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의(意)와 기하학이 만난 자연의 이야기 -송만용
의(意)와 기하학이 만난 자연의 이야기 
-이상봉의 개인전에 부쳐

물 속에는 
물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

I.
물을 바라보고, 하늘을 바라고 있음에 있어 우리가 그 자체만을 보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것은 우리는 대상을 바라보고 인식함에 그 지각적 작용에 개념적 인식을 덧붙여 생각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라봄의 자유를 즐길 수 있으며 그 자유 속에서 예술의 존재의 근거를 찾기도 한다. 이러한 독특한 시(視)방식이 있음과 없음을 통하여 우리는 한 시대와 한 작가의 작품의 양식을 구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번 이상봉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주된 표현은 자연, 특히 산에 대한 인식이다. 물론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인물은 자연에 동화거나 자연을 닮을 인간이기에 그 또한 자연인 것이다. 사실, 자연과 예술의 관계는 자연과 예술에 대한 해석의 변화의 결과이다. 그렇기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대상황의 변천에 따라 그 표현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즉 완전성의 표상으로서 고전주의 미술에서의 자연, 초월적 신의 은총으로서의 중세적 자연 그리고 인간정신의 자율적 투영으로서의 근대적 자연 등이 그 이름을 달리하며 존재하여 왔던 것이다. 여기에 노장의 무위자연(無爲自然)까지 합한다면, 그 개념적 확장성은 너무 넓다. 그렇다면 이 많은 자연의 개념 중에서 이상봉의 작품은 어디에 속하는 것인가? 그리고 그의 자연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무엇인가? 

