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소담론적 소통의 매체로서의 이미지들-이영재
소담론적 소통의 매체로서의 이미지들


글/ 이 영 재 (미술평론가, 제이갤러리 관장)

'거대담론'(grand narrative 혹은 metanarrative)에 대한 회의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주된 흐름 중 하나이다. 특히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를 중심으로 한 후기구조주의자들에 의하면 근대는 보편적인 인간의 이성과 보편적인 진리가 있다는 가정을 통해 역사의 진보를 주장하여 왔지만, 세계에는 혼돈과 무질서도 존재하는 것이며, 거대담론은 이들을 간과하여 왔다고 한다. 더구나 거대담론의 이면에는 권력의 구조가 숨어있으며, 따라서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거대담론은 인류의 이질성 혹은 다양성을 간과하고 진보의 개념으로 역사의 발전을 주장한다. 하지만 리오타르는 인간에게 잠재하는 다양한 열정들은 특정한 이론으로 정의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담론이 아닌 특정 지역문맥과 경험의 다양성에 주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리오타르는 거대담론 보다는 "지역적 담화"(local narratives) 혹은 '소담론'(small narratives)를 강조하게 된다.
박영인의 작품세계를 보면 전반적으로 리오타르가 말했던 '소담론'을 연상하게 된다. 왜냐하면 박영인의 작품세계는 이전의 자연과 음악을 접목하는 추상작업에서 최근의 강아지 이미지에 이르기까지 늘 거대담론 보다는자신의 삶과 연관된 담론의 기조를유지하여 왔기 때문이다. 주말이면 항상 찾는 강원도 평창의 산골 작업실, 음악 그리고 강아지들과의 교감, 이 모든 것은 박영인의 일상적 삶이었다. 원래 20세기의 추상미술은 조형의 근원을 추구하고자 했던 점에서 사실상 거대담론에 가까웠다. 하지만 박영인의 추상작품들은 회화적 근원으로서 추구되는 추상미술이었다기 보다는, 시골생활과 음악에서 만끾하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추상미술의 리듬과 색채를 이용한 찬미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작가의 말대로 "시골생활을 즐기고 좋아하면서 . . 또 음악듣기를 좋아하면서 . . .그러한 것들에서 얻어지는 행복감과 평화로움을 밝은색조와 부드러운 선들로서 표현해온 작품들"이었던 것이다.
늘 위대한 그 무엇을 향한 집념 보다는 자신의 주변을 사랑하고, 자신의 주변 이야기로 사람들과 소통하고자 하는 박영인의 태도는 최근의 강아지 이미지의 작품들을 통해 더욱 리오타르의 '소담론'을 연상하게 만든다. 이 새로운 강아지 이미지들의 작품은 그런 점에서 매우 새롭게 느껴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한국현대미술도 오랫동안 거대담론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왔기 때문이다. 많은 작가들이 한국적 정체성과 국제적 동질성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에 얽매여 있었다. 박영인의 이전 추상작품들 역시 외형적으로는 그러한 분류에서 분명하게 제외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영인의 최근 강아지 시리즈의 작품들은 거대담론 중심의 미술계에서 오히려 분명하게 역설적이며, 심지어는 반역적이기까지 하다. 왜냐하면 역사나 문화는 오로지 인간중심적인 것이며, 그것은 강아지에게는 관련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대담론과는 아무런 관련도없는 그저 박영인 자신이 사랑하고 애착을 갖는 동물을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은 욕망을 실현한 것일 뿐이다.
박영인의 강아지 작품들처럼 최근에 와서 보편적이며 거대한 담론 보다는 자신만이 관심사일 수도 있는 개별적 이야기를 펼치는 작가들을 우리는 많이 볼 수 있으며, 이는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한 갈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들은 의식적으로 거대담론의 함정을 피하고, 자신의 '지역적 담화' 혹은 '소담론'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자 하고 있다. 어찌 보면 박영인도 그러한 흐름 속에 의도적으로 비역사적이며 비문화적인 강아지를 선택하였는지도 모른다. 강아지를 통해 우리는 역사나 진리를 접근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강아지를 통해 어떤 강렬한 감정을 갖게 된다. 그것은 사랑의 감정과 비슷한 것이기도 하지만, 남녀끼리의 사랑처럼 어떤 강박관념에 얽매여있지 않은 사랑이기도 하다. 강아지와 인간과의 조우는 사실상 우리가 자연의 꽃이나 나무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원초적인 조우에 가깝기도 한 것이다.
