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또 다른 욕구를 위한 여명의 신호, 화가 박지오의 작품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소고_이경률 (미술이론가)
또 다른 욕구를 위한 여명의 신호, 화가 박지오의 작품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소고

니체는 주어진 것의 진상을 알기 위해 어떤 현상의 껍질을 한 켜 한 켜 벗겨 나갈 때 이론가는 벗겨낸 껍질에 관심을 갖는 반면, 예술가는 계속 껍질을 벗으면서 저쪽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궁극적인 것에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예술가는 껍질에 본질적인 형상들이 새겨져 있다고 믿고 끝없이 껍질을 벗기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이러한 행위(acte)를 가능하게 하는 매개물을 매체(media)라고 하고 형상으로 출현한 껍질을 흔히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껍질에 새겨진 형상은 언제나 어떤 사태의 진상이나 본질이 아니라 그것을 암시하는 자국 혹은 지시(index)이다. 왜냐하면 본질은 끝없이 껍질만 드러내는 양파처럼 언제나 부재의 신호로 끝없이 자신의 존재를 암시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술가의 눈에 곧 해가 뜰 것 같은 여명(黎明)의 신호로서 창작 행위의 가장 시원적인 출발점이 된다. 그러나 예술의 분명한 실체로서 본질의 해는 영원히 떠오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양파의 껍질과 알맹이로 비유되는 예술 작품의 올바른 이해는 결과물로 나타난 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 작품을 출현하게 한 최초 어떤 원인적인 것에 있게 된다. 엄밀히 말해 인간의 정신적 메커니즘에서 모든 행위에는 그 원인적인 것이 존재한다.

 특히 종교나 예술에서 드러나는 정신적 생산물은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의식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무의식적인 충동으로부터 야기된다. 바로 이 충동의 세계는 우리가 현악기의 현(絃)을 울릴 때 각자에게 전달되는 소리의 공명(共鳴)처럼 오로지 대상과 주체 사이에서 발생되는 주관적인 “내적 의미의 연관(聯關)” 말하자면 인식 영역 밖에 존재하는 공(空)의 세계를 암시한다. 사실상 작가들이 실행하는 예술 행위를 잘 관찰해보면 작가는 처음부터 자신도 잘 인지하지 못하는 어떤 충동(intuition)과 알 수 없는 욕구(desir)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는 오늘날 비주얼 리터러시(Iiteracy) 개념을 설명하는 실제적인 배경이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흔히 작품의 테마라고 언급하는 것 역시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존재로부터 진화된 문화적 코드를 말한다.

화가 박지오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풍경의 세계는 바로 이러한 이중적인 감각의 논리를 주파하고 있다. 작품은 장면의 지리적인 장소와 그것이 암시하는 상황적인 인상(impression)이 겹쳐진 일종의 표현적인 대위법으로 나타난다. 작가의 풍경들은 엄밀히 말해 구체적인 장소의 확인이나 조형적인 미적 효과를 넘어 과거 자신의 경험적인 기억과 인상으로부터 다시 재구성된 현실로 이해된다. 이럴 경우 작가가 실행한 그림의 전통적인 사실주의는 경험적인 인상을 재구성하는 탁월한 재현도구가 된다. 이러한 이유로 재구성된 장면은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가상, 출현과 부재 그리고 구상과 추상 사이에서 우리가 시를 읽을 때 음률로부터 환기되는 어떤 미묘한 느낌과 같이 선과 면, 색과 형태, 자국과 터치, 시간과 공간이 만드는 미묘한 분위기를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경들은 즉각적으로 그리고 반박할 수 없는 분명한 현실(hic et nunc)을 호출한다는 관점에서 결코 모호한 장면들이 아니다. 예컨대 거리 풍경, 사랑하는 사람들, 다닥다닥 붙어 있는 판자 집, 가로수와 버스, 우산을 들고 길을 건너는 사람들, 분주한 시장 상인들, 육교를 내려오는 사람들, 자전거 타는 사람 등의 이미지들은 첫눈에 장면의 신빙성과 장소의 확인 그리고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상황을 보여주면서 보는 이가 그 현실 속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이러한 실제 효과는 오늘날 화가로서 역사적 사건을 사진의 실제로 구성하는 제프 웰(Jeff Wall)의 그림-사진(Tableau-Photo)이나 그림의 형태로 대중 매체에 의해 왜곡된 독일 현대사의 진실을 드러내는 게르하르트 리히터 (Gerhard Richter)의 사진적 그림(Photobilder)에서 나타난다.
작가의 풍경들은 응시자에게 전혀 낯설지 않고 오히려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장면들 - 예컨대 시장 풍경, 거리 풍경, 군상들, 산동네 풍경, 비탈진 골목길, 번두리 한적한 도로, 버스 정류소, 화가 자신이 살았거나 현재 살고 있는 동네 풍경- 등과 같이 누구나 경험하는 일상의 단면들로 나타난다. 그러나 장면들은 엄밀히 말해 현실의 단순한

