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에게 바치는 이상적인 공간_박은영(미술사가, 안상철미술관) | |
최서원 작품론
여성에게 바치는 이상적인 공간 - 《그녀를 위한 슈필라움 (Spielraum for Her)》 -
박은영(미술사가, 안상철미술관)
최서원은 전통 회화와 현대의 팝아트를 넘나들며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이룩한 작가다. 강렬하고 산뜻한 색채로 일상의 공간과 소소한 기물을 단순명쾌하게 묘사한다. 주로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으로 소파가 놓인 거실, 식탁이 차려진 주방, 컴퓨터가 있는 서재 등 현대의 공간과 생활용품을 다룬다. 하지만 책거리와 같은 서가와 서적, 문자도의 변형된 글자, 전통 가구와 도자기, 꽃, 과일, 십장생 등 민화의 소재가 자주 나타나며 다시점을 활용한 자유로운 구성, 대담한 색채, 전통 문양의 활용에서도 민화의 기법이 엿보인다. 요컨대 최서원의 작품은 전통 회화에 뿌리를 두고 과감하게 변형시켜 현대인의 감각과 생활환경에 어울리게 재창조한 회화라 할 수 있다.
2019년 첫 개인전에서는 전통 회화의 요소가 확연한 작품을 선보였다. 《기쁨(Delight)》 연작에서 바탕재로 장지와 순지를 사용하고 현대식 실내에 전통 가구, 책, 화분 등을 배치했다. 책가도에서 온 서가, 책 표지의 기하학적 패턴, 새봄을 알리는 매화 화병, 장수의 상징인 복숭아 등 민화의 요소가 다양하게 등장한다. 그러나 가구의 반듯한 정면성, 바닥 타일의 원근법적 배치, 공간의 질서정연한 논리는 서양화의 기법을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림자가 없고 모델링이나 깊이감도 없는 단일한 색면 처리로 비현실적인 장면을 연출해 민화의 세계와 유사점을 보인다.
최서원은 일상적 사물이 놓인 친근한 공간을 미화해 현실을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한다. 작가는 그 공간을 ‘슈필라움(Spielraum)’이라고 부른다. 독일어로 ‘Spiel’은 ‘놀이’를, ‘Raum’은 ‘방’을 뜻한다. 즉 슈필라움은 놀이하고 휴식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을 가리킨다. 그런데 독일어 ‘슈필라움’은 다른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단순히 놀이하는 공간이 아니라 방해받지 않는 자율의 공간으로, 물리적 공간이자 심리적 공간이기도 하다. 진정한 슈필라움은 즐겁고 행복한 공간일 뿐 아니라 자의식이 발현하는 장소이고 삶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이다. 김정운,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 21세기북스, 2019, pp.5-12 참조.
작가가 추구하는 슈필라움은 몸과 마음이 온전히 휴식하고 안정을 얻을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을 의미한다.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제작한 《슈필라움》 연작에서 색채가 더욱 선명해지고 섬세한 장식 문양이 줄어들면서 대담한 색면의 공간구성이 탄생한다. 그 공간은 거실이나 주방의 한 부분과 같이 대부분 여성이 사용하는 가정의 작은 실내를 보여준다. 밝고 조용하며 따뜻한 공간에 사람은 아무도 없다. 차려놓은 식기와 찻잔, 그림도구, 펼친 책이 부재하는 사람의 존재를 암시한다. 작가에게 슈필라움은 어린 시절 자신만의 방을 갖고 싶었던 소망을 회화 속에 실현한 것이다.
2024년 11월 안상철미술관에서는 《그녀를 위한 슈필라움 (Spielraum for Her)》이라는 제목으로 최서원 개인전이 열린다. 여기서 ‘그녀’는 작가의 어머니를 뜻하며 이 전시를 어머니에게 헌정한다는 의미를 띤다. 작가의 어머니는 젊은 시절부터 늘 몸단장을 중시하고 패션 감각이 뛰어난 멋쟁이였다고 한다. 작가는 그런 어머니를 멋지게 치장해드리고 싶어서 어릴 때 패션디자이너를 꿈꾸기도 했다. 이번 전시는 시대적으로 혼란스럽고 불안했던 격동기에 유년기를 보내고 성인이 되어서는 산업화 시대의 치열하고 고단한 삶을 겪으며 살아 온 어머니에게 편안히 즐기면서 마음껏 꾸미고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슈필라움을 선물하자는 뜻이 담겨 있다.
