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환상 정원_화가 김윤경
환상 정원

팬데믹으로 인해 인간과 자연, 문화 등의 많은 측면에서 우리는 크나큰 변화를 겪고 있다. ‘언택트’, ‘거리 두기’ 등의 새로운 용어들이 생겨나면서 인터넷 세상은 실재를 능가하는 정교한 가상의 세계를 우리에게 더 익숙한 자연으로 만들어 놓았다. 비대면 수업이나 회의 등에 익숙해 지고 있는 젊은 세대들에게 대자연의 의미는 퇴색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언제나 말없이 조용히, 변하지 않으면서도 실은 변화 무쌍한 자연은 예술가들의 작품 속에서도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제주도’라는 낯선 환경에서 비로소 자연을 담아 내기 시작한 작가 정인희의 작품 세계처럼 말이다.
오래 전부터 많은 예술가들이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얻고 그것을 시각화해 왔다. 채집과 수렵의 활동을 하던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이미 사냥을 잘 하게 해 달라는 주술적인 의미로 들소 등의 동물을 그리는 동굴 벽화를 남겼다. 과학 기술이 많이 발달한 현대에도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이해하고 진정으로 소통하게 하는 힘은 개인의 내적 체험이나 믿음에 있다. 인간의 선험적, 영적인 힘의 근원은 자연에 있으며 그 속에서 느끼는 경외감이 시공을 초월하여 비로소 인간을 자연과 하나가 되게 만든다는 것이다. 정인희 작가의 최근작에는 이전 작품들과 달리 이러한 자연의 영향이 짙게 베어 있다. 번잡한 도시를 벗어나 ‘제주’라는 곳으로 거처를 옮기며 적막한 자연 속에서 자연의 일부인 자신을 발견한 작가는 보다 자연적인 색, 전통적인 매체로 돌아오는 등 작품의 형식에서도 많은 변화를 보여 준다. 예술가에게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것은 불가피하면서도 도전적인 일인데 작가에게 이러한 변화를 가능케 해 준 근원은 자연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 준 새로운 환경이었을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 화가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를 비롯하여 자연에서 받은 영감을 화폭에 담은 많은 예술가들이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의 철학에서처럼 자연은 인간을 압도하고 심지어는 파괴할 수 있는 것,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운 경험의 대상으로 표현하였다. 관객을 그림 앞에서 울게도 만들었다는 마크 로스코(Mark Rothko)나 바넷 뉴먼(Barnett Newman)이 커다란 색면 회화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것 또한 자연에서 받는 신비감이나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신과의 일체감 등과 같이 ‘보다 높은 것’에 관한 것이었다. 인터넷의 부작용으로 인해 붉은 노을, 드넓은 사막과 망망대해 등 자연의 이미지가 도로 표지판이나 광고 사진처럼 평평한 감흥을 주는 것으로 전락해 버린 현대에도 자연은 여전히 우리에게 시시때때로 위력을 떨치며 경고를 보내기도 하고 젊은 작가에게 변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변화무쌍한 것에 대해 속삭여 준다. 감정, 혹은 감정을 지칭하는 단어를 색이나 패턴으로 치환하는 작업으로 나름의 화법을 정립해 오던 작가는 이제 자연의 이미지, 자연이 주는 정감에 작업의 흐름을 맡긴다. 이탈리아 작가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에게서 영감을 얻어 ‘옥중 수고(Prison Notebooks)’, 즉 작업실 안에서 마음의 행로를 따라 내적 세계로의 침잠을 추구하며 자신을 발견하고자 했던 작가는 이제 대자연 속에서 새로운 화법을 발견해 나가며 무언가 자신보다 훨씬 큰 존재에 이끌리는 듯 작업을 이어 나간다. 새 그림들 속에는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의 색, 담팔수 색, 하얀 눈의 색 등 보다 자연적인 색이 있다. 고요한 가운데 갖가지 빛과 그늘이 끊임 없이 형상을 만들다 작가의 캔버스 위에 안착된 것만 같다. 바쁜 도시의 환경과 네모난 작업실 안 풍경이 익숙했던 작가에게 제주는 변화무쌍한 자연의 경이로움 그 자체로 다가왔을 것이다. 언제나 똑 같은 것만 같은 마당 구석 구석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화폭에 옮기자고 결심한 순간 사라져 버리고 이내 다른 풍경으로 변해 있는 것을 경험했다는 작가는 오래된 것, 변하지 않는 것, 그러면서도 새로운 것, 변화하는 것 등 이질적인 요소들 사이에서 ‘사이의 색’, 혹은 ‘사이의 형태’를 찾았다. 