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NOTE
2023-01-30 작가노트_검은 유리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실경을 말하다

최익진 작업 노트,  검은 유리를 통해서 우리 사회의 실경을 말하다.

 

2011 안상철미술관 설치 전경

[좌측부터 광장의 벽화(2008), 어긋난 시선2(2011), 검은 촛불(2008)]

 

 

 


 

  

1996년 유리를 처음 사용하게 된 것은 “의미의 속 살"을 보여주고 하는 의도였다. 이러한 의도에서 출발한 내 작업은 지난 25년 동안 그 의미가 조금 달라지면서 바뀌게 된다. 그 변화의 추이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보면, 첫째 평면에서 확장된 오브제 구성을 통한 평면설치작품들, 둘째 낙원도 시리즈 작품들. 셋째 광장의 벽화 프로젝트다.

 

초기 형태의 평면+설치 작업 출발은 IMF 이후, 당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소재로 삼았는데, 나는 이를 실경을(Genuine Scenery) 바탕으로 한 모색이었다고 생각한다. “Ex-interior”라는 타이틀로 진행된 2001년의 개인전은, 우리 사회의 현실을 탈-인테리어 적인 시각 즉, 제도권 밖에 있는 외부의 현실 상황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작품 형식이 화면 밖으로 나와 평면에서 확장된 의미로써 전시장의 벽과 바닥에 건축 현장의 오브제들을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연출하게 된 것이다. 

 

“벽의 눈”이라 명명한 일련의 작품들은 IMF 이후 급격하게 해체되는 가족들과 이로 인한 불안정한 사회에 대한 내 해석으로, 마치 사람처럼 의인화된 벽의 눈을 통해서 한국 사회 내부를 들여다본 바를 점경(點景) 인물과 폐 건축 오브제로 구성한 것이다. “국세청에서”라는 작품은 건물의 하중 역할이 제거된 ‘커튼월(Curtain Wall 비 내력벽)’ 공법으로 지어진 예전 국세청(지금의 삼성생명) 건물을 소재로 한 것이다. 나에게 있어 그 건물은 은폐된 권력이 작동하는 파놉티콘으로 보였다. “테헤란로에서”라는 작품 역시 커튼월 공법으로 만들어진 테헤란로의 여러 첨단 건물들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투명 유리를 검게 칠해 검은 유리 박스를 만들어 설치하였다. “고속터미널에서”는 사람들이 신속히 모였다가 흩어지게 하는 장치의 역할이 상실된 당시(2001년, 신세계백화점, 메리어트호텔 신축공사)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은 한국 사회의 정체된 단면을 보여주었고, 이를 건축 부자재인 나무를 이용하여 구성한 작업이었다.

 

“낙원도” 시리즈 작업은 인간의 현실적 삶과 그 삶의 구조에 대한 해체와 재구성의 방법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인간 상호 간의 소통을 지향코자 하는 데서 출발한다. 석회와 색을 칠한 투명 유리로 구성한 낙원도 시리즈는 그림 전면에 일정 시간이 지난 과거의 풍경, 우리의 기억에서 멀어진 과거의 아픔을 가진 폐허 풍경이 주를 이룬다. 그 위에 간간이 색을 넣은 유리를 콜라주 한 작업이다. 유리는 시간상 현재적 시점인 “지금” (화면을 바라보는 감상자가 유리에 반사되어 투영되게 함으로써 현재의 나 즉 감상자 자신을 바라보게 한다)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이를 통해 피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소외된 인간의 실제 현실을 더욱 차갑게 표현하는 동시에 감상자는 유리를 통해 이러한 현실의 좌절을 성찰할 기회가 제공됨으로써 현실을 넘어 소통하고자 하는 내적 동기를 끌어내고자 했다. 

 

‘낙원’은 어떠한 것도 거칠 것 없는 자유로운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 그곳은 물리적 세상에서는 만날 수 없는 인간의 심리에 자리한 곳이기에 “유토피아”다. 따라서 개개인이 상상 속에서 구성한 “낙원”에 대한 언급은 ‘옳다’ ‘그르다’의 불필요한 논쟁을 피할 수 있게 되고, 그 결과 낙원에 대한 소통에 있어선 일반적 소통의 과정에서와 같은 갈등과 모순이 수반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결국 “유토피아”는 개개인들이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이상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서로의 무한한 상상을 억압과 구속 없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무한한 장(場)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소통을 위한 이상적인 공간으로써의 “낙원”을 구성하고자 한 것이다.

 

이어진 “광장의 벽화” 프로젝트는 역시 삶의 실재를 바탕에 둔 실경 모색의 연장에서 소통할 수 없는 우리들의 상황 자체를 모티브로 삼은 것이다. 역사 속의 광장은 인류의 모든 활동이 수렴되고 확산하는 공간이었다. 근대 이후 광장은 권력의 의지가 극명하게 발현되는 공간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고자 하는 자유의 열망이 충돌하는 장이었다. 나에게 있어 광장에 대한 경험은 2008년의 촛불집회로 야기 된 소통 불가능한 상황에 대한 미술적 해석을 재구성한 것으로, 전시 현장과 작품 속 화면의 관계를 미리 설정하여 불투명한 유리와 거울을 통해서 반사된 감상자의 몸이 화면 안으로 수용되게 설정하였다. 이는 확장된 화면으로 전시 공간을 실제 우리 삶 속에 있는 광장으로 치환시켜보고자 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작품이 벽에 ‘기댐’으로써 생기는 그림자로 인해 작품은 설치와 평면 개념을 흔들어 놓았다. 이런 한 모순적 배치를 통해서 회화의 숙명인 보여주기 방식에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전시 현장성을 강조하기 위한 실험적인 모색이었다고 생각한다.