최서원의 작품에는 어머니를 생각하게 하는 사물이 자주 등장한다. 자개 장식의 농과 화장대, 화장도구, 재봉틀, 토르소 마네킹 같은 것은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소환하는 사물들이다. 한편 책과 꽃과 와인과 음악이 있는 따뜻한 욕실과 거실, 아늑한 침실은 어머니가 편안히 휴식하기를 바라는 공간이다. 그런데 그 공간들에는 작가 자신의 물건으로 보이는 것들도 공존한다. 어머니의 슈필라움은 딸의 슈필라움으로 이어져 오버랩된다. 자신만의 놀이공간이지만 개인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로 계승되고 의미가 첨가되기도 한다. ‘그녀’는 일차적으로 어머니이지만 작가 자신이기도 하며 더 넓게는 그림 앞에 서 있는 모든 여성이 될 수 있다. 작가는 단정히 차려놓은 아늑한 방으로 그들을 초대해 공간과 마음을 공유하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존》 연작은 어머니 세대인 과거와 딸의 세대인 현재의 공존을 내포한다. 자개로 장식한 전통 가구를 세밀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규방 가구인 이층농이나 화장대를 정면 시점으로 제시해 문양과 장식에 집중하게 한다. 검은 농에는 ‘여종지례(女宗知禮)’, ‘송녀불개(宋女不改)’와 같이 『오륜행실도』 중 ‘열녀’ 편의 일화가 그림과 글자로 표현돼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부여된 덕목을 제시한다. 또 화장대에는 문갑에 십장생을 자개로 새겨 장수를 기원하는 길상의 의미를 강조한다. 문갑 위에 청화백자 화병과 화장품 케이스, 화장도구가 놓여 있다. 화장품 케이스는 영조의 딸 화협옹주의 무덤에서 출토된 실물을 모방해 그린 것이다. 어머니를 비롯한 모든 여성에게 공주의 방을 선물한다는 뜻이다. 화장대의 거울에는 실내 한구석이 반영되는데 현대의 서양식 인테리어와 기물이 보인다. 여기에도 토르소 마네킹이 등장해 어머니의 공간을 가리키는 동시에 작가의 어린 시절 패션디자이너의 꿈을 상기시킨다. 농이나 화장대 같은 가구는 그 자체가 사용자의 슈필라움이다. 여성이 자기만의 독립된 방을 갖기 어려웠을 때 규방 가구는 그나마 온전히 다룰 수 있는 여성만의 공간이었다. 전통 가구가 있는 실내는 조선시대에서 근대로,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여성의 삶과 그들의 소망을 암시한다.
최서원의 회화에 나오는 민화의 종류 중 가장 빈번히 등장하고 중요시되는 것은 책가도 형식이다. 주방이든 거실이든 서재든 벽면 한쪽에는 거의 책꽂이나 장식장이 자리잡고 있다. 책가도는 본래 궁중미술로 시작해 민화로 발달했는데 학문을 숭상하는 선비정신을 반영한다. 책이 있는 서가는 사랑방과 같은 남성의 공간에 해당하는 것이다. 작가는 여성의 공간에 책과 서가를 들여놓아 남성성을 결합한다. 거실이나 서재의 배경을 점유하는 서가에는 책들이 전통 방식으로 수평으로 쌓여 있다. 테이블과 의자, 조명등, 컴퓨터, 선풍기까지 모두 현대적인데 서가만이 옛날식인 경우가 많다. 가부장적 남성 문화를 상징하는 책가도가 슈필라움에 들어와 여성에게 제한되었던 학문에 대한 배움의 욕구를 보상해 주는 듯하다.
