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물리적 현상의 조형적 변주-이일
물리적 현상의 조형적 변주_이일(미술평론가, 홍대 교수)

올해로 나이 만40에 접어든 조각가로서 두 번째의 개인전을 가진다는 것은, 그것도 매우 의욕적인 제작 활동을 해 온 조각가의 경우, 어딘가 아쉬움을 갖게 한다. 계낙영의 경우가 바로 그것이며 그는 1977년의 첫 번째 개인전 이후 자그마치 12년 만에 이번에 다시 개인전을 꾸미게 된 것이다. 그 동안의 계낙영의 작품 활동은 그 경력만을 훑어보아도 매우 다양하게 펼쳐져 왔다. 지난 '86년에 거푸 두 공모전에서 각기 [동아미술상]과 [서울현대조각공모전 대상]을 수상했고, 그 이전과 이후에도 그는 각종 현대조각 단체전 내지는 그룹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왔다. 그러한 그가 모처럼만에 개인전을 가지게 된 데에는 나름의 각별한 의의가 있다고 여겨지며 거기에는 어떤 결산과 변모에의 의지가 동시에 담겨 있지 않나 생각된다. 
'77년의 첫 개인전이래 거의 10년 동안 계낙영은 오로지 목조에만 전념해 왔다. 그러한 그가 '86년이래 아주 단호하게 석조에로 전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의 작품 세계도 또 다른 단계에로의 전환의 획을 긋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조각세계가 완전히 그 모습을 달리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그의 조각적 발상은 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시종일관되어, 그것이 다양한 조형적 변주를 엮어 왔으며, 그것은 근자에 와서의 석조작품에 있어 한층 그 증폭을 더해가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계낙영 작품의 기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우선 무한히 스스로 증식해 가는 곡선적 리듬이다. 
그러나 그 리듬은 결코 [추상적] 리듬이 아니라, 어디까지는 구체적, 더 나아가서는 [물리적] 인 현상의 한 양상이며, ([융점변화]라는 작품 제목도 우리에게는 생소한 물리학 용어이다.) 그것은 작가 자신이 밝히고 있듯이 두루마리 종이 또는 헝겊이 자연스럽게 서로 겹치고 또 펼쳐지면서 형성되는 구김의 리듬이다. 그리고 그 리듬이 엮어내는 곡선적 조형성이 바로 계낙영 조각의 라이트모티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 리듬은 사실상 무한한 조형적 변주가 가능하다. 그것은 수직적으로 또 수평적으로 마치 그 어떤 생명체처럼 자라며 문자 그대로 [자라나는 나무]와 같이 끝없이 [상승]하는 무한성을 그 속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무]는 다양한 목재의 재질과 함께 그 조형적 변주 또한 다양하게 펼쳐져 왔다. [자라나는 나무]로 비유될 수 있는 계낙영의 유기적 조각은 '86년에 이르면서 목조에서 석조에로의 전환과 함께 보다 물질성이 강하게 노출된 조각에로 이행해 간다. 하기는 목재나 석재가 다같이 청년적인 사물임에는 서로 다를 바가 없다. 그리고 그가 10년 동안이나 목조에 집착했고, 거기에서 다시 석조에로 이행해 간 것은, 바꾸어 말해서 그가 브론즈에 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도 필경은 그의 [천연적]인 사물에 대한 애착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브론즈는 고사하고 석조 중에서 그가 대리석을 굳이 마다하는 것도 이 두 유형의 조각이 지니는 재질적인 냉냉함, 체온이 전적으로 배제된 [매끄러움]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석조를 택하면서도 짐짓 거칠고 경도가 높은 화강암을 택한 것이다. 돌이라고 하는 재질상의 조건 때문에 계낙영의 조각적 형태 구조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이미 그것은 [자라나는 나무]의 그것은 아니며, 이와 아울러 작품의 조형 체계도 달라지는 것이다. 물론 물리적 현상으로서의 곡선적 이름과 그 조형적 변주라는 기본 테마에는 변함 이 없기는 하나, 그 조형적 변주에 새로운 요소가 추가되는 것이다 곧 [대비]라고 하는 조형적 요소가 그것이다.
이 [대비]는 아마 두 가지 유형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않나 싶다. 하나는 곡선적 리듬 상호간의 대비요, 또 하나는 곡선적 리듬과 단순화된 양괴와의 대비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보아 목재와는 다른 화강암의 육중한 중량 때문에 조각 형태가 전반적으로 단순화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그 단순화가 오히려 계낙영의 작품으로 하여금 조각의 형태적 리듬을 구조화시킴과 동시에 육중한 기념비적 성격을 지니게 하고 있다.

유려한 곡선에서 오는 담백한 맛-윤진섭
유려한 곡선에서 오는 담백한 맛_윤진섭(미술평론가)

계낙영 조각의 요체는 덩어리(양괴)와 여기에서 뽑아올린 면의 연장이 가져오는 조화에 있다. 그리고 면의 연장이라고 할 때 거기에는 흔히 다양한 변주가 덧붙여진다. 그의 작품은 또한 심플한 것이 특징인데, 이는 70년대 그가 목조작업에 몰입했을 때부터 지속돼 온 경향이자 그의 작업의 일관된 성격이기도 하다. 계낙영의 조각에서 두드러지는 형식적인 성격은 자연스러움과 인공성이 어우러진 선명한 대비효과라고 할 수 있는데, 이같은 특징은 돌이라고 하는 재료 자체가 지닌 중후한 느낌을 가일층 촉발시킨다. 그는 재료가 지닌 이와 같은 특징을 보다 강화시키기 위하여 섬세하게 묘사된 면의 변주 부위 이외에는 자연 그대로의 맛을 살리기 위하여 인공의 흔적을 가능한 한 배제한다. 돌이 잘린 흔적의 느낌이 생생하게 묻어나오는 기저에는 거칠게 마감질한 정이나 끌의 자취가 최소한으로 베풀어져 있는데 이와같은 자연스러움은 정교하게 드러나는 면의 곡선적 자태에서 오는 율동감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70년대 이후 주변경향의 변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꾸준히 조각에 있어서의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탐색해오고 있는 계낙영의 이와같은 굳은 자세는 앞서 언급한 두 명의 작가와 함께 개성의 강도를 드높이면서 경직과 획일화의 또 다른 늪으로 침몰하는 듯한 조짐을 보이는 우리의 화단에 조용한 파문을 던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