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조각의 돌’에서 나를 보다-김종길

안재홍 조각전_[나를 본다-자라다]

 

‘조각의 돌’에서 나를 보다

- 자기 서사의 구축미학, 안재홍의 ‘자라다’ 조각 -

 

 

김종길 / 미술평론가

 

안재홍, 그의 조각은 사람의 외적 형상성에서 ‘몸’의 내적 구조에 대한 성찰로 전환되고 있다.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자라듯 그의 조각에 대한 시선도 자랐다. 구리선 뭉치에서 볼 수 있었던 짚과 풀의 느낌은 사라지고 작은 가지들이 등장한다. ‘덩어리’를 묶는 방식이 아닌 자라고 번식하는 식이다. 몸의 내부가 나무로, 숲으로 치환되면서 ‘억압’의 굴레를 벗고 완전한 ‘자아’로의 탈아(脫我)적 힘을 획득한다. 이제 그의 ‘사람’들은 일어나 걷는다. 땅으로부터, 벽으로부터 독립해 투명한 유영의 숲이 된다. 이 변화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자아의 신화’와 조각적 통섭

파울로 코엘료는 『연금술사』에서 ‘나’를 찾는 것이란 ‘자아의 신화’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라 말한다. 이 여행에서 또한 반드시 찾기를 소망하는 것이 ‘철학자의 돌’이다. 코엘료의 이야기에서 철학자의 돌은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 가는 여정 자체이며, 또한 이 돌은 만물과 통하는 우주의 언어를 꿰뚫어 궁극의 ‘하나’에 이르는 길, 각자의 참된 운명, 즉 자아의 신화를 사는 것으로서 은유된다. 돌이 들려주는 소리는 “사람은 무언가를 진심으로 바랄 때 만물의 정기에 가까워지는 거야. 그것이야말로 궁극의 힘이지.”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철학자의 돌에서 ‘아프락사스의 돌’(abraxas stone)을 연상하게 된다. 아프락사스의 돌은 로마가 멸망해갈 당시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주문을 외던   abracadabra 란 주문과 함께 사용했던 돌이다. 돌은 재앙에 맞서서 ‘나’를 보호하는 호신의 상징이지만, 적확한 의미는 선한 영(靈)을 불러 모으는 주술적 힘의 실체이다. 또한 아프락사스가,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그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에 명시된 신의 실체임을 주지한다면, 아프락사스의 돌은 새로운 몸, 즉 탈아(脫我)의 몸을 상징한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자아의 신화란 궁극의 하나의 언어를 찾는 것으로서 ‘참된 운명’에 다가가는 것이며, 그러한 운명이란 새가 알에서 깨어나듯 새로운 몸으로의 환생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추론이 가능하려면 우선 ‘자아’에 대한 분명한 인지가 필요할 터이다. 

‘나=자아’에의 인식은 ‘여정’과 무관하지 않다. 여정은 곧 삶이다. 여정의 오랜 침적상태가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태궁에서 시작된 여정의 시작은 의식과 무의식의 층위를 형성하며 삶을 축적한다. 그럼으로 ‘자아의 신화’에서 있어 신화로서의 ‘자아’는 총체적 삶의 형태로서 존재하는 ‘나’이다. 그러한 ‘나’의 본성에 신화의 화원이 있는 것이다. 

안재홍의 조각은 ‘자아의 신화를 사는 것’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된다. 구리선을 뭉쳐 옭아매거나 덧대는 방식에서 출발한 그의 작품들은 ‘알’의 형상을 닮아 있었다. 마치 세상에 처음 몸을 드러낸 형국처럼 그의 인물들은 알의 ‘덩어리’였다. 덩어리들은 돌이나 나무에 기생하거나 그것들에서 떨어져 나오려는 형상으로 변이되는데, 일견 이 몸은 자연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물아일체적 사유로도 읽힌다. 그러나 ‘자연=몸’의 사유가 화려한 나비의 부활처럼 아름답거나 충만한 기쁨이 결코 아니다. 

 

<꿈꾸는 몸의 기억>의 네 인물은 형(形)을 꿈꾼자들의 상처를 엿볼 수 있다. 이 투쟁 또한 고통을 수반하고, 자신의 업장을 감소시킨상태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결코 싸움에 의지하지 않고 뒤틀린 육신의 추한 모습을. 이들은 결코 강대하거나 아름답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현자가 설파한   영원한 가치와도 무관한 추(醜)의 용사들이다. 머리가 없거나 그로테스크하게 뒤틀려 있는, 엉거주춤한, 존재의 첫 호흡을 시작하려는 바로 그 시점에 노출된 인물들이다. 이는 억눌려 있던 작가의 내면의지에서 비롯되고 있으나 포박된 상태로 잉태한 것은   거짓 없는 순수성 즉 형(形)이 소유할 수 있는 최고의 속성이 결코   아름다움은 아니라는 무언의 외침이다. - 졸고, 「자기 그물망에 사로잡힌 내적 자아의 실체들-안재홍의 조각, 심지(心地)에서 자라난 줄기」,『미술세계』(2004년 12월호)