전통 서책과 서양식 양장본이 공존하는 ‘그녀’의 서가에서는 남성적 공간과 여성적 공간이 통합된다. 남성과 여성, 전통과 현대, 학문과 일상이 공존한다. 《책 (The Book)》 시리즈에서는 책들이 서가에 이리저리 놓여 마침내 춤을 추듯 자율성을 띤다. 작가는 책을 한 권씩 입체로 제작하기도 한다. 낱권의 책은 책가도에서 꺼내 소장하고 싶은 욕구를 반영한다. 원색에 가까운 균일한 표지에 작은 책의 이미지들이 평행사변형을 띠며 여러 방향으로 날아가듯 배치된다. 그 이미지들은 책 속의 책으로서 지식과 지혜로 삶을 비상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책을 실물처럼 만들어 제시함으로써 책이 주는 지식과 지혜의 의미와 본질을 강조한다.
책에 담긴 수많은 정보는 《보물섬》 시리즈에서 잡다한 사물로 표현된다. 중국 고전인 『주역(周易)』이나 『근사록(近思錄)』의 17~18세기 목판본에 나오는 잡보문에서 따온 것이다. 책, 돈, 보주, 산호, 연화, 파초, 부채, 화병, 화분, 북 등 많은 사물이 뒤섞여 산뜻한 색을 입고 알록달록 빛을 낸다. 책으로부터 튀어나와 나만의 놀이공간을 장식하고 함께 놀아줄 갖가지 보물들이다.
최서원은 수직 수평의 안정된 구도와 순색의 깔끔한 색면들의 조화로 쾌적한 공간을 만들고 현대적 가구와 소품, 전통적 수집품, 신식⋅구식 책들로 그 속을 채운다. 배움의 기회를 얻지 못한 어머니 세대에게 학문의 기회를 주고, 자신만의 공간을 갖지 못한 여성에게 꿈을 펼치며 자의식을 확립할 수 있는 안전한 방을 제공하려 한다. 정돈된 그곳에는 친근한 집기와 놀이감이 있어 누구나 들어가 만지며 즐기고 싶어진다. 작가는 전통과 현대를 공존시킴으로써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여성의 삶을 반추하며 따뜻한 위로와 휴식을 주고자 한다. ‘그녀를 위한 슈필라움’은 시대를 가로질러 모든 여성에게 바치는 이상적인 놀이 공간, 가상의 여유 공간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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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밀한 현대인의 이상 공간 - ‘슈필라움’으로의 초대_김상철(동덕여대 교수. 미술평론) | |
내밀한 현대인의 이상 공간 - ‘슈필라움’으로의 초대 김상철(동덕여대 교수. 미술평론)
예술은 작가의 예민하고 섬세한 직관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의 세계를 이어주는 것이다. 제한적인 개인의 인식과 느낌은 구체적이기보다는 모호하고 애매하기 마련이다. 바로 그 모호함을 구체화하는 것이 바로 예술이라 할 것이다. 작가의 화면은 실내라는 특정한 공간의 조건을 중심으로 맑고 정제된 원색으로 구성되고 있음이 인상적이다. 탁하고 거칠며 어두운 색채는 배제되고 높은 명도의 색채들로 이루어진 화면은 강한 장식성과 더불어 시각적 쾌감으로 다가온다. 공간은 직선을 근간으로 잘 정돈된 질서를 보이고있다. 그것은 현실의 일상에서 채집된 것이지만 작가의 주관에 의해 해석되고 가공됨으로써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환치되고 있다. 원근이나 명암 등 합리적인 공간 표현은 배제된 채 오로지 기본적인 투시의 원칙만으로 사물 간의 관계를 설정한 공간은 일종의 절대 정적과 같은 고요함으로 충만하다. 인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정연한 질서의 공간은 순간 그것이 그저 눈에 보이는 것 이외에 또 다른 무엇인가를 담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다.