묘사나 재현이 아니라 과거 자신이 경험한 기억의 인상으로부터 다시 재구성된 현실로 이해된다. 이때 이미지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림 행위 그 자체와 시각적인 정보가 아니라, 그 행위에 앞서 일어난 어떤 비밀스런 생성(genese), 즉 자신도 분명히 인지할 수 없는 어떤 느낌으로서 대상과의 강렬한 교감이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원인을 존재론적으로 스팀뭉(Stimmung)이라고 한다. 이것은 유일하게 느낌의 어조 혹은 음색 (tonalite)으로 번역되는데, 특별히 작가들이 실행하는 예술적 행위에 있어 가장 원천적인 무엇이 된다. 또한 우리가 작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존재가 물질로 전이(轉移)된 것을 말한다. 특히 “화가는 그때 거의 영감(신의 계시)으로부터 행동한다. 형이상학적 경험이라는 의미에서 그림은 화가가 화폭을 이젤에 놓기도 전에 그리고 색의 연금술이 정리되기도 전에 이미 시작된다. ( ... ) 그림은 스팀뭉의 찰나(instant)를 가지자마자, 작가의 기억소생으로 진행된다. 그래서 스팀뭉의 발견은 우선적으로 작가에게 생성을 재생하는 의미를 가진다.”

스팀뭉의 물질적인 재생은 작품의 진행과정 특히 표현주의 계열의 작품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 그림의 내부적 주제는 작가가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이미 잉태되고, 흔히 자신의 순수기억이나 또 다른 환상의 욕구로서 레미니센스는 이러한 주제의 배경이 됨과 동시에 화가가 가장 먼저 활용하는 중요한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폴 클레 (Paul Klee)의 “음악의 그래픽적 전이“나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마들렌 과자가 유발하는 무의식적 기억은 사실상 작가의 기억소생을 통한 상황적인 음색의 재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작가의 풍경은 더 이상 있음직하지 않은 기억의 재구성 즉 ”스팀뭉과 영혼의 결정적 찰나(instant accorde)"로서 스티뭉겐 (Stimmungen)의 흔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결정적 찰나의 포착은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히 내재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찰나는 비록 인간의 제한된 감각으로 도달하지 못하지만 현실적으로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내부적 경험 (experience interieure)'’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지시적인 그림을 이해하는데 있어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미지가 외시하는 논리적 진술이 아니라 그 그림을 있게 한 형이상학적인 순수 출현 즉 모든 예술적 재현 행위가 시작되는 제로 단계로서 작가의 내부적 경험이다. 이 경험은 우리에게 말하자면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그 음악에 대하여 전혀 논리적 이유를 달지 않는 순수 그 자체의 즐거움이나 희열을 준다.

그래서 작가가 사실주의 풍경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실질적인 메시지는 결코 작가의 경험적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그림 행위가 반목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삶과 경험이 작품에 은밀히 침투하여 자신도 모르는 일종의 ”무의식적 시선(vision inconsciente)"을 발견한다. 작가는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하찮은 것과 초라하고 낡은 풍경이라 할지라도 미세한 빛과 색 속에 아직 남아 있는 사랑과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거기서 희열을 느낀다”고 고백하듯이, 작가가 보여주는 단편적인 이미지들은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오로지 내면에서 스스로 발견한 충동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래서 그의 풍경에는 오로지 상황만 있을 뿐 의미론적으로 분명히 진술되는 구체적인 주제나 제목이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작가의 풍경은 그 재현 대상과 방식이 무엇이든 순수예술의 전형이 된다. 왜냐하면 장면들은 현실의 단순한 기록으로 나타나지만 엄밀히 말해 작가 자신의 내부적 경험으로부터 포말로 부서지는 감정의 잔여물들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머리를 만지는 청아한 소녀,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아이, 환희에 젖은 부부, 봇짐을 진 노인 등은 더 이상 언어학적 도구로 설명 불가능한 감각의 침전물들이다. 그것들은 또한 작가가 자신의 경험담을 쓰듯이 자신의 의식이 투영된 일종의 자화상적인 독백임과 동시에 삶의 두께에 반사되어 은밀히 드러나는 무언의 메아리이다.

