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닫힌 사회와 열린 마음--최익진의 유토피아(김백균 / 중앙대 교수, 미술비평)

닫힌 사회와 열린 마음

--최익진의 유토피아

 

김백균 / 중앙대 교수, 미술비평

 

 

최익진의 작업은 현실적 삶과 삶의 구조에 대한 비판적 의식에서 출발하여 인간 상호간의 소통의 문제를 지향한다. 그는 문화와 문명, 그리고 이상적 사회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 사회와 사회간의 이해와 소통에 의해 구현되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그는 사회구성원들의 소통을 전제로 사회의 성격 규명과 제도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다. 

하지만 그가 이해하는 우리사회는 아직 소통과 공존의 적절한 방법을 모색하지 못한 채, 서로의 의식을 굳게 닫고서 단절된 사회로 이해된다. 그는 우리의 삶이 더 이상 위계질서 위에 기초한 근대적 양식들에 의해 파악될 수 없으며, 나아가 층차적 구조를 지닌 근대적 이성관은 인간의 의사소통을 단절시킨다고 여긴다. 그는 또 개성과 자율성, 다양성, 대중성의 중시를 통해 근대적 의식을 극복하려 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세계관 역시 그 자유분방한 삶의 방식으로 인해 의사소통의 기능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유의 막다른 골목에서 그가 찾은 닫힌 사회를 여는 소통의 고리는 ‘피안(彼岸)’이다.

‘피안’은 어떠한 것도 거칠 것 없는 자유의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 ‘피안’은 유토피아(Utopia-세상에 그 어디에도 없다)이다. ‘피안’은 세상에 없다. ‘피안’은 도달할 수 없는 곳이기에 ‘피안’이다. 그러므로 도연명의 도화원기(桃花源記)나, 이백의 시구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또한 세상 밖의 세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현할 수 없고, 도달할 수 없다하여 우리의 희망이나 열정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도달할 수 없기에 그 곳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고, 그 곳에 대한 상상은 더욱 풍부해 진다. 모든 갈등과 모순이 해결된 지점과 시간, 바로 그 곳 유토피아는 논리의 영역이 아니다. 그 곳은 이성적 사유로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상상에 의해 그려볼 뿐, 현실에서 구체적 실현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최익진이 선택한 상상 속에서 진행되는 ‘피안’에 대한 언급는 소모적인 논쟁을 피할 수 있다. 이 ‘피안’은 바로 최익진의 피난처이자 이상이며, 우리의 예술적 상상이 이루는 자유로운 소통의 장(場)이다.

그러나 상상으로 가득 찬 ‘피안’이라 하여 아무 준비 없이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최익진이 마련한 장으로써의 이 세계는 우리의 열린 마음을 요구한다. 이 열린 마음은 최익진의 작업에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창작의 묘수인 동시에, 그가 그의 작업 안에 설치해 놓은 그의 작품세계를 여는 관객에게 주어진 열쇠이다.

이 열린 마음을 그는 ‘무거리(無距離)의 거리’라고 부른다. ‘거리(distance)’없는 거리, 매우 현학적 표현으로 이루어진 이 개념은 그의 ‘피안’을 향한 인식론적 방법을 지칭한다. 물론 이 때의 ‘거리’는 물리적, 시공간이 아니라 대상과의 심리적인 거리로써 대상을 바라보는 세계관과 관련된 것이다. 

근대 미학의 역사에서 심미적 주체와 객체, 대상 사이의 ‘거리’는 미(美)를 탄생시키는 조건으로 이해된 적이 있었다. 대상과 주체의 심리적인 거리는 대상을 즉물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현상적 측면에 국한되는 것인 아닌 본질적 정감의 공유를 전제로 하는 사유의 공간이다. 