작가의 작품 중 눈에 뜨이는 것은 바로 ‘슈필라움’이라는 명제이다. ‘슈필라움’은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고 휴식을 취하고 여유를 가질 수 있는 나만의 놀이 공간을 뜻하는 말로, 독일어 '놀이(슈필·spiel)'와 '공간(라움·raum)'의 합성어라 한다. 즉 타인의 관심이나 간섭에서 벗어나 휴식을 취하고 심리적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온전한 자신만의 놀이 공간을 일컫는다. 이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는 '케렌시아'(Querencia)를 들 수 있다. ‘케렌시아’는 투우경기장에서 소가 잠시 숨을 고르는 영역으로, 현대인들에겐 남에게 방해받지 않는 피난처, 휴식 공간을 의미한다. 즉 ‘케렌시아’가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잠시 휴식을 취하며 지친 심신을 재충전하는 안식의 공간을 가리킨다면, ‘슈필라움’은 휴식뿐만 아니라 온전한 자기다움을 되찾고 자신의 삶을 재창조할 수 있는 활동 공간이라는 차이를 말할 수 있다. 즉 공간의 크기나 상황, 조건 등과는 관계없이 혼자 있어도 지겹지 않고, 마음껏 자신을 드러내며 새로운 삶의 동력을 회복할 수 있는 공간이라면 그것이 바로 ‘슈필라움’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의 삶은 늘 위태롭고 불안한 것이어서, 인간들은 늘 이상향을 갈구해 왔다. 이상향의 대상과 내용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서로 다른 양태로 제시되고 표출되어왔다. 현대 사회는 기계문명의 절정을 구가하며 경험해 보지 못한 물질적 풍요와 편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인 이른바 ‘인간적인 삶’이라는 가치에 대해 늘 회의하고 갈망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속도와 효율을 강조하는 무한경쟁의 삶 속에서, 그리고 급변하는 상황에 대한 무의식적 불안감은 급기야 현대인들에게 만성적인 병적 상황을 야기하고 있다. 오늘날 회자되는 ‘힐링’이나 ‘웰빙’ 등의 가치는 바로 이러한 시대 상황을 반영하는 핵심적인 단어라 할 것이다. 작가의 작업을 이해하고 바르게 읽어 낼 수 있는 단서가 바로 여기에 존재하는 셈이다. 작가의 화면은 색채와 이미지로 충만하지만 그것의 본질은 비어 있는 정적인 공간을 제시하고 있다. 어떤 인적도 드러내지 않는 절대 정적의 공간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속에 깃들게 한다. 보는 이는 빈 의자의 주인이 되고 공기의 흐름을 주도하는 생기가 된다. 정교한 장식과 화려한 문양, 그리고 잘 정돈된 실내는 관객을 위한 작가의 배려인 셈이다. 작품의 명제가 지시하듯이 그것은 작가에 의해 구축된 현대인의 도피처인 ‘슈필라움’인 것이다. 굳이 작가의 의사를 강조하지도 않으며, 특정한 가치를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정돈된 공간 속에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일상에서 누적된 삶의 피로를 떨어내고 고갈된 기운을 재충전하기를 바라는 것은 작가의 진솔하고 따뜻한 초대라 할 것이다. 화면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가 흥미로운 것이다. 전통적인 고가구와 상징성 강한 문양, 그리고 직선을 근간으로 하는 화면의 구성이 바로 그것이다. 재료의 사용과 화면의 구성은 다분히 서구적인 조형의 틀을 차용하고 있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동양적인 이미지를 취하고 있다. 더불어 문양의 내용들은 보편적인 인간의 욕망과 바램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는 일정 부분 민화와의 연계를 상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더불어 직선으로 구획된 화면의 구성은 민화의 유명한 <책가도>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주지하듯이 <책가도>는 책을 비롯한 도자기·문방구·향로·청동기 등이 책가 안에 놓인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문(文)을 중시하던 조선 후기의 작품 형식이다. 놓인 사물들은 전적으로 남성을 중심으로 한 욕망이자 이상의 또 다른 상징들이다. 작가는 이러한 전통적 요소들을 차용하고 해석하여 자신이 지향하는 ‘슈필라움’을 구축한 것이다. 전통의 차용, 혹은 재해석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러나 전통의 깊이는 매우 깊고 넓은 것이기에 목적한 바를 쉽게 이루기 어렵다. 그런 이유로 대부분의 경우 소극적인 변형이나 부분적인 차용을 통해 전통과 창작의 애매한 경계에 서게 된다. 작가의 경우 분명 일정 부분 특정한 내용, 즉 민화 등을 비롯한 전통적인 것들로 부터의 영향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를 매우 효과적으로 해석하고 수용하여 표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현대라는 시공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슈필리움’이라는 가치를 제시하고 여기에 전통적 가치를 수용해 냄으로써 전적으로 자신의 개별성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은 긍정되고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속한 시대에 대한 성찰과 전통의 해석과 수용에 대한 진지한 노력과 성취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보잘것없이 작고 누추한 공간이라도 내가 정말 즐겁고 행복한 공간, 자아를 확인하며 