즉 이전의 원색이나 짧은 막대 혹은 책의 형상, 그리고 조형 요소로서의 글자가 사라지고 보다 은은한 색, 동심원, 빗방울이나 고양이의 형상 등 보다 유기적인 형태로 자연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시인과 화가 등의 예술가들이 경험했다는 대자연 앞에서의 숭고미는 젊은 작가의 캔버스 속에서 제목처럼 ‘적막 환상’의 세계로 다소 고요하고 아득하게 표현된다. 작가가 매일 보는 마당의 풍경, 점점이 이어진 징검돌, 신비스러운 고양이, 푸른 식물들 위에 쏟아지는 하얀 달빛 등은 일견 소소한 일상의 풍경인 듯 하지만 시시때때로 그 모양을 달리 하는 자연의 변화를 여지없이 보여 준다. 마당은 유명한 제주의 비바람을 막아 주는 아늑한 집을 향하는 통로이기도 한 까닭에 작가에게 적절한 미적 거리를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이야기한 것처럼 자연은 작가의 정신 세계를 고양시켜 자연과의 교감을 시각 언어로 표출하게 만들었다. 대평원이나 검푸른 바다, 그리고 깎아지른 절벽 등의 자연을 컴퓨터 모니터로 평평하게 떠올리는 세대일 수도 있는 젊은 작가의 작품에서 아흔이 넘은 화가 에텔 아드난(Etel Adnan)의 작품과의 유사성을 발견한다는 것은 빠르게 돌아가는 시대에도 자연과의 합일, 우주의 법칙에 대한 깨달음 등이 화가의, 나아가 인간의 궁극적인 지향점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에텔 아드난이 보았던, 그리고 화면으로 옮겼던 산과 물, 대지는 정인희 작가의 ‘징검돌’, ‘고양이 환상’, ‘달빛 환상’ 등의 작품에서처럼 추상적이면서도 사실적인 형태와 색감을 가지며 고유한 내적 세계를 시각화한 요소로 간주된다. 스스로 걸어 들어 온 적막 환상의 세계를 캔버스 위로 옮기며 비로소 자연과 하나 되어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작가, 그녀가 이야기하는 ‘해방감’이 뚝뚝 묻어 나오는 색과 패턴 등을 보며 그 필력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다. 
갑작스러운 환경의 변화로 인해 맞닥뜨린 자연을 자신만의 화법으로 담담히 제시하는 작가는 적막한 정원에서 마주한 환상을 가시화하며 고요 속에서 자연에 귀 기울여 보라고 속삭인다. 자연이 주는 경외감을 그림이나 시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림은 일 순간 주변의 정황을 잊게 만든다. 자연을 담은 예술 작품이라니, 그것도 우리 시대에, 생각해 보면 젊은 작가의 새로운 그림들은 정말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화가 김윤경)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을 앞에 두고_윤규홍, 예술사회학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을 앞에 두고>는 팬데믹 때문에 미뤄지다가 이제 모습을 드러내게 된 정인희 작가의 전시다. 작가가 제주도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고, 이 전시가 벌어지는 대구 북구 어울아트센터와 물리적인, 또 인지적인 거리가 있는 탓에 아무도 그의 신작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이 점은 하나의 전시를 만들어가는 입장에서는 불리한 조건이지만, 어느 범위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작업을 완성해 간 작가에겐 잘 된 점도 있다. 화가 정인희에게 있어 미적 실현은 한 점의 작품 단위로 완결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큐레이터가 작품의 세밀한 부분까지 제안할 순 없다. 이 전시를 기획한 이정란 선생도 작가에게 전체적인 방향만 제시하며, 공간 해석의 여지를 의도적으로 열어뒀다. 덕분에 우리는 이번 전시를 기다린 관객의 순수한 입장에서 그림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정인희 작가의 그림에는 미묘한 감정의 선이 있다. 이 선은 방향이라고 해야 하나, 각도와 구도를 잡는 조형성으로 드러난다. 작품 하나를 계획하는 단계에 이 선들은 절대적인 형식이 된다. 물론 대놓고 드러나는 형식이 다름 아니라 금속 표면 위에 물감과 펜의 잉크가 올라가는 회화의 변형이란 점은 두말 할 필요가 없겠다. 작가 본인의 감정을 정리하는 기능을 맡은 선들은 많은 추상단색화 작업에서와 같이, 강제적이며 권위로 채워진 나머지, 본인이 왜 그걸 긋고 있는지 이따금 깜빡 잊는 라인들과는 다르다. 작가는 감각에서 비롯된 즉흥적인 구도의 형식 속에 더 자잘한 선과 색면 그리고 글자가 내용을 채운다. 그 내용이란 작가가 접하는 일상의 삶, 그리고 주변 사람과의 대화, 문학과 미술과 음악과 영화 감상을 통한 삶의 대리 체험 같은 거다. 또 다른 게 있나? 내가 아는 건 여기까지다. 감정이 일렁이는 저장탱크의 게이지 눈금이 어느 정도 올라가면 작가는 그 원료를 뽑아서 그림에 옮긴다.
