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Image Calligraphy-이대형
Image Calligraphy 

(이대형, Lee DaeHyung, H-zone 대표)

인간의 역사가 문자와 함께 시작된다면, 이미지의 역사는 찰나적 영감에서 출발한다. 역사. 누적된 시간의 집합체. 당대 문화의 정체성을 극명히 드러내는 대표적인 아이콘은 바로 문자이다. 소리가 형태를 만나 새로운 뜻을 나타내는 문자는 정보와 상징 속에 내포된 논리와 조형성를 통해 그 의미를 전달한다. 그러면 이 조형적인 규칙이 사라진 문자는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스치는 영감 속에 여기에 주목하여 문자가 가지는 새로운 조형미를 독특한 작가적 해석력으로 보여주는 여성 작가가 있다.    작가 오영숙. ‘ㄱ’, ’ㄴ’ 의 자음과 ‘ㅏ,ㅑ,ㅓ,ㅕ’ 의 모음이 만나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가는 가장 진보한 문자체계인 우리 고유의 한글. 그의 유쾌한 상상력은 초등학교 1학년 국어시간에 칠판에 쓰여진 ‘바둑이와 고양이’ 에서 과감히 모음을 빼버린다. 어느새 반가운 바둑이와 귀여운 고양이의 의미는 사라지고, ‘ㅂ’ 과 ‘ㄷ’ , ‘ㄱ’, ‘o’ 등 칸딘스키의 점.선.면을 연상하게 하는 다이나믹한 형태의 자음만이 드로잉처럼 칠판에 남는다.    작가 오영숙은 이렇게 모음이 사라진 한글 자음의 다양한 조합을 통해서 오래된 토기의 표면과, 화재로 소실된 남대문,  드라마 ‘바람의 화원’으로 친숙해진 화가 신윤복의 미인도를 표현한다. 토기, 남대문, 미인도로 대변되는 문화의 정체성. 그러나, 그 정체성은 오영숙의 작품 세계에서는 그 경계가 불명확하다. 바래져 버린 시대의 정체성. 텍스트가 가지는 규정적이고, 단정적인 논리성은 오영숙의 작품세계에서는 다만 새로운 재료일 뿐이다. 그러나, 작가의 상상력으로 작품으로 구현된 문자의 논리성은 새로운 조형미와 함께 새로운 예술로 거듭나게 된다. 문자의 논리가 가진 이성, 문화에 대한 예술적 변조를 통해 작가는 시대를 초월하는 예술의 가치를 다양한 상징적 조합으로 구성된 문자텍스트의 ‘美’세계를 보여준다. 퇴근길. 대로변의 다양한 간판을 한번 보라. 뜻을 초월한 문자가 아름다운 것은 이미지가 가지는 다양한 상상력 때문인 것을 당신도 알게 될 것이다. 한글의 자음만을 이용해 작품을 만들어 온 오영숙의 신작 속 텍스트는 구축이 아닌 해체를 선택한다. 이전 작업이 자음을 모아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 갔다면 조선시대 명화를 주제로 새롭게 선보이는 이번 신작은 원작의 아우라를 해체하는 역발상을 제시한다. 부분에서 전체가 아닌 전체에서 부분으로, 일상으로부터의 예술이 아닌 예술로부터의 일상으로, 관객에서 창작자가 아닌 창작자에서 관객으로 힘의 균형이 역전되었다. 의미의 해체가 시작된 것이다. 감히 손 될 수 없는 신윤복의 미인도, 불타버린 국보 1호 숭례문 등 역사 속 원작의 오리지널리티가 쓰고 있던 아우라 역시 일종의 환영이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신기루처럼 다가서면 사라져 버리는 원작의 규정된 의미는 결코 소통될 수 없는 이상향이다. 자아가 아닌 타자의 편의에 의해 의미 규정되어 버린 박제화된 동물의 표본과 다를 바 없다. 오영숙은 전통, 선입관, 역사, 원작의 아우라에 갇혀 소통되지 못하는 이미지의 빗장을 풀어 버린다. 해체하고 공격한다. 새로운 가치는 소통이 필요하다. 오영숙의 해체작업이 만들어낸 변용이 새로운 오리지널리티를 획득할 수 밖에 없는 당연한 결과이다.