결국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삶의 애착과 희열을 그림 행위 그 자체로 은밀히 위장시키고 있다. 이럴 경우 이미지는 정확히 심리학적 의미로 억압된 욕구나 충력을 위장시키는 이전(移轉)으로 이해되고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 빈 그릇의 지표가 된다. 삶의 긴 굴곡을 지나면서 침전된 경험적인 것과 세상을 관조하는 작가의 청명한 눈으로 포획된 것, 그것들은 일상의 겹쳐진 주름 속에서 죽음의 고통보다 삶의 기쁨이, 현실의 절망보다 미래의 희망이 그리고 충동의 본능보다 절제의 미학이 지배하는 존재의 흔적들이다.
- 이경률 (미술이론가)
 
현실과 유리된 예술은 생명력 잃은 ‘박제된 인형’과 마찬가지_김정은 기자(뉴스메이커)
현실과 유리된 예술은 생명력 잃은 ‘박제된 인형’과 마찬가지
- 김정은 기자(뉴스메이커)

박지오 화백의 행보가 화제다. 국내 사실주의회화의 대명사인 박지오 화백은 우리 미술계의 큰 축을 이루고 있는 구상미술작가의 일원이면서도 독특한 자기 세계를 확립한 작가로 평가되고 있다.

다른 형상이나 소재지만 자신만의 일관되고 특별한 조형어법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박지오 화백.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는 서민들이 사는 평범한 동네, 걸어 다니면서 늘 마주칠 수 있는 주변의 모습들이다. 박지오 화백을 만나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 일상의 파편에서 중요한 모티브 찾아내
박지오 화백이 캔버스에 담아내는 풍경은 무척이나 인간적이고 인생적이다. 그의 작품은 평범한 일상에 주목하고 있다. 너무나 현실적인 삶과 밀착된 ‘평범한 순간들’이다. 전혀 화려하지도 않을뿐더러 매력적이지도 않은, 퍼즐처럼 흩어진 수많은 모자이크 파편의 일부처럼 그저 그런 일상을 따왔다. 이에 대해 박지오 화백은 “삶에 대한 기쁨과 감사와 사랑의 시선으로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담으려고 노력한다. 같은 대상이라도 가장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각도에서 바라본다”면서 “일상의 소재를 화가가 먼저 따뜻한 감성을 갖고 바라볼 때 원하던 따뜻한 그림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단순히 걸기 위한 작품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놓친 좀 더 다른 관점의 순간들을 찾아 보여주고 싶다”고 전한다. 그래서일까.


- 박지오 화백
박 화백의 작품은 수려한 자연 풍광이나 화려한 도시 풍경이 아닌 서민적인 거리 풍경, 즉 인간의 삶이 서로 섞이고 녹아드는 애환의 정경을 담아내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화면은 낯익고, 마치 우리들의 삶에서 경험하는 일상들이 자연스럽게 펼쳐져 있다. 박지오 화백은 순간순간 증발할 수 있는 일상의 파편에서 중요한 모티브를 찾아내고 있는데, 그 순간이 단절이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점이자 영원의 지속임을 증명해준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선 스치는 장면을 우연히 캡처한 듯 과감한 화면구성이 더욱 돋보인다. 관객에게 사진보다 더 현장감 넘치는 우리의 일상을 보다 친밀하고 생생하게 중계하고자 작가만의 원근법으로 포착된 순간들을 재구성한 결과다. 그리고 그 안에선 생에 대한 긍정적인 바라봄, 삶에 대한 기쁨과 감사와 행복의 언어가 밀도 있게 엮어져 있다.

박 화백이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쳐 버리는 하찮은 것과 초라하고 낡은 풍경이라 할지라도 섬세한 빛과 색 속에 아직 남아있는 사람과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거기서 희열을 느낀다”고 고백하듯, 작가가 보여주는 단편적인 이미지들은 누구의 가르침도 없이 오로지 내면에서 스스로 발견한 충동의 결과물일 뿐이다. 그래서 그의 풍경에는 오로지 상황만 있을 뿐 의미론적으로 분명히 진술되는 구체적인 주제나 제목이 없다. 그러면서도 생의 숨결이 배어나는 화면을 통하여 그가 서술해가는 인간의 이야기는 신선한 자연의 생명력과 더불어 그의 조형을 지키는 축이 된다. 그만큼 그의 화면에선 인간 박지오의 체취가 물씬 풍겨 나온다.


