잔해진 필을 한눈에 감지할 수 있다. 과거나 현재나 그의 예술관은 자연에 대한 사실 재현이나 형식기법보다 더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유의 정신세계와 자연과의 교감에 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스승 아산 조방원 선생으로부터 사사와 교화를 통해 형성된 '자연주의의 천인합일'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군자로 시작하였으나 산수화의 작가로 남기 위하여 사유와 정신세계, 직관과 관조를 통하여 예술세계를 확보하고 대상(자연)에 대한 현실적 표현이나 사실적인 묘사의 기법에 일탈하여 작품에 내재해 있는 정신세계를 추구하고 있다. 이러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가적 정신세계의 근가는 모든 것을 버리는 일을 시작으로 그는 작품에서 절제를 통하여 대담한 화면 구성과 면처리, 담백한 색감 등으로 인위적인 조작 없이 자연본연의 질서대로 전개되는 상태를 그려내고있다.

그의 최근 작품 '가을소리'는 이러한 그의 예술관을 뒤받침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넓은 들판에 무성하게 자란 갈대밭을 화면에 가득하게 메우고 한 마리의 새가 넓은 여백과 갈대밭 사이를 날고 있는 그림이다. 화면 구성과 초묵의 강함과 단묵의 부드러운 갈대 사이로 날고 있는 새는 늦가을에 위치한 자신을 상징하고 삶의 외로움을 전해주면서 새 한 마리를 통하여 새로움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주고 , 깊은 사유를 통한 일탈을 꿈꾸는 무유(無遺)의 세계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또한 화면 구성에 있어서 갈대의 배치와 여백의 구성은 시각적으로 대담성을 드러내고 자연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그의 의식 깊숙한 본성에 내재하고 있음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또한 이 시대에 갖는 전통회화의 존재가치를 인식시켜 주는 작품이라고 본다. 이렇게 그는 무욕을 통하여 자연에 순응함을 목가적이고 서정적으로 담담하게 그림을 그려내고 있으며, 자연에 대한 이해와 표현의 욕심을 버리고 절제를 통하여 자유를 누리는 초연함이 드러나고 있다. 이러한 측면은 일상의 담백함에서 묻어나오고, 강직한 눈빛을 통하여 드러내고 있다.

최근 작품 '세인봉'과 '홍매화'는 문인화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지금까지 사용했던 붓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 막대기로 그려 흥미로움을 더하고 있으며 실험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목운은 초묵과 단묵을 잔잔하게 사용하여 그림은 무거움을 벗어내고 밝아졌으며 다양한 색상과 함께 경쾌함까지 보여주고있다. 특히 세련된 필의 움직임과 사물의 묘사력은 화면구성에 이러함을 더해주고 과거에 비하여 작품에 깊이를 느끼게 해주고 있다. 먹을 화선지에 칠하고 다시 반복적인 덧칠로 그의 작품을 시각적 두터움과 함께 심미적인 효과를 증폭시키고 있다고 보여 진다 . 이렇듯 목운은 그의 스승에게서 전수된 정신세계와 수묵화의 조형성을 차별화시켜 스승과 차별화된 예술세계 구축으로 그 성과는 점차 확대되어 가리라 본다.

붓으로 부르는 내면의 노래-목운 오견규의 회화세계-강경호
붓으로 부르는 내면의 노래
목운 오견규의 회화세계 

강경호

1. 목운 오견규의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전통서정시를 읽는 느낌을 받곤 한다. 현대성 추구라는 이름으로 그려지는 많은 작가들의 난해한 조형성이 보는 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곤 하는데, 그의 그림은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하고 마음의 여유를 준다. 뿐만 아니라 그림을 통해 가난한 선비의 꼿꼿하고 풍요로운 정신세계를 느끼게 해준다. 이렇듯 정신적 품격까지 드러내는 그의 그림의 힘은 가난하지만 물질적 욕망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그의 삶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수많은 작가들이 정신적 건전성보다는 예술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탐하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는 풍토에 그는 늘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매우 엄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옳지 않은 일이면 누구든지 쉽게 타협을 하지 않으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그의 길은 현실적으로 매우 외롭고 쓸쓸한 길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그의 삶의 자세는 물론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일이긴 하지만, 스승인 아산 조방원(雅山 趙邦元) 선생과의 인연으로 더욱 몸에 배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목운은 1947년 광주시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방황과 좌절을 하게 되는데, 그에게 어떤 말할 수 없는 시련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그는 월남전에 참여하기도 하는데, 줄곧 그림을 그리고 싶어 몸부림치지만 스승을 만나지 못하다가 1975년 아산 선생의 화실을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스승은 쉽게 제자로 받아들일 수 없어 몇 개월 동안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를 정식으로 제자로 받아들이게 된다. 스승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단지 사물을 붓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오견규의 화실 벽에 걸려있는 [心外無法]이라는 글씨가 그것을 짐작하게 한다. `마음밖에 길이 없다', 즉 `마음 속에서 길을 찾으라'는 뜻이다. 그렇듯 스승인 아산 조방원 선생은 물질적 욕망을 탐하는 시대에 최소한 문인화가가 되려면 참다운 인간의 `인격'을 그림그리는 방법보다 더 강조했다. 그림을 기교로 그리는 것보다 인간의 착한 본성을 지키는 것이 그림임을 묵묵히 제자에게 가르친 것이다.
오늘날 스승을 하나의 기능직으로 이해하는 시대에 스승과 제자가 가끔 만나 목욕탕에서 등을 밀어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듯 고매한 인품을 늘 새기고 있는 그의 화실 벽에는 혼자 산책하고 있는 스승의 사진이 걸려 있다. 외롭고 쓸쓸하지만 인간의 가치를 지키며 살아온 스승의 인품을 좇는 제자의 아름다운 마음이 배어있는 일면이다.