Footnote Becomes Image-이대형
Footnote Becomes Image

이대형 (디렉터, gallery SUN contemporary)

오랜 시간 앞에 부식된 암갈색 토기. 이가 나가고 금이 간 깨진 표면이 시간과 역사의 질곡을 고스란히 견뎌온 토기의 우직함을 말해준다. 그래서일까? 백자의 세련된 곡선과 청자의 화려한 문양을 마다하고 오영숙은 흙으로 빚은 토기의 질박함을 좋아한다. 고대토분에서 갓 발굴한 듯 투박한 표면 위로 양각으로 새겨진 한글 자음이 반듯하게 열과 행을 맞추고 있다. 전통적인 읽기 방식을 응용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각주의 형식으로 짝을 이루며 배열되어 있지만, 모음이 생략되어 구체적인 의미를 읽어내기 쉽지 않다. 대신 모음의 빈자리가 관객의 몫으로 남겨진다. 관객 스스로 자신만의 모음과 조합하며 텍스트로서의 토기와 이미지로서의 자음과 마주하게 된다. 하나의 해석이 불가능해졌지만 다양한 개별적 읽기가 가능해진 셈이다. 작가 자신의 감정이 개입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이 같은 장치는 선과 악, 안과 밖 등 이분법적인 사고에 대한 해체와 판단 유보를 추구하고 있는 작가의 의도와 일치한다. 
오영숙의 토기는 완전한 형상을 감춘 채 부분만 보여준다. 안에 내용물을 담아 낼 수 있는 그릇으로서의 전형적인 외관을 보여주는 대신 왼쪽 혹은 오른쪽 측면을 절단해서 화면을 구성하거나 위에서 내려다 본 생경한 모습을 그린다. 토기가 담아 낼 수 있는 토기 안의 물리적 공간 크기와 토기 밖 공간 사이의 경계를 부정한다. 토기의 좌측 면과 이웃한 토기의 우측 면이 나란히 놓이며 생긴 빈 공간이 또 다른 토기를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외부 공간이었던 여백이 토기가 되고 단단한 토기 껍질은 배경이 된다. 이처럼 오영숙은 안과 밖이라는 경계. 즉 인습적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이항대립적 논리를 다양한 실험을 통해 반박하고 있다. 오영숙의 작품을 프레임 안에 갇힌 독립된 개별적인 작품으로 한정해서 보아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웃한 캔버스의 파편화된 이미지들이 모여서 배경 속에 숨겨 졌던 또 다른 이미지를 드러낸다. 토기라는 기능적인 측면이 사라지고 상징과 함축으로 가득한 빈 공간이 탄생한다. 
오영숙의 작품에 반복해서 각주로 사용되고 있는 한글 자음은 텍스트로서의 지시적 기능을 상실했다. 각주로서 토기의 각 부분을 부연설명 하는 역할을 하겠지?라는 막연한 추측만 무성할 뿐 어디서, 언제,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단서를 찾을 수 없다. 게다가 모음이 빠진 한글 자음은 읽히기를 거부한다. 이처럼 읽을 수 없는 한글 자음은 더 이상 텍스트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지이다. 작가는 텍스트를 읽는 방법과 이미지를 읽는 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활용해 불완전한 텍스트, 즉 모음이 빠진 채 자음으로 구성된 텍스트를 하나의 완전한 이미지로 변화시킨다. 오영숙의 그림을 읽어 내기 위해서는 토기의 구석구석에 자리잡은 일련의 숫자를 따라가며 읽는 방법, 한글 자음 만으로 구성된 텍스트를 독립된 하나의 이미지로 바라보는 노력, 그리고 동시에 모음과 자음을 결합시키며 자신만의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상상력 등 다양한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