- 초여름날의외출
아름다움의 가치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정립
“현실과 유리된 예술은 생명력을 잃은 ‘박제된 인형’이나 마찬가지다. 예술이 일상과 동떨어져 있거나 평범한 일상의 정서를 거부한다면, 보통 사람들과 정서적 교감은 힘들 것이다.” 주변의 재발견을 통해 아름다움의 가치에 대한 정의를 새롭게 정립한 박지오 화백은 작품을 통해 전혀 시선을 끌지 못해 앵글 밖으로 밀려났던 그 풍경들을 다시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상의 소중함, 주변의 재발견을 통해 일상도 가치 있는 존재감이 있음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는 “늘 다니던 익숙한 길이라도 그곳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려 노력해야 한다. 그 새로움의 출발은 빛으로 시작된다”면서 “마치 내가 가장 원하던 장면을 순간순간이 연출해낸 자연의 한 장면에서 발견하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고 한 박 화백의 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작가만의 따뜻한 시선이 녹아든 일상의 전경은 새로운 값진 의미를 품고 있다. 삶의 긴 굴곡을 지나면서 침전된 경험적인 것과 세상을 관조하는 작가의 청명한 눈으로 포획된 것, 그것들은 일상의 겹쳐진 주름 속에서 죽음의 고통보다 삶의 기쁨이, 현실의 절망보다 미래의 희망이, 그리고 충동의 본능보다 절제의 미학이 지배하는 존재의 흔적들이다. 그래서 박지오 화백에게 있어 일상은 자신만의 특별함을 발현하고 구현해내는 창구인 셈이다.

지금까지 총 19회의 개인전과 한국구상대제전, 대한민국 현대 인물화가회 정기전, KIAF 한국국제아트페어, SOAF 서울오픈아트페어, Art Chicago(미국), 베를린 SON갤러리 초대전(독일), West & East 리치몬드전(미국), 한·중·일 당대예술교류전(중국) 등 200여 회의 초대·단체전에 참가하며 역량을 발휘하고 있는 박지오 화백은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심사위원장을 역임했다. 2010 한국미술작가상, 2013 한국구상대제전 특별상, 2017 한국예술상(미술부문)을 수상한 그는 현재 대한민국 미술대전 초대작가, 대한민국 현대인물화가회, KAMA운영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오리지널 그림쟁이 세상 풍경을 말하다
오리지널 그림쟁이 세상 풍경을 말하다

박지오 화백 초대전, 춘천 송암아트리움서 24일부터 20여점 전시

 
평범한 우리들 삶의 이야기를 그림 한 폭에 정성스레 담았다.
언제나 그림을 통해 삶에 대한 기쁨과 감사, 행복의 언어를 보여주고 싶다는 박지오(64·사진) 화백. 그가 오는 24일부터 6월12일까지 춘천 송암스포츠타운 내 송암아트리움에서 초대전을 갖는다.
부산에서 태어나 13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으니 어느덧 경력 50여년의 원로화백이 선보이는 작품들은 삶에 대한 진한 향수를 머금었다.
자신을 ‘오리지널 그림쟁이’라고 소개하는 그가 이번 초대전에서 선보이는 작품은 모두 20∼30점 내외.
10여년 전 스케치해 두었던 200호 작품에서부터 5개월 내의 최근 작품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연과 풍경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 풍경은 무척이나 인간적이며 서민적이다. 늘 사람이 북적대는 ‘서울역 근처’와 ‘한낮의 종로 풍경’, ‘어느 봄날’과 ‘거리를 활보하는 수많은 사람들’까지 인간의 삶이 뒤섞이고 녹아드는 정경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박지오 화백은 “서민의 낮은 풍경들이지만 그림에는 생에 대한 따뜻한 포옹과 시선이 면면이 배어 있다”며 “생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과 삶에 대한 기쁨과 감사, 행복의 언어를 밀도 있게 엮었다”고 설명했다.
생의 숨결이 배어나는 화면을 통하여 그가 서술해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는 신선한 자연의 생명력과 더불어 그의 조형을 지키는 축이 되고 있다.
특히 작품 속에는 삶의 밝고 긍정적인 부분들을 적절히 묘사해 그림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편안한 미소를 머금게 한다.
행복한 빛의 풍경이 갤러리 주변의 수려한 풍광과 어울려 이번 전시의 기대감을 더욱 높이고 있다.
박 화백은 10회의 개인전을 열었으며, 2011 한국 구상대제전을 비롯 시카고 아트페어, 2010 한국 미술작가 대상 수상 및 수상 기념 초대전 등 20여회의 단체전을 가졌다.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장과 서울 국제뉴아트페어 조직위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미술협회와 한국인물 작가회 회원, 서울시립대 시민대학 지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 최경식 기자(강원도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