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서정희 ‘시간여행자’ 이야기_정금희 전남대학교 교수
서정희 ‘시간여행자’ 이야기
글 정금희 전남대학교 교수

회화의 범주를 넘고자 하는 화가의 욕망은 평면의 캔버스 안에서 늘 들끓게 마련이다. 제어할 수 없는 그것을 가두기 위한 그들의 경주는 동통을 수반한, 들뜬 희열이다. 서정희의‘시간여행자(Time traveler)’시리즈는 표제음악이다. 
게다가 과학과 상상의 영역을 넘나드는 가장 매력적인 개념까지 제목의 힘을 빌려 은유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담아냈다. 연작의 일관성도 잊지 않고 유지한다. 신화적 서사성이 담긴 장편소설을 마주 대하듯 긴 호흡이 필요하다. 동시에 서정적인 감성이 선율로 변주되고 끝없이 이어지는 스토리텔링이 데카메론 기법을 연상시킨다.
화가의 순열한 욕구는 이처럼 장르를 초월해 문학·예술·과학의 융복합체를 눈앞에 드러내고자 한다. 이는 과도한 의욕일까, 촛농이 흘러내리는 날개처럼 위태로울까, 의구심이 싹트는 시점 수채물감은 빙점에 달한 듯 차분하게 순간 정지한다. 뻗쳐 날던 모든 열망이 수채의 정결함 속에 고요히 갇힌다.
유화, 아크릴화, 페인트까지 다양한 재료로 작업했던 서정희는 “상당한 시간이 흐른”뒤 수채화의 매력에 빠져“아직도 유영 중”이라고 밝힐 정도로 몰입해 있다. 맑게 언 냉각(氷)점에 뜨거움조차 가두는 신비한 물의 능력에 깊이 빠지게 된 것은 아닌가. 아르쉬지와 수채물감을 사용한 그림은 그 특징을 살려 투명하고 차분한 터치와 미묘하고 풍부한 색채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서정희의 그림은 전반적으론 평안하고 행복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으며, 대상을 재현한 표현 기법은 아동화에서 보이는 순수성이 가미된 천진난만한 모습이다. 그녀의 연작은 사실적인 기교에 단순화시킨 형상이 배경과 어울려져 신비롭고 몽환적인 초현실주의 성향이 엿보인다. 작품 속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한 여성이다. 기타가 연주되는 동안 그녀는 명상에 빠져 있거나 관조하고 있다. 그러다 자전거를 끌고 나서 구름이 비끼는 초승달 아래 멈춰 향기로운 꽃의 선율에 조용히 귀를 기울인다. 꽃은 여행자의 발길에 따라 백합과 수국, 장미, 프리지아로 피어난다. 꽃의 디테일은 아름다움에 대한 그녀의 경배다. 흥미롭게도 그녀의 시간여행은 광속을 벗어나는 속도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느림을 통해 시간을 통제하려 한다. 바퀴살이 우주의 자전처럼 움직이며 천천히 달리는 자전거가 여행자의 시간을 안내하는 수단이다.
서정희에게 구름과 비는 특별한 소재다. 그녀는 화창한 날보다는 빗소리와 비내음이 전해져 오는 차분하고 조용한 날을 더 선호한다고 한다. 또한 둥글고 휘황한 달이 아닌 초승달을 벗한다. 그것은 보석함 속에 보관한 소중한 어떤 것과 같은 존재지만 한편 가냘프며 서글픈 느낌을 부른다. 아직 차오르지 않은, 힘겹게 어둠을 밀고 막 솟는 초승달은 마치 살아가면서 만들어진 슬픈 이야기들을 대신한 듯하기 때문이다. 서정희 그림 속의 또 하나의 특이한 소재는 부드럽고 가는 실이다. 이는 사람이나 사물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다. 실은 마치 다리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어 과거와 현재, 현실과 초현실, 시간과 공간의 연결고리가 된다. 우연이나 필연도 인연 아니런가, 만남과 헤어짐에 동반된 소중함, 기쁨, 슬픔이 입자가 되고 그것이 구슬처럼 이어져 인연의 실이 된다.