나는 이 글의 서두에 그의 그림에서 마치 전통적 서정시가 떠오른다고 하였다. 그것은 그의 그림에 흐르는 어떤 기운들이 한국적인 정서들을 물씬 자아내게 하며, 화면 어디선가에서 누군가 부르는 옛 선비들의 노래, 때로는 우리네 선조들이 살았던 삶의 모습에서 스며나오는 감동의 떨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의 고백처럼 그가 유년에 체험했던 토속적 정서들이 오히려 전통적 한국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고달픈 삶의 현장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정서를 다시금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그림이 단순히 복고적 취향을 바탕으로 한 전통적 정서의 재생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림의 소재나 주제는 남도적인 향토성에 관심을 보여주면서 형식적 실험과 탐구를 부단히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그림은 관념보다는 사실을 추구하는데, 우리의 산과 들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그러면서도 특별하거나 눈에 띄는 어떤 대상이라기보다는 늘 우리의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들을 소재로 끌여온다. 하지만 편각구도(偏角構圖)의 풍경 위로 가파르고 빠른 언덕과 능선, 그리고 가까운 나뭇가지의 내밀한 묘사, 화면 곳곳에 맑게 비치는 담채(淡彩), 때로 선명하게 강조되는 색채 등으로 하여 보잘 것 없는 대상조차 보는 이로 하여금 특별한 느낌을 받게 한다. 이것은 자연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스승의 가르침대로 마음으로 대상을 따스하게 어루만지기 때문이다. 만약에 온화한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보지 않고 대상을 단순히 하나의 모티브로 생각하여 그림을 그린다고 가정할 때 그 그림은 단순한 그림일 뿐이다. 즉 살아있는 그림이 아니라 먹과 물감이 칠해진 대상을 닮은 그림이 되고 말 것이다. 목운의 그림은 자연의 형상을 화면에 옮긴 것만이 아니라 자연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새로운 생명체로 창조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상은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동기유발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즐겨 쓰는 편각구도는 서구 회화양식의 세례를 받은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많은 작가들이 그로 인해 남화의 본질이라거나 정체성이 변질, 혹은 왜곡된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서양화의 기법과 구도를 자신의 그림에 차용하기는 하지만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의 전통과 정서를 새롭게 해석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릴 때 그의 시선은 거의 대상의 중간쯤 되는 곳에서 내려보는 방법을 즐겨 쓴다. 그랬을 때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를 얻게 된다. 만약에 그가 낮은 곳에서 위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림을 그렸을 때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쳐다보는 시각적 부담 뿐만 아니라 심리적 부담도 수반하게 된다. 한편으로 전지적 시점에서 늘 아래로 내려보는 그림을 그렸다고 가정할 때는 오만한 그의 눈길이 그림에 드러나게 된다. 선비적 풍모를 갖고 이를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 그로서는 쉽게 차용하기 어려운 기법이 되고 말 것이다. 


2.

1986년, 첫 작품전 때 선보였던 「입동(1)」에서는 마을 앞 들판 가운데를 낮게 흐르는 냇물이 있고 들판 끝에는 두세 채의 민가가 머물러 있다. 이 그림을 그릴 때의 화가의 위치는 약간 높은 곳에서 내려보는 풍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경의 냇물이 훤히 드러나게 묘사되었고 들판 끝에 집이 몇 채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민가 뒤의 산은 뭉개어 하나의 흐릿한 배경이 되어 전경과 중경을 강조하는 안정된 기법과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주로 먹을 써서 사물의 윤곽을 드러내고 담채로써 추수가 끝난 겨울 들판의 풍경을 담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변두리」 풍경 역시 낮은 언덕 정도의 위치에서 건너편 언덕에 다닥다닥 붙은 집과 위로 오르는 골목길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먹과 담채로써 강한 색을 누르며 담백한 정서를 환기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 배경을 하늘로 처리하여 시선을 `변두리 마을'로 모으고 있다.

비교적 초기의 작품인 첫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화면이 그다지 밝지 않다. 하지만 감정을 억눌러 필요없는 감정 개입을 막고 있다 하겠다.
이후 그의 두 번째 작품전에서 선보인 그림들은 현란할 정도로 화면이 채색으로 변모해 있다. 다소 화면 구성에서 나무와 집과 숲의 구조물이 복잡하게 배치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는 그의 의지가 강렬하게 배어 있다. 그림을 통해 그는 생생한 자연의 생기를 재현해내는 동시에 남화의 전통인 수묵산수의 사상과 철학을 체득하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작품전 이후 그의 그림의 화면은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끊임없이 형식의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화면 구성이 대담해진 것이다. 이를테면 첫 작품전에서 보여준 그의 화면은 전통적인 우리의 회화양식을 비교적 충실하게 지켜왔다고 할 수 있는데, 1994년 김병모, 정광주, 이부재 등과 함께 한 작품전에 출품한 향·1(鄕·1)에서는 전경에 그늘 속의 대문간을 먹으로 그려 배치하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중경에 가을 장독대를 그려 넣었다. 대문간의 검은 그늘로 인해 주제가 클로즈업된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향(鄕·2)에서도 기존의 구도와는 달리 봄날의 풍경으로 짐작되는 밭을 전면에 클로즈업시키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마을은 풍경의 끝에 조그마하게 밀어 놓았다. 이 그림에서 밭두렁인지 길인지를 여러 갈래 곡선으로 배치하여 들판의 단조로움을 깨려는 노력이 역력하게 보인다.

