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김성수의 조각설치 삶의 축도, 유년의 놀이를 통해 본 삶의 알레고리_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김성수의 조각설치 삶의 축도, 유년의 놀이를 통해 본 삶의 알레고리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Octagon과 Cosmos. 팔각형과 우주 혹은 팔각형의 우주. 지구의 축소판? 삶의 축도? 작가 김성수가 자신의 근작에 부친 주제다. 조각은 물성이 강해, 보기에 따라선 물성 자체가 형식이고 주제이기도 한 것이어서 따로 주제를 가정하거나 전제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굳이 주제를 가정하고 전제한 것은 작가의 작업이 서사적임을 말해준다. 문학적임을 말해준다. 어떤 메시지를 특정한 것임 을 말해준다. 그래서 자신의 작업으로 하여금 사회적 조각이 되고 존재론적 조각 이 되게끔 확장을 꾀하고 있는 것임을 말해준다. 서사는 이야기다. 그리고 예술 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 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이야기의 기 술일 수 있다. 자신이 생각한 이야기, 자신이 지어낸 이야기를 매개로 공감을 얻 는다. 비록 지어낸 이야기지만 자신의 경계를 넘어 보편성을 얻는다. 비록 지어 낸 이야기지만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 건너온 이야기, 현실을 각 색한 이야기란 점에서 현실성을 얻는다. 그렇게 작가의 조각엔 사회를 보는 자신 의 관점과 현실을 대하는 저만의 태도가 반영돼 있다. 그렇게 옥타곤과 코스모스로 나타난 주제에는 작가의 관점과 태도가 함축된다. 여기서 코스모스는 우주와 함께 질서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아마도 우주를 창조한 신의 섭리를 질서로 본 것일 터이다. 한편으로 신은 질서와 함께 로고스 (말씀 혹은 이성)로 표상되기도 하는데, 그 의미가 대동소이한 경우로 보면 되겠다. 그리고 옥타곤은 팔각 변으로 이루어진 평면이다. 옛날에 사람들은 지구가 평면이라고 생각했고, 그 평면의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낭떠러지 밑에는 지옥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팔각 평면은 지구를 상징한다. 

 

여기에 작가는 팔각 평면을 삶의 축도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평면의 바닥에는 격자 패턴의 금이 그어져 있어서 체스 판이나 바둑판을 연상시킨다. 말에 해당하 는 군소조각들이 등장하는 걸로 치자면 바둑판보다는 체스 판에 가깝다. 그럼에 도 근본적으로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가 않은데, 전통적으로 동양에서는 바둑판 을 그리고 서양에서는 체스 판을 삶의 축소판으로 봤다. 그런 점에서 팔각형의 우주 혹은 팔각형으로 한정된 공간을 우리가 사는 지구로 보고 삶의 축도로 본 작가의 입장은 전통적인 상징형식에 부합한다고 하겠다.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 겠지만 보통 삶의 축도라고 하면 긍정적이기보다는 부정적인, 우호적이기보다는 공격적인 경우로 보기 마련이다. 현실적으로 삶은 이타주의보다는 이기주의에 의해 견인되고, 존재론적으로 삶은 부조리에 의해 지배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팔각형은 격투기경기장을 의미하기도 한다는데, 삶을 탈출구가 없는 링으로 보고 정글로 본 것일 터이다. 현실적으로 볼 때가 그렇고, 존재론적인 경 우로는 존재를 세계에 (내)던져진다고 표현한 하이데거의 경우에서 확인해볼 수 가 있다. 존재는 특정의 의미와 가치관으로 이미 구조화된 세계 속으로 태어난다 는 의미와 함께, 이에 따른 부조리한 인간이며 비극적인 인간조건을 의미한다. 팔각형의 한정공간으로 축도된 작가의 세계 역시 이런 현실, 이런 존재론적 조건 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외적이지가 않다. 얼핏 동화적 판타지를 연상시키 지만 사실은 이전투구와 아비규환을 재현한 것이고, 장난감처럼 보이는 말들이 알고 보면 상대방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병정들이다. 

 

이처럼 작가는 팔각형의 한정된 공간 속에 삶의 축도를 옮겨놓았다. 조각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상황의 알레고리를 재현한 상황조각으로 보면 되겠다. 작가의 조각엔 말하자면 연극이 있고 연출이 있고 상황이 있다. 이러한 사실 역시 상식 에 부합하는데, 흔히 삶을 삶이라는 무대에서 저마다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는 역 할극으로 보는 것이 그렇다. 앞서 말했듯 비록 동화적 판타지로 각색된 탓에 실 제로 피바람은 불지 않지만 세세히 뜯어보면 박 터지는 경쟁이 있고 아비규환이 있다. 지옥이 있고 비극이 있다. 예컨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제리코의 원작을 패 러디한 <메두사의 뗏목>에서는 살아남기 위해 식인행위가 자행되고 있고, 화산 섬에선 삶의 무분별한 욕망이 용암처럼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실제로는 피어오 르는 인공연무로 대신한 것이지만(사실상 같은 테마를 다룬 2016년 전시에서 보 듯), 부나방처럼 저 죽는 줄도 모르고 화산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의 무리를 표 현한 것이다. 여기에 말들도 알고 보면 장난감 병정인형을 조형한 것이다. 상대 방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상황논리를 순진무구하게 혹은 천진난만하게(?) 표현한 것이다. 순진무구하게? 천진난만하게? 순진무구한 폭력? 천진난만한 부조리? 역설이 다. 역설적 표현이다. 역설적 표현을 통한 강조화법이다. 역설을 통한 강조 화 법? 일종의 잔혹동화를 생각하면 되겠다. 원래 동화는 우호적인 이야기와 폭력 적인 이야기, 재밌는 이야기와 무서운 이야기, 행복한 결말과 비극적인 종말 이 야기가 날씨와 씨실로 직조돼 있었다. 그렇게 삶의 원형적 성질을 고스란히 간직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후 이런 원형적 이야기를 각색하고 억압하는 일이 일어나 는데,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동화를 교육적으로 권장할 만한 이야기로 각색하 면서 억압이 일어난다. 그렇게 동화는 우호적인 이야기와 재밌는 이야기 그리고 행복한 결말을 의미하는 것으로 현재에 전수되고 있다. 그래서 모든 동화에는 폭 력적인 이야기와 무서운 이야기 그리고 비극적인 종말 이야기가 억압돼 있다. 그 리고 그렇게 억압된 이야기를 원형 그대로 복원한 것이, 이로써 부조리한 삶의 현실을 폭로한 것이 잔혹동화다. 판타지가 부조리한 현실을 억압하는 것처럼 잔 혹동화는 동화의 억압된 그림자에 해당한다. 그래서 알고 보면 잔혹동화가 현실 보다 더 잔혹하다. 사실이 극화되는 과정을 통해 부조리한 삶, 비극적인 삶의 실 재가 더 잘 부각되기 때문에 그렇고, 더욱이 이때의 부각이 적어도 외적으로는 여전히 순진무구하고 천진난만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렇게 세상만사 모든 일은 이중적이다. 겉보기와 실제가 다르다. 동화도 그렇지만 장난감도 꼬마들의 놀이도 사실을 알고 보면 어른들의 폭력을 전수하는 경우들이 많다. 더욱이 가상현실이 보편적인 현실이 된 작금의 현실에서는 더 그 렇다. 이를테면 인터넷게임에선 폭력경쟁이 게임의 성패를 좌우한다. 마치 어른 들의 놀이에 해당하는 대중문화와 특히 성인영화에서 선정성경쟁이 결정적이듯. 그렇다면 이처럼 동화의 얼굴을 한 잔혹동화, 순진무구한 얼굴을 한 폭력, 천진 난만한 얼굴을 한 아비규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프로이트는 이처럼 현실이 은폐하고 있는 억압적인 현실, 이중적인 현실, 현실의 그림자를 캐니의 얼굴을 한 언캐니라고 부르고(언캐니는 캐니의 잠재적인 한 속성이었다), 억압된 것들 의 귀환이라고 부른다. 자크 라캉은 복수를 위해 상징계의 틈새로 출몰하는 실재 계의 예기치 못한 출현, 돌발적인 출현(이를테면 세월호?)이라고 부르고, 슬라 보예 지첵은 질서가 구축한 현실을 일소하는 사막, 황량한 바람만 부는 불모의 사막이라고 부른다. 그렇게 작가는 팔각형의 한정된 정글과 링 속에 삶의 축도를 옮겨 놓았다. 순진무구해서 더 잔인한 폭력을, 천진난만해서 더 무서운 부조리 를 옮겨놓았다. 동화의 얼굴을 한 잔혹동화의 실재를 옮겨놓았고, 판타지의 얼 굴을 한 억압적인 현실의 민낯 그대로를 옮겨다 놓았다. 