가는 선을 주로 사용한 자잘한 소재를 드러내기 위해 배경은 차분한 회색 계열로 정리하고 거대한 두상을 측면으로 드러낸 여인은 이상한 나라의 소녀가 되어 꽃향기와 추억 안에 잠겨 있다. 녹색계열 톤의 변화에서 평온과 안정감을 주고 정면 처리된 빨간 입술은 입체성을 부각시켜 더욱 선명하다. 노란 프리지아를 받치는 녹색 줄기의 강인함이 강조된 화면의 여인은 홍조를 띠고 있으며 탁자 아래 민트 색의 기타와 부드러운 곡선으로 펼쳐진 아라베스크 문양 속에 노란 의상을 입은 여인이 초현실세계를 응시하고 있다. 프리지아는 천진난만이나 순결을 뜻한다고 한다. 따사로운 봄은 탄생, 희망을 내포하고 있어 시간여행자는 조만간 행복한 순간을 맞이할 것이라는 예감을 준다.
또 다른 작품은 장미꽃이 담긴 화병이 중앙에 배치되어 초승달의 형태로 신비롭게 펼쳐진 길과 자연스레 연결되어 있다. 그 길은 우리 인생의 발자취로 비쳐지며 여인은 잠시 머물러 앉아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있다. 창문 너머 현실 속 소재들이 여행자의 발길을 잠시 멈칫거리게 만들고 쓸쓸한 정조를 불러낸다. 하지만 자전거는 쉬지 않고 또 다시 그녀를 어디론가 데려갈 것이다. 알지 못하는 혹은 알 수 없는 여정, 그럼에도 그녀는 결코 여행을 멈추지 않는다. 그것은 그녀의 삶이다.
서정희의 연작‘시간여행자’는 달리 서술하자면‘여행하는 자화상’을 담은 그림이다. 자전적 내용을 담아 살아가면서 느낀 희로애락을 관찰자처럼 응시하며 여행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다. 일상의 반복된 삶에서 어디론가 떠나는 미지의 여행, 그곳 대자연 속에서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고 다시 일상의 삶으로 돌아온다. 처음과 끝은 일견 같지만 매우 다르다. 깨달음의 궁극에는‘그저 존재함’만이 있을 뿐이다. 수채화의 새로운 경지를 열어가고 있는 서정희의 작업이 어디까지 이를 것인가. 서사구조의 기승전결처럼 혹은 수확의 절기를 맞이하듯 그녀의 작업도 어느 한 지점에서 결실을 맺을까, 추적해 볼만하다.
신비롭고 새로운 상상의 나래_미술과 비평평론 김광명(숭실대 명예교수, 예술철학)
작가는 평면사이의 공간을 연출하여 평면작품이면서 입체작품인 듯한 이중감각을 갖게 한다. 구상적인 앞부분과 추상적인 뒷부분 사이에 여백을 둔 삼중적 구성, 전후의 평면을 약간 어긋나게 배열하여 평면성으로부터의 탈출을 시도한다. 다층평면으로 구성된 작품의 입체성은 시간차를 두고 행해진 시간여행에 얽혀 있는 다면적인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하여 시간이 중층으로 켜켜이 쌓이게 되어 삶의 깊은 맛을 더해준다. 이러한 구도 속에 작가 자신의 시각으로 그림 전체를 응시하는 모습을 명시적으로나 묵시적으로 제시하여 작가적 개입을 보여준다. 객관적인 대상이나 방관자로만 머무르지 않은 주체적인 개입은 자아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로 여겨진다. 서정희의 작품세계는 시간여행을 통해 잃어버린 소중한 시간을 되살려 재음미하고, 우리로 하여금 신비롭고 새로운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미술과 비평평론 김광명(숭실대 명예교수, 예술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