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정원에서 보내는 생의 행복한 순간_박영택(미술평론가)
이존립-정원에서 보내는 생의 행복한 순간

-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

 이존립은 인간이 자연 속에서 행복하고 낭만적인 생의 한 순간을 만끽하는 장면을 선물처럼 안긴다. 그것은 정원에서 보낸 하루의 일기와도 같고 그곳에서 보내온 그림엽서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림이 무척 예쁘고 장식적이며 달콤하다고나 할까. 다분히 문학적인 그림이다. 문학적이란 그림을 보면서 어떤 사연, 내용이 자꾸 연상된다는 얘기다. 특정한 사연을 도상화 하고 있는 그림, 그림책과도 같다. 그림 하나하나가 사연과 이야기를 열매처럼 매달고 있으며 그 장면 하나로 인해 여러 상념과 사연을 부풀려낼 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근대 이전의 그림은 모두 문학적인 그림들이었다. 특정한 텍스트에 기반 한 이야기그림들이었다. 서구의 경우 그리스, 로마 신화나 성경에 나오는 일화가 그림의 내용들이었고 영웅담이나 전설들이 그림으로, 조각으로 형상화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 역시 신화나 불교교리, 유교경전의 내용이 이미지로 풀려나왔다. 따라서 전통시대의 그림이란 결국 특정한 텍스트에 기생하는 것이었다고 말해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당시 이미지는 읽은 그림들이었다. 
반면 현대미술은 미술에 붙은 이야기를 배제하고 오로지 미술 그 자체만을 다루려고 하였다. 따라서 문학은 미술에서 추방되고 이제 미술은 미술 내적인 문제나 시각적인 것만을 대상으로 하면서 주제나 내용이 지워졌다. 이른바 현대미술의 보편적인 작품 제목이 된 ‘무제’가 바로 그것을 반영한다. 미술은 오로지 눈으로 보는 그 상태, 그 자체만을 즉물적으로 확인시키는 다소 난해하고 건조한 것으로 되었음도 부정하긴 어렵다. 그래서인지 미술에서 추방된 문학성, 이야기성을 여전히 그림 안으로 호출하는 경우를 자주 만난다. 이존립의 경우도 그런 예라고 볼 수 있다.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고독, 사랑, 낭만, 행복 같은 단어를 자연스레 떠올리게 하는, 입에 붙게 만드는 그림을 그린다. 다소 상투형의 이미지이자 설정이지만 무척 정감 있는 풍경이다.  그는 모종의 행복한 순간을 형상화하고 있다. 자연 속에서 저렇게 여유 있고 호젓하며 나른한 한 때를 보내는 한 때가 추억되고 있다. 그의 그림은 행복한 지락의 한 순간을 기념하고 기억한다. 그림 속 공간은 한결같이 숲속이고 공원의 한 풍경이다. 나무와 풀과 꽃이 가득한 공간이다. 현란한 색채와 다기한 형상을 지닌 온갖 꽃과 풀들이 색 면과 간추려진 도상으로 번안되어 그려져 있다. 그것은 식물을 단순하게 약호화 하고 기호화하고 있다. 너무도 다른 식물의 여러 자태들을 몇 가지 유형으로 간추려서 색채와 이미지로 해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식물계를 추려 이미지로 만드는 과정에서의 도상의 독자성이 요구되고 설정 자체가 주는 클리쉐적 이미지연출에서 자유로웠으면 한다.  
작가가 연출한 배경 안으로 젊은 남자와 여자가 등장한다. 청춘의 사랑과 동경, 그들의 낭만적인 젊음의 한 때가 보는 이들에게 홀연 그 시절로 회귀시킨다. 그래서 그의 그림이 행복한 순간을 보여주는 동시에 애틋한 추억의 장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어쩌면 이 인물들은 작가가 만든 배경에 등장하는 배우들과도 같다. 무대가 된 정원에서 하나씩의 에피소드를 만들어가는 청춘남녀의 모습 말이다. 이 연정이 가득한 장면은 세속의 도시와는 분리된 자연공간이다. 인간은 늘 자연 안에서 행복을 추구해왔다. 그러나 자연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잔인하기도 하고 거칠기도 하면서 생존을 위협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온갖 은혜를 베풀기도 하는 양의적 존재다. 인간은 그 자연 안에서 삶을 영위해왔고 행복하고자 했다. 본연의 자연뿐만 아니라 인위적으로 가설된 정원 안에서 그 꿈을 실현하고자 했으며 이를 그림으로 구현해왔다. 풍경화나 산수화는 그런 욕망의 소산이다. 