 내가 보기에, 정인희 작가에게 지난 몇 년은 조형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극적인 진전이 있던 시기다.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을 매끄럽게 채색하여 색·점·선·면 네 가지를 발랄하게 배치하던 놀이는 작가 유년기를 향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작가 앞에 펼쳐진 긴 삶에서 드리워진 그림자가 그림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음영이 곧 글자들이다. 글자와 단어와 문장과 문단으로 짜인 텍스트 이전에 검은 펜 자국으로 밀집된 이미지가 화면 속에 펼쳐졌다. 알 듯 모를 듯한 글 내용에 내가 무슨 토를 달 수 없다. 딴 평론가나 큐레이터들도 마찬가지일 거다. 매 작품 밑에 정보 캡션으로 각주처럼 설명을 남기는 것도 어색하고, 도록 출판물에 그 내용을 미주처럼 달 수 있는 사람도 그 작가적 생애를 반려하는 필자나 작가 본인이지, 우리는 아니다. 암호는 그냥 그렇게 남더라도 괜찮다. 공공 커뮤니케이션의 차원에서 그 문자들은 일종의 기호에 가깝다. 그래서 그 그림들은 실용성보다 심미성 쪽으로 살짝 기울어진 디자인과 같다.
 그 모든 원리 때문에, 정인희의 회화는 경쾌하다. 괜히 있는 체하거나, 고의적으로 정서를 걸리적거리게 하는 게 거의 없는 그림이다. 하지만 그래서 작가가 속으로 품은 모험심이나 투쟁심이 드러나지 않은 채 지나치게 조신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조신함은 그림 가운데 있는 산뜻한 색의 단일체가 어느 정도 풀어준다. 어느 정도의 장난기와 대담함이 뭉쳐져 오벨리스크처럼 확 솟은 그 색면체는 우리로 하여금 심각한 판단을 중지하라고 한다. 이건 작품에 들어간 거친 노고와 집중력까지 묻어버리는 겸손함이기도 하다.
 이런 형식의 회화가 대부분 비슷한데, 멀리서 보면 낱낱의 작품에 담긴 의미를 확인할 수 없다. 감상자들은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그림을 둘러싼 양식미를 먼저 즐긴 다음에, 가까이 다가서서 앞선 문단에서 내가 밝힌 것처럼 세세한 부분을 살피며 궁금증을 풀어갈 것이다. 따라서 이번에 성공적인 전시를 이끄는 핵심은 세 가지다. 우선, 참신한 제목이 포함된 전시 소식을 널리 알리는 기획의 솜씨가 있어야 될 것 같다. 그 다음은 그렇게 장소를 찾아온 관객이 유리벽 너머 벽면에 설치된 작품으로 시선을 끌어들이는 흡인력도 필요하다. 마지막은 작품 앞에서 선 관객을 붙잡아 두는 그림의 내재적 구성미다. 요즘 사람들은 긴 글을 읽지 않는다. 작가도 안다. 그래서 그의 작품엔 아포리즘처럼 마음을 콕 찌르는 단순한 문장이 들어가기도 하고, 아예 집합적인 패턴으로 제시되는 다크 사이드가 있다. 바로 이 것. 조형의 그림자 격인 이 어두운 묘법을 작가는 발전시켜 왔다. 또 앞으로 그렇게 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길은 불충분함, 삐뚤삐뚤함, 거침, 불안정성, 이와 같은 완벽하지 않음을 완벽히 재현한 역설이다.
