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회상, 순환의 역사성-박황재형
회상, 순환의 역사성


  1. 기적이라는 수식어가 상징인 모세는 복종의 정주적 존재 방식에서 탈주의 유목적 존재 방식으로 이끄는 운동을 상징한다. 물론 모세의 이야기는 훗날 누군가가 지어낸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모세가 실재했는지에 대한 것도 해당 종교인이 아니라면 그리 중요치 않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는 공동체가 억압한 공간으로부터 외부, 즉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약속의 땅이자 그물망의 공간인 사막으로 사람들을 인도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모세에게 약속의 땅이란 약속의 땅에 도착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 바꾸어 말하자면 그 과정 자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을 신에게서 들었든, 살해가 되었기 때문이든, 아니면 그 스스로가 들어가기를 원치 않았든 모세는 결국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모세의 삶은 모더니즘 이후의 미술가들과 유사하다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염현진의 설치작업은 세계에 대한 이해와 판단을 기존과는 상이한 해석과 입장을 통해 재배치, 재조립함으로서 인식의 전환을 이끈다. 유무형의 다차원적 현실을 사적미감과 미적일반 사이의 조화와 화해를 통해 문화적 실제로 구체화하는 것이다. 획일적이고 절대적인 각성을 추구했던 편협한 역사주의를 상대성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방식으로 수정하고자 한다. 그렇기 때문에 염현진 작업의 결과물들은 작품이라기보다는 기존의 규칙이나 범주에 지배를 받지 않는, 오히려 바로 그러한 규칙이나 범주를 찾아가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아무런 사전 규칙 없이 만들어질 것의 규칙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염현진의 미술은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동일한 방식 일반으로 고착되지 않으며 탐험적 사건의 성격을 띠면서 항상 너무 늦게, 같은 말이지만 언제나 너무 일찍 시작된다. 당연히 탐험적 사건이란 늘 어떤 위험을 동반하는 것이어서 스스로 믿고 있는 자아성이, 주체성이, 정체성이 송두리째 난파당하는 사태가 발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것의 즐거움은 바로 그런 아득하고, 아찔한 위험스런 전복에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것이 한 번으로 마쳐지는 것이 아니라 그물망처럼 이어질 것이기에 염현진은 그 힘들고 위험한 유희에 흔쾌히 동참 중인 것은 아닐까. 탐험적 사건 자체의 즐거움을 위하여, 또는 신천지에 오르기 위하여, 혹은 오른 후 사다리를 걷어 차 버리기 위하여.
  그러나 행여 누군가가 다양성과 이질성을 강조하면서도 이미 그것의 규칙을 메타규칙으로 설정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면 그것은 문제의 외곽을 맴도는 진부한 발상이다. 어떤 예술이나 사상도 영원한 타당성을 담보할 수는 없으며 결국은 비판되고 몰락하는 운명을 타고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염현진의 작업이 보여주는 탐험적 사건이 왜, 지금, 여기에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회자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2. 염현진의 설치작업은 작품에 의미를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미 의미가 되어 버린다. 서명을 하거나 날인을 할 자리에 걸쳐진 또 다른 탈주의 흔적으로서 언제나 이것이나 그것이 아닌 다른 것을 말한다. 앞이나 뒤라기보다는 측면으로 내딛는 한 발이기에 작업에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난 적이 없을 수도 있고, 또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의미가 예술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염현진의 작업에서 그것은 마치 본문은 비어있고 일러두기나 주석만이 드러나는 논문처럼 괄호 속에 유폐되어 있다. 사적인 경험, 혹은 기억과 의미가 단어와 단어 사이가 한 칸 비어 분리되면서 연결 되듯이, 자음과 모음 사이가 거리를 유지하며 밀착 하듯이, 지우면서 쓰고, 쓰면서 지우기가 반복된다. 그렇기에 기억해 둘 것은 작품이 아니라, 환기이자 상황에 대한 탐구인 탐험적 사건인 것이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항상 미루어질 최종 때문에. 마침내 어느 날 만들어지지 않는 만들기가 이루어질지도 모르기 때문에.