이 사유방식은 직관적 인식을 내포하는 총체적 인식을 지시하는 것이다. 최익진은 ‘거리’는 이 앞에 다시 ‘무거리’의 제한적 수식어가 붙어있지만, 이 때의 ‘무거리’는 직관적 인식을 강조하기 위한 ‘열린 마음’의 또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거리가 없음’은 대상에 대한 총체적 인식, 즉 기존의 선입견에 의해 대상의 실상이 왜곡될 시간과 공간이 없음을 뜻하고, 무거리의 ‘거리’는 본질적 대상의 심미적 숙성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의 ‘무거리의 거리’는 주체가 대상에 대해 완전히 인식의 선입견을 버리고 다가섰을 때 비로소 열리는 대상에 대한 인식론적 방법이다. 마치 장자가 소요의 공간을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으로 상정하고, 그 전제를 대상에 대한 평등한 시각, 제물(齊物)에 두었듯이 그의 ‘무거리의 거리’는 그의 소요의 공간 ‘피안’을 향하는 전제이다.

최익진은 그의 ‘피안’을 몇몇 차용 이미지를 사용하여 구성한다. 그 이미지는 5‧60년대 우리의 사회의 풍경, 또는 길을 가며 마주하는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들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솔직히 말하면, 그의 ‘피안’은 완전히 ‘상상’으로만 만들어지는 ‘피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피안’이라 말하는 까닭은 ‘차안(此岸)’과 ‘피안’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차안’의 현실 속에서 ‘피안’을 만들어 낸다. ‘차안’을 ‘무거리의 거리’로 껴안으면서, 닫힌 사회는 열린사회로 전화되고, ‘피안’으로 보여 진다. 즉 ‘차안’과 ‘피안’을 구별하지 않는 열린 시각이 ‘차안’을 ‘피안’으로 전화시킨다.

그러므로 이 ‘피안’은 화려하지 않고, 특별하지도 않다. 그의 ‘피안’은 시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스스로 그러한 모습 ‘차안’으로 그려진다. 그의 작업은 석회위에 목탄과 먹이 수없이 지나가고 벗겨지고 퇴색해간 시간을 담지하고 있는 담담한 풍경에 불투명 색면의 유리들로 가리어져 있다. 그의 작업에 표현 되는 인위적 ‘의식(닫힌)’세계는 마치 불투명한 색면의 유리처럼 주체와 객체의 의식의 흐름을 이어주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단절되어있다. 그가 그리는 ‘피안’은 이러한 불투명 유리의 효과가 우리의 열린 마음으로 희석되는 곳에 서있다.

그의 또 다른 ‘피안’은 건축자제로 혹은 수화물 받침대로, 선로 버팀목으로 그 용도를 다하고 이제는 폐목이 되어버린 소외된 것들에 대한 기억이다. 그는 폐목의 기억을 통하여 소외된 존재의 가치를 다시 묻는다. 그 소외된 존재는 언젠가는 주목받는 삶이었고, 쓸모 있음을 통해 그 의미를 발현하던 때가 있었다. 최익진은 ‘무거리의 거리’라는 열린 마음으로 이 쓸모 있음과 없음의 상대적 차이를 극복하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무거리의 거리’의 인식적 방법론은 서사적인 구조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이거나, 정감에 의지한 ‘피안’을 보여주려 한다. 이것이 그가 추구하는 시공간적으로 자유로우며 소통의 장으로 펼쳐질 수 있는 유토피아이며, 닫힌 사회를 여는 열린 마음이다. 


열리고 다시 또 열리고_이재걸(미술비평)

 

<열리고 다시 또 열리고>

 

: 최익진 展에 부쳐

2018. 04. 20 – 2018. 04. 29. 인천아트플랫폼

 

 

이재걸(미술비평)

 

 

  

 

“쉼 없이 파괴되고 다시 재구성되어온 우리 현실적 삶에서 과연 진정한 ‘실재’는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과정이 ‘실경’의 모색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실경’은 단순히 현재의 상태 있는 그 자체만을 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성의 시대에 있어 가장 궁극적인 질문은 과연 우리는 누구이고, 진정한 우리 것은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있어선 무엇이 한국적인 것인가? 라는 질문 못지않게 과연 무엇이 ‘선 (good)’인지의 문제가 더불어 고민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최익진(2014)