(윤규홍, 예술사회학)
이 일은 처음의 행위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었네
이 일은 처음의 행위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었네(<메모> 中)

작가가 현재와 같은 작업을 한 계기는 어느 날 꾸었던 ‘꿈’이었다고 말했다. 자전거 라이딩 중, “느닷없이 자전거가 낱낱이 해체되더니 결국엔 갖가지 모양들이 파편처럼 남아서 두둥실 공중을 떠다니는 꿈”을 꾸었다는 것. 온전한 형체가 갑자기 해체되는 것은 일종의 공포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런 꿈에 대한 작가의 말은 이랬다. “계절은 봄이었고 그 느낌이 하도 유쾌하고 좋아서 그림으로 그려보기로 마음을 먹고 그린 적이 있다.” 그 꿈은 파편화된 의식의 표상일 수도 있겠는데 그것의 조합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서 이전의 형태로 돌아갈 수도, 아니면 전혀 다른 형태로, 이도저도 아닌 온전히 파편화된 양상으로 남을 수 있다. 타인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건이 작가에게는 실로 작업의 묵직한 추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는 바, 작가의 선택은 보는 바와 같다. 그 꿈은 ‘비오는 날의 풍경’을 목격한 작가의 실제 경험과 연결됐다. “어느날 비오는 걸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전체적인 풍경이 아닌 ‘하나의 빗줄기’, ‘하나의 빗방울’하는 식으로 관찰하는 나를 발견한 적이 있다. 그때부터 다른 빛깔을 띠며 떨어지는 빗방울을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누군가의 은밀한 사적 행위나 의식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꽤 많은 수고를 요하는 일이다. 그러한 행위의 도덕적 판단 유무를 떠나서 말이다. 작가의 작업이란 어떻게 보면 자신의 사적인 경험과 의식을 필연적으로 드러내는 바,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더한 은밀함을 생성하기도 한다. 
정인희가 이번 전시에 출품한 작업을 봤다. 위에서 언급했듯 꿈과 실재의 경험을 거친 작가의 작업은 마치 홀로그램과 같이 영롱한 색채를 발하는 메탈지에 작가의 주문에 의해 제작된 다양한 색상의 굵은 선형 혹은 원형의 스티커를 손 가는대로 부착한 후, 여백을 자신의 이야기로 음각하듯 채운다. 혹은 자외선 조명을 비춰야만 읽히는 안료를 품은 펜으로 글씨를 채워 넣기도 한다. 이전 작가의 작업은 캔버스에 직접 붓으로 표현된 형식이었으나 이번 전시에는 위와 같이 표현된 작업을 선보인다. 형태들은 눈에 보이듯 단순하다. 그것은 작가의 경험대로 빗줄기처럼 보일 수도, 아니면 장노출에 의해 찍힌 밤을 지나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사진처럼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구체적인 형태 혹은 비물질적 파장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흔적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작가는 자신의 삶의 흔적을 텍스트로 전달하고 있다. 
그래서 정인희의 작업은 일견 단순한 형태를 무의식적으로 조합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아니, 어떻게 보면 그것을 지향하려 했는지 모른다. 눈으로 지각되는 것의 복잡다단함을 형태든, 색이든 그 무엇이라는 요소로 ‘단순히’ 보여주는 행위야 말로 인류가 그간의 미술을 통해 이룩하려 했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작가는 그 단순함 사이의 여백을 온전히 자신의 역사로 채웠다. 이는 단순함의 현현이 온전히 개인사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듯하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형태와 더불어 객관화하려는 시도를 하려는 것은 아닐까? 이는 이전 작업에서 보여줬던(<달다의 사생활>, 2009), 작가의 지기를 관찰한 3인칭 관찰자 시점을 스스로 폐기하고, 스스로를 관찰하는 시점으로 그 대상을 옮긴 듯해서다. 
이제 전시를 보는 관람객은 작가의 사생활을 캐는 집요한 ‘스토커’로서가 아닌, 작가가 왜 그토록 자신의 생활을 가시와 비가시의 중간에서 줄타기를 하는지 이해하는 이로서 존재할 것이다. 여기에 작가의 이번 전시의 의도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는 그러한 아슬아슬한 행위를 통해 꿈에서 비롯한 형태가 거대한 의미의 집합체로서 작동하기 보다는 타인의 이해를 바탕으로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한 담담한 놓아주기를 감행하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의미는 발화의 순간, 내것이 아닐게 될뿐더러 과거 한 시점의 의미일 뿐이기에.