온갖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꿈꾸고 삶의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는 그런 공간이야말로 진정한 ‘슈필라움’이라 할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내밀한 삶의 경험과 공간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우리들에게 숨을 고르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은밀한 공간을 제안해 주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에게 그의 진솔한 초대는 반가운 것이며 기꺼이 참여 해 볼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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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서원 작가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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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서원 작가의 <The Present>에 부쳐
* 주수완(우석대학교 조교수. 미술사학)
현대 민화로 소개되고 있는 최서원 작가의 작품들은 민화 중에서도 특히 책거리 풍의 민화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책거리는 주로 선비들의 서재에 있는 책장에 다양한 기물들이 늘어선 모습을 그리고 있는데, 실제 그런 귀중한 물건들의 진품을 책장에 늘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조선시대 당시에는 극히 드물었을 것이다. 때문에 아마도 이처럼 그림으로나마 그려서 방을 꾸몄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나마 욕구를 해소하는 감상행위는 한편으로는 허세로 치부할 수도 있다. 만약 누군가 독일제 고급 승용차나 이태리 명품백을 가지고는 싶은데, 가질 수 없으니 마당에 독일제 승용차 벽화를 그려놓고, 옷장에는 명품백이 인쇄된 벽지를 발라놓고 마치 재력이 있는 사람인냥 뽐낸다면 그것은 정말로 허세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책거리가 보여주는 허세는 단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대리만족의 차원이 아니라 자신이 그런 것들을 좋아하고 관심이 많다는 것을 통해서 자신의 박물학적 취향이나 지식, 혹은 자신의 지적 호기심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 물건을 ‘소유하고 있다’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자신을 품위 있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책거리는 긍정적인 표현의 방식으로 해석될 수 있다.
최서원 작가의 현대적 책거리들도 그 연장선상에서 읽어볼 수 있다. 작가의 작품들에 자주 사용되는 “슈필라움”이란 제목은 ‘개인적인 유희(슈필, Spiel)의 공간(라움, Raum)'을 의미한다. 평면적인 그림이지만, 이 그림으로 인해 그림이 걸리는 곳은 마치 자신의 취향이나 내면을 비춰주는 제3의 공간으로서 방 안에 자리 잡게 될 것이다. 그 모습은 마치 이케아 매장의 가구 진열 방식처럼 우리에게 하나의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하고 있다. 이렇게 최서원 작가가 꾸며놓고 제안한 유희 공간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의 책장에 놓였을 청나라로부터의 진귀한 수입품이나 옛 것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즐겨 진열하고 자랑하였던 골동 취향의 기물들도 등장하지만, 그보다 더 많이 등장하는 것은 책이나 화병, 찻잔, 가구 등 우리 일상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물건들이다. [그림1] 이러한 소품들은 더더욱 지적 유희의 쇼윈도처럼 우리도 쉽게 그런 공간을 따라서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설렘이 일어나게 한다. 비록 그림 속의 물건들은 실제로 사용할 수 없는 그림일 뿐이다. 하지만 만약 사용할 수 있었다면 단순한 물건에 그쳤을 형태가 평면의 그림으로 그려지고 실제의 용도와 쓸모로부터 벗어남으로써
우리는 그 물건 자체를 인식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최서원 작가의 작품에 있어 “The Present”라는 개념은 선물의 의미, 그리고 현재의 의미와 함께 바로 “있는 그 자체”, 또는 “현재성”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정교하게 그려진 2층 자개농 그림은 실제로는 구하기 어려운 귀한 가구를 그림으로 그려 공간을 장식한 것이다. [그림2] 그림 속의 자개농은 물건을 수납할 수 있는 기능은 할 수 없으므로 결코 농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렇게 순수한 형태만 가지고 공간을 꾸미고 있다는 점에서 자개농은 물건의 수납이라는 쓸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지니고 있는 고유의 아름다움 때문에 새로운 존재 가치를 지니게 된 것이다. 그런 외부 사물의 ‘현재성’을 발견하는 행위는 점차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발견하는 것으로 나아감으로써 결국에는 자기 자신의 현재성에 바치는(증정, 이 역시 present의 개념이다) 최고의 ‘선물’이자 찬사가 아닐까. 이는 마치 불교에서의 관불삼매(觀佛三昧) 수행과도 닮았다.