보기에 따라서 이 작업은 그동안 제작되고 진행된 일련의 작업들이 집대성된 것이고, 그런 만큼 작가 작업의 결정판일 수 있다. 팔각평면을 체스 판에 비유되 는 삶의 축도라고 했다. 그리고 체스 판에는 이러저런 말들이 등장하는데, 저마 다 개별성을 유지하다가도 이처럼 한데 모이면 상황조각의 일부로서 편입된다. 말들 자체는 완결된 것이라기보다는 현재진행형으로 보아야 하고, 그런 만큼 차 후에 말들이 다른 말들로 대체 연출되면서 지금과는 또 다른 양상을 보여줄 것이 지만, 삶의 축도에서 벌어지는 세상사를 재현한다는 큰 개념의 틀은 당분간 지속 변주될 것이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인간사의 스펙트럼을 전개해 보여준다. 여기서 작가는 조각가임을 넘어 연출가가 된다. 마치 체스 판에서 말들의 운용이 게임의 성패를 좌우하듯 어떤 말들이 출현하는지 여하에 따라서, 말들과 말들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는지 여부에 따라서 다양한 현실, 가변적인 현실, 비결정 적인 현실표현이 가능해진다. 

그 과정에서 전작에서처럼 용암분출을 대신한 인공연무나, 근작에서와 같은 우주를 대신한 영상스크린과 같은 장치들이 조각에 부수되면서 조각을 확장할 것이다. 영상스크린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근작의 경우에 속이 비쳐 보이 는, 그래서 설치작업과 영상이 겹쳐 보이는 투명스크린을 설치작업 둘레에 둘러 쳐 감각적 효과를 강화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영상에는 그래픽으로 재현된 거 대한 고래 한마리가 유영하면서 전시공간을 물속환경으로 바꿔놓는다. 그리고 고래는 재차 별자리로 환원되면서 공간 역시 밤하늘과 같은 우주환경으로 변주 된다. 그리고 마침내 고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무한대 기호로 환치되면서 존 재론적인 환경, 상징적이고 도상학적인 환경을 펼쳐 보인다. 

마치 한편의 잘 짜인 영상 쇼를 보듯 느리게 흐르다가도 불현듯 빠르게 전환되는, 블랙홀처럼 이미지를 빨아들이다가도 문득 화이트홀처럼 이미지를 뱉어내는 반복 순환과정과 더불어서 이 모든 이미지들의 변주가 행해진다. 그리고 그렇게 고래가 동시에 별자리로 그리고 무한대기호로 변주되면서 덩달아 공간 환경 역 시 달라진다. 그 과정에서 물속환경은 아마도 생명의 기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모든 존재는 물에서 왔다). 그리고 우주환경은 막막한 우주를 떠도는 미아처럼 고독한 존재를 의미할 것이다(모든 존재는 고독하다). 그리고 무한대기호는 이 처럼 고독한 존재의 생성과 소멸이 무한순환 반복될 것임을 말해주는 것 같다(존 재의 생성과 소멸은 끝이 없다). 존재론적으로는 생과 사가 순환 반복되는 자연 의 섭리를, 그리고 불교적으로는 밑도 끝도 없이 연이어지는 윤회(업?)의 고리 를 떠올리게 된다. 해석하기 나름이겠지만, 적어도 영상을 매개로 서사가 눈에 띠게 확장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이고, 모르긴 해도 이런 매체를 매개로 한 서사의 확장은 추후 작가의 작업에서도 당분간 지속 변주될 것이다. 이 모든 서사의 발단은 작가의 유년시절 장난감 놀이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최초 장난감 놀이에 억압된(은폐된?) 어른들의 놀이(전쟁놀이?)를 조망 하던 서사가 삶의 축도에서 벌어지는 이전투구와 아비규환의 현실을 조망하는 것으로 확장되고, 재차 존재의 근원과 유래를 예시해주는 예지적 비전으로 심화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현실의 표면과 이면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은폐된 현 실, 억압된 현실을 폭로하고, 현실과는 다른 현실, 어쩌면 현실보다 더 지극한 현실을 열어서 보여준다. 

 

조각에선 조형감각이 절대적이지만 설치작업에선 연출력이 결정적이다. 상황논리에 대한 이해, 관계에 대한 이해, 확장된 서사에 대한 이해와 함께 공간에 대한 감각이 결정적이다. 조각을 아우르면서 설치로 확장되는 작가의 작업 역시 이런 조형감각과 함께 연출력이 요구되고 있고, 작가는 이에 꼭 필요한 역량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개념미술 이후 조각은 이전처럼 매력 적이지도 않고 작가 층도 두텁지가 않다. 특히 노동과 물성이 강조되는 직조에 매진하는 작가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조각 역시 변화된 개념과 달라진 환경에 부 응해야할 것이지만, 직조를 도외시하면서까지 조각의 확장 운운하는 것은 문제 가 있어 보인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직조는 여전히 조각의 핵심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전히, 그리고 오히려 더 경쟁력 있는 경우, 대체 불가능한 경우로 남 아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직조에 대한 남다른 근성과 기량을 보여주고 있는, 그리고 여기에 확장된 서사에 대한 이해마저 견지하고 있는 작가의 작업에 신뢰가 간다. 


시간경험과 시간의식, ‘상자속의 놀이공원’_홍경한(미술평론가)

시간경험과 시간의식, ‘상자속의 놀이공원’

홍경한(미술평론가)

 

작가 김성수의 작품 <나의 유년기 시리즈> 그 세 번째인 <상자속의 놀이공원>은 상상 속 동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플랫폼이며, 전시장 )에 들어선 그의 작품들을 접 하는 관객들로 하여금 현실과 전혀 다른 ‘빗장 풀린 세계(마음껏 상상하고 체험할 수 있는 세계)’에 발을 담그도록 이끄는 매개이다. <상자속의 놀이공원>은 그야말로 ‘시간여행자’가 되어 자유롭게 비행할 수 있도록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

 

1.상호지향적 예술은 탈장르, 탈경계와 함께 1990년대 이후 예술의 중요한 흐름을 차지한다. 특히 작가 김성수의 작업에서도 유추 가능한 경험적 상호작용은 단순히 어떤 오브제를 제시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작가 자신의 삶과 미적 경험의 연속성을 현실에서 복원하기 위한 의미 있는 시 도라는 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동시대미술의 지형요소로 꼽힌다. 그런 차원에서 김성수의 작업 또한 ‘나’라는 위치지음에서 이탈해 ‘우리’의 미적 경험을 유도하고, 새로운 예술적 체험을 가능하 게 한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근작인 <나의 유년기 시리즈-상자속의 놀이공원>은 관객의 현존이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 가 되거나 작가와 함께 물리적 행위로서 작품에 참여하고 그 행위가 작품의 일부를 구성하 며 시공간을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작품이 완성된다. 과거 어떤 형상을 설치한 후 공감을 원했던 방식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더구나 <나의 유년기 시리즈-상자속의 놀이공원>에 등장하는 여러 형상은 그가 추구하는 상호의 내부인 시간성과 공간성을 아우르며, 이것은 여러 가지 기술적 방식에 의해 조작되고 변형된다. 그리고 그에 수반되는 짧은 유희와 시간 

경험(time-experience), 시간 의식(time-conciousness)은 참여 관객들에게 고스란히 전이 된다. 

