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손맛’이 충일한 그림-서성록
                         ‘손맛’이 충일한 그림


                                     서성록 (안동대 미술학과교수,미술평론가)

추상회화에서는 대상의 재현보다 색과 형태, 텍스추어 등 조형어휘의 개발과 실험을 강조하기 때문에 조형요소들 혹은 그림을 어떻게 만들었냐를 특별히 강조한다. 그럼에 반해 구상화는 실재의 재현 자체를 중시하기 때문에 그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구상화에 바탕하면서도 과감히 추상화의 발상을 끌어들이는 화가가 있다. 과일이 주렁주렁 달린 농원풍경을 그리는 ‘과수(果樹)의 화가’ 이상열이 그 주인공이다.
이상열의 화면은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두드리고 굴리며 깨지는 소리가 들릴 것같은, ‘소란스러운 실험실’을 방불케 한다. 바르고 던지듯 찍어바르고 으깨고 휘젓는 등 격정적인 몸짓들이 화면을 휩쓸며 지나간다. 마티에르가 봉긋 솟아오르고 필선들이 분주히 들락거리면서 화면 표정도 약간 상기된다. 이상열은 이처럼 화면을 수식하기보다 그것을 구성하는 데에 관심을 집중한다. 작품내용을 자신만의 조형언어를 통해 전달한다는 점에서 독창적인 수법 개발은 필수적이다. 이상열은 그런 요구를 너끈히 충족시킨다. 그에게 조형언어는 내용을 전달하는 통로가 될 뿐만 아니라 세상의 풍요를 담는 요긴한 수단이 된다. 
2000년대에 들어와 이상열의 그림표정이 밝고 명랑해졌다. 원색이 새 순처럼 꽃망울을 터트리고 강한 색대조로 화면을 경쾌하게 만든다. 터치가 도처에서 꿈틀거리고 있는가 하면 봄과 가을 등 계절감각도 이전보다 민감해졌다. 전체적으로 생명의 환호성이랄까 흥겨운 축제를 벌이고 있는 것같다. 실물 자체를 빈틈없이 ‘채록’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것이 풍기는 정취나 존재의 생명력을 나타내는데 주력하고 있다. 살아있는 존재의 생명력을 환기시키기 위해 색상의 순도를 높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의 맥박과 숨결을 느낄 수 있는 생동감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이점은 과거 작품과 비교할 때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90년대 작품은 숲속의 가옥이나 호젓한 시골풍경, 호수, 해안이나 염전, 혹은 거제도나 백령도, 제주같은 섬 등을 소재로 삼았다. 시골의 곳간, 숲에 둘러싸인 가옥, 바다위에 떠있는 고깃배, 깊은 계곡에 흐르는 물, 녹음이 진 숲속, 물안개가 핀 호수, 빨갛게 물든 가을 풍경 등도 함께 다루었다. 이 무렵 작가는  풍경을 정취 있게 옮기는 데에 충실하였다. 이 시기의 작품은 대상의 주관적 해석이 일부 있기는 했지만 예술적 변형보다는 전반적으로 자연의 실사(實寫)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의 작품에 변화의 조짐이 나타난 것은 2008부터인데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했던 해안선, 숲속풍경이 줄어드는 대신 유실수들과 꽃동산이 고개를 내민다. 이 무렵의 작품이 달라진 것은 소재만이 아니다. 빨강색, 황금색, 흰색, 오렌지색, 노랑색, 보라색이 어울리고 때로는 대조를 이루면서 과감한 색채표현이 감행된다. 밤하늘에 폭죽이 터지듯 원색의 향연은 그렇게 막이 올랐었다. 

화면의 ‘경작’
근작에서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표현력이 유난히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화면은 온통 유화물감으로 뒤범벅이 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으깨지고 덧칠되어 덩어리진 물감이 온통 화면을 채우고 있다. 이렇게 물감이 두껍게 올라와 있는 풍경화를 필자는 지금껏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다. 
작가는 어떤 연유로 이런 작업을 했을까.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내가 나무를 그릴 때 나는 나무를 그린다기보다 화폭속에서 나무를 키운다. 내가 손끝으로 밀면 그때마다 나무가 가지를 뻗고 그 가지 끝에서 꽃을 피운다. 또 때로는 그 가지 끝에서 과일이 영글기도 한다. 나는 때로 노란 물감을 풀어흘리고,때로 붉은 물감을 풀어흘린다. 나의 화폭속에서 나무들이 그 물감을 자양분으로 삶을 키운다.”