1996년 위의 작가들과 함께 한 작품전에서는 더욱 대담한 화면구성을 시도한다. 「돌아가는 길」에서는 S자로 급히 돌아가는 들녘의 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목운의 생각을 좀더 내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의 화면에서 사람의 모습은 늘 작게 그려져 있다. 때로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 이것은 그가 사람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는 증거이다. 큰 나무 아래로 지나가는 길과 그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자연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겸손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의 오른쪽 전경 등 화면을 먹으로 검게 칠하므로써 길을 따라가는 사람의 모습에 주목하도록 시선을 유도하고 있음에서 그의 화면 배치를 위한 계산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가 음미해야 할 또 다른 생각은 그가 지금껏 고여 있거나 멈춰있는 어느 한 순간을 마치 카메라로 포착한 듯한 그런 풍경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그의 최근 작품들과 연계해 생각할 때 이 그림은 매우 의미있는 출발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격이나 품위를 중시하는 그의 성품이 이 그림에 투사되기 시작한 점은 그가 비로소 그 다운 그림을 본격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문인화, 또는 남화의 본령을 자신의 방법으로 구축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하겠다.

이때 출품한 작품들 중 「산간(山間)」이나 「청학동에서」도 단조로우면서도 대담한 화면구성이 돋보인다. 주로 묵화로 그려진 이 작품들은 오르막 또는 내리막 시선으로 경사진 다랑이 전답의 두렁이 마치 뱀이 꿈틀대는 듯한 곡선의 흐름으로 요동치고 있다. 화면 오른쪽, 혹은 전경을 먹으로 검게 칠해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주제는 특별한 아주 단조로운 풍경이다. 이쯤에 이르러 그의 생각은 인간의 흔적이 머문 `산간'이나 `청학동'을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로움을 넘어서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쯤에 이르러 그의 마음은 인간의 삶의 형식이 자연을 떠나 살 수 없으며, 들판 끝에 머문 마을이 왜소한 것처럼 사람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그의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된 것이리라. 그것은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본래 모습을 발견한 것이며, 일찍이 유년에 체험한 환몽 같은 고향의 이미지를 발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오랫동안 남도의 산야를 누비며 다니며 실경을 담아내며 어떤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닐까.

2000년 `묵노회전'에서 선보인 작품에서는 지금껏 어느 한 귀퉁이에 붙박혀 있던 오래된 당산나무 한 그루가 온통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며 우람하게 서 있는 모습은 인간의 존재를 겸손하게 한다. 이 당산나무 가지를 스치며 오랜 세월이 흘러갔음을 생각할 때, 당산나무 전경에 검게 숨겨진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한갓 잠시 부는 바람같은 것임을 당산나무를 통해 말하고 있다.

이제 목운은 단순히 어떤 사물의 형태만을 보지 않는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재해석하여 대상의 본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2001년 가을에 발표한 작품전에서도 그 연장선상에서 자연과 인간의 존재를 목운답게 재해석해 내고 있다. 화면은 보다 산뜻하게 밝아졌고 그동안 실험했던 화면구성이 종합적으로 선보인다. 묵화로 그렸던 당산나무가 채색되고 다랑이 밭도 채색으로 색의 옷을 입었다. 그러나 나는 이들 작품 중에서 또 다른 변화에 주목한다. 그동안 그가 붙인 그림의 제목은 다른 작가들과 별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아침을 위한」, 「그 오랜 세월의 기억들」, 「산중일기」, 「비상을 위하여」, 「스스로 그런 곳」, 「잃어버린 것을 위하여」, 「빛나는 건 별빛만 아니다」 등이 보여준 것처럼 자연을 통해 인간의 삶과 존재에 대해 보다 깊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전의 주제를 `나무에 구름이듯'이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목운 자신이 지향하는 삶과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다. 주로 먹으로 그린 「아침을 위한」에서는 추수가 끝난 들판 끝에 옥수수단인지 짚가리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들판에서 추수한 곡식을 세워둔 단조로운 풍경이 있을 뿐이다. 어떤 영감을 주는 이 작품은 추수가 끝난 빈 들판의 쓸쓸함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혼자 왔다 혼자 자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단독자 인간의 쓸쓸함을 숙연하게 말해주고 있다. 바람부는 들판에 놓여있는 옥수수단처럼 추수가 끝난 늦가을의 풍경이 전하는 메시지는 숙명적인 인간의 존재가 이 쓸쓸함의 힘으로 다시 겨울을 보내고, 어둠을 지나 아침을 맞는 것은 아닐까. 그것을 암시하는 작품으로 「비상을 위하여」가 있다. 역시 빈 들판 위를 날고 있는 새 한 마리는 단독자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러나 겨울과 어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절망과 좌절에 빠질 수는 없다. 날개짓을 해야만이 하늘을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보여주는 그의 작품들은 앞의 연장선상에 있다. 2002년에 발표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과 2003년에 발표한 「귀로」 역시 우리에게 어떤 영감을 갖게 하는 작품들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앞의 「비상을 위하여」처럼 옥수수밭인지 갈대밭인지를 떠오르게 하는 풍경 위를 나는 새 한 마리를 그리고 있을 뿐이다. 단독자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유한한 인간의 존재에 대해 사색하게 한다.