<나의 유년기 시리즈>는 1-2회 개인전 당시부터 동화적 텃밭 아래 기하학적, 추상적 공간에서 자라온 열매이다. 작가에게 조형적 사고를 지속시켜 온 주제이기도 하다. 여기에 최근 덧칠된 ‘놀 이공원’은 기억의 상징인 인체라든가 동물(곰이나 말 같은), 구체적인 놀이기구(달착륙선)와 같은 실체가 덧대어지고, 금속으로 견고하게 물질화된 구상적 이미지들이 그리드 되면서 미술관을 놀 이공원으로 치환케 하는 특별한 플랫폼이다. 동시에 어렴풋 미지에 머물던 유년시절의 꿈과 기억 을 현실로 불어내고 작가 자신의 세계로 불특정 다수를 소환, 신화적인 요소를 확대 재생산하는 다리와 같다.

 

 

2.‘놀이공원’은 한 예술가의 상상력을 맘껏 흡입할 수 있는 지점을 가리키는 것이자 상징적 이 미지를 통해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와 미래를 연결시키는, 다시 말해 시간과 시간을 잇는 여러 차원의 통로 중 하나로 자리한다. “놀이공원은 잠시 현실의 끈을 놓고 비현실과 상상의 세계로의 입장”이라거나 “어떤 특정한 공간을 환상의 세계나 비현실적인 대상으로 설정해 놓고 사람들을 맞이하며 그 공간 안에 존재하는 순간만큼은 모두가 상상의 세계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게 만들어 준다.”는 작가의 정의가 낙점되는 지점과도 동일하다. 그런 점에선 동물을 만났을 때의 향수도 매한가지의 기억더듬이 역할을 한다.  

헌데 그의 작업의 모태를 형성하는 것은 어린 시절 경험한 신비로운(신비로웠던) ‘놀이공원’이지 만, 그것의 속내는 시간관(時間觀)으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없는 균질적이고 직선적인 서 양에서의 불가역성의 성질이 아닌, 다분히 감각적이고 동화적인 순환의 성격을 내포한다. 때문에 시간여행자의 한 결과물 )로 다가오는 그의 작품 <나의 유년기 시리즈-상자속의 놀 이공원>은 누구나 한번쯤은 떠올릴 법한 소제에 이미지를 부여하고, 그 이미지가 공간이라 는 무형성을 관통하면서 인식(認識)의 공유로 무리 없이 연결되는 구조를 내보인다.

‘인식의 공유’를 드러내는 부분은 작가의 작품 속에 자주 등장하는 구체적인 형상, 즉 <시 간여행자(회전목마)>나 <달을걷는자(대관람차)>, <경주마(흔들목마)>, <근위병> 등이

다. 개별적이면서 일체를 이루는 이 놀이의 대상들은 동적인 조각에 멈춰지는 것이 아니라 염원(念願)과 바람, 회귀에 대한 일정한 결을 지닌 초월적 장소(놀이공원)에 위치된다. 한 때 작가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이것들은 작가만의 예술적 신화를 이끌어 가는 모티브 중 하 나이며 공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일종의 능동적 대화의 통로로서의 기능을 맡는다. 이를 달 리 말하면, 작가 개인의 세계가 신화가 되고 신화는 소통의 조각이라는 틀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하며, 그곳에 동승하는 이들은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시간을 향한 탐미 에 개입하는 것이라 해도 그르지 않음이다. 

오늘날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이미지들은 다섯 가지 특징이 엿보인다. 즉, ①유기적 형태가 강한 원과 직선이 교합된 기하학적 구조체라는 점, ②작가의 삶을 넘어 공유 가능한 스펙트럼을 담고 있다는 점, ③건축적 균형과 조각적 볼륨의 가시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 ④공간과 시간이 얽힌 채 과거와 현재를 총체화 하고 있다는 점, ⑤일상과 예술의 경계가 무력화 되고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과거 대비 진일보한 방식으로 평가된다. 왜냐하면 동시대미술의 흐 름에 맞게 놀이공원, 동물, 동화적인 몸짓을 통해 적극적인 관객 소통을 추구하고 있는데다, 정 지된 화상에 국한되었던 예전과는 다른 접근법이기 때문이다. 

 

 

3. 그러나 김성수의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작가의 경험이 전이-상호성을 포박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앞서도 언급했듯, 이를 경험적 상호작용이라 칭한다면, 우린 그의 경험적 상호지향성 이 철학자이며 교육자인 존 듀이(John Dewey)의 ‘경험’의 개념을 중심으로 메를로 퐁티 (Maurice Merleau Ponty)의 ‘지각의 현상학’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련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갖는 장소특정적인 성격마저 함유하고 있음을 고려할 경우, ‘놀이공원’은 다시 ‘장소’의 이 데올로기에 관한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싸이트’의 개념과도 맞닿는다. 

즉, 경험은 개인적인 감정과 감각 안에 갇혀 있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세계와의 활발하고 민첩 한 교체를 의미하며, 예술은 세계를 탐구한 결과이자 우리에게 단순히 보는 법이 아니라 본 것 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는 행위를 통해 무엇을 알게 되는가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결국 예술이란 세계로부터 이탈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를 지정하는 것이고, 나를 둘러싼 세계(기억에 머물고 있는 과거든 현재로 호출된 기억이든, 지난 세계이든 오늘의 세계이

든)는 미적인 것은 물론 사회적이고 정치적이며 경험적인 모든 관계의 원천임을 증명한다. 작가 김성수의 근작들은 바로 여기서 논리적 배경이 건설된다.

아무튼, 김성수의 ‘놀이공원’은 현실적인 의미의 단순한 소통의 개념보다 초월적 성격을 가진 일 종의 길(路)로써 개인의 신화를 대입시키는 은유적 공간이자 추상적 형상과 기념비들을 나타내는 근원의 장소다. 그리고 그 이미지 자체인 여러 동물과 놀이기구 등은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초 현실이라는 두 차원의 연결고리로서의 기능을 겸하는 훌륭한 장치가 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

다. 무엇보다 조각이 지닌 고정성에 탈피하여 다양한 실험적인 예술에 눈이 가 있음은 눈여겨볼 만하다.  