  

안재홍의 조각적 ‘몸’들은 불안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이 불안함의 몸짓은 자기 내부로부터 발아한 ‘불안’이며 ‘몸짓’이다. 이 둘의 상태가 하나의 실을 뽑아 내기 시작했다. 조각에서 구리선으로 등장하지만, 그 의미와 상징은 ‘고치’가 되는 과정이라 할 것이다. 불완전성의 몸에서 다시 완전한 몸으로의 탄생은 그가 줄기차게 밀고 온 조각적 힘이다. 그럼으로 수년에 걸친 이 작업의 침적상태가 바로 그의 ‘자아의 신화’ 가 아닐까. 아이를 낳고 기르고, 다시 조각가의 삶을 시작해 지금에 이른 조각의 신화 말이다. 

철학자의 돌, 아프락사스의 돌은 조각가에 있어 자아의 신화를 응집한 조각이라는 ‘작품’이며, 그 서사이다. 조각가는 그 안에서 명징하며 궁극한 ‘하나’의 언어를 찾기 위해 여정을 시작한다. 자아의 신화와 만나는 조각의 통섭은 그러므로 한 생을 향한 노정에 다름 아닐 터이다. 

그에게 있어 조각적 물음은 ‘나를 본다’에서 출발한다. 세계 안에 존재하는 사회적 자아라기보다는 본래적 존재로서의 ‘나’이다. 그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동일하게 그의 작업적 태도이며, 삶이란 얘기다. 2002년의 작품들이 낱개 하나마다 그 이름을 달리했지만, 2003년부터 작품의 개별이름은 사라지고 전체 주제로 「나를 본다」를 설정한다. 그러니까 자기 존재의 진정성을 찾아가는 시발점에서 그는 ‘꿈’이라는 형이상학적 무대를 설정했고, 그러한 환타지를 유영하는 ‘몸’이 조각적 화두였는데, 이후 이러한 무대는 현실공간으로 내려와 희노애락의 긍정상태인 ‘몸’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땅 위의 ‘나’ , 늘 부유한 마음의 상태로 떠돌아야 하는 ‘나’를 확연히 바라보기 위해 그는 「나를 본다」에 집중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그 내부에 부표처럼 떠 있는 형상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소환하여 재배치한다. 그것은 곧 자아의 신화가 조각으로 현현해 드러나는 풍경이자 꽃이다. 

이번 전시에서 안재홍은 「나를 본다-자라다」를 펼쳐 놓는다. ‘자라다’의 몸은 이전의 몸과 다르다. 몸의 내부에 ‘다의성’ 구조로 혼합적 양상을 축적하던 방식에서, ‘몸=나무’의 방식으로 바뀌었다. 몸의 구조가 혈맥의 구조처럼 잔가지를 형성하며 자라고 있다. 몸에 대한 사유 방식이 “불완전한 육체의 눈뜸→완전한 몸의 소망→고치되기 혹은 탈아적 형상으로 돌아가기→<몸=나무>사유로 전환→나무의 몸으로 눈뜸”으로 전이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조각적 ‘몸’에 대한 사유가 한 단계를 마무리하고 다음 단계로 진입했음을 읽을 수 있다. 즉, 몸과 직렬로 연결된 ‘안재홍’이라는 화두가 ‘몸’이라는 육체적 물성에서 벗어나 궁극의 하나의 언어를 찾는 시적 화두로 변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그가 바라보던 ‘나’의 본성이 ‘웅크림’으로 정지(멈춤)되어 있는 것-앉아 있거나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신화’를 획득해 가는 과정에 있음을 증언하다. 이제 그의 인물들은 걷기 시작했다. 당당한 몸으로 활보한다. 이 몸에서 지난 날 노숙처럼 떠돌았던 몸의 그늘을 찾기란 쉽지 않다.

“차라리 이대로 너를 재워둔 채 / 가만히 떠날까도 싶어 네게 묻는다 / 어떤가 몸이여”라 말하는 김사인의 노숙처럼 그도 얼마나 많은 날을 떠나야 했던가. 

