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채기선 작가의 ‘한라산’ 展 에 대해

채기선 작가의 ‘한라산’ 展 에 대해

 

흔히 ‘한라산이 곧 제주도이고 제주도가 곧 한라산’이라고들 한다. 한라산의 의미와 상징성을 이보다 잘 표현한 말이 있을까. 채기선 작가에게 있어서도 한라산은 그렇게 다가온다. 작가는 화업에 입문한 시절부터 한라산 그림을 즐겨 그렸고, 실경 위주의 제주 풍경과 해녀 연작에 천착했다. 40대 중반 무렵부터는 ‘애견과 여인’ 연작 등을 선보이면서 작가적 역량과 함께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채기선 작가하면 ‘한라산’을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지금도 작가의 마음을 채우고 있는 것은 ‘한라산’이다. 예전의 한라산 그림은 화폭에 많은 것이 녹아들었다. 꽃이 피고, 녹음이 우거지고, 대지의 생명력이 움트고, 어머니 품처럼 넉넉한 한라산을 이야기했다. ‘한라산이 곧 제주도이고 제주도가 곧 한라산’이라고 하는 것처럼, 그림 한 폭이 곧 화산섬 제주이자, 섬을 무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서양화 부문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화단에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 그림도 ‘한라산’이다. 2018년 4월 열린 역사적인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당시에는 채 작가의 ‘한라산’(150호) 작품이 국빈 선물로 선정되는 경사를 맞았다. 그에게는 자연스레 ‘한라산 작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다.

작가의 ‘한라산’ 화풍은 조금씩 변화를 거듭한다. 이는 2018년 한라일보 창간 30주년 기념전 ‘마음의 풍경-한라산과 백두산’ 전 출품작들에서 보다 선명해진다. 이전에 비해 구도와 기법은 보다 단순해지고, 화폭은 푸른색, 붉은색 위주로 변했다. 수십 번 덧칠을 반복하면서 농도와 명암의 강약만으로 한라산을 이토록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고 느껴진다. 청년작가 시절부터 2020년 4월 한라일보 갤러리ED 개관기념전을 거쳐 이번 ‘한라산’전(2022.10.18.~11.3)에 이르기까지 연륜이 쌓이면서 농익은 그림은 깊은 사색과 신비함을 느끼게 하고, 더욱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한다.

일례로 이번 전시에서 그는 물이 들어찬 한라산 백록담 그림을 처음 선보인다. 주변의 산세는 생략한 채백록담만 부각시켜 시선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거기 푸른 물결 위에 일곱 개의 별자리 북두칠성을 표현해 냈다. 한라산은 말 그대로 은하수를 잡아당길 만큼 높은 산이라는 뜻에서 그렇게 불리는 것 아닌가.

별은 밤하늘에만 떠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백록담 산정호수에, 밤하늘에 빛나는 북두칠성을 그려넣는 상상력을 발휘한다. 일곱 개의 별이 백록담 푸른 물결에 반짝인다. 한라산의 또 다른 표현이자 누구나 가슴속에 하나쯤은 품고 있는 별을 담았다. 언제 어디서 봐도 가슴 뭉클하고 그리운 한라산을,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이번 한라산 전에는 밤바다를 가득 밝히는 어선들의 불빛(어화)이나, 거침없이 내달려 바다로 직하하는 정방폭포 등 다양한 ‘한라산’ 그림을 선보인다. 우리가 늘상 가까이 하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한라산의 다양한 변주를 화폭에서 느낄 수 있다.

작가는 한라산의 많은 것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버려야 채워지는 이치를 보여주는 것처럼 과감히 생략하고, 군더더기를 없앤 ‘한라산’ 그림은 더욱 진한 감흥으로 다가온다. 색감은 오히려 더욱 풍성해지고 전해지는 울림은 진하다. 눈을 감아도 한라산 산세가 자연스레 떠오를 만큼 수없이 발품을 팔고, 스케치를 하면서 체화된 한라산이기에 저절로 우러나오는 느낌이다. 작가는 아마도 훗날에는 점으로, 혹은 선만으로 한라산을 담아내고 있지는 않을까.