 

“뒤엉킨 여기” 연작은 광장의 벽화 프로젝트 연장선에 있는 2004년 이후 우리의 삶의 변화를 주제로 한 것으로, 인터넷의 일상적 보급으로 인하여 생기는 개인의 환경 변화, 물리적 거리의 소멸, 공간의 재구성, 자본화된 공간 재배치 전략을 보여주고자 기획한 전시다. 무거리 속의 거리는 새로운 양식의 네트워크 양식들이 폭발적으로 증대되면서 우리의 삶이 공간적으로 분명 가까워졌으면서도, 다시 멀어지는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공간 속에 오늘날 우리들의 모순적이면서도 역동적인 실제 현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돌이켜 보면 우리들의 삶이 어느덧 강압적으로 들이닥친 폭력적인 근대성을 넘어 이미 다문화적인 가치들이 각기 자기 독자 영역을 구성해가는 포스트모던 적인 방식으로 이미 진행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어떻게 한국화를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계속된 고민의 결과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듯 쉼 없이 파괴되고 다시 재구성되어온 우리 현실적 삶에서 과연 진정한 “실재”는 무엇인지를 추구하는 과정이 “실경”의 모색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실경”은 단순히 현재의 상태 있는 그 자체만을 담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근대성의 시대에 있어 가장 궁극적인 질문은 과연 우리는 누구이고 진정한 우리 것은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의 시대에 있어선 무엇이 한국적인가? 라는 질문 못지않게 과연 무엇이 “선 (good)”인지의 문제가 더불어 고민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문화는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조건 속에서 인간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날 우리가 한국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많은 것들 역시 근현대 역사 속에서 우리에 의해서 자의 반 타의 반 선택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소위 서구와 동양이란 편리한 구분을 만들었지만, 국제화가 이미 충분히 진행된 오늘날 과연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적 구도는 우리의 현실적 삶을 이해하는데 적실성을 가지지 못한다. 지구촌의 너무도 다양한 삶의 방식을 접하게 된 오늘날 한국적이란 단지 우리 앞선 세대들의 삶을 구성했던 방식이었다는 이유보다는 보다 현재 우리에게 “선(good)”에 더욱 근접한 삶의 방식을 모색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소통에 대한 열망을 바탕으로 구성한 내 작업은 기존의 동양화와 서양화, 구상과 비구상, 혹은 회화 대 설치 등 기존 개념의 구분을 넘는 소통의 가능성을 모색하여, 더 넓게 한국화의 외연을 확대함으로써, 오늘날 한국적인 것이 될 수 있는 선이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고민과 맥이 닿아있다고 생각한다. 

 

 

2023-01-30 작가노트_이번 전시는 내 삶에 많은 영향을 준 네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일종의 추모와 진혼제 성격의 작업이다

2022 최익진 개인전 – 33 Vectors

 

이번 전시는 내 삶에 많은 영향을 준 네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일종의 추모와 진혼제 성격의 작업이다. 이들은 짧게는 3년, 10년, 길게는 34년 전 유명을 달리했다. 이들 네 사람의 개별적인 관계에 대한 주제를 바닥 벽 천장의 기본적인 공간 구조를 (돌) 깔기, (끈) 잇기, (화면) 세우기라는 조형적 구성으로 연결하려 했다. 이렇게 주변 사람들에 대한 반추의 의미를 담은 조형적 시도를 통해서 그들의 존재가 잊히지 않고 영원히 되살아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미술이라는 행위는 대상에서 발견한 여러 감정과 해석을 개인의 고유한 조형적 체계로 이해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인간이 현세에서의 삶을 마치면 혼(魂)과 백(魄)이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시신)은 땅속에 내려간다고 믿어 왔다. 그래서 이러한 의미를 혼승백강(魂昇魄降)이라 불렀다. 하늘과 땅의 연결고리인 영매(신목, 세계수)는 샤머니즘에서 출발하여 여러 종교와 사상에 영향을 주었다. 

 

주역에서는 이것을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원리로 설명한다. 하늘. 땅. 인간의 생성 변화 원리를 음양으로 전개 시키는 것을 줄여서 간지(干支)라 한다. 시간과 공간의 만남이 우주 아닌가 !(上下四方曰宇 古今往來曰宙), 이렇게 우주의 여러 물질은 모두 음양의 변화로 생멸하고, 구체적으로는 사상(四象)으로 묘사한다. 이 사상에 토(土) 자리를 합하여 오행이라 하는데, 오행은 다섯 개의 기운이 오고 간다는 말로 우주의 운행 원리는 다섯 가지의 기본 요소인 오행을 하늘에서는 오운(五運)이라 하고, 땅에서는 육기(六氣)라 한다. 이 오운육기가 더욱 분화된 것이 십천간 십이지간이다. 십천간과 십이지간의 구조에서 그 사이를 잇는 매개로의 인간은 10과 12를 연결하는 숫자인 11로 말해 볼 수 있고 그래서 그 합인 33이 하늘. 인간. 땅이 서로에게 끊임없이 수렴하는 벡터의 구조로 맞닿을 수 있다는 것이 내 작업의 목표였다. 

■ 최익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