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안락함을 향한 보편적인 상징인 집의 형상_강종문
안락함을 향한 보편적인 상징인 집의 형상

송현호의 둥글고 부드러운 형태의 조각은 모두 <나의 집으로>라는 제목이 붙여져 있다. 심지어 집의 형상을 찾아보기 어려운 작품에도 그러하다. 이 제목은 작가가 형상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그러면 그는 집의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가? 집은 동화 속에 나오는 요정의 집 같이 작고 단순하다. 작가가 집에 부여한 의미는 물론 개인적인 경험의 소산이겠으나 그것은 동시에 집에 부여된 보편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집의 형상도 어떤 개인적 특수성을 가지지는 않고 ‘집’이라는 낱말처럼 집의 형상을 간단히 알아볼 정도로 간단하다. 이것은 작가가 집의 형상을 통해서 어떤 특수한 감정이나 특정한 집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에게 집은 인간이 태어나고 자라는 보편적인 집을 의미한다.

물론 집에 대한 작가의 상상은 개인적인 경험의 소산일 수 있고, 그 결과물인 작품 또한 그만큼 개인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작품의 감상의 입장에 서면 작가의 그런 개인적인 경험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감상자의 반응과 감동은 일차적으로 오직 작품의 형상 그 자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작품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도 집이라는 형상이 사람들에게 주는 보편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작품을 보고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도 이러한 보편적인 의미에 기인할 것이다.
그렇다면 집의 형상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가스통 바슐라르가 말했듯이 ‘집은 인간에게 안정의 근거나 또는 그 환상을 주는 이미지들의 집적체’이다. 이러한 집의 이미지는 <그림 4>처럼 우리의 심리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 정확히 집의 형상이 아닐지라도 움푹 들어간 형상이나 무언가 담을 수 있는 것이면 우리는 집을 떠올리고 편안함과 안정의 느낌을 받는다. 심리적으로 보면 이것은 요나 콤플렉스와 관련되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어머니의 태반 속에 있을 때 느꼈던 편안함과 안정의 정서를 집을 통해서 다시 느끼는 것이다.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집은 어머니의 자궁의 대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에 나타나는 둥글고 안으로 구멍이 뚫린 오목한 형상(그림1, 2, 3)은 사람들이 살았거나 혹은 살고 있을 집을 어머니의 자궁처럼 감싸고 있다.

 
그러나 작가에게는 “집이 절대적인 안락함을 주지 않는다”(작가노트). 물론 대리석의 형상을 집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 공정은 힘들다. 거칠기의 정도가 다른 여러 종류의 사포를 바꿔가며 힘들게 광을 내야 하는 지루한 작업을 거쳐야 집은 우리들의 시선 속에서 반짝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집에 살지만 그것은 어머니의 자궁에서 내쫓긴 결과이고 집이 안락하더라도 그것은 어머니의 자궁만큼 절대적인 안락함을 주지는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역으로 집이 정말 안락하고 절대적인 편안함의 기억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면 작가는 힘들여서 돌과 씨름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작품 속의 집의 형상은 안락함의 상징인 동시에 절대적인 안락함에 대한 욕구불만의 대체물이다.

작가는 아주 보편적인 형상을 선택했다. 그러한 주제를 가지고는 아무리 ‘튀는’ 작업을 하더라도 그 의미는 곧바로 보편적인 것으로 귀속되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 미술작가에게 필요할지도 모르는 의미의 모호성이라는 전략에 있어서도 불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불리한 점들을 감수하고서도 작가는 꾸준히 집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업은 튀지 않는다. ‘튀지 않다’는 것은 이 시대에 악평으로 들릴 수 있다. 거의 모든 작가들이 눈에 띄기 위한 형상과 재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까지 추구해온 것은 가장 전통적인 재료인 대리석과 보편적인 주제인 집의 이미지이다. 이러한 보편적인 것들을 가지고 깎고 다듬는 행위에 천착[穿鑿]하는 것이 그가 선택한 것이다.
요즈음 같은 미술의 경향으로 볼 때 이런 작업은 조각의 전통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시대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것으로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전통의 힘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돌을 깎고 다듬는 행위에 조각가의 진심이 담겨 있고, 그러한 작품이 보는 이에게 평온함을 주고 미적 감성을 일깨운다면 그것 또한 예술의 일면인 것이다. 그의 작업이 아방가르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것이고 그러한 선택이 이후에 바뀔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 현재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작업에서 전통적인 조각가의 진심이 보인다는 것이다.

강종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