작가는 단순히 실재의 나무를 그린 것이 아니라 캔버스에 나무를 키운다. 물론 그가 키우는 것은 나무가 아니라 나무라는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농부의 마음으로 밭을 갈고 비료를 주고 씨를 심고 해충이 들지 않도록 잘 간수하고 돌본다. 사실 이런 과정은 주의깊은 화가라면 반드시 유념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농사일을  대충대충 할 수 없듯이 그림도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애정과 세심한 돌봄을 요한다. 이상열은 농부의 애틋한 마음으로 그림속의 나무를 키우고 꽃을 가꾸며 잔디를 돌본다. 마음이 닿는 곳에 시선이 쏠리듯이 그림을 대하는 자세가 각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을 농사일과 견주는 데는 또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농사일만큼이나 작품제작에 엄청난 노동력이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특히 근래의 작업을 보면 작가는 손을 사용해서 작업을 했다기보다 몸 전체를 사용해서 작품을 했다고 여겨질 정도다.  물감들이 여기저기서 술렁이고 색깔들이 쉬임없이 들썩거린다. 농부가 작물에 물을 주듯이 작가는 분주히 물감을 캔버스에 퍼나른다. 또 농부가 채소와 과실을 애지중지 돌보듯이 작가는 쉴새없이 나무와 잎사귀들, 그리고 과실의 이미지를 매만진다. 그 결과 화면은 신체가 물질과 뒤섞여 박력있고 역동적인 광경을 펼쳐낸다.
흔히 우리는 위기에 몰렸을 때 온 힘을 쏟게 마련인데 작가는 생명에 대한 벅찬 감격으로 작업에 전력을 다한다. 그가 최선을 다하는 것은 자신의 힘으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막다른 길에 봉착해서가 아니라 즐거움과 희열에 기인한다는 얘기다. 보다시피 그림에는 빨갛고 푸른 사과나무, 감나무, 복숭아나무, 하얀 배나무 등 각각의 과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나무들은 화려할 뿐만 아니라 빛을 듬뿍 머금고 있어 찬란하기까지 하다. 단순히 계절의 감각을 전해주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의 생명력, 아름다움, 열매를 맺었다는 기쁨과 희열을 담고 있다. 그런 감정이 바깥으로 흘러나와 색의 ‘코러스’를 만들고 자연의 ‘심포니’를 울려퍼지게 하는 것이다.