 

 

 

 

공간을 뚫는 힘

 

최익진의 작업은 감각적이다. 거대한 스펙터클이 눈 앞에 펼쳐지면서 무언가의 웅성거림이 들리는 듯하고, 나를 찌르려는 듯 다가오다가도 이내 쿰쿰한 냄새와 여운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먹, 염료, 목탄, 석회, 자연석, 무늬목편, 고무판, 거울 조각 등과 같은 이질적인 재료들이 서로 뒤엉키고 서로를 밀쳐내는 그의 예술은 이렇게 우리의 감각을 곤두서게 한다. 관객의 심리적 안전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의 힘찬 ‘공간 속의 드로잉’은 우리의 공간을 점유하고, 그곳의 원래 성질을 재빠르게 훔쳐서 달아날 뿐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가 그리는 ‘선(線)’은 공간의 균열이다. 유리의 균열이 유리의 인식론적 성질을 바꾸듯이 그의 거칠고 날카로운 균열은 일상적 공간의 성질을 바꾼다. 그의 작업 앞에서 우리는 ‘느낌’의 대가로 현실을 도둑맞는 것이다. 감각적인 것을 이용해서 오히려 우리의 현실감각을 무력화하는 최익진의 조형능력은 이번에도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평면작업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보여주는 평면의 균열도 회화의 고정된 이차원성을 떠나 공간성을 획득한다. 균열들 중간마다 자리 잡은 흑경(黑鏡)도 우리의 세계를 반사하는 동시에 평면에 구멍처럼 비워진 공간으로 보이면서 우리를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인도한다. 공간주의자 폰타나(Lucio Fontana, 1899-1968)가 이차원성과 삼차원성의 공존을 이룩했다면, 최익진은 우리의 감각을 혼란스럽게 하며 전혀 새로운 차원의 공간을 연다.

 

“1996년 유리를 처음 사용하게 된 것은 ‘의미의 속 살’을 보여주고 하는 의도였다. 이러한 의도에서 출발한 내 작업은 지난 20년 동안 그 의미가 조금 달라지면서 바뀌게 된다.”(최익진, 2014)

 

작가의 ‘새로운 차원’은 ‘의미의 속살’로서 불안정하고 비선형적이다. 복잡한 주름(fold)처럼 거듭되는 그의 균열은 ‘차이(difference)’가 만들어내는 성장과 증진의 과정이다. 살아있는 실재는 신체의 세포분열처럼 끊임없이 차이를 만들어내는 과정과 원리를 본질로 삼는다. 따라서 작가가 말하는 ‘실경(實景)’은 실재를 묻는 인식론적 기반 위에서 구성된 개념이다. 

 

 

주름의 항해(航海)

 

최익진의 실재관은 ‘차이’에 대한 긍정으로부터 시작한다.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와 들뢰즈(Gilles Deleuze)도 ‘차이’를 긍정적인 것으로 다루었다. 들뢰즈는 미분과 극한의 철학자인 라이프니츠의 논의를 심화하여 주름이 가지는 존재론적 의미를 떠올리게 하는데, ????주름, 라이프니츠와 바로크(1988)????에서 모나드(단자, Monad) 개념을 기초로 주름론을 펼치며 바로크 예술을 설명한다. ‘단순하다’는 원뜻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모나드는 더는 나눌 수 없는 세계의 최소 단위이다. 물질과 다르게 무한히 변형되고 점진할 수 있는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만약 세계의 실체가 원자와 같이 유한한 물질로 구성되었다면, 그 실체는 무한한 분할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무한한 세계는 구성될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실체는 비물질적이어야 한다. 원자론자들(절대적 견고성)과 데카르트(절대적 유체성)의 가정은 세계가 원자 같은 최소 단위로 이뤄져 있다는 생각에 기초했지만, 라이프니츠와 들뢰즈는 '분리될 수 있는’ 데카르트의 최소 단위는 관념적 존재에 불과하다고 보고 ‘모나드’라는 형이상학적 원소를 사물 존재 방식으로 제안한다. 이것은 서로 성질이 다르고, 모양도 없으며 분리도 안 된다. 모나드는 실체를 이루는 점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주름으로 된 단순 실체이다. 모나드에게 잠재력이란 곧 그것에 담긴 주름이다. 