 

 

4. 물론 김성수의 작업에서 아쉬운 부분이 없는 건 아니다. 일단 소통 및 전달, 교감의 방식에 있어 사유의 측면이 희미하다. 이는 인지적 측면에서의 수월함을 형성하고 스토리의 개연성을 합 당하게 만들지만 다소 직접적으로 다가오게 하여 사고의 여진을 효과적으로 생성하지 못하게 하 는 원인이다. 그만큼 이해는 쉬운 반면 여백(경험의 여백, 상상이상의 여백)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자칫 기계적인 메커니즘에 천착할까 우려되는 측면도 없진 않 다.3) 

사실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기지만, 형상 없이 색깔 한줌, 소리 하나만으로도 기억의 소환과 참여 의 방법은 충분히 구현될 수 있으며 설명이 아닌 사유과정을 통해 작가가 의도한 메시지는 더욱 강하게 전달 가능하다. 시각체의 규정성을 극히 제한하더라도 혹은 매우 단순하거나 내레이션이 없는 상태, 매체의 활용성을 최소화하더라도 얼마든지 작가 본인이 언급하고자 하는 의미들은 부 여될 수 있다. 그것이 조각이라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굳이 조각적 범주에 스스로를 포박 시킬 이유 또한 없다. 더 자유롭게 풀어 놓는다면 오히려 감응과 공감의 스펙트럼은 넓어진다.  만약 작가가 이와 같은 필자의 지적을 수용할 경우 이번 전시는 어떤 완성도를 선보이는 게 아 니라 되레 자신의 작업에 대해 객관하고 여러 가지 고민을 담보하는 시간일 것이다. 물론 현재 까지의 과정을 보면 필자의 이러한 제안은 긍정적이다. 공학자가 되다시피 하여 이전과 다른 결 과물4)을 만들기 위한 노력과 성실함, 비평을 비평으로 이해하는 태도와 예술적 열정으로 보아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짙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나의 유년기 시리즈> 그 세 번째, <상자 속의 놀이공원>은 내일을 향한 도약의 계기일 수 있으며, 작가 스스로 멈춰 있지 않음을 증 거 하는 중요한 전시로 귀착될 가능성이 높다.■

 

3)기계장치에 흥미를 느낀 여타 작가들에게서 곧잘 드러나는 양태이므로.

4)입상으로서의 조각이 아닌, 동적인 기능성 조각으로의 전환, 탈경계성. 제시가 아닌 참여방식의 선택 등


동물형상을 통한 무의식의 표출과 현대적 시각으로서의 토템의식_이태호(미술평론가, 익산문화재단 정책연구실장)

동물형상을 통한 무의식의 표출과 현대적 시각으로서의 토템의식

이태호(미술평론가, 익산문화재단 정책연구실장)

 

 

일상(日常), 그 너머의 낯선 상상력과 조우(遭遇)하다. 

조각가 김성수는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인 이번 <제 자리에, On your Mark>展에서 갈라파고스 육지 거 북, 대왕 아르마딜로, 고양이, 돌고래 등 주로 다양한 ‘동물형상’들을 통하여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작 품의 주요 소재가 되고 있는 동물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거나 혹은 일상 속에서 직․간접적으로 접하고 있는 동물들이다. 하지만 이런 낯익은 소재들이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작품은 어딘지 낯 설다. 평범한 현실세계의 소재는 다시금 작가의 무의식 속에서 상상의 나래가 더해져 작가는 무의식과 상상력의 세계를 사실적이면서도 몽환적으로 표현해내고 있다. 초현실주의 작품이 그랬던 것처럼, 사실 적이면서도 상상적이다. ) 꿈과 무의식의 세계, 상상력의 세계를 형상화했던 초현실주의 대표적인 작가 르네 마그리트와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등과 같은 천재적 영감을 지녔던 작가들의 공통점은 바 로 현실의 실재(實在)와 그 실재를 바탕으로 한 무의식과 상상 속에서, 혹은 무감각하게 스쳐지나갈 수 있는 일상의 평범함 속에서 그 내면에 감추어진 ‘비범함’을 찾아냄으로써 현실 너머에 존재할 수 있는 그 이상의 것들을 우리에게 제시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초현실주의자들이 ‘저 너머(beyond)’에 대 해 이야기할 때, 그것은 죽은 자로부터 온 ‘메시지’와 같은 초자연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다. 그것은 현실의 경계를 넘어 우리의 무의식이나 환상적인 감각상태에서 우리의 감각으로 알 수 있는 어떤 것을 의미한다. 

김성수의 이번 개인전 <제 자리에, On your Mark>展에 등장하고 있는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작가 는 일종의 ‘동물 공포증’ 때문에 유년시절부터 두려워했으면서도 동경의 대상이 되었던 다양한 동물들을 소재로 지금까지 꾸준히 연작(連作)을 시작하게 되었고 이런 소재는 바로 김성수 작품만의 외형적인 특 징이 되고 있다. 하지만 김성수 작품이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독창적인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이런 외형적인 특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작가가 동물 이미지를 통해 제시하려는 다양한 ‘내적 상징성’에 기인 하고 있고, 그것은 다름 아닌 ‘치유(治癒)로서 기능’과 ‘현대적인 토템(Totem)적 시각’이다. 르네 마그리 트의 작품들처럼, 김성수의 작품은 사실적인 표현성에도 불구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고정관념을 깨 는 소재와 구조, 발상의 전환 등의 특징을 통해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 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무의식 속의 동물형상, 심리적인 치유로 전환되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던 것처럼 김성수 작품의 특징이 되고 있는 다양한 동물 이미지들은 작가의 유년시절 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동물 공포증’으로 인해 유년시절부터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다양한 동 물들은 작가에게는 점차적으로 ‘상상의 대상이자 친구’가 되었고, 가지고 싶었지만 가질 수 없는 ‘사막 의 신기루’와도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작가가 인지하고 있든, 혹은 인지하지 못하 고 있든지 간에 그것들은 작가에게 ‘일종의 심리치료’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무의식 속의 동물들이 심리적인 치유의 기제로 전환되어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동물들이 이제는 동경의 대상이자 작가 상상력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들을 우리는 김성수 작품의 외형적인 특징이나 기법적인 특징, 그리고 색채 등에서 쉽게 찾 아볼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을 하고 있는 동물의 외형적인 특징은 이제 더 이상 작가를 괴롭히는 두려움의 대상으로서의 형상이 아니고 오히려 귀엽고 친근함마저 느껴진다. 기법 적으로도 날카롭고 차가운 직선보다는 곡선적인 형태가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김 성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인 곡선은 ‘원(圓, Circle)’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만다라(曼茶

羅)’와도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다. ‘원(圓)’을 뜻하는 ‘만다라’는 우리나라에서 뿐만이 아니라 아프리카, 유럽, 북미 대륙에 살았던 고대인들의 암각화에서도 발견되는 것으로서 고대로부터 인류의 삶속에 존재 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이자 심리학자였던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은 만다라 를 통합적인 정신의 중심인 자아와 연관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만다라가 통합적인 정신의 패턴을 실 현하고자 하는 우리의 정신을 가장 자연스럽게 실현시킬 수 있는 구체적인 형태를 제시하고 있는 것으 로, 무의식의 상징으로서 꿈속이나 상상의 세계 혹은 예술작품에서도 자연스럽게 만다라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작가 김성수에게 있어 곡선으로 이루어진 ‘원(圓, Circle)’은 단순한 의미로서의 곡 선이 아니라 날카롭고 차가운 직선을 극복하는 ‘따뜻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고 아울러 어린 시절부터 줄곧 괴롭혀왔던 동물들에 대한 ‘공포감’을 극복하는 ‘심리적인 치유’로서의 의미 역시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것은 치유로서의 자아에 대한 인식과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색채들 역시 초록색 계열의 민트나 갈색 톤, 연한 베이지 색 등 파스텔 계열의 색상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표현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풍선처럼 부풀려진 동물 이미지들과 함께 등장하고 있는 마을이나, 달, 구름, 비행기 같은 요소들은 마치 작가가 어린 시절부터 꿈꾸어왔던 꿈속 세계 혹은 동경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처럼 동화적이고 몽환적이다. 예를 들어 그의 작품 <달 벌 레>와 <조지의 섬>, <반달곰 마을>에서는 마을과 달이 공통적으로 등장하고 있고 고래의 뱃속에 작가 가 어린 시절부터 상상했던 마을을 담아내고 있는 대형작품 <고래의 꿈>은 이탈리아의 작가 콜로디의 

1883년 동화작품인 <피노키오의 모험, Le adventure di Pinocchio>에 등장하는 피노키오의 아버지 제 페토(Giuseppe Geppetto)가 피노키오를 찾아 헤매던 중 고래에게 잡아먹힌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사실적인 동물형상을 통하여 꿈과 상상력의 세계를 담아내고 있는 그의 작품들은 작가 김성수만 의 무의식의 세계, 상상력의 세계를 그가 두려워했던 ‘동물형상’을 빌어서 표현한 것으로서 이것은 심리 치유의 과정을 거쳐 파생된 결과물들인 것이다. 