  염현진의 설치작업은 지극히 사적인 사유, 그러나 결코 사적일 수 없는 사유를 단초로 전개되고 있다. 개인사가 시작되는 모태 인연의 땅으로부터 자리 이동한 흙, 아버지의 삶이 육화되어 있는 유물 등이 작가의 미적체험을 거치면서 개념화 되어 사고의 전회를 이끈다.
  아버지의 병상을 지키며, 납골당에 당신을 두고 돌아오는 길에,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했던 일상을 언어화한 시들은 커튼 형태의 작품으로 만들어져 설치된다. 그 커튼은 무엇을 가리는 도구가 아니라 마치 영화가 끝나고 모두가 자리를 뜰 준비를 할 무렵 읽기 힘든 속도로 빠르게 화면에 펼쳐졌다 사라지는 수많은 이름들과 같은 일종의 개인사적 연대기라 할 수 있다. 전통악기인 해금으로 작가가 직접 연주하고 녹음한 소리 설치작업 역시 자신의 삶의 궤적을 기록하고, 기억하고, 역사화 하는 작업이다. 또한 아버지에 대한 회상은 그가 사용하던 낡은 숫돌을 통해 되살아나고, 같은 모양으로 제작된 숫돌 모형 속에는 아버지의 땅에서 채취한 흙을 담아 단절이 아닌 지속으로서의 역사 개념을 보여준다. 이는 간접적 논리의 개념화에서 직접적 체험의 개념화로, 정신성에서 신체성으로, 단일한 역사성에서 복합적 순환의 역사성으로의 전환이라 할 수 있다.
  순환의 역사성, 그것은 염현진이 좋아하는 표현인 윤회일 수도 있고, 해체와 재구축의 영원회귀를 일컫는 말일 수도 있겠다. 한 번 사유되었거나 존재했던 것의 지속이나  복사가 아니라, 어떤 낯선 존재성으로 나아가는 생성적 반복의 사유방식인 것이다.

  3. 하나의 패러다임에 의해 진행되는 활동은 마치 원래의 그림을 복원하기 위해 조각을 맞추어가는, 헝클어뜨렸다 다시 맞추어도 여전히 같은 그림이 만들어지는 퍼즐과 흡사하다. 틀과 밑그림이 미리 주어져 있는 사태 안에서 한 개인 존재가 할 수 있는 창발적인 일이란 거의 없다. 단지 그 범위 내에서 다른 조각과의 정합성을 유지하면서 보충해 넣는 배터리 역할 그 이상이 아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기존의 정상적 패러다임에 수용될 수 없는 변칙적인 조각이 등장한다. 이미 주어진 밑그림에 자신의 자리를 갖지 못한 이 변칙적인 조각은 더 많은 운동을 하며 자신의 자리를 찾아보지만 결국은 적당한 위치를 확보하는 데 실패하고 만다. 그런데 세계의 구성에서 중요한 것은 밑그림이나 틀이 아니라 그림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과 그것을 주도하는 주체인 조각들 아닌가. 변칙적인 조각이 기존의 그것에 자신의 위치를 배정받지 못했지만 버려지지만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남들보다 더 넓고, 더 깊이 움직이며 자신과 같은 처지의 조각들과 어울려 기존의 패러다임에 위기를 초래하고, 곧이어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인식의 틀을 생성하게 된다.
  세계는 이렇게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근본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테두리로서의 인식의 체계, 혹은 사물에 대한 이론적인 체계의 혁명적 교체를 통해 연속적 진보가 아니라 비연속적으로 진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변칙적 조각인 염현진의 작업을 지켜보는 것이 늘 즐겁고, 또 다른 패러다임이 기대되는 이유라 할 수 있다. / 박황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