 

한라일보 편집국장 | 이 윤 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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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스케치[깊을수록 눈부신 - 한라산 작가 채기선] KBS제주 221219방송 

 

https://www.youtube.com/watch?v=BFasLWdZpFA 

채기선의 인물화-신항섭
채기선의 인물화

초상화 양식을 통해 구현한 심미적인 표현

신항섭(미술평론가)

 현대미술에 경도되어 있는 이들은 사실주의 회화는 전근대의 유산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그러기에 사실주의 미학에서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고 단언한다. 단지 기술적인 문제를 중심에 두는 회화적인 양식이라는 관점에서는 맞는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학적인 관점에서는 사실주의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다시 말해 회화적인 기법이나 미학적인 면에서는 발전의 여지가 무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들 시대에서 활동하는 화가들 가운데 일부는 사실주의 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부단히 탐색하여 이전과 다른 새로운 성과물을 내놓음으로써 사실주의 영역을 확장하는데 기여하고 있다.
 채기선의 경우에도 재료와 기법의 연구를 통해 사실주의 회화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극미한 묘사기법과 더불어 템페라 기법을 도입함으로써 유채화와는 다른 시각적인 이미지를 얻고 있다. 유채화가 기름 성분으로 인해 발색이 강조되는 경향이었다면 템페라 기법은 발색이 억제된다. 색채이미지가 밖으로 발산되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가라앉는다. 이와 같은 발색의 차이는 그림 자체의 인상은 물론 정서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의 작품과 마주했을 때 느끼는 차분함과 포근함, 그리고 미세한 공기의 흐름에 반응하는 섬세하고 여린 감성의 촉수는 새로운 체험이다. 시각적인 이미지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평온하고 행복한 정서가 감지되는 까닭이다. 그림의 전체적인 인상과 결부되는 이러한 내적인 정서를 감지하는 것은 흔한 경험이 아니다. 이러한 느낌 또는 인상은 그의 작품이 기존의 사실주의 회화와는 다른 시각 및 표현기법이 반영된 결과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실제로 꽃과 인물 그리고 애완견을 제재로 하는 일련의 최근 작품은 기존의 사실주의 회화와는 또 다른 영역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사실주의 회화는 전근대적인 표현양식이 아니라 이 순간에도 여전히 그 생명력을 유지하며 진화를 거듭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그가 제시하는 진화란 유채화와는 또 다른 이미지를 가능케 하는 기법적인 문제와 더불어 심미적인 접근방식에 있다. 시각적인 이미지를 초월하는 내적인 정서를 표현하는데 따른 새로운 기법을 강구함으로써 심미표현에 이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제주도 풍경을 시작으로 하여 꽃을 제재로 하는 현대적인 작업을 거쳐 악기와 인물을 대상으로 하는 작업, 그리고 최근의 애완견 연작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변화가 있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입체적인 표현과 소재의 질감 그리고 공간적인 깊이에 대한 문제를 심층적으로 연구했다. 여기에서 연꽃을 비롯하여 장미, 모란, 작약 등 크기가 큰 꽃이 지닌 아름다움을 깊이 탐색했다. 화려하면서도 유려한 모양의 이들 꽃에서 그 표면적인 질감과 관련해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접근방식에서 한층 깊이 들어갔다. 미시적인 접근방식을 통해 마치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는 듯싶은 이미지의 질감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이룩한 기법적인 성과의 하나는 유채화 특유의 발색, 즉 빛을 받으면 반사하는 기름 성분을 감지할 수 없도록 하는데 있다. 유채화는 기름성분으로 인해 빛이 닿으면 반사되는 부분의 형태 및 색채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이러한 현상은 그림 감상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그의 작품에서 전통적인 채색화를 보는 듯싶은 인상은 다름 아닌 발색을 억제한 결과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간색에 대한 감각이 남다르다. 놀랍게도 그가 사용하는 물감의 색상은 10여 가지에 불과하다. 이처럼 제한적인 색의 물감만으로 원하는 색채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이는 색채감각이 극도로 예민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가능한 한 물감의 순색을 억제하는 가운데 팔레트에서 색채를 혼합하여 필요한 색채를 얻는다. 어쩌면 그림의 전체적인 인상이 지극히 차분하게 느껴지는 것도 미묘한 중간색에서 비롯되는지 모른다. 