‘손맛’의 극대화
또 하나 그의 그림에서 눈여겨볼 대목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작품이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이다. 자연을 벗삼고 있고 과수원을 테마로 삼고 있지만 그의 회화는  특별히 질료의 성질을 강조해서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질료감각’이 두드러진다는 얘기인데 그의 작품은 가까이에서 보면 무엇을 그렸는지 선뜻 형체를 식별하기 어렵다. 질펀한 물감 자락이 화면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거친 터치와 물감 덩어리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 질료를 덕지덕지 겹치면서 쌓아올린 앵포르멜 작품, 아니 그 이상이다. 그러나 거리를 두고 보면 안개속에 희미하던 사물이 그제서야 윤곽이 파악되고 실체를 드러낸다. 작가는 왜 이처럼 질료를 강조하였을까. 거기에는 작가의 문명에 대한 어떤 위기감이 내포되어 있다.  
작가는 우리의 문화, 즉 자동화된 생활패턴에 주목한다. 현대인들은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을 정도다. 팩스, 휴대폰, 인터넷,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현금자동입출기, 버튼만 누르면 켜지는 텔레비전 등등. 전자 네트워크에 기반을 둔 문화는 연결의 속도를 높이고 지속시간을 줄이고 효율성을 향상시키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서비스화함으로써 생활을 편리하게 만든다. 사회학자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이렇게 개인의 삶이 기계화될 때 혈연,이웃의 관계나 문화적 취향의 공유는 약해지고, 더구나 서로의 소통이 간접적으로 축소될 때 애정, 사랑, 헌신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전통적 상호관계는 위협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이상열이 작품을 할 때 일체의 기계장치에 의존하지 않고 그림에 땀 냄새가 배일 정도로 화면과 씨름하며 작업을 하는 것은 기계적 네트워크에 의존한 패턴에서 벗어나 전통적 회화수법을 따름으로써 그속에 간직된 잠재력, 즉 ‘손맛’을 수복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즉 복고적인 개념이랄 수 있는 회화의 전통성을 되찾음으로써 세상을 보다 따듯하게 만들고 인간적으로 바꾸자는 시도의 일환이다. 이때 ‘손맛’이란 그림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어떤 면에서 기계장치가 쉽게 넘볼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열은 ‘손맛의 극대화’를 통해 그림을 그림답게 만들고, 기계화된 문화에 맞서 인간의 온기를 되찾자는 웅혼한 비전을 품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에서 느끼는 차가운 감정이나 세련된 디지틀 칼라의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작가는 차가움, 간편함, 가벼움을 거부하고  불편함, 무거움, 힘겨움을 감수한다. 그의 그림은 순전히 아날로그적 방식을 기반으로 이를 통한 ‘회화의 본질적 계승 발전’(작가의 말)을 도모하고자 한다. 모든 것을 기계에게 미루고 의존하는 세태에 이상열같은 장인정신을 지닌 화가가 우리 곁에 있다는 것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우리는 이상에서 이상열의 이전 작업과 근작을 비교하면서 최근작을 중심으로  변화를 점검해보았다. 근래 들어 그의 작품이 점점 더 표현성이 강해지고 질료성이 중추적인 조형요인이 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표현성과 질료감각은 작가라면 갖추어야 할 회화의 기본요건인 조형어휘의 충일성에 대한 기대치를 만족시키는 데서, 그리고  자연의 생명력,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에서 비롯되었음을 점검할 수 있었다. 자동화와 기계화가 편만해 있는 사회에서 ‘손맛’을 중시하는 그의 아날로그식 그림패턴은 우리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볼만한 대목이 아닌가 싶다.
“예술은 끓어넘치는 주전자처럼 우리 안에 넘치는 뭔가에 대해 말하고 보여주는 어떤 것이다”(Luci Shaw)는 말이 있다. 이제 나무에 달린 열매의 의미를 설명하면서 그가 들려주고자 하는 내용을 마지막으로 알아보자. 
그의 작품은 꽃들의 정원에 둘러싸여 있다. 화려한 꽃들만 피어있는 것이 아니라 가을철을 맞아 풍요로운 열매를 맺고 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피고 지는 꽃의 영화로움은 무상하지만 어떤 난관을 무릅쓰고 맺는 열매의 결실은 나무의 생애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나무에 달린 열매를 보며 우리는 무엇을 연상할까. 한철의 아름다움을 ‘꽃’이 웅변해준다면, 지속적인 아름다움은 ‘열매’가 웅변해준다. 열매는 뜨거운 뙤약볕과 세찬 비바람을 참고 이뤄낸, 다시 말해 오랜 역경과 난관을 꿋꿋하게 극복한 삶을 말해주는 동시에 감상자에게는 ‘나눔의 정신’을 일깨워준다.
나무는 어떻게 그의 화폭으로 가게 되었는가 _김동원(문학평론가)

나무는 어떻게 그의 화폭으로 가게 되었는가
글: 김동원(문학평론가)