 최초의 정원은 식량 생산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고되고 정처없으며 위험한 방랑을 끝내고 정착, 정주의 삶을 영위하면서 밭을 가꾸고 재배를 하면서부터 인간의 삶은 새로운 차원으로 진화되었고 자연이 그런 식으로 관리되고 재편되면서 정원이란 개념도 생겨났을 것이다. 프랑스의 원예가인 질 클레망에 의하면 채소밭이 최초의 정원이란다. 유럽의 시골에서는 정원이라는 단어가 다름아닌 채소밭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 나머지는 다 풍경이 된다. 이 풍경이 어떤 구성의 대상이 될 때 사람들은 그것을 공원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최초의 정원은 자연 안에 울타리 처진 땅을 지칭했다. 정원이란 단어는 울타리 쳐진 땅(라틴어Hortus conclus)을 의미하는 독일어 단어 Garten에서 파생되었다. 울타리를 두른 땅은 채소와 과일, 그리고 꽃과 동물, 생계수단 등 정원의 소중한 재산을 보호하는데 적합했다. 어느 시대든 그런 것들을 잘 지켜내야 가장 좋은 정원이었다. 그 정원이 다름아닌 낙원의 기원이다. 낙원(paradis)은 페르시아로부터 발원하는데 울타리를 두른 땅이란 페르시아어‘pairidaeza’가 파라다이스가 되었다. 불모의 땅을 지니고 있던 이들이 자신의 거주 공간 안에 그 자연을 모방하고 불모성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나무와 풀, 분수를 만들면서 정원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낙원 혹은 정원이란 무엇보다도 성채이자 보호구역이었다. 오늘날 공원은 도심 속에 구현된 파라다이스이다. 그 인공의 자연, 인위로 가설된 공원/정원 안에서 사람들은 애초에 자연 속에서 살았던 한 때를 추억한다. 아니면 수시로 자연 안으로 달려가 도시에서의 가혹하고 궁핍한 삶을 희석시키고자 한다. 그러니 여전히 풍경이나 이 같은 정원그림이 가능하다는 생각이다. 
  
 이존립이 가설한 정원, 공원 안에는 여자 혼자 거닐며 풍경에 취해있거나 꽃그늘에 앉아서 책을 본다거나 자전거를 타고 있는 모습이 등장한다. 더러 긴 나팔과도 같은 악기를 부는가 하면 머리 위에 핀 꽃을 올려다보는 장면도 있고 우산을 쓰고 따가운 햇살을 피한 체 그늘에 앉아 쉬고 있기도 하다. 연인으로 보이는 한 쌍이 그 숲 속에서 함께 자전거를 타거나 밀담을 나누고 있기도 하다. 한가하며 평화로운 상황이 연출되어 있다. 이 목가적 내음이 물씬거리는 장면은 작가에 의해 상상되어진 이미지다. 아마도 작가는 이런 상황이 지극한 행복의 이미지라고 보는 것 같다. 나는 그의 그림을 보면서 문득 인물산수화를 떠올렸다. 우리의 전통적인 그 그림들은 한결같이 자연 안에서 가장 인간다운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한편 지극한 생의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그림이기도 하다. 이존립 역시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행복한 한 순간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위안을 삼고 있고 그 위안을 타자와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이 이 작가가 그리고 있는 그림(정원)의 본질이 아닌가 한다. 

사심없는 관조로 세상을 맑게 하는 착한 풍경_신병은(시인)
이존립의 그림 읽기

사심없는 관조로 세상을 맑게 하는 착한 풍경 
신병은(시인)


 .............. 생각의 긍정으로 마련한 착한 풍경, 정원 
 
 그의 정원은 천국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고 소통하는 공간으로서의 정원이다. 
 현실과 동떨어진 이상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만 달리하면 삶이 곧 낙원이라는 생각의 긍정적으로 마련한 정원이다.
 조금만 눈여겨보면 우리 사는 세상이 곧 정원이고 낙원이라는 메타포를 몰래 안겨두고 있다.
 끝까지 관심과 애정으로 바라보는 생각의 힘, 섬세하고 착한 내면적 감성이 있어 결국 그만의 사유의 풍경인 정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웃옷 단추 하나쯤 풀어놓고 대문도 조금 열어놓고 지나가던 이웃이 빠끔히 들여다보며 말 걸게 하는, 그런 여유가 있는 풍경이다.
 
 자연과 조화있게 잘 어울려 사는 착한 마음이며 ....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따뜻한 소망을 가진 마음이며 .... 먼저 달려가 안겨드는 마음이며 ... 본질과 더불어 실존이 동시에 삼투해있는 마음이며 ... 아득한 시원을 잊고 살아온 생각들이 나무와 꽃 사이사이에서 자라나고 .... 우리의 일상을 순수하게 화해시켜주는 풍경이다.   