특히 「귀로」에서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 위로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이 단조로운 그림 역시 단독자 인간의 존재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림의 제목이 말해주듯 `돌아가는 길'이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쓸쓸하게 하는가. 이것은 늘 외로움 속에서 삶을 헤쳐가는 그의 삶에서 연유한 것이 아닐 수 없다.


3.

목운을 가난하지만 불의와 삿된 욕망과 쉽게 타협하지 않는 우리 시대의 선비라고 부르겠다. 소년시절부터 오직 그림에 대한 열망 하나로 자신의 길을 걸어온 쓸쓸한 단독자 목운은 언제부턴가 산에 오르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오래 전부터 남도의 산야를 휩쓸고 다니면서 눈에 밟히는 그 풍경들이 때로 정겹고 때로 스승처럼 가르침을 주고, 때로 쓸쓸하게 느끼며 자신의 예술세계에 끌어들이고 있다. 그는 산야에 돌아다니면서도 강아지풀이거나 매화꽃잎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살핀다.
옛 전남 도청 근처 금동에 있는 그의 화실에서 그를 만나 차를 마시며 담소할 때마다 늘 내가 말을 많이 하지만 몇 마디 말로도 나를 감동시키며 즐겁게 하는 목운의 인간적 품성은 살아있는 것은 물론 죽어있는 것까지도 따스하게 바라보는 그의 마음에서 연유함을 나는 잘 안다. 어쩌면 그에게 남화니, 북화니, 문인화니, 사군자니 하는 갈래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것들을 넘어 참다운 인간의 가치추구와 존재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붓으로 부르는 내면의 노래-목운 오견규의 회화세계-강경호
붓으로 부르는 내면의 노래
목운 오견규의 회화세계

강경호

1. 목운 오견규의 그림을 볼 때마다 나는 전통서정시를 읽는 느낌을 받곤 한다. 현대성 추구라는 이름으로 그려지는 많은 작가들의 난해한 조형성이 보는 이들에게 스트레스를 주곤 하는데, 그의 그림은 마치 고향에 돌아온 듯 편안하고 마음의 여유를 준다. 뿐만 아니라 그림을 통해 가난한 선비의 꼿꼿하고 풍요로운 정신세계를 느끼게 해준다. 이렇듯 정신적 품격까지 드러내는 그의 그림의 힘은 가난하지만 물질적 욕망보다는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그의 삶에서 연유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수많은 작가들이 정신적 건전성보다는 예술을 통해 물질적 풍요를 탐하기 위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물불을 가리지 않는 풍토에 그는 늘 자신의 이름 석 자를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매우 엄중한 태도를 보이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옳지 않은 일이면 누구든지 쉽게 타협을 하지 않으며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그의 길은 현실적으로 매우 외롭고 쓸쓸한 길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그의 삶의 자세는 물론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일이긴 하지만, 스승인 아산 조방원(雅山 趙邦元) 선생과의 인연으로 더욱 몸에 배인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목운은 1947년 광주시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자살을 기도하기도 한다. 감수성이 예민한 나이에 방황과 좌절을 하게 되는데, 그에게 어떤 말할 수 없는 시련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그는 월남전에 참여하기도 하는데, 줄곧 그림을 그리고 싶어 몸부림치지만 스승을 만나지 못하다가 1975년 아산 선생의 화실을 방문하게 된다. 그러나 스승은 쉽게 제자로 받아들일 수 없어 몇 개월 동안 그림을 그리게 한다. 그리고 얼마 후 그를 정식으로 제자로 받아들이게 된다. 스승은 그림을 그리는 것은 단지 사물을 붓으로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가르쳤다. 오견규의 화실 벽에 걸려있는 [心外無法]이라는 글씨가 그것을 짐작하게 한다. `마음밖에 길이 없다', 즉 `마음 속에서 길을 찾으라'는 뜻이다. 그렇듯 스승인 아산 조방원 선생은 물질적 욕망을 탐하는 시대에 최소한 문인화가가 되려면 참다운 인간의 `인격'을 그림그리는 방법보다 더 강조했다. 그림을 기교로 그리는 것보다 인간의 착한 본성을 지키는 것이 그림임을 묵묵히 제자에게 가르친 것이다.
오늘날 스승을 하나의 기능직으로 이해하는 시대에 스승과 제자가 가끔 만나 목욕탕에서 등을 밀어주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렇듯 고매한 인품을 늘 새기고 있는 그의 화실 벽에는 혼자 산책하고 있는 스승의 사진이 걸려 있다. 외롭고 쓸쓸하지만 인간의 가치를 지키며 살아온 스승의 인품을 좇는 제자의 아름다운 마음이 배어있는 일면이다.