동물형상, 현대적인 시각으로서의 새로운 토템(totem)의식과 만나다. 

 

김성수의 첫 번째 개인전인 이번 전시의 주제는 <제 자리에, On your Mark>이다. 김성수 작품의 주된 모티브가 되고 있는 동물 형상들은 어찌 보면 지극히 개인적인 소재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제 자리에>라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생각해본다면 개인적인 경험과 상상력의 표출, 치유의 의미만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작가가 동물형상을 통하여 표현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의미 는 무엇일까? 이제 우리가 <제 자리에, On your Mark>라는 이번 전시의 주제를 음미(吟味)하면서 상상 력을 발휘해야 할 차례이다. 우리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요셉보이스의 한 작품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 다. 1965년 한 작은 방에서 이색적인 퍼포먼스가 열렸다. 젊은 남자는 꿀과 금박을 얼굴에 바르고, 죽 은 토끼를 양팔로 감싸 안았다. 펠트 구두를 신고, 구두 밑창에는 강철을 댔다. 그 남자는 3시간이나 토 끼에게 자신의 드로잉 작품에 대해 속삭였다. 이 퍼포먼스가 바로 세계적인 거장 요셉 보이스의 대표적 인 퍼포먼스 작품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한 것인가?>의 장면들이다. 고대 원시시대의 영매 (靈媒) 혹은 주술사가 그랬던 것처럼, 요셉보이스가 자신의 얼굴에 꿀과 금박을 잔뜩 바르고 죽은 토끼 에게 주문을 외우듯이 자신의 작품을 설명했던 이유는 물질만능주의의 탐욕과 폭력의 악순환을 거듭하 고 있는 차가운 세계에 따뜻함을 주는 존재자로서의 행위이자 미술행위를 통해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한 일종의 의식(儀式)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토끼라는 동물은 하나의 존재 단계에서 다른 존재의 단계로 자유롭게 이동하기 위한 매개체이자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영역에 접근해 있는 영적 (靈的)인 존재의 현세적인 형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김성수의 작품에 등장하고 있는 동물 이미지들 역시 현실세계와는 다른 무의식의 세계, 상 상력의 세계에 접근하고자 하는 영적인 존재로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더 나아가 동물은 자연이라 는 커다란 의미의 공동체를 위한 하나의 요소들로 존재하는 것이고 이것은 다시 특정 개인과 연관된 수 호신이나 초자연력(超自然力)의 원천으로서의 동물, 또는 샤먼(무당)의 동물신 등과 동일시되는 토템 (Totem)적인 시각과도 연결된다. 현대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토템이라는 개념 역시 사회현상에 있어서 집단의 상징이나 징표로서의 동․식물이나 자연물을 가리키는 것이다. 작가 김성수에게 있어 동물들뿐만 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들은 자연과 연관을 맺고 변화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제 자리에>라는 이번 전시의 주제가 가지는 의미를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자연과 기 본으로의 환원과 복귀이다. 작가는 다양한 동물형상을 통하여 그 터전이 되고 있는 자연에 대한 사유 (思惟)를 지속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따라서 김성수의 동물형상 작품은 ‘자연속의 공동체’를 바라보는 현대적인 시각으로서의 새로운 토템의식은 아닐까.


팔복예술공장 입주작가 비평문 김성수, 천의 얼굴을 가진 동화 속 영웅들_백기영(서울시립 북서울 미술관 운영부장)

팔복예술공장 입주작가 비평문 김성수

천의 얼굴을 가진 동화 속 영웅들

백기영(서울시립 북서울 미술관 운영부장)

       

 

미국의 비교신화학자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은 어린 시절 아메리카 인디언의 민화를 접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다양한 문화권의 동화, 신화, 전설, 민간전승, 역사적 기록, 학술 조사 서 등을 가리지 않고 연구했다. 그의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에는 인간의 상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천의 얼굴을 가진 동화와 신화 속의 영웅 서사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되는지 기술되 어 있다. 그가 말하는 영웅의 신화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 활동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살아 있는 영감을 불어 넣는다. 이 신화적 상상력은 어린이 동화책에도 등장하지만, 성 서나 불경과 같은 종교적 네러티브에도 나타난다. 심지어 캠벨은 콩고 주술사의 잠꼬대 같은 주문이나 점잖은 취미로 읽어 보는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노자 경구집(老子驚句集)의 얇 은 번역본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법이나 기괴한 에스키모 요정 이야기의 빛나는 의미가 그 내용 면에 있어서는 별로 다른 것이 없다고 주장한다. ) 이 이야기들이 일정한 패턴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한 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을 인용하면서, ‘신화는 우리 삶 에서 인식되고 통합되어야 하는 정신의 힘을 그림언어로 이야기해준다’고 말했다. 따라서 그 는 ‘신화를 올바르게 해석하면 다시 내면의 힘과 연결될 수 있다’고 믿었다.

 

김성수의 작업은 자신이 어린 시절에 남겨둔 낙서 장, 그림일기 같은 동심의 세계로 여행하는 것에서 시작했다. 작가의 동심은 때 묻지 않고 순수했던 어린 시절의 꿈과 미래를 보여준다. 낙서 장에 그려진 그림은 동화 속 주인공이거나 애니메이션 만화 영화, 성인이 되기도 전에 어른들이 만들어 주입한 동심의 영웅들의 모습에 영향을 받았다. 조지프 캠벨에 따르면, 동화 는 죽음을 초극하는 무의식적이고 강박적인 공포와 망상의 표출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신화적 이다.  ) 그렇다면, 이미 어른이 되어 버린 작가가 자신의 유년기에 그렸던 동물, 일러스트 북 의 신화적 캐릭터들 그리고 놀이공원의 풍경이나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디오라마의 기억을 더듬어 발굴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김성수는 그것들이 살아서 만들어 내 는 스토리를 상상하고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조각으로 만들어 낸다. 낙서 장에 그 려진 상상 속의 영웅들은 그의 마법 같은 주술을 통해서 형체를 입고 나타났다. 이 작업은 미 켈란젤로가 대리석 안에 숨어 있는 인체를 조심스럽게 꺼냈다고 말하는 것처럼, 상상 속에 잠 자고 있던 존재들이 생명을 얻고 살아난 것이다.