화폭에는 사과나무가 줄이어 서 있었다. 사과나무의 발목 밑으로는 보라색 제비꽃이 뿌려져 있다. 사과나무엔 붉은 사과가 그 품에 깃들어 있다. 사과는 나무의 품속으로 깊이 박혀 있다. 화가 이상열은 내게 그 그림이 「사과나무 숲」이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사과나무는 푸른 잎으로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화폭에는 그 사과나무 숲이 담겨 있었다.
화폭은 경계이다. 그 경계 안에 사과나무 숲이 담겨 있으면 우리는 사과나무 숲을 볼 수밖에 없다. 그 경계를 넘어가 다른 얘기를 듣는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림의 바로 옆에 화가가 서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나는 슬쩍 물어본다. “이 사과나무 숲은 어디예요?” 물론 나는 그로부터 답을 들었다. 하지만 그의 답을 그냥 전하는 방식으로 얘기를 풀어가기 보다 이제부터 얘기의 구성을 달리해 보려 한다. 만약 그의 답을 그냥 전했다면 그의 그림 「사과나무 숲」은 어딘가에서 본 사과나무 숲을 그린 그림이 된다. 그러나 그의 답을 듣는 순간, 나는 그림이란 것이 무엇을 보고 그리는 작업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림이란 사과나무와 화가의 만남이었으며, 그린다는 것은 알고 보면 그 만남 이후로 둘이 화폭에서 사과나무 숲을 가꾸어낸 만남의 연장이었다. 나는 그 둘의 만남과 그 이후를 전하고 싶어졌다.
사과나무가 화가 이상열을 만난 것은 충주의 한 길가에서 였다. 예전에 어떤 가수가 종로에는 사과나무를 심어보고, 을지로에는 감나무를 심어보자고 노래 부른 적이 있었지만 정작 서울에선 그 어떤 나무도 심지 않았다. 거리에 사과나무를 심은 곳은 충주였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이상열이 그 곳의 길을 지나가게 되었고, 가로수로 늘어서 있던 사과나무는 그가 화가란 것을 한눈에 알아차렸다. 사과나무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눈속으로 뛰어들었다. 화가 이상열이 급정거를 하듯 멈추었음은 물론이다. 눈속으로 사과나무가 뛰어드는 그 급작스런 사태에 그가 잠시 가슴을 쓸어내리긴 했지만 그러나 그는 팔을 벌리고 자신을 멈춰세우며 눈속으로 뛰어든 나무들을 다시 시선 밖으로 쫓아내지 않았다. 그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사과나무가 그의 눈속으로 뛰어든 이유를.
우리는 대개 모두가 꿈꾼다. 사과나무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거리에 사과나무를 심고 꿈을 꾸지만 사과나무의 꿈은 원래는 길거리의 가로수가 아니라 사과나무 숲이었다. 사과나무는 모여 숲을 이루고 싶었다. 그렇다고 사과나무가 숲을 이루고 싶었던 것이 사과나무끼리만 모여 살고 싶은 욕망 때문은 아니었다. 모여 살면 사과나무가 이루는 풍요는 더 커진다. 사과나무는 커진 풍요를 사람들과 넉넉히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듯이 삶은 꿈처럼 되지는 않는 법.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 듯, 길거리를 지나는 차들의 소음이 발밑에 깔리는 것이 가로수로 선 사과나무의 오늘이다. 그래도 사과나무는 꿋꿋하게 현실을 살아간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충주의 어느 길가에서 만난 뒤로 사과나무와 화가 이상열의 만남은 계속된다. 그 둘이 만나는 곳은 화가 이상열이 마련해놓은 화폭이다. 우리도 그렇지 않던가. 우리도 그냥 만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만나서 서로 얘기를 나누고, 그 얘기 속에서 종종 우리들의 꿈을 내비친다. 만남은 알고 보면 꿈을 나누는 장소이고 시간이다. 꿈은 반드시 이루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잊지 않고 가슴에 담아두었다가 그것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나 서로 얘기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화가는 그 만남을 형상으로 구체화할 뿐이다. 그리하여 이상열과 사과나무가 만난 장소와 시간 속에선 사과나무가 그 꿈을 얘기하고, 그러면 이상열은 그 꿈을 붓에 실어 그의 발밑에 형상과 색으로 깔아준다. 그건 그 꿈의 얘기를 들어주는 일이다. 사과나무는 여전히 충주의 길거리에 서 있지만 이상열이 마련한 화폭 속에서 그 발밑에 제비꽃이 깔린 것은 그 때문이다. 아마 사과나무가 화가에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풀밭에 앉아 있지만 이름으로는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는 제비꽃의 얘기를. 그리고 어느 날, 내가 그 둘의 만남 앞에 선다. 둘의 만남이 가꾸어낸 사과나무 숲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것은 내가 그저 보고 감상하는 그림의 세상이 아니라 화가와 사과나무, 그리고 내가 모두 한자리에서 만나는 만남의 자리였다. 셋, 그러니까 화가와 사과나무와 나는 그림이란 그 만남의 자리에서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그림이 혹시 「사과나무 숲」 한 점밖에 없지 않나 오해를 살 듯하다. 그 얘기를 너무 길게 놓았다는 느낌 때문이다. 사실은 여러 그루의 나무들이 있었다. 퇴계원에서 왔다는 배나무가 배꽃을 안은채 서 있었고, 파란 집의 기억을 안고 있는 감나무도 있었다. 이건 내 마음이라며 복사꽃을 건네고 있는 복숭아 나무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화가 이상열에게 그들이 서 있던 원래의 자리를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과의 만남을 쓸데없이 신상을 캐는데 허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퇴계원 배꽃」은 내게 말했다. 봄이 와서 배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배나무가 배꽃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계절을 봄으로 채우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화폭 속에서 만난 배꽃은 봄이 와서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배꽃 이야기로 봄을 채워놓고 있었다. 「파란 집 감나무」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가을이 와서 익은 감을 본 것이 아니라 감나무가 채워놓은 가을 이야기를 들었다. 우리의 세상에선 봄이 와서 꽃이 피고, 가을이 와서 감이 익지만 그의 그림 세상은 만남의 공간이어서 꽃을 피워 채워놓은 봄 이야기가 있었고, 감나무 가지 사이로 하나둘 감을 채우며 불러온 가을 이야기가 있었다. 그림 앞에 선 것은 오후의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 얘기에 귀 기울이다 언듯 시간을 확인했더니 날이 벌써 저녁으로 저물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