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NOTE
2023-01-30 작가노트_2022

-작업노트

 

 두어 시간이 더 지났을까. 물길을 좆아 의식과 무의식이 뒤섞인 긴 작업의 여정이 끝났다. 흐르는 물줄기를 막고 트는 부산한 몸놀림에 숨 쉴 틈 없는 몰입의 시간이었다. 검은 공간속에서 오직 감각에 의존해 붓질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그 다음은 물의 흐름이 알아서 할 일이다. 아직 물기에 젖은 캔버스 화면에서는 온전히 작업결과를 가늠할 수가 없다. 화면이 차츰 건조되면서 시시각각 떠오르는 이미지가 마치 여명이 밝아오듯 경이로움으로 내게 온다.  

 

 사전 스케치를 통해 작곡가가 악보를 그리듯 큰 틀을 세우지만 그뿐, 붓질행위의 즉흥성과 물의 우연성에 의해 작업의 결과는 예측불허다. 물길의 표정은 흰색의 농도와 물의 양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극도의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붓을 통해 물길을 인도하고, 흐르는 물길에 마음을 싣는 것이다. 자연스레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흘러 번지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흰 얼룩으로 남는다. 이렇듯 내 작업은 물과 나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직관에 의해 무위자연의 순수감성 자체를 끌어내는 작업이 끝났다. 반나절 정도의 건조시간을 보낸 후, 화면 구조와 흐름 따위의 고전적 조형원리에 따른 다음 작업이 시작된다. 이것은 인위적 덧붙임을 배제하는 오직 뺄셈을 통한 비우기 작업인 것이다. 화면구조를 보다 더 단단히 하기위한 이성적, 지성적 작업인 것이다. 

이런 두 상이한 작업태도는 나의 내면에 있는 양면성과 관계가 있으리라. 그리고 오랜 외국생활에서 체득된 동, 서양의 이중적 정체성과도 연관이 있을지 모르겠다.

이즈음 나는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퐁티(Merleau-Ponty 1908~1961)가 지적한 폴 세잔 회화의 제3의 입장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세잔은 그에게 제시된 기존의 입장, 즉 감각과 지성, 보는 화가와 사유하는 화가, 자연과 구성, 원시주의와 전통이라는 양자택일에서 언제나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을 모델로 삼는 인상주의 미학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고전주의가 추구하는 대상성(객관성)을 회복하려 했다.”

 

 물길을 따라 형성된 번짐 현상들은 내 그림의 핵심요소일 것이다. 이를 일부 깎고 닦아낼 때, 붓질 행위의 반복은 내게 여러 상념을 떠올리게 한다. 예컨대, 그것은 환경 등의 사회문제일 것인데 점점 온기를 잃어가고 있는 인간 활동을 이름이다. 또 내 사색의 터인 주변 산과 호수, 들판에서 느끼는 자연현상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랜 세월 삶을 함께해온 주변 사람들일 것이다. 마침내 돌아가신 부모님, 은사님 얼굴이 떠오르면 눈가가 촉촉해지기 일쑤다. 

 

 돌아보면 오늘 내가 있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애정이 있어 왔는가. 하나같이 소중한 사람들이다. 한 때 남태평양 외진 곳서 원시의 숲을 형상화하고자 방황했던 시절, 고립감에 휩싸인 내게 얼마나 꿈에 그리던 얼굴들이었던가. 지금 내가 사라져 없어진들 누가 나를 기억할 것인가. 이렇듯 내 그림 안에는 그리움에 대한 감정과 비애가 담겨있는 듯하다. 

 

 영원할 것만 같은 우리 인생도 금방 말라 소멸돼가는 물방울처럼 허무하고 안타까운 것이다. 그럼에도 숱한 역사의 뒤안길에서 사람들이 이 땅, 자연에서 나고 졌음을 생각하면 생기로 가득한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마운가. 희망의 무지개가 도처에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나의 ‘검은 산수’ 그림을 통해 자신의 존재와 삶을 성찰해보고, 자연 속에서 사람의 길을 찾는 사색의 공간을 갖길 원했다. (2022.8. 양규준)

 

 

2023-01-30 폴 고갱의 이상향을 동경해 떠난 남태평양 뉴질랜드에서 나는 수 년 동안 한국과 다른 문화적 차이로 인해 큰 충격과 혼란을 경험했다

작가노트- 2006년

 

 

 

 폴 고갱의 이상향을 동경해 떠난 남태평양 뉴질랜드에서 나는 수 년 동안 한국과 다른 문화적 차이로 인해 큰 충격과 혼란을 경험했다. 언어, 문화, 자연환경의 다름으로 인해 뉴질랜드와 한국이라는 두 가지 가치관속에서, 나는 어느 날 문득 내 자신이 혼성의(Hybridity) 정체성을 가졌음을 느끼게 됐다. 예컨데 뉴질랜드에서 어떤 풍경을 보았을 때 한국의 특정 장소가 생각나고, 뉴질랜드 역사, 교육제도를 보면 한국의 그것과 자동적으로 비교된다. 요즘 나는 이중의(Duality) 가치관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드리며 살고 있다. 

 

 나는 작가가 Object에 있는 혼성, 예컨데 물질성, 정신 따위를 동시에 드러냄으로써 Reality에 효과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감성과 이성, 부드러움과 단단함, 음과 양 같은 서로 다른 두 요소를 상호대립이 아니라 평형을 통한 중용의 미로 받아드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처럼 내 안에 있는 혼성의 어떤 것을 드러냄으로써 내 작업은 시작된다.