박영인의 강아지 그림은 비록 역사적 문맥과는 상관없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다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작품들과는 달리 강력한 소통성을 갖추고 있다. 왜냐하면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이 강아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강아지 마니아들은 박영인의 그림을 이해하고 구매도 한다. 이러한 대상을 선택하기 까지에는 아마도 박영인 자신이 전세계의 수많은 아트페어에 참가하게 되면서,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를 가진 사람들과의 감정의 교류를 위해서는 '소통'의 중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소통의 중요성은 비단 박영인 뿐만 아니라 20세기이래 인류문화가 주목해온 화두이기도 하다. 특히 하버마스 이후 최근 알랑 바디우(Allain Badiou)에 이르기까지 철학이론은 전통적인 주관과 대상의 도식에서 벗어나 그 사이에 놓여있는 소통의 역할에 더 주안점을 두어 왔다. 이미 대중음악에서 현실화된 대중과의 소통은 이제 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미술에서도 강력한 시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인터넷과 같은 매체와 전세계적인 여행객의 증가는 사람들에게 타문화에 대한 접근기회를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시켰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전세계적으로 성행했던 비엔날레는 비단 유럽미술 뿐만 아니라 여러 제3세계의 미술을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다양한 미술체험을 하게 된다. 하지만 비엔날레의 많은 관객들은 먼나라에서 온 작가의 작품 속에 잠재한 이질적 역사와 문화에 낮설어 하게 되었고, 당혹해 했다. 비엔날레의 큐레이터들은 소통을 강조하였지만, 관주도의 권위주의적 형태의 비엔날레에서 대중들과의 소통에 접근하는데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었다.
이후 21세기 초에는 세계의 여러 아트페어가 20세기말의 비엔날레의 물결을 대치하게 된다. 그러한 물결 속에서 많은 작가들이 아트페어를 통해 작품을 선보이게 되고, 박영인도 역시 이러한 물결 속에 수많은 아트페어에 참가하게 된다. 아트페어는 구조적으로 비엔날레보다 더 소통을 중시할 수 밖에 없는 전시이다. 소수의 전문가들 보다는 수많은 대중들이 좋아하고 관심을 갖는 작품들이 더 각광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많은 작가들이 전세계 누구나 알아볼 수 있는 유명한 정치가나 연예인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렸다. 아트페어라면 어디에서든 우리는 마릴린 몬로나 모택동 혹은 케네디를 그린 그림을 발견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그림들은 이제 통속적이라고 여겨지기도 하지만 여전히 잘 팔려나간다. 실제로 그러한 그림들중 상당수는 팝아트라는 미명 하에 근대적 의미의 표현의지 보다는 마케팅에 더 주안점을 두고 제작되었다고 해도 틀린 얘기는 아닐 것이다. 
박영인의 경우 스스로도 소통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오기는 했지만,  의도적으로 통속적인 대상을 그리는 것은 거부하여 왔다. 무엇보다 이러한 류의 그림들은 자신의 체험과는 관계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박영인의 강아지 그림은 자신의 일상과 소통가능성 두가지가 고려되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제는 이미 자신의 삶의 일부가 된 강아지 사랑은 자신의 개인적 생활에서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그리고 강아지 그림은 그러한 삶의 연장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가능성도 열어줄 수 있는 매개체가 되었다. 박영인은 자신의 강아지 그림을 통해  대중들과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어찌 보면 이들 강아지 그림을 매개로 한 우리 인간끼리의 소통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 그 자체가 박영인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그 무엇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 점점 더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