나는 이 글의 서두에 그의 그림에서 마치 전통적 서정시가 떠오른다고 하였다. 그것은 그의 그림에 흐르는 어떤 기운들이 한국적인 정서들을 물씬 자아내게 하며, 화면 어디선가에서 누군가 부르는 옛 선비들의 노래, 때로는 우리네 선조들이 살았던 삶의 모습에서 스며나오는 감동의 떨림 같은 것이 그것이다. 그의 고백처럼 그가 유년에 체험했던 토속적 정서들이 오히려 전통적 한국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고달픈 삶의 현장에서 잃어버린 우리의 정서를 다시금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그림이 단순히 복고적 취향을 바탕으로 한 전통적 정서의 재생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림의 소재나 주제는 남도적인 향토성에 관심을 보여주면서 형식적 실험과 탐구를 부단히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그림은 관념보다는 사실을 추구하는데, 우리의 산과 들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그러면서도 특별하거나 눈에 띄는 어떤 대상이라기보다는 늘 우리의 주변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들을 소재로 끌여온다. 하지만 편각구도(偏角構圖)의 풍경 위로 가파르고 빠른 언덕과 능선, 그리고 가까운 나뭇가지의 내밀한 묘사, 화면 곳곳에 맑게 비치는 담채(淡彩), 때로 선명하게 강조되는 색채 등으로 하여 보잘 것 없는 대상조차 보는 이로 하여금 특별한 느낌을 받게 한다. 이것은 자연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스승의 가르침대로 마음으로 대상을 따스하게 어루만지기 때문이다. 만약에 온화한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보지 않고 대상을 단순히 하나의 모티브로 생각하여 그림을 그린다고 가정할 때 그 그림은 단순한 그림일 뿐이다. 즉 살아있는 그림이 아니라 먹과 물감이 칠해진 대상을 닮은 그림이 되고 말 것이다. 목운의 그림은 자연의 형상을 화면에 옮긴 것만이 아니라 자연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새로운 생명체로 창조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상은 그림을 그리는데 필요한 동기유발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즐겨 쓰는 편각구도는 서구 회화양식의 세례를 받은 것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많은 작가들이 그로 인해 남화의 본질이라거나 정체성이 변질, 혹은 왜곡된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는 서양화의 기법과 구도를 자신의 그림에 차용하기는 하지만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우리의 전통과 정서를 새롭게 해석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림을 그릴 때 그의 시선은 거의 대상의 중간쯤 되는 곳에서 내려보는 방법을 즐겨 쓴다. 그랬을 때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심리적 부담을 덜어주는 효과를 얻게 된다. 만약에 그가 낮은 곳에서 위로 바라보는 시선으로 그림을 그렸을 때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쳐다보는 시각적 부담 뿐만 아니라 심리적 부담도 수반하게 된다. 한편으로 전지적 시점에서 늘 아래로 내려보는 그림을 그렸다고 가정할 때는 오만한 그의 눈길이 그림에 드러나게 된다. 선비적 풍모를 갖고 이를 삶에서 실천하고 있는 그로서는 쉽게 차용하기 어려운 기법이 되고 말 것이다. 


2.

1986년, 첫 작품전 때 선보였던 「입동(1)」에서는 마을 앞 들판 가운데를 낮게 흐르는 냇물이 있고 들판 끝에는 두세 채의 민가가 머물러 있다. 이 그림을 그릴 때의 화가의 위치는 약간 높은 곳에서 내려보는 풍경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경의 냇물이 훤히 드러나게 묘사되었고 들판 끝에 집이 몇 채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민가 뒤의 산은 뭉개어 하나의 흐릿한 배경이 되어 전경과 중경을 강조하는 안정된 기법과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주로 먹을 써서 사물의 윤곽을 드러내고 담채로써 추수가 끝난 겨울 들판의 풍경을 담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변두리」 풍경 역시 낮은 언덕 정도의 위치에서 건너편 언덕에 다닥다닥 붙은 집과 위로 오르는 골목길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도 먹과 담채로써 강한 색을 누르며 담백한 정서를 환기시키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리고 마을 배경을 하늘로 처리하여 시선을 `변두리 마을'로 모으고 있다.

비교적 초기의 작품인 첫 개인전에 출품한 작품들은 화면이 그다지 밝지 않다. 하지만 감정을 억눌러 필요없는 감정 개입을 막고 있다 하겠다.
이후 그의 두 번째 작품전에서 선보인 그림들은 현란할 정도로 화면이 채색으로 변모해 있다. 다소 화면 구성에서 나무와 집과 숲의 구조물이 복잡하게 배치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새로운 변화를 갈망하는 그의 의지가 강렬하게 배어 있다. 그림을 통해 그는 생생한 자연의 생기를 재현해내는 동시에 남화의 전통인 수묵산수의 사상과 철학을 체득하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

두 번째 작품전 이후 그의 그림의 화면은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는데, 그것은 그가 끊임없이 형식의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화면 구성이 대담해진 것이다. 이를테면 첫 작품전에서 보여준 그의 화면은 전통적인 우리의 회화양식을 비교적 충실하게 지켜왔다고 할 수 있는데, 1994년 김병모, 정광주, 이부재 등과 함께 한 작품전에 출품한 향·1(鄕·1)에서는 전경에 그늘 속의 대문간을 먹으로 그려 배치하고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중경에 가을 장독대를 그려 넣었다. 대문간의 검은 그늘로 인해 주제가 클로즈업된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또한 향(鄕·2)에서도 기존의 구도와는 달리 봄날의 풍경으로 짐작되는 밭을 전면에 클로즈업시키는 대담함을 보여준다. 마을은 풍경의 끝에 조그마하게 밀어 놓았다. 이 그림에서 밭두렁인지 길인지를 여러 갈래 곡선으로 배치하여 들판의 단조로움을 깨려는 노력이 역력하게 보인다.