 

 나의 작품은 두 피스의 그림으로 구성돼 있다. 좌측 그림의 칼리그라픽 마크는 내가 어릴 적부터 접해온 서예의 전통으로부터 온 것이며, 나의 존재 혹은 자연의 일부분을 형상화 한 것이다. 

우측 검은색 그림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 즉 남태평양 깊은 바다의 심연과 검은 숲의 이미지로부터 연유된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이것을 통해 내 삶의 내면에서 떠오르는 희망과 기억들, 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 그림은 한국의 전통산수화 정신에 있는 삶의 태도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내 어릴 적 기억으로부터 온다. 농부는 봄에 씨앗을 뿌려 가을에 수확할 때까지 하늘의 기운을 늘 살핀다. 물을 주고 잡초를 제거하는 일에도 때가 있다. 석양 노을을 통해 혹은 하늘의 별자리를 보며 내일의 날씨를 가늠한다. 하늘의 주어짐에 따라 내일 일이 정해진다는 것은 인간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서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내 그림이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삶과 그것들이 어디로부터 연유 됐는지 사색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2023-01-30 작가노트_검은 산수

작업노트- 

 

                               검은 산수                       

 

 허공을 맴도는 소리, 그러나 그것은 허공이 아니다. 흐르는 물, 치솟은 산, 한가로이 떠도는 구름은 부단히 음기와 양기를 부딪치면서 기운을 전개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의 기운이 삼라만상을 있게 한다. 나의 그림 그리는 일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주변 환경 속에서 보이지 않는 어떤 징후를 살피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영원할 것만 같은 많은 것들이 부서져 소멸한다. 오늘도 쉽사리 생채기가 나는 내 몸과 마음을 본다. 체념하고, 다시 생기를 찾아 평상심을 이어간다. 

내 그림에 있어 검정은 삼원색을 포함한 모든 색을 흡인하는 포용력을 갖는다. 그리고 내가 폴 고갱의 이상향을 찾아 떠난 15년의 남태평양생활 속에 있었던 주변 자연환경, 즉 검은 산과 바다, 숲을 회상케 한다. 그것은 또한 화선지 위 진한 먹색의 번짐에 대한 나의 어릴 적 기억을 반영하고 있다. 검은 공간 속으로 퍼져나가는 흰색의 잔잔한 울림과 진동, 그것은 까만 밤, 긴 어둠의 터널을 뚫고 나오는 희미한 여명처럼, 내 삶의 내면에서 떠오르는 기억들과 희망, 그리고 나의 꿈에 관한 기록들이다.

 

 제작과정에서 검정화면 위 엷은 흰색 띠들은 붓질의 궤적에 따라 형성된다. 긴 시간 명상을 통해 얻은 평정심으로 넓적 붓을 들고, 들숨, 날숨을 반복하며 붓질을 시작한다. 이따금 씩 붓 아랫부분이 들리면서 까만 여백의 공간이 만들어진다. 흰색의 혼합 정도에 따라 궤적의 표정도 다르게 표현된다. 이것들은 채움과 비움, 번짐과 스밈 사이에서 아무것도 없는 듯하면서 어떤 풍경이 감지되는 이중효과를 낳는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향한다. 붓질 궤적에서 중력에 따라 물기가 차츰 아래로 모여 물길을 만들고, 그것이 포화상태가 되면 다시 아래로 흘러내린다. 이런 현상은 마치 한반도의 허리를 지나는 태백산맥에 비를 내리면 산과 골을 따라 여러 강이 발원하고 평야를 지나 바다에 이르는 이치와 비슷한 것 같다. 이런 전 과정이 물기가 마른 다음 수평과 수직의 얼룩으로 남는다. 무심한 획 긋기를 통해 드러난 까만 여백과 긴 수평, 수직의 얼룩들이 만들어낸 광대한 우주의 대서사시는 전통 서예의 방법론이 현대적인 재료를 통해 구현된 이 시대의 ‘검은 산수화’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제작태도는 자연법칙에 따른 물의 자발성과 우연성에 의한 조형 효과가 인간 내면의 저변에 있는 무의식성을 끌어내는 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화면의 밝기가 위로 갈수록 차츰 밝게 나타나 시간의 흐름을 표현하고 있다. 

표현재료 면에서 내 그림은 특별한 검정 젯소와 화이트, 미디움 등의 매치에 의해서만 표현이 가능한 독자성을 확보한다. 

 

 나는 대상의 형태나 색의 관계보다는 인간 감정의 표현들에 관심이 있다. 남태평양의 고립된 공간에서 세상과 직면했던 절망감, 좌절과 희망, 회한, 그리움, 귀국해 보낸 삶 속에서 느낀 안도감, 존재감, 변화감, 정의감 등, 일 것이다. 시간이 감에 따라 변화하는 주변 환경, 기후 속에서 내 감정 변이를 지켜본다. 화면에 얼마나 많은 수분을 포함하고 있는가에 따라 어떻게 감정표현의 차이가 나타나는지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어두운 구름이 증가하면 바람이 몰려오고, 바다와 육지에 있는 모든 존재가 출렁인다. 자연은 스스로 순환하며, 살아있는 모든 것에 이로운 에너지를 공급한다. 오늘도 우리는 이러한 대자연의 순리 속에 살고 있다. 나는 자연의 순환체계를 내 작업에 반영함으로써 물질적 세계관으로 경도돼 있는 현실 세계를 돌아보고자 한다. 나에게 그림이란 타인과의 소통의 창이며, 이상향을 꿈꾸는 곳이기도 하다(2018.11. 양규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