II
우선, 이번 이상봉의 작품을 굳이 나눈다면 3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물론 이전의 철필의 선을 응용한 작품도 있기는 하지만 이번 전시회에서 1) 의경(意景)으로서 산, 2) 해체적 도시풍경과 풍광, 3) 인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그 표현에 있어 다름은 주제의 다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매우 특징적이다. 먼저 작품 『心山』에서 보여지듯이, 산을 표현할 때에는 마치 산의 실경적 풍경이기보다는 작가의 의중(意中)에 있는 산의 형상을 그리듯 기하학적인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작품『도시풍경』과 작품 『風光』에서 보여주는 경향은 전자가 근경에는 우리가 어떤 형상을 가늠하기 힘든 해체된 구성을 마치 영상에 투영된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단면적 색채를 보여주고 있는 반면 원경에서는 우리가 구체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풍경의 형상을 표현되어 있다. 후자의 경우는 특히 공간의 표현에 특징이 있다. 그것은 그저 있음이 아니라 그 자체로 끊임없이 유동한 힘을 간직하듯이 유기적 구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등장하는 작품, 『Casiopea』와 『空』의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전자의 경우에는 면분할에 의한 화면의 조형성에 집중하였으며 후자에서는 인간의 형상보다는 그 선적 구성, 특히 승무에서 나오는 선의 묘미를 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을 하나의 맥으로 잇는 것은 색채의 톤의 변화에서 나오는 존재의 진지함으로서 내적 울림이다. 이 내적 울림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작가는 밝은 색을 밑에 깔고 그 위에 어두운 주조색을 얼기설기하게 던짐으로서 마치 인상파가 추구한 색의 병치혼합에 의한 지각의 결합을 추구하고 있다. 이점을 자연의 변화무쌍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기존의 양식과 그 속에서 나오는 새로운 것을 포용하는 자연의 의미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상봉의 작품은 자연을 대상 그 자체의 완전함보다는 주관적 인식의 반영으로서의 자연으로, 그 형상이 기하학적 구성에 입각한 서양적 인식이지만 동양의 산수화관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로운 인식 안에서의 자연, 즉 안중(眼中)이 아닌 의중(意中)의 자연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해체되고 파편화 된 근경의 표현에 비하여 멀리 시선이 다다를 수 있는 그곳에 우리의 인식상으로서 형상을 작가는 놓아 둔 것이다. 이러한 조형관은 변화하는 자연의 모습에서 변치 않는 가치를 시각상으로 옮기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다분히 자연 모사적인 측면보다는 주관적 인식의 반영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즉 현실의 욕망이나 질곡에서 벗어나 자연과 벗하며 초월적인 자유를 기하학적 엄격성에서 찾고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장자의 소요유(逍遙游)를 그의 작품에서 느끼는 것은 무리일까? 
비록 이상봉의 자연의 표현이 서구의 기하학적 조형관에 기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표현하는 세계는 객관성의 대상이기보다는 자신의 체험 속에서 살아 숨쉬는 자연의 형상이기에 우리가 동양의 산수화관과 결부시키는 것은 결코 무리가 아니라고 본다. 그는 자연 대상을 수학적 엄격성으로서 기하학이 아닌 조형적 완결성으로 기하학적 구성을 사용한 것이기에 그 형식성만 국한한다면 많은 것을 놓칠 것으로 보여지기에 그 내용의 구성,  즉 의(意)로서 자연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결국 이상봉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표현은 형사(形似)의 세계이기보다는 사의(寫意)세계인 것이다. 
이러한 사의의 세계로서 이상봉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또 다른 조형적 특징이 있다. 그 특징이란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구성이 서양의 투시원근법적 세계인 것 같으면서도 다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투시원근법이 아닌 산수화의 원(遠)의 지각, 특히 심원(深遠)의 지각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투시원근법이라면 그 소실점과 시각거리를 인식할 수 있는 마름모꼴이 화면에 있어야하는데 그의 작품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있는 것은 근경으로서 대상에 대한 해체된 기하학적 구성으로 새로움을 추구하고 원경에서는 생명의 기(氣)를 느낄 수 있는 유동하는 공간만 있을 뿐이다. 이러한 조형구성은 곽희의 <林泉高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진정한 산수의 내(川)와 계곡은 이를 멀리 바라봄으로써 그 세(勢)를 취하는 것이며, 이를 가까이 봄으로써 그 질(質)을 취한다”(眞山水之川谷, 遠望之以取其勢, 近看之以取其質)고 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곽희의 원(遠)의 지각이란 道의 象을 인식하는 형식으로 '象外'라는 인식적 거리 두기인 것이다. 더욱이 인식적 거리두기로서 원(遠)은, 像의 초월을 통하여 상상력의 자유로운 활동을 승인하며 이를 통하여 감각을 보다 순수하게 인식하는 의경(意景)으로 완전한 물상의 시각적 인식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원은 하나의 공간 인식법이기도 하지만 대상을 초월하는 심미적 인식형식이다. 이 심미적 인식과 이상봉의 산의 해석에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상봉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원의 지각은 곽희의 원의 지각과는 다름이 있다. 그것은 곽희는 평원으로서 근경을 주된 표현으로 삼고 고원으로 주산의 웅장함을 표현한데 비하여 이상봉은 근경을 하나의 단편화, 해체화시켜 규정하기 어려운 새로운 에너지의 형상으로 던져두고 그 기하학적 율동감에 자신의 조형적 리듬감을 싣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 다른 점이 역설적으로 곽희의 원의 지각을 새삼 다시 바라다보게 하면서도 이상봉다운 조형성을 더욱 차별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III.
그러나 이상봉의 작품에서 사의와 원의 지각을 인식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 표현에서 가지는 겝을 아니 느낄 수 가 없다. 그것은 산의 기하학적 구성에서 현실성보다는 심중(心中)의 형상이 더욱 강조되어야만 그 의미성이 배가됨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이 대상의 구체성을 띄고 있어 그 상상력의 자유로운 미적 유희를 방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조형성에 너무 입각한 나머지 산을, 자연을 감성적으로 보는 해석이 약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인식이 존재의 기하학적 체계에서 시작된,  객관성을 강조한 조형관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미는 객관적이기보다는 주관적인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대상의 객관성에 입각한 그의 기하학적 구성에는 질서로서 아름다움은 존재하지만 그 속에 내재된 감성으로서의 아름다움이 약화되는 아쉬움을 보여주고 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대상에는 그 속에 내가 있기에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를 우리가 만날 수 있다면, 우리는 너무 좋을 것이다. 
이상봉의 작품 속에서 ......


2000. 6. 송 만 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