결국 유희의 공간이란 현실 세계에서 외부로 향해있던 자신의 정신을 다시 안으로 돌려 자신의 현재성을 발견하여 이를 자기 자신에게 오롯이 돌려주는 공간이며, 그것이 진정한 휴식이요 놀이임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서원 작가의 그림 속 기물과 가구들은 하나하나가 새로운 고유의 생명력을 얻어 살아있는 것처럼 다가온다. 마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나 나옴직한 신비스런 공간에서 물건들이 현재성을 얻고 나와 대화를 나눌 것처럼 기다리고 있어서 왜 작가가 <슈필라움>이라는 제목을 붙였는지 실감나게 한다. 사람은 등장하지 않지만, 물건들의 성격과 그 배열만으로도 방금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는지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야기가 사물들을 더욱 살아나게 하고 있다. [그림3] 아마도 지금 그림 속에 부재하는 그 사람이 바로 그림을 관찰하고 있는 관찰자로서의 나 자신임을 아는 순간, 나는 차원이 다른 그림 속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환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데이비드 호크니(David Hockney)의 그림 속 실내 인테리어를 연상하게도 되는 독특한 현대적 화풍임에도 민화라는 전통의 연장선상에서 해석되는 이유는 이 작품들이 지니는 특징적인 공간 개념 때문일 것이다. 배경이 되는 공간 자체는 매우 평면적이면서도 그 안의 책장과 가구는 강한 원근감으로 그림 묘사되어 말하자면 부분적인 원근감으로 전체적인 원근감을 표현하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그림4] 때로는 같은 깊이에 있는 가구들이 서로 다른 시점에서의 자유분방한 원근법으로 표현되는 것은 전통적인 민화에 보이는 복합적인 원근법을 계승하고 있다. 그러나 민화에서의 이러한 복합적인 원근법은 한편으로는 자유로운 생각을, 한편으로는 비논리적인 공간으로 보이는반면, 최서원 작가의 복합적 원근법은 다양한 차원이 공존하는 현대물리학을 보는 것처럼 그 자체로서도 논리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이 차이점이다.
때로는 굳이 빛을 화면상에 표현하지 않았음에도 마치 조명기구에서 나온 빛이 화면 속 공간에 부유하고 있는 것처럼 연상케 하여 이것으로 공간감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림5] 그림 속 사물들에는 그림자가 딸려 있지 않아 매우 비현실적인 공간임을 암시하면서도 마치 조명의 빛을 받아 자라고 있는 사물들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화면 속의 모든 사물들은 빛을 중심으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느낌도 받게 된다. 이런 관념적인 공간표현 기법은 전통 민화 책거리 공간구성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덕분에 작품 속 공간은 실제와 관념의 경계를 오가면서 존재하는 지적 유희의 공간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최서원 작가가 꾸민 이러한 지적 유희의 공간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항상 유쾌한 경험을 선사한다. 이 유희의 공간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 주변의 세계를 탐구하는 데서 느끼는 재미와 그 탐구를 통해 결국은 나 자신을 발견하는 희열을 경험하게 해주는 아주 특별한 방인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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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Criticis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