주름에는 리좀(Rhizome)의 탈중심적 계열과 비선형적으로 증식하는 ‘정신적 물질들’로 가득하다. 명석·판명(clara et distincta, 데카르트)을 거부하고, 세계 안의 무모한 차이와 다양함을 탐닉하는 최익진의 예술도 이러한 세계이해에서 비롯하였다. 그의 예술은 항상적(恒常的)이고 정합적(整合的)인 것이 아니라, 우연적이고 카오스적이다. 바로크의 힘이 차이의 무한한 발생에서 출현하듯이 최익진 예술의 힘도 ‘하나가 다른 하나 안으로 수렴하는 계열들의 이어짐 또는 계속(들뢰즈)’에서 나온다. 차이의 강도가 심할수록 더 큰 힘이 발생하고, 이에 따라 하나가 다른 하나로 ‘수렴’되는 과정은 더욱 긴장되고 극적이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항해 #003(2018)>에서 능동적으로 발생하는 힘도 분열과 고립의 유혹을 뿌리치고, ‘무한’이라는 ‘변화의 통일’을 향해 나아간다.

 

 

유토피아에서 에우토피아로

 

피안(彼岸)을 향해 전진한 결과는 매번 참혹하다. 이 진리의 언덕은 생사고해(生死苦海)의 세상에 대한 깨우침이 없이는 볼 수 없기에 더욱 그러하다. 진리가 피어나는 곳이자 모든 번뇌가 소멸한 열반의 궁극적 종착지인 피안은 ‘나’의 마음 안에서 찾아야 하겠지만, 매번 얻어지는 것은 이 나와 피안 간의 ‘아찔한 거리감’일 뿐이다. 최익진은 피안에 도달하려 애쓰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작가는 우리에게 피안을 강요하지 않는다. 비평가 김백균이 지적하듯이, 작가는 오히려 ‘차안(此岸)’과 ‘피안’의 경계를 없애고, 닫힌 세계에서 열린 세계로의 이행을 시도하는 데에 집중한다. 

 

  “최익진의 ‘피안’은 완전히 ‘상상’으로만 만들어지는 ‘피안’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피안’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차안’과 ‘피안’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차안’의 현실에서 ‘피안’을 만들어 낸다.” (김백균, 2004)

 

최익진의 예술은 고차원적인 깨달음의 증거가 아니다. 오히려 깨달음을 위한 예술가의 겸손한 각성의 과정으로 느껴진다. 이 각성 안에서 피안은 자유로운 소통과 자발적인 상상이 허용되는 곳으로, 현실을 떠나기 위한 도피처가 아니라 존재의 참된 반성을 위해 지향해야 하는 곳에 가깝다. 이것이 최익진에게 ‘선 (good)이 머무르는 곳’, ‘끝없이 열린 세계’로서의 유토피아(Utopia)이다. 물론, 유토피아는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리스어로 ou(없다)와 topos(장소)를 조합한 말인 유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잠재적인 유토피아가 우리의 감각세계로 이동하면 사라질 수밖에 없다. 현실에서 가능한 것은 ‘좋은 곳’ 즉, ‘에우토피아(Eutopia)’ 뿐이다. 영어 발음이 같은 이 두 개념의 차이는 결국 현전(現前)의 가능성에 달려 있다. 초월적인 힘이나 원리가 갈 수 없는 유토피아를 건설했다면, 예술가의 행위는 가지고 있는 신념의 종류와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에우토피아를 건설한다. 