작가가 과거에 존재했던 증명으로서 텍스트도 지금 그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어쩌면 이제는 무의미한 것일지 모른다. 이러한 내용은 꿈에서 봤던 파편화된 형태와 맞닿아 있다. 따라서 작가의 형태와 텍스트는 단순히 간극을 메우는 요소로서가 아닌, 작가 스스로를 회고하는 귀결점에서 만나게 된다.
황석권 《월간미술》 수석기자
정인희가 벌이는 자아 탐색은 산뜻함이 돋보인다
 정인희가 벌이는 자아 탐색은 산뜻함이 돋보인다. 책더미로 드러나는 이 산뜻함은 사실 트릭이다. 그것이 속임수란 뜻이 아니라, 더 깊은 안쪽으로 시선을 끌어들이는 장치라는 말이 맞겠다. 작가가 쌓아온 삶의 여정을 알건 모르건 관객들은 그림에 무심한 듯 담긴 수기나 문학 인용구를 읽으면서 감동에 근접해간다. 작가는 마치 일기처럼 자신의 생각을 객체화하고, 그것을 감각과 결합시켜 일람할 수 있도록 일관된 구성을 반복해간다. 작가노트에 쓰인 작업론은 그 문장에서 강약과 장단의 리듬감이 느껴진다. 예전의 그가 보여준 글의 톤과는 뭔가 다른 그 텍스트는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그것은 전통적 의미의 회화가 점유해야 할 부분을 문학에 자리를 비켜주면서 고정시키고자 하는 기록인 셈이다. 

예술사회학, 윤규홍

마당 산책자의 어느 맑은 오후_이병률 (시인. 여행작가)
마당 산책자의 어느 맑은 오후 

오래전 살던 동네를 우연히 지나고 있는 건지 한 열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손을 뻗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예전에 저기 산 적이 있어요. 저기 빵집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네요.”
그 말이 어린 아이가 하는 말이라서 슬며시 미소 너머의 웃음을 짓게 되는 오후가 있습니다. 
맑지 않다면 농담이 될 수 없는 세계를 정인희 작가는 꼭 움켜쥐고 있습니다.  

또 이런 이야기를 꺼내봅니다. 
색종이와 그림이 그려진 엽서, 그리고 오천 원짜리 지폐를 5미터 거리에 나란히 펼쳐 놓고 열 살 어린이들한테 물었답니다.
“여러분, 어떤 것이 제일로 가까워 보이나요.”
그랬더니 어린이 열 명 가운데 아홉이 오천 원 지폐가 젤 가깝게 보인다고 대답했습니다. 무엇을 선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과감히 지워버리고 빼버리는 아이들만의 풍성한 시선 때문입니다. 

맑음은 오래 멀리 울려 퍼집니다. 노래가 되고, 인사가 되고, 공명이 됩니다.   
오래 전원생활을 해본 사람은 시끄러운 도시 한복판에서도 귀뚜라미 소리를 금방 알아듣습니다. 이런 당연함에는 당최 스스로 마음을 어지럽힐 일이 없을 정인희 작가의 재능이 겹쳐집니다.  
생의 고통 다음에 오는 향기가, ‘모든 끝은 시작과 맞닿아 있다’는 말과 통한다면 작가는 아주 오래전이거나 혹은 미래에 다가올 고통에 맞서기 위해 태어나기 이전부터 몸에 새기고 있던 행복의 유전자를 꺼내고 있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마당 산책자는 세상에 줄을 설 필요도 없고 가진 것의 숫자를 셀 필요도 없습니다. 정인희 작가가 마당에서 발굴한 보물들은 동시에 자기 안에서 캐낸 보물이기도 한 것이므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더 선명하게 옮길 수 있었을 거라 확신합니다. 
첫 감각을 잡아챈 서정의 목소리를 이토록 맑게 펼쳐놓은 정인희 작가의 세계 앞에서 우리는 자꾸 둥글어집니다. 마당에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쌓이고, 고양이가 지나갔을 뿐인데 우리는 자꾸만 둥글어집니다.      

이병률 (시인.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