1996년 위의 작가들과 함께 한 작품전에서는 더욱 대담한 화면구성을 시도한다. 「돌아가는 길」에서는 S자로 급히 돌아가는 들녘의 길을 통해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목운의 생각을 좀더 내밀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의 화면에서 사람의 모습은 늘 작게 그려져 있다. 때로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기도 한다. 이것은 그가 사람을 자연의 일부로 인식하는 증거이다. 큰 나무 아래로 지나가는 길과 그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모습에서 우리들의 `자연 속에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겸손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의 오른쪽 전경 등 화면을 먹으로 검게 칠하므로써 길을 따라가는 사람의 모습에 주목하도록 시선을 유도하고 있음에서 그의 화면 배치를 위한 계산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가 음미해야 할 또 다른 생각은 그가 지금껏 고여 있거나 멈춰있는 어느 한 순간을 마치 카메라로 포착한 듯한 그런 풍경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는 그의 최근 작품들과 연계해 생각할 때 이 그림은 매우 의미있는 출발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인격이나 품위를 중시하는 그의 성품이 이 그림에 투사되기 시작한 점은 그가 비로소 그 다운 그림을 본격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문인화, 또는 남화의 본령을 자신의 방법으로 구축했다는 의의를 갖는다 하겠다.

이때 출품한 작품들 중 「산간(山間)」이나 「청학동에서」도 단조로우면서도 대담한 화면구성이 돋보인다. 주로 묵화로 그려진 이 작품들은 오르막 또는 내리막 시선으로 경사진 다랑이 전답의 두렁이 마치 뱀이 꿈틀대는 듯한 곡선의 흐름으로 요동치고 있다. 화면 오른쪽, 혹은 전경을 먹으로 검게 칠해 주제를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주제는 특별한 아주 단조로운 풍경이다. 이쯤에 이르러 그의 생각은 인간의 흔적이 머문 `산간'이나 `청학동'을 바라보는 눈길이 예사로움을 넘어서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쯤에 이르러 그의 마음은 인간의 삶의 형식이 자연을 떠나 살 수 없으며, 들판 끝에 머문 마을이 왜소한 것처럼 사람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그의 마음의 눈으로 보게 된 것이리라. 그것은 자본주의 산업사회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본래 모습을 발견한 것이며, 일찍이 유년에 체험한 환몽 같은 고향의 이미지를 발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그는 오랫동안 남도의 산야를 누비며 다니며 실경을 담아내며 어떤 깨달음에 이른 것이 아닐까.

2000년 `묵노회전'에서 선보인 작품에서는 지금껏 어느 한 귀퉁이에 붙박혀 있던 오래된 당산나무 한 그루가 온통 화면 대부분을 차지하며 우람하게 서 있는 모습은 인간의 존재를 겸손하게 한다. 이 당산나무 가지를 스치며 오랜 세월이 흘러갔음을 생각할 때, 당산나무 전경에 검게 숨겨진 밭을 일구며 살아가는 인간의 삶이 한갓 잠시 부는 바람같은 것임을 당산나무를 통해 말하고 있다.

이제 목운은 단순히 어떤 사물의 형태만을 보지 않는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재해석하여 대상의 본질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2001년 가을에 발표한 작품전에서도 그 연장선상에서 자연과 인간의 존재를 목운답게 재해석해 내고 있다. 화면은 보다 산뜻하게 밝아졌고 그동안 실험했던 화면구성이 종합적으로 선보인다. 묵화로 그렸던 당산나무가 채색되고 다랑이 밭도 채색으로 색의 옷을 입었다. 그러나 나는 이들 작품 중에서 또 다른 변화에 주목한다. 그동안 그가 붙인 그림의 제목은 다른 작가들과 별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아침을 위한」, 「그 오랜 세월의 기억들」, 「산중일기」, 「비상을 위하여」, 「스스로 그런 곳」, 「잃어버린 것을 위하여」, 「빛나는 건 별빛만 아니다」 등이 보여준 것처럼 자연을 통해 인간의 삶과 존재에 대해 보다 깊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읽을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전의 주제를 `나무에 구름이듯'이라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목운 자신이 지향하는 삶과 세계관이 반영된 것이다. 주로 먹으로 그린 「아침을 위한」에서는 추수가 끝난 들판 끝에 옥수수단인지 짚가리인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들판에서 추수한 곡식을 세워둔 단조로운 풍경이 있을 뿐이다. 어떤 영감을 주는 이 작품은 추수가 끝난 빈 들판의 쓸쓸함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혼자 왔다 혼자 자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단독자 인간의 쓸쓸함을 숙연하게 말해주고 있다. 바람부는 들판에 놓여있는 옥수수단처럼 추수가 끝난 늦가을의 풍경이 전하는 메시지는 숙명적인 인간의 존재가 이 쓸쓸함의 힘으로 다시 겨울을 보내고, 어둠을 지나 아침을 맞는 것은 아닐까. 그것을 암시하는 작품으로 「비상을 위하여」가 있다. 역시 빈 들판 위를 날고 있는 새 한 마리는 단독자 인간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러나 겨울과 어둠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절망과 좌절에 빠질 수는 없다. 날개짓을 해야만이 하늘을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보여주는 그의 작품들은 앞의 연장선상에 있다. 2002년에 발표한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과 2003년에 발표한 「귀로」 역시 우리에게 어떤 영감을 갖게 하는 작품들이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앞의 「비상을 위하여」처럼 옥수수밭인지 갈대밭인지를 떠오르게 하는 풍경 위를 나는 새 한 마리를 그리고 있을 뿐이다. 단독자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인식과 유한한 인간의 존재에 대해 사색하게 한다.