 그의 정원은 보송보송한 연두빛 색감을 앞세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맑은 휴식 사이로 햇살 내리는 길도 만들고 바람 지나는 길도 만들었으리라. 혼자 열고 닫고 채우고 비우며 햇살 내릴 때도 바람 지날 때도 사그락 사그락 연초록 맑은 웃음소리를 내었으리라.
 지나는 바람이 고갤 들이민 풍경은 부식된 생의 아픔까지 편안한 길이 되었으리라.


............... 조형어법, 낯설지 않은 것을 낯설게 하는  

 그의 조형언어는 현대인의 일상이 기대어 쉴 수 있는 공간에 대한 관조다.
 어디에서도 만날성 싶은 풍경이지만 우리 꿈과 희망이 조용한 삶의 관조 속에 들게 하는 것은 그의 변화에 대한 진정, 즉 어떻게 하면 낯설지 않은 일상에 낯선 변화를 줄 것인지를 고민한 흔적이다. 
 고즈넉하고 유려한 색감으로 표현된 그의 그림 속에는 이미 우리 삶이 맑은 색으로 풀려 우리가 평소에 원했지만 끝내 만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갈망을 펼쳐두고 있다. 

 그는 어둔 색으로 밑작업을 하고 그 위에 흰색을 칠해 긁어내는 스크래치 기법으로 자연이 지닌 원형심상을 원색적인 색감의 신비로움으로 풀고, 그 위에 다시 미니멀적인 상징과 오브랩으로 가시적인 풍경을 심성의 근원 가까이 끌어놓는다.   
 이는 카오스를 경험한 인간세상을 상징하는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어둠은 존재의 영원한 뿌리이면서 다른 색을 받쳐주는 원형심상이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 속에서는 비맞고 추한 기억도 맑아질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그림 속에 길을 내어 그 맑게 씻긴 풍경이 되려 풍경 속에 든다.
 그래서 오랜 기억들을 열고 닫으면서 끝없이 조형적 변주에 의한 작은 상징과 추상의 매력도 함께 만날 수 있다. 
 

 ..................... 그리고, 그의 그림  

 창작인에게 필요한 것은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발견하여 아름답게 형상화하는 능력일 것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이란 미적 본능이 아니라 훼손되지 않은 본질과 심상의 또 다른 말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통해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느끼는 만족감은 아름다움 자체를 사심없이 관조(Betrachtung)할 때 생긴다.
 그렇기에 그의 그림은 손맛이 아니라 마음의 맛임을 알 수 있다.
 그 맛과 향기를 이렇게 몇 마디의 말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일 수밖에 없지만 그의 그림은 우리 삶의 공간을 쾌적하고 아름답게 디자인한다.  

 그 와중에서도 그가 절대 놓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사람(여인)이다. 
 사람의 식물성 사랑에 대한 배려를 놓치지 않은 것은 공간을 향한 그의 남다른 미학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늘 공간의 근본은 사람이라고 역설한다.
 이제 내 뜨락에 들어와 좀 쉬어 가시게.
 꽃과 나무, 맑은 햇살과 바람과 함께 어울림으로써 새로이 마련된 삶의 의미 읽기, 거기에 유년의 기억들을 오브랩시킨 착한 정원을 마련해 두고 독자로 하여금 편하게 그림 속으로 뛰어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그 속으로 뛰어 들기만 하면 맑은 공존에 저절로 동참하게 된다. 
 
 바라보면 볼수록 행복한 풍경,
 그의 풍경을 맴돌아 나온 내일 아침은 때 낀 그리움도 끝내 걸러고 걸러 나무처럼 꽃처럼 착하게 웃으면서 날마다 행복한 아침을 열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이 있는 아침] 정원애(愛)
[그림이 있는 아침] 정원애(愛)
파란 하늘과 푸른 숲이 생기발랄한 에너지를 전달하는 계절이다. 화사한 색채로 정원 풍경을 그리는 이존립 작가가 이에 걸맞게 싱그러운 작품을 전시장에 내걸었다. 그는 나무와 꽃 사이를 오가며 순수한 일상을 보내고자 하는 염원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이를 통해 관람객들이 희망과 사랑을 발견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정원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책을 읽으며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풍경이 서정적이다. 

작가는 순수함과 편안함이 자신의 작품 미학이라고 한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 나무 새 꽃 그리고 사람들이 부유(浮遊)하다 가장 편안한 공간에 자리를 잡는다. 본래의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 동심의 눈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추억 속 내밀한 것을 끄집어내기 위해 심안(心眼)의 조리개를 밀었다가 당겨보기도 한다. 흐리거나 선명한 기억들을 채집해 미지의 캔버스에 색과 구도를 부여하면 작품은 하나하나 생명이 된다.” 
이광형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