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겹겹이 피어나는 색채의 숨결

겹겹이 피어나는 색채의 숨결

 

 

꽃 이미지

피어나지 않는 것은 꽃이 아니다. 하지만 피어나는 것이 꽃만은 아니다. 안개도 피어나고 그리움도 피어난다. 장남희의 꽃 이미지는 꽃의 ‘형태’와 더불어 ‘피어남’의 의미를 함축한다. 겹겹이 피어나는 꽃잎의 중첩(重疊)과 개화(開花)의 이미지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면서 작품 내면의 층위와 외면의 전개를 주도한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꽃’은 상징과 은유로 사용하기에 적절한 소재가 된다. 모란꽃의 이미지가 주조를 이루지만 그것은 모란이 형태상 다른 꽃에 비해 풍요로워서 대중적으로 선호된다는 외적인 이유와 함께 작가는 모란에게 꽃의 대표성을 부여하여 이를 수단으로 꽃의 다양한 상징적 의미를 담아낸다. 또한 모란꽃의 풍성한 중첩적 특성은 작가의 작업기법적인 특징인 ‘드로잉한 밑색을 사포질로 드러내기’와 맞물리면서 색채의 중층적 효과를 살리는 데 적합하게 작용한다. 작업기법상의 특징과 꽃의 중층적 특성이 호응하여 ‘꽃의 피어남’은 상징적이고 독자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꽃을 매개로 한 중층효과의 기법은 작품 <백야의 환희>, <겹겹이 피어나는 평화의 숨결> 시리즈, <희망이 초록으로 피어나다> 등의 작품에서 십분 발휘되고 있다.

 

 

리듬의 출처

얼핏 보면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모노톤의 분위기가 압도하여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작품과 차분히 마주하다 보면 감상자는 서서히 작품 속에 빠져들게 된다. 모노톤의 틈새를 뚫고 다양한 색채들이 다소곳이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단색조는 여기서 작품의 통일성과 정합성을 담보하면서 또한 색채가 다양한 방식으로 발현하고 상호소통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건이기도 하다. 이제 단색조의 물감층 위로, 앞서 두껍게 드로잉한 물감층이 바탕색과 대조를 이루며 화사하게 드러나는가 하면, 바탕색과 조화하여 온건하게 자태를 드러내기도 한다. 그 자리에 있었지만 보이지 않던 색채는 ‘밖으로 끌어내 앞으로 나오게 하는 행위(poiesis)’를 통하여 빛을 보게 된다. 미학적인 탄생의 순간이다. 여기서 공간은 누적된 시간으로 화하고 평면은 살아있는 입체가 된다. 회화작품은 일반적으로 형태와 색채 간의 수평적인 리듬에 주목한다면, 장남희는 여기에 시간성을 띤 수직적인 리듬을 새롭고 강력하게 추가한다. 작품 <유년의 햇살 속으로>, <붉은 그리움은 그림자를 남기고>, <9월 17일 오후 3시의 비상> 등은 그의 작품에 내재된 시간적 요소를 충분히 가늠하게 한다.

 

색채의 묘미

장남희의 작품에서는 원색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작품의 마무리 단계에서도 색이 가미된 오일을 전체적으로 붓고 닦는 작업을 반복함으로써 색상이 날 것으로 드러나는 것에 작가는 저항한다. 색의 혼합과 교차가 빚어내는 결과는 환상적이고 신비롭다. 찍어 바르고, 입히고, 갈고, 붓고, 닦고, 덮고, 고치는 작업의 부단한 반복 속에서 작가 고유의 숙성된 색상이 출현한다. 작가는 작품의 조형적 구성과 형태에 비해 색감의 미묘한 차이에 더 주목한다. 색감의 차이는 표면적인 색의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드러난 색과 감추어진 색의 관계에서 비롯한다. 여기서 작가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색을 제대로 감추면서 또한 드러낼 것인가?’에 귀착된다. 색채의 묘미를 작가는 ‘드러난 색’ 못지않게 ‘적당히 감추어져 속에서 비추는 색’에서 찾는다. 그런 한에서 그의 작품 전체는 햇빛보다는 달빛의 영상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그 이미지들을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와 연관시켜 이해할 수도 있다. 내밀하고 우회적이면서도 몽환적인 아르테미스의 이미지를 담은 색채가 캔버스 전반에 흐른다. <꿈속의 산책>, <푸름의 내밀한 진실>, <아르테미스의 은빛환상>, <달빛 연정>, <회색빛 세계에서 컬러로 살아남는다는 것> 등의 작품이 이러한 사실을 대변한다.

 

부조(浮彫)와 빛

‘속에서 비추어 나오는 색’에 초점이 맞춰진 한에서 감상자의 시선은 작품의 부분 부분에서 새어나오는 미묘한 색조에 머물게 된다. 특히 ‘두께를 가진 밑색’을 갈아 드러내는 작업기법의 특성은 화면상에 요철(凹凸)의 부조효과를 낳는데, 이때 드러난 색조가 미묘하고 복잡해서 장남희의 작품 전반에서 자개장 혹은 비단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다. 부조효과는 입체적 특성으로 인해 시선 혹은 빛의 각도에 따라 상이한 명암과 색조를 유발한다. 작품 가운데 특히 <푸른 새벽의 속삭임>, <불꽃의 향기>, <아르테미스의 은빛환상> 등은 부조효과가 극대화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색감의 미묘한 차이와 변화에서 동양적 감성의 신비를 만난다. 부조 속에 구현된 미묘한 색조를 통하여 작가는 달빛 이미지가 담긴 반(半)투명성과 우회적 속성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부조효과는 시선에 따라 색채의 움직임을 달라지게 한다. 부조 겉으로 드러난 색이라 해도 시선 혹은 빛의 각도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체로 다가온다. 작품 <그대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내가 피어난다면>은 부조된 노란색이 빛에 의해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되어 타율적인 성향을 띠는 반면, <스스로 피어나는 꽃에만 눈길은 머문다>는 부조된 빨간색 자체가 스스로 발현하여 자율적인 성향을 띤다고 보인다.  이러한 타율과 자율의 한 가운데에서 작품 <존재의 품격>이 중심을 잡고 있다.

 

유헌식(문예비평가, 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