특히 「귀로」에서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길 위로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이 그려져 있다. 이 단조로운 그림 역시 단독자 인간의 존재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림의 제목이 말해주듯 `돌아가는 길'이지만 보는 이로 하여금 쓸쓸하게 하는가. 이것은 늘 외로움 속에서 삶을 헤쳐가는 그의 삶에서 연유한 것이 아닐 수 없다.


3.

목운을 가난하지만 불의와 삿된 욕망과 쉽게 타협하지 않는 우리 시대의 선비라고 부르겠다. 소년시절부터 오직 그림에 대한 열망 하나로 자신의 길을 걸어온 쓸쓸한 단독자 목운은 언제부턴가 산에 오르는 버릇이 생겼다. 물론 오래 전부터 남도의 산야를 휩쓸고 다니면서 눈에 밟히는 그 풍경들이 때로 정겹고 때로 스승처럼 가르침을 주고, 때로 쓸쓸하게 느끼며 자신의 예술세계에 끌어들이고 있다. 그는 산야에 돌아다니면서도 강아지풀이거나 매화꽃잎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애정어린 시선으로 살핀다.
옛 전남 도청 근처 금동에 있는 그의 화실에서 그를 만나 차를 마시며 담소할 때마다 늘 내가 말을 많이 하지만 몇 마디 말로도 나를 감동시키며 즐겁게 하는 목운의 인간적 품성은 살아있는 것은 물론 죽어있는 것까지도 따스하게 바라보는 그의 마음에서 연유함을 나는 잘 안다. 어쩌면 그에게 남화니, 북화니, 문인화니, 사군자니 하는 갈래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 모른다. 그가 그림을 그리는 일은 그것들을 넘어 참다운 인간의 가치추구와 존재방식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먹빛의 채색의 감각적 조화 /오견규의 삶과 그림-문순태
먹빛의 채색의 감각적 조화 /오견규의 삶과 그림

문순태 (소설가,광주대교수)