이와 같은 작업의 시작은 작가가 미술대학을 졸업하던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0년부터 2011년까지 어린 시절에 끄적거렸던 낙서를 바탕으로 제작된 시리즈 <제 자리에>가 그 시원 이다. 이 작업은 작은 철판 조각을 이어 붙여서 용접한 조각이다. 이 시리즈는 동선, 철판을 이어붙인 <달벌레>, 가슴이 뻥 뚫린 반달곰 형상 안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마을을 형상화 한 <반달곰 마을>, 동화책 속의 한 장면 같은 마을이 거북이 등에 올라타고 있는<조지의 섬>, 뭉 게구름을 뿜고 날아가는 우주왕복선이 맴도는 <아르마딜로의 행성>, 파란 구름 위를 헤엄치는 고래를 형상화 한 <고래의 꿈>, 동그랗게 말아 오므리고 있는 <아르마딜로2>로 구성된다. 이 작품들은 각 캐릭터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해주는 네러티브를 바탕으로 전통적 조각의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  

 

김성수의 작업에서 두 번째 시리즈로 분류되는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는 2012년부터 2013 년까지 제작된 것이다. 이 시리즈에 등장하는 작품들은 작가가 10살 때 구상한 동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다. 캐릭터들은 여러 동화책의 이야기가 서로 부조리하게 뒤섞여서 만들어진 것이 다. 스테인레스 스틸과 동판을 연결해서 제작한 이 조각은 늑대를 타고 있는 빨간 망토, 말괄 량이 삐삐, 장화신은 고양이, 당나귀와 강아지 그리고 고양이와 닭이 연결된 브레멘 음악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성수는 생 떽쥐 베리의 말을 인용하여 ‘누구에게나 어린 시절은 있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어른들은 많지 않다.’고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이 조각들은 이전 시리즈에 비해서 더욱 정교하고 조각적으로 완벽한 형태를 이루게 된다. 거친 용접 자욱 위로 두텁게 칠했던 채색작업도 사라지고 원 재료의 질료만으로 이루어진 청동조각 의 특성이 살아났다. 스테인레스 원형, 직사각형 좌대는 거울처럼 캐릭터들을 반영하여 접촉 하는 표면으로부터 부유하듯 떠오른다. 

 

세 번째 시리즈 <상자 속의 놀이 공원>에 와서는 3D 그래픽 툴을 이용한 보다 정교한 작업을 보여준다. 그간의 작업에서 조각적 캐릭터를 갤러리나 공공 공간에 소환했다면, 이 시리즈는 마치 한 권의 동화책 속에 관람객을 초대하는 것과 같은 환경을 제공한다. 놀이동산의 관람차 를 연상 시키는 <달을 걷는 자>, 관람객들이 올라타고 놀 수 있는 <시간여행자>, 스테인리스 로 만든 <경주마>를 <근위병>이 지키고 있는 형국이다. 한 구석에 놓인 <조각가의 책상>은 조각의 제작과정의 비밀을 보여준다. 이 시리즈는 마치 무대의 한 세트장을 연상시킨다. 이상 한 나라의 엘리스에서 마주할 것 같은 초현실적이고 동화적인 상황은 작가의 말대로 어린 시 절의 꿈을 잃어버린 어른 관람객에게는 키치적인 당혹감을 유발시킬 수 있다. 어린이의 입장 에서 살펴보자면, 이 상연된 장치들을 이용해서 놀이에 빠져들기엔 너무나 조각적이다. 오히 려 이 구조물에 올라탄 어린이 관람객의 퍼포먼스는 김성수가 고안한 동화적 상연을 완성시킨 다. 이것이 놀이 공원이 아니라, 갤러리 공간에 설치된 놀이기구 조각품이 갖는 모순이다.

동화적 서사의 연극성이 더욱 극대화 한 것은 이후에 이어지는 2017년부터 2018년까지 제작 된 <옥타곤 & 코스모스> 시리즈에서였다. 회전하는 거대한 팔각형 무대 위에 펼쳐진 디오라 마 형식의 작은 모형들이 어울려 만들어내는 장관은 한편의 거대한 역사극의 한 장면을 연상 시킨다. 작가의 말처럼, 이것들은 무언가에 고군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이들은 전쟁을 하고 있는 지 축제의 향연을 즐기고 있는 지 알 수가 없다. 실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 들은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제작한 <연출된 디오라마>에 등장했던 것들이다. 이 작업을 위 해서 작가는 그동안 제작했던 캐릭터들을 작은 크기의 다양한 디오라마 미니어처로 제작했고 팔각형의 무대 위에 설치했다. 이 작품은 김용찬이 제작한 영상 미디어 프로젝션 매핑작업과 함께 변형된 버전으로 2017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에 출품되기도 했는데, 이 설치작업에서는 거대한 고래가 반짝이는 별처럼 우주의 바다를 유영하는 장면이 팔각형 디오라마를 감싸고돈 다. 순간 디오라마 무대 위의 캐릭터 주인공들은 작은 우주를 여행하는 여행자들이 된다. 그 들의 여행은 우주 바다 위의 낭만을 노래하기 위한 무대가 되기도 하고 성난 파도와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투의 현장이 되기도 한다. 

최근 김성수의 작업은 한층 더 애니메이션 영화제작의 과정을 참조해서 등장인물, 서사구조가 조밀해지고 있다. 2017년에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탑승자들 (The Passengers)> 는 만화와 같은 스토리 보드와 함께 제작되고 있다. 모자를 쓰고 지팡이를 한 손에 든 갱스터 와 강아지를 데리고 장보러 가는 플로리스트의 상반된 성향의 캐릭터를 만들고 또 다른 쳅터 에서는 세 개의 머리가 달린 늑대를 타고 있는 ‘울프 라이더’, 페가수스를 타고 있는 ‘폴리스 맨’, 강아지와 함께 뛰어 다니면서 신문을 돌리는 ‘페이퍼보이즈’를 등장시킨다. 이 캐릭터들 은 거대한 형태의 조각 작품으로 제작되어 스폿라이트 조명을 통해 연극적 상연을 연출하고 있다.

 

조지프 캠벨은 신화적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나고 여기 에서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는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봤다.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오는 것을 통해서 스토리는 완성된다. ) 여기서 수호자는, 영웅의 현재 상황, 혹은 삶의 지평의 한 계를 상징하면서 사방에서(위 아래 까지) 세계의 경계를 침범한다. 이 수호자 뒤로는 어둠이 며, 미지의 세계이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부모의 감시 밖이 아이들에겐 위험 지역이고, 사 회의 보호 밖이 종족의 구성원들에겐 위험 지역인 것과 마찬가지다. 보통 사람들이면 여기에 서 만족한다. 심지어는 표시된 경계선 안에 안주하는 데 만족하기까지 한다. 집단의 보편적 믿음이, 미지의 땅으로 첫 발을 내딛으려 하는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김성수는 이 세계의 경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미지의 땅으로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서는 이 경계를 침범해야 한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들이 도래하는 미래는 과거 작가의 어린 시 절, 동화 속 상상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끝없는 역설적 딜레마를 안고서 말이다.  

  

 


조각가의 정원

<조각가의 정원>

“우리는 자연을 모방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연을 재현하려 하지 않는다. 우리는 열매를 생산하는 나무같이 창조하기를 원하며 복사하고자 하지 않는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창조하기를 바라며 해석을 통해 만들어 내려 하지 않는다.”

- 한스 아르프 Hans Arp

 

현실 속에 흩어져 있는 형상들의 파편을 의식세계 안으로 모아 온다. 파편들은 작가의 허구적 네러티브 안에서 자유롭게 변형된다. 작가 개인의 경험들과 상상이 뒤섞인 서사 속 세계에서, 파편들은 외부세계를 닮은 형태를 유지하거나 확대, 축소되기도 하고, 완전히 변형되거나 단 순화된 형태, 혹은 해체되거나 통합된 형태로 구성되기도 한다. 입체조형 작가 김성수는 허구 적 서사의 세계에 존재하는 형상을 조각을 통해 현실의 공간들로 다시 옮겨 놓는다. 금속판을 수도 없이 반복해서 두들겨대는 그의 행위는 그래서인지 소환의식처럼 보이기도 한다. 무아지 경에 빠질 때도 연장의 궤적은 익숙한 감각을 따라간다. 덕분에 직관적이고 비합리적이며 불 확실한 요소들이 개입되는 과정 속에서 질서와 균형 또한 추구된다.