최익진의 에우토피아는 피안과 차안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에 등장한다. 여기저기 튀는 날카로운 나무의 파편들처럼 그의 ‘좋은 곳’은 감각현실의 빈틈을 거침없이 파고 들어온다. 파편들은 마치 제의(祭儀)의 행위처럼 먹과 염료에 의해 엄숙하고 경건하게 칠해졌고, 생사의 고통으로 가득한 우리의 물리적 현실은 파편들 사이에 자리 잡은 흑경에 의해 온전히 다른 것으로 비치게 된다. 폐기된 목재가 우리의 의식 안에서 줄기를 뻗고, 깨져서 버려진 거울이 새롭게 펼쳐진 세계를 담아낸다. 이미지가 입체의 실시간으로, 입체가 이미지의 영원으로, 인간 밖의 공간이 세포적인 것으로 형질전환을 한다. 작가의 에우토피아는 결과보다는 과정을 세계의 본질로, 고정되고 무생물적인 것이 아니라 생명력이 넘치는 비고정의 세계, 정의할 수 없으므로 더 큰 정의를 갖게 되는 세계, 가능성과 우연으로 열려있는 세계이다. 종교적 피안이 우리가 지향하는 곳이라면, 그가 말하는 ‘좋은 곳’은 현실 안에서 이것들을 체험하는 곳이다.

 

 

열리고 다시 또 열리고

 

우리는 거대한 ‘적’을 만날 때 성장한다. 성장하기를 꿈꾸는 예술가의 적들은 시간, 공간, 삶, 죽음, 영원, 영혼, 자연 같은 것들로서 언제나 거대하다. 물리학이나 수학 같은 과학이 복잡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자연에서 어떤 법칙을 찾아내려 한다면, 그것을 표현하는 수사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예술도 실재하는 대상을 고정한다는 점에서 그 궤를 같이한다. 개인적인 동기에서 이 대상들의 작용을 찾아내고 예술행위를 통해 의미작용(signification)을 시도한다. 이 의미작용은 시적이거나 심리적인 이유로, 아니면 단순히 일상의 권태를 극복하는 이유로도 출현할 수 있다. 무엇이든 상관없다. 예술가의 의미작용은 그 동기가 무엇이냐를 떠나서 사고의 확장과 증진에 다가가기 때문이다. 예술가는 자신은 물론 거대한 적들마저도 이성의 무한성 안에서 성장시킨다. 최익진의 예술도 마찬가지이다. ‘나’와 이 거대한 적들이 대결하는 격전지에 다름 아니다. 격전의 고통을 승화하면서 그도 성장의 의미를 가지게 되고, 이 적들도 성장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예술가는 이 거대한 대상과 ‘동반성장’하려 하지 그것들을 정복하려 하지 않는다. 

그의 오래된 구산동 작업실은 그래서 늘 시끄럽다. 작업실도 작품도 모두 하나의 유쾌한 난장(亂場)이다. 작가는 물질을 자르고, 갈고, 붙이고, 뜯어내고, 붓질하고, 배열한다. 물성을 탐구하는 것처럼 보이나, 그가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시공간에 물질을 개입시켜 주름진 세계의 복잡성을 표상하는 것이다. 눈으로 전해지는 이 시끄러움과 번잡함은 예술의 즐거움과 고통이 뒤섞여 내는 파열음과 어울리며 독특한 미학적 자질을 갖춘다. 

세계적인 정신과 자국적인 제작방식, 미시(微視)와 거시(巨視) 그리고 진화와 퇴화의 궁극적 화해..., 작가의 털털한 웃음에는 이를 위한 치밀한 고민과 냉철한 자기반성이 늘 배어있다. 시간과 공간을 감싸는 그의 태도에는 예술의 형식과 국적을 떠나서 세계의 복잡성을 외면하지 않는 예술적 ‘선(善)함’이 묻어 나온다. ‘나’와 ‘세계’는 이러한 ‘선함’ 위에서 갈등을 만드는 경계를 지우고 진실의 근사치와 객관성에 다가간다.

성장하기 위해, 감각과 인식의 오래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비가시적 리얼리티의 숭고한 진실을 위해, 최익진의 세계는 열리고 다시 또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