나는 오래 전부터 雅山화백 곁에는 늘 오견규가 서성거리고 있는 것을 보아왔다. 존경하는 분의 제자를 만나면 도반(道伴)의 정같은 것을 느껴온터라, 나는 그에게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그의 첫 인상은 약간 껄렁하게 느껴진다. 아마 깐깐하고도 다부진 체격하며, 예사롭지 않아보이는 민첩성과 날카로운 눈빛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언제 보아도 변하지 않는 청년의 모습 그대로다. 언젠가 "왜 그렇게 늙을 줄을 모르느냐."고 넌지시 물었더니, "지금까지 무릎을 꿇거나 손바닥 빌지 않고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말에서 그의 올곧으면서도 자유로운 예술가적 삶을 가늠할 수가 있다.
그런데 그의 나이 어느덧 이순을 바라보는 55세의 초로기에 들어섰고, 아산선생 문하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한지 25년이 되었다고 한다. 화가 나이 55세라면 한창 자기세계를 꽃피울 때가 아닌가. 하기야, 붓을 잡으면서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는 그는 전남도전 초대작가에 심사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이만하면 화가로서 궤도진입에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고 보여진다.
76년도 무턱대고 아산선생을 찾아가 그림공부를 하겠다고 떼를 쓰다시피 했을 때 까지만해도 그의 곤고한 삶은 지치고 황폐해 있었다. 그를 처음 본 아산선생의 첫마디는 "문 열고 들어오는 것 보고 자네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였을 정도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안 사정이 어려워 더 이상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군에 입대한 그는 월남에 파병되었고 수색중대 근무를 했다. 그의 암울했던 삶의 궤적처럼 그의 모습은 거칠어보일수밖에 없었다. 아산선생은 "마음을 희게 비우고 수행하는 자세로 그림을 시작할 수 있겠느냐"고 거듭 물은후 확답을 받고서야 제자로 받아들였다. 아산선생은 그에게 그림을 가르치기보다는 우선 사람부터 올바르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으리라.
오견규의 그림은 농촌을 배경으로 쓴 한편의 서정시처럼 아름답다. 그림이 소박하면서도 상큼한 느낌을 준다. 전라도 실경을 즐겨 그리는 그의 그림에는 전라도적 정서와 섬세한 감성이 잘 살아 있다. 기엇은 그가 문학적 감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에는 황토빛 전라도 정서가 있고 시가 있고 질박한 농민의 삶이 물씬 묻어있다.
특히 최근 그의 그림은 색채가 화려해지고 있다. 그 화려함은 무거운 먹색에 매몰되지 않아 상쾌한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의 색채는 사뭇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수묵의 먹빛 속에 돌출적으로 노랑 은행나무나 짙은 초록빛 보리밭이 등장한다. "참을 수 없다는 듯 강하게 드러나는 색채의 조율은 그다운 자연관이 두드러지는 대목"이라는 장원석교수의 지적처럼 먹빛과 도발적일만큼 화려한 채색이 조화를 이루어 감각적인 미감을 한껏 살려주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그림은 대중과의 감각적 영합으로 흐르기 쉽다. 앞으로 그가 경계해야 할 점이기도 하다. 
그가 갈 길은 역시 밝고 명쾌한 새로운 수묵화의 세계이다.누구나 그렇듯이 오견규 역시 그림을 시작하면서 스승의 화풍을 그대로 본땃다.
그러다가 자신의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충동을 느꼇다.아산 역시 제자들에게 자기만의 독창적인 작품세계 구축을 원했다.
93년 무렵부터 오견규는 늘 새로운 수묵세계를 꿈꾸었다. 어떻게 하면 수묵화가 어둡고 무거운 것에서 벗어나 밝고 경쾌한 느낌을 살려낼 수 있을까 고민했다. 갈등 끝에 얻어낸 그림이 94년 겨울 4인전에 출품했던<월출산>을 비롯해서 96년의 <청학동에서>,2001년의 <새인봉을 지나며><낮달은 보이지 않고>같은 일련의 밝은 수묵화이다. 밝고 경쾌한 느낌을 주는 이 그림들은 먹을 통해 사물의 사실성을 극대화시켜 마치 흑백 사진 에서처럼, 사색적이고 은유적은 깊은 맛을 느낄 수가 있다.
이들 그림에서는 먹그림이 주는 중량감과 경쾌함, 어두움과 밝음이 조화를 이루어 감각적 서정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스승인 아산이 일필휘지의 발묵(潑墨)과 파묵(破墨)으로 여러가지 묵색을 드러낸다면 오견규는 적묵법(積墨法)으로 먹색의 무검우과 어두움을 감추면서, 새로운 먹빛을 만들어내고자 한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목기에 옻칠을 하듯, 한 작품에 10일 정도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먹색을 덧칠하여 밝은 먹색을 얻어낸다. 배접한 다음에 다시 덧칠을 하면 먹색이 탈색되지도 않는다. 그는 밝고 리드미컬한 먹색을 얻어내기 위해 한번 쓴 벼루는 반드시 깨끗하게 씻어낸 다음에 먹을 간다고 했다. 1차구성 자체가 없어지도록까지 반복적인 덧칠을 하게 되면 그 위에서 심미적인 새로운 먹빛이 스멀스멀 살아올라온다고 했다.
지금 오견규는 색채와 먹빛의 새로운 조율을 시도하고 있다. 흑백 위에 색채를 가미하여 밝고 경쾌한 리듬감을 살려내고 싶은 것이다. 이것을 그는 은유적이고 사색적이라고 한다. 스승인 아산의 그림에서 노장철학의 허무의식과 도교적 유현미(幽玄美),불교적 선미(禪味)를 느낄 수 있다면, 오견규의 작품에서는 사색적이고 감각적인 시적 은유를 맛볼 수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오견규가 생각한 그 나름의 문기(文氣)일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어 추수를 끝낸 황량하고 텅빈 겨울 논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흑갈색 벼그루터기의 공간에 도발적이다 싶게 초록색 보리밭을 함께 배치한 그의 그림은 분명 사색적이고 은유적이다. 그러나 조화를 이룰 때 분명 현대감각에 맞는 조형미를 획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오견규가 앞으로 추구해야 할 세계인 것 같다. 먹과 색채의 조화를 통한 새로운 조형미가 그것이다.
결국 그의 작품세계는 木雲이라는 아호가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나무 위에 구름 한 점 떠 있는 듯한 아름다운 서정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그는 이번 전람회를 준비하면서 "어제를 돌아다 보는 마음으로, 지나간 삶의 풍경을 그리고싶다."고 했다. 사라져버린 것들에 대한 애착이 그의 주요 테마가 될 것 같다. 앞으로 수묵의 토양 위에 새롭게 꽃피울 오견규만의 감동적인 세계를 기대해 본다.




人間의 存在에 대한 思索-강경호
人間의 存在에 대한 思索

강경호(광주대 교수, 문학평론가)

최근 오견규가 그려내는 회화는 전통적인 선비의 기질을 떠오르게 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정서를 새롭고 담백한 묵화로 부활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향토성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전차 내면의 의식을 형상화시키고 있다.
'새벽의 사유'와 '비상을 위하여'가 그 대표적인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옥수숫단인지 짚가리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들판에 추수한 곡식을 세워둔 단조로운 풍경과 그 위를 날고 있는 새 한마리에서 쓸쓸함이 물씬 배어난다.
그의 이런 경향의 그림은 인간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하는데, 혼자 왔다가 혼자 자연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단독자 인간의 고독을 느끼게 한다. 바람부는 들판에 놓여있는 옥수숫단처럼 추수가 끝난 늦가을 풍경이 전하는 메세지는 숙명적으로 쓸쓸한 인간의 존재이다. 그러나 역동적으로 이 그림이 자아내는 힘은 바로 쓸쓸함의 힘이다. 이쓸쓸함의 힘으로 다시 겨울을 보내고 어둠을 지나 아침을 맞는 인간의 미래를 예견하기도 한다. 그것을 암시하는 작품이 '비상을 위하여'이다. 역시 빈 들판 위를 날고 있는 새를 통해 단독자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오견규는 우리에게 삶의 의미와 존재에 대해 질문하고 사유하는데 골몰하고 있는 것이다.

-[오견규론]중에서/강경호(광주대 교수,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