<조각가의 정원>은 조각들이 놓여있는 실제 정원도 아니고, 정원을 재현하기 위한 조각도 아 니다. 정원의 미학은 정원사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옮겨온 자연의 생명들이 스스로 공간을 창조해 나갈 때 형성된다. 작가는 외부와 분리된 전시공간을, 외부의 자연과 분리된 영역 안에서 자연의 창조가 이뤄지는 공간, 즉 정원으로 설정한다. 이를 위해 자신이 만들어 낸 서사 속 형상들을 전시장으로 옮겨와, 정원의 방식처럼, 조각이 전시공간을 창조하도록 시 도한다. 즉 작가는 조각이 놓이게 될 공간을 정원처럼 바라볼 뿐, 공간을 창조하는 것은 조각 인 셈이다. 따라서 관객은, 당황스럽게도, 정원의 잘 가꿔진 식물의 형상 대신, 굵고 단단한 기둥에 달라 붙은 금속식물의 단편을 만나게 된다. 당연하게도, 전시공간은 전혀 정원처럼 보 이지 않는다. <조각가의 정원>은 생명이 정원을 창조하듯, 조각들의 조형성이 확장된 공간이다.

 

정원 속 식물들처럼 조각은 전시공간의 물리적 제약을 수용한다. 이번 전시는 두 나무 fallen tree(2024), blossom tree(2024) 설치 작품을 중심으로 부조 relief 형태의 식물 파편들이 함 께 구성되어 있다. 두 나무는 작가의 허구적 네러티브 속의 캐릭터가 조각한, 훼손된 자연의 파편들을 재구성한 형상들을 현실에 구현한 것이다. 두 나무는 분리된 형태의 흰 벽을 마치 회화의 캔버스처럼 이용하는데 이를 통해 조각은 평면적인 조형효과를 갖는다. 입체조각에서 기본적으로 하부구조에 요구되는 시각적 무게 중심이 뒷벽에 평면적으로 분산되면서 전체적인 구조는 안정된다. 사선의 형태로 확산되는 듯한 형상의 에너지도 벽 안으로 갈무리된다. 외부 공간과 열린 관계를 맺는 3차원 조각에 부여되는 이러한 정면성은, 부조의 형태로 벽면에 걸 려 제시되는 파편 조각들과 함께 더욱 강조된다. 이때 관객은 조각이 놓여진 현실공간을, 마 치 평면회화처럼, 분리된 내적 조형세계로 함께 인식하며 경험한다.

 

조형세계 속 김성수의 조각은 순수한 예술적 표현을 통한 창조를 추구한다. 작가는 서사나 자 연의 재현을 최소화하면서 조각에 가하는 신체의 물리적 개입을 극대화하고 동시에 재료의 물 성을 강조한다. 작가는 서사 속 캐릭터의 형상이나 캐릭터가 놓인 상황을 연출했던 이전의 전 시들에서도 서사적 내용보다는 조각과 공간이 형성하는 조형적 긴장감에 더 중점을 두는 경향 이 있었다. 이번 <조각가의 정원>은 여기서 더 나아가 물질과 신체의 행위라는, 조각의 창작 조건이 만나는 경계면으로서의 재료의 표면을 강조하면서, 조각의 추상성과 물질성을 함께 성 취하려는 시도를 드러낸다. 집요하고 지독하게 반복적으로 표면을 때리는 작업과정은 알루미 늄 금속판의 전면을 추상적 형태로 변형시키는 동시에, 재료의 밀도를 높이면서 금속의 단단 한 물성을 강조한다. 이때 식물의 형상과 대비되면서도 조화를 이루는 금속성은, 은유와 상징 으로서의 해석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무엇보다도 조형 재료로서의 그 위치를 강화한다. 마치 현대회화의 표면에 드러나는 붓질처럼, 표면의 대비를 만들어내는 요철 凹凸 은 그 자체가 조형적 자율성을 갖는 동시에 힘을 가하는 신체의 지표가 되는데, 결국 표면이 변형될수록 금속재료의 물리적 특성이 더 드러나는 효과를 보이기 때문이다.

알루미늄 고유의 속성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제작과정은 표면의 최종적 형태에 종속되지만, 조 각의 파편들은 결합하면서 자연을 닮은 구상적 형상에 가깝게 구축된다. 그러나 조각은 부자 연스럽게, 비스듬히 바닥에 쓰러지거나 떨어진 상태, 벽에 달려 있거나, 상대적으로 납작하고 좁은 금속판 위에 뿌리 없이 서있는 상태로 놓인다. 식물의 형상도 가지의 방향, 잎의 형태, 꽃의 위치가 작위적으로 뒤섞이면서 비현실적으로 구성된다. 작가는 자연을 모방하지 않고 자 연으로부터 창조한다.

표면을 두들기고 모서리에 열을 가하는 동안, 파편들은 필연적으로 비의지적인 요소의 영향을 받는다. 마치 자연의 식물들처럼, 완벽한 제어가 불가능함에 따라 이를 결합하는 과정에도 즉 흥적이고 비계획적인 수정이 불가피하다. 그럼에도 그동안 입체성이 강조되는 조각 작업들을 진행하며 축적된 작가의 조형감각은 좌대 없는 조각, 뿌리 없는 식물을 최종적으로는 견고하고 안정적으로 구성한다. 작가는 전통적인 회화와 조각에서의‘관계적 구성’, 즉 전체적인 균형 과 조화, 통일성을 위해서 요소들을 나누고 관계를 설정하는 구성 방식을 여전히 유지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통적인 재현 조각이 효과적으로 자연을 모방하고 서사를 전달하기 위해 설정 하는 표면과 형상 간의 관계는 거부한다. 오히려 조각가 신체의 각인처럼 남겨진 자국들로 이 루어진 표면의 덩어리들은 파편 조각의 형상들과 함께 이질적인 조형적 긴장관계를 형성한다. 금속 조각은 거칠지만 섬세하고 차갑지만 서정적이며, 강인하면서 천진해 보이고, 자유로우면 서도 규칙성이 느껴지는 모순된 조형적 성격을 나타낸다. 표면의 추상성과 재료의 물성 그리 고 자연으로부터 창조된 형상을 충돌시키면서, 김성수의 조각은 공간을 창조해 나간다.

 

김성수는 금속이라는 재료를 미적으로 탐구하고 신체의 개입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를 표현 한다. 창작의 과정을 통해 자신이 만들어낸 서사의 내용들과 조형적 가치 간의 균형을 치열하 게 탐색한다. 조각은 현실의 공간으로 이식하듯 옮겨지면서 작가의 경험적 세계와 조형적 세 계로 구성된 서사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관객은 더이상 파악되지 않는 서사의 무대 안에서, 내 용이 아닌 조각 자체를 바라본다. 이때 관객의 상상을 통해 서사는 다시 시작되고 조각은 새 로운 조형적 세계를 공간에 확장한다. 정원을 창조하는 자연의 생명들처럼.

채영 (미술이론)


조각가의 정원 Sculptor’s Garden_권혁규 전시기획자

조각가의 정원 Sculptor’s Garden 

 

김성수 개인전 《조각가의 정원》(2024)은 특정한 서사를 기반으로 한다. 전시는 작 가 스스로를 캐릭터화한 가상의 조각가 렛켓(Rat-Cat)과 그의 동료 문벅(Moonbug) 이 우연히 불시착한 숲을 배경으로 한다. 그들은 새롭게 맞닥뜨린 숲을 자신들만의 터전으로 가꾸어 가고 전시는 그 과정을 식물의 조형적 구성으로 시각화한다. 개별 작업을 살펴보기 전에, 위 서사 구조는 몇 가지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조각가와 그 의 동료는 왜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서게 됐는가. 어째서 아무도 없는, 불시착 한 숲을 그들만의 터전으로 만들려 하는가. 전시의 개별 작업들은 이 같은 질문들 과 함께 렛켓과 문벅의 여정을 상상적으로 그려보게 한다.  