 유채화임에도 불구하고 발색이 억제되는 전통적인 채색화를 보는 듯싶다. 템페라 기법을 응용함으로써 유채라는 재료가 지닌 특유의 발색 및 질감과는 달리 차분히 가라앉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색채의 발색을 캔버스 안쪽에서 빨아들이는 듯싶은 분위기다. 그러기에 원색적인 이미지일 경우에도 시각적인 자극이 거의 없다. 유채라는 물질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 유채화에 대한 경험은 확실히 새롭다. 그의 작품과 마주하고 있으면 이제까지 유채화에서 느끼던 특유의 물질적인 감각, 즉 유채 성분이 가지고 있는 재료적인 이미지가 감지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작품을 감상하는데 따른 방해요인의 하나일 수도 있는 유채물감의 질감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은 감상의 몰입과 관련된 문제이다. 다시 말해 물감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함으로써 작품이 가지고 있는 시각적인 이미지 및 그 내용에 직입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의 경우 유채화임에도 눈에 거슬리지 않은 순연한 이미지로 인해 그림 속의 공간으로 쉽게 들어갈 수 있다. 이는 감정이입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가 템페라의 시각적인 이미지를 추구하게 된 것은 감상자가 그림의 외연에 훑는데 그치지 않고 회화적인 공간속으로 들어서기를 기대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과 마주하면 마치 실제처럼 느껴진다. 회화적인 일루전이 아니라 현실적인 공간으로 착각할 정도이다. 그리하여 일상적이고 편안한 감정으로 회화적인 이미지에 몰입할 수 있다. 초상화 양식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인물에 대한 시각적인 불편함 느껴지지 않는 것은 공간적인 깊이에서 비롯되는 부드럽고 온화하며 정적인 분위기에 기인한다.   
 그런가 하면 애완견을 제재로 하는 일련의 작품에서 털을 표현하는 묘사기법이 남다르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털과 털 사이에 입체적인 공간감이 형성되어 있다. 단순히 시각적인 속임수가 아니라 마치 실제의 상태를 보고 있는 듯싶은 기분에 빠져드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기존의 사실주의 기법과는 다른 점이다. 털과 털 사이에 공기층이 형성되어 있다고 느낄 만큼 실제적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공간적인 깊이, 즉 심도까지 표현하는 것은 사실주의 회화에서는 고려할 사항이 아니었다. 보이는 사실을 실제처럼 재현하는데 의미를 두는 즉, 일루전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인물의 옷을 묘사하는 과정에서도 실제처럼 보이도록 하는 일루전이라는 상투적인 묘사기법에 머물지 않고 직물의 질감을 살리는데 주력한다. 여기서 말하는 질감이란 실낱의 형태가 드러나는 극명한 사실성과는 다른 직물 자체의 느낌을 뜻한다. 그리하여 그 옷감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색감 및 표면의 느낌을 표현하는데 집중한다. 가령 실크의 경우 부드러우면서도 윤기가 나는 특유의 고급스러운 질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정인을 대상으로 하는 인물화는 초상화 형식을 따르기 마련이다. 서구회화가 초상화 중심의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애완견 연작은 초상화 형식에 충실하다. 하지만 단순히 인물의 형태미를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인물이 처한 상황이나 정서를 표현하는데 의미를 둔다. 즉, 특정인의 애완견을 제재로 삼아 그 주인과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스토리를 만든다. 
 이로써 인물중심의 차가운 초상화가 아니라 이야기가 존재하고 온기가 느껴지는 인물화가 된다. 전통회화인 정선의 <금강산도>를 인물의 배경에 배치하거나 매화, 도라지꽃, 수국, 철쭉 또는 풀꽃들과 같은 자연적인 이미지를 도입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종이접기 학이라든가, 주사위, 인형, 테니스 볼 등의 소재를 적절히 배치하는 것도 스토리를 전제로 하는 구성이다. 이렇듯이 전통회화라든가 자연의 이미지를 도입함으로써 초상화의 차가움을 상쇄시키는 한편 스토리를 만들게 되는 것이다. 인물과 배경이 어우러져 초상화라는 양식이 가지고 있는 경직된 이미지를 해체시키게 되는 셈이다. 
 그의 인물화는 전체적으로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우아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림이 현실과 다른 조형세계임을 명료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문제는 그 자신의 회화적인 사상 및 철학에 대한 소견이기도 하다. 그림이란 단지 시각적인 이해 또는 즐거움만을 위해 봉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정서함양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와 같은 점을 직시한 그는 초상화 양식의 그림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 즉 특정인의 사적인 공간에 걸린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는다. 온화하고 부드럽고 우아한 이미지 또는 그 분위기가 실내 공간의 정서를 일신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까닭이다. 
 초상화 양식의 그림에 대한 이와 같은 관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고향인 제주도라는 자연환경의 소산이지 싶다. 거친 바람에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제주도의 동적인 자연환경에 적응해야만 했던 그로서는 거꾸로 따스하고 정적인 환경이 그리웠는지 모른다. 결국 그러한 잠재적인 욕망이 작품에 반영되고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