 

설명했듯, 가상의 조각가 렛켓(Rat-Cat)은 작가 자신을, 어쩌면 동시대 많은 작가들 을 닮은 캐릭터라 할 수 있다. 작가는 그간 지속적으로 실제와 가상, 경험과 기억을 중첩시켜 서사를 구축하고 그것을 조각, 설치, 드로잉 등의 방법으로 시각화해왔다. 그의 작업에 등장하는 등장인물과 동물들, 그리고 장소들은 모두 어떤 기억, 장면의 시각적 발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전의 서사들이, 또 그를 기반으로 한 작업이 일종의 관찰자 시점으로 진행된다면 2023년 공개한 《조각가의 아뜰리에》를 기점 으로 작가의 개인적 경험이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듯하다. 《조각가의 정원》 에서도 창작자로서 마주하는 여러 현실의 장면과 고민들이 자조적으로, 또 어떤 면 에서는 결심이나 다짐처럼 내비쳐진다. 

같은 맥락에서 렛켓이 표류하고 불시착하는, 또 다른 터전을 꾸리는 과정은 자연스 럽게 오늘 창작의 현실을 떠올리게 한다. 말 그대로 무한경쟁 속에서 작가는 지속 적으로 작업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표류한다. 정주 공간 마련의 필요성을 절감하지 만 어쩔 수 없이 떠도는 많은 작가들은 자의든 타의든 아티스트 레지던시와, 각종 공모를 통해 창작 활동을 지속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같은 활동지원 역시 신자유주의적 경쟁과 통치의 체계에서 선택받은 소수만이 받는 혜택이라는 점은 오 늘 작가들이 처한 막막한 현실을 역설적으로 더 강조하는 듯하다. 실제로 지원 프 로그램의 혜택을 받아 전주에서 서울로 이동한 《조각가의 정원》은 마치 현재의 상황을 극화하듯 경쟁논리가 만연한 가운데 더욱 어려워지고 있는 작가의 창작과 일상을 허구의 서사로 가공해 제시한다.  

 

그렇다고 김성수 개인전, 《조각가의 정원》(2024)이 경쟁 역학에 스스로 종속된 장 면만을 제시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전시는 다른 장소를 찾아 떠나는 여정을, 우연 히 당도한 새로운 장소를 자신들의 터전으로 꾸리는 과정을 보다 중요하게 보여준

다. 다시 말해, 끝없는 경쟁과 통치성보다 능동적 행위와 자율성에 더 주목하는 것이다. 전시는 마치 가상의 금속 조각 정원처럼 다가온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Fallen Tree>(2024)와 같은 직립한 입체가 보이고 그와 함께 부조 형식의 <Relief Flower>(2024)와 <Floating Leaf>(2024) 시리즈가 벽면에 자리한다. 제목 그대로 나무와 꽃, 잎의 형상들이 전시장 곳곳에서 정원을 구성하는 것이다. 작가 말에 따르면 렛켓의 비행체와의 충격으로 인해 쓰러진 나무와 함께 어우러지는 각각의 잎과 꽃 잎이 공간 곳곳에 흩어진 장면이다. 이는 육중한 조각의 물질성과 직립성을 무조건 적으로 강조하는 대신 조화롭게 꾸려지는 유기적 공간으로, 입체와 평면, 정지와 움 직임, 훼손과 복구/창작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이번 전시를 제시한다. 그렇게 전시는 실제 나무, 잎, 꽃을 단순 재현하거나 묘사하기보다 그것의 기본 속성을 더 중요하 게 여기며 일종의 숲을 형성한다. 금속으로 만들어진 식물은 대상의 모습과 얼마나 유사하냐의 문제보다 그것이 조화와 확장의 성질 안에서 나름의 조형성을 갖는다는 점에 더 주목한다. 개별 작업은 얼핏 나무와 꽃 등의 형상을 띄지만 그것은 실제 형태나 덩어리, 모습에서 어긋나는 또 다른 물질과 덩어리로, 선과 형태로 존재하는 듯하다. 

작가의 이러한 의도는 작업 방법에서 한 번 더 강조된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이 전의 단조기법에서 보이는 표면의 질감을 보다 드라마틱하게, 마치 일렁이는 물결 처럼, 불어오는 바람처럼 표현한다. 이는 금속판을 두드려 형상을 만들 때 발생하는 들어가고 튀어나오는 표면의 차이를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일종의 자연물이 라 할 수 있는 나무와 식물의 성질을 특유의 질감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동시에 금 속의 표면을 통제하며 정제된 감각을 제시하기보다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롭게 질감 을 운동을 드러내며 앞서 언급한 개인적인, 현재 마주한 고민과 현실을 보다 솔직 하게 전달하려 한다. 다시 말해, 작가의 가장 오랜 방법론 중 하나인 금속 단조를 통제나 조율, 단순 조형의 목적보다 물질과 자신이 가장 직접적으로 관계한다는 방 식의 근원적 성질에 집중하며 하나하나의 작업을 전시하는 것이다.

 

전시는 작업의 표면뿐 아니라 주변을 마치 중력에서 이탈한 또 다른 차원의 공간처 럼 구성한다. 일전에 《조각가의 아뜰리에》와 《패신저스》(2016-2022) 시리즈를 통해 조각의 그림자를 강조하거나 공중에 떠있는 듯한 상황에서 얼마간 움직이는 작업을 선보였던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알루미늄 표면의 빛을 공간에 반사시켜 퍼 뜨리는 등 역시 조각의 중력을 재고하는, 심지어는 물리적으로 벗어나려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작가가 줄곧 만들어온 놀이기구들, 이번 전시에 등 장하는 비행체, 또 서사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는 이동의 행위는 어쩌면 직립한 3차 원의 물체라는 조각의 성질을 보다 즉흥적으로 또 자유롭게 재구성해보는 또 다른 조각적 시도처럼 다가온다. 

 

종합해보면, 작가가 《조각가의 정원》를 통해 마주하는 현재는, 또 개인의 경험과 고민을 시각화하는 방법은 결코 ‘자기 자신’만의 드러냄은 아닌 듯하다. 작가가 밝히듯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가는 조각가의 이야기는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다룬 《패신저스》에서 비롯된다. 여기서 말하는 생존자가 누구인지 그 실체를 분명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그 말 자체로 먹먹하고 쓰라린 사건 사고와 재난을, 경쟁의 고단함을 떠올리게 한다. 이번 전시는 분명 작가의 이야기지만 그것은 타인이 침범 할 수 없는 영역이 아닌 누군가와 ‘함께 꾸려나가는 정원’으로 제시된다. 전시는 작가의 권위나 개별 작품의 절대성이 아닌 그것에서 비롯되는, 때로는 그로부터 벗 어나는 또 다른 장소와 움직임을, 어떤 다짐과 고군분투를 떠올리게 한다. 여기 작 품의 권위Authority와 내용을 관장하는 유일한 존재로서의 작가Author가 아닌 누군 가와 함께하는 작가, 그의 작업이 전시된다. 그렇게 전시는 작가의 작업 과정을, 창 작의 두드림을 역전시켜 추적하길 넘어 그에 동참해 함께 정원을 꾸리는/이어 붙이 는 장면을 시각화하는 것은 아닌지 질문해본다. 작가가 말한 공존의 서사는 “어떻 게 우리가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를 꾸려나갈 수 있는가?”라고 묻는지 모 른다. 누군가가 이곳에 불시착했다면 부디 함께 꾸려나가는 과정에 동참해보길 바란다.

권혁규 전시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