 

‘몸=나무’, 나무의 신화로 만나다

안재홍의 변화된 사유에서 두 개의 이야기와 만날 수 있다. 하나는 강유환의 시에서 만날 수 있는 몸과 나무의 ‘애무’이다. “허기졌던 한철의 둥지를 버린 / 새들의 날갯짓 아직 남아 있어 / 소란스러운 지난날의 몸짓들이”가 지난 조각들에 대한 회상이라면, “색색이 물들어 지는 저 비밀들처럼 / 한때 수없이 나를 흔들던 소리들 / 소리도 오래 묵으면 높낮이를 알아 / 제 음을 짚으며 제자리로 내려앉고 / 잎 떨군 나무들 가지런히 모여 / 커다랗게 그물맥이 된 숲에서 / 아름다운 노래가 풀려 나온다 // 이파리만 기억하는 이에게 나무는 / 비어 있는 몸에 가득한 노래를 / 들려주고 싶어 하는 것 같아 / 깊어지는 숲 속으로 발을 옮겨 몸 흔드는 나무에 귀 걸어 둔다”(강유환,「나무의 몸을 만지다」)는 ‘자라다’의 몸이 나무와 어떻게 환유(metonymy)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집과 작업실을 매일 출퇴근하듯 오가는 그에게 길의 길목에서 만나는 작은 숲과 나무들은 깊은 인상이 되었다. 하루 여덟시간의 예술노동을 위해 오전과 오후, 오가는 이 길의 ‘기쁨’이 그의 몸을 변화시켰다.   

그는 인체의 아웃라인 위에 드로잉의 선과 같은 필력의 선들을 용접한다. 큰 흐름의 선들이 인체의 중심을 바로잡고, 그 선에서 잔가지의 줄기를 틔워낸다. 느리게, 맥점의 가지들을 찾아 연결하고 다시 틔워 나가는 이 작업은 긴 시간동안 반복된다. 굵기가 다른 구리선은 아래로부터 상승하는 가지의 생명력을 힘차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가지의 빈 사이에서 바람의 둥우리와 흔적을 엿볼 수 있음은 ‘나’가 훨씬 자유로와 졌다는 것을 반증한다. “커다랗게 그물맥이 된 숲”의 시어가 안재홍 조각에서 동일한 양상으로 전개는 셈이다. 그리고 “몸 흔드는 나무에 귀 걸어 둔다”는 시적 표현은 이전의 작업들이 땅에 뿌리박고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데로 나아가는데, 이번 작업에서 공중에 설치된 둥근 원과 원 안의 인물은 그러한 ‘나’의 적극적 의지로 표상 되고 있다. 나무에의 상상이 나무에 깃든 모든 ‘생명’의 에너지로 확장되는 게 아닐까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몸=나무’의 긴장도 원근의 시선에 따라 다층적으로 해제될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된다. 흰 벽에 부조로 설치된 작품들은 검은 획의 선으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덩어리’에서 ‘선’으로 풀어진 인체의 형상, 즉 몸의 드로잉이 차후 드러날 조각에의 전환적 단계로 이해될 수 있으나, 의미론적 해석과 달리 조형적 맛이 차감되는 효과는 이번 전시의 아쉬움이다.

두 번째는 ‘여정’의 유목적 사유일 터이다. 리타 골드 겔만의 『나는 유목민, 바람처럼 떠나고 햇살처럼 머문다』에서 “모든 여자의 꿈은 영원히 혼자 여행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고루한 사회적인 인식에 의해 자신에게 부여된 삶에 매여 있다. 그러한 사회적 압박감으로부터 벗어나길 원하기 때문에 누구보다 더 혼자서 떠나고 싶은 여행의 충동을 늘 가슴속에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인식은 안재홍의 유목적 진정성과 맞닿는 부분이다. 한 곳에 뿌리를 박고 살아야 하는 나무의 천형은 일견 유목과 상관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해 보면, 나무는 바람이 전하는 유목의 냄새를 맡고 자란다. 그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떠남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내 보내는 정거장인 것이다. 철마다 새들이 잦아들고, 바람이 머무는 것을 떠 올려 보라. 시베리아 침엽수림에서 날아 온 씨앗들이 바람에 묻어 있고, 그 아름다운 노르웨이의 숲도 맛볼 수 있다. 남녘 땅 호주의 깊은 계곡에 떨어지는 폭포의 물방울도 있고, 연경에서 외치던 옛 선인들의 탄성, 울란바토르 외곽의 묘비명에 적힌 “끊임없이 이동하는 자만이 살아 남는다”는 명구도 들려 온다. 백두산에서 한라산에서 지리산에서 태백의 영봉에서 날아온다. 나무는 지금 여기를 살지만, 시간에 뿌리 대고 먼 창공에서 호흡한다. 그는 나무에서 유목의 가지를 뻗어 올리고 있다. 

 

‘몸=나무’에서 ‘몸=형상’을 찾다 

『연금술사』에서 말하는 ‘하나의 언어’는 ‘신(神)’이다. 즉, 절대적 언어란 얘기다. 그리고 그러한 신에의 궁구(窮究)가 바로 ‘나’를 찾아가는 길이라 말한다. 조각에 있어 하나의 언어는 무엇일까. 어쩌면 그것은 신을 찾아가는 길, 나를 찾아가는 길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다면 반어적으로 표현해 나를 찾아가는 하나의 언어는 ‘조각’이다. 조각을 찾아가는 것이 곧 ‘나’를 찾아가는 길이란 얘기다.  

앞서 언급했듯이 안재홍의 조각적 화두는 ‘나’를 찾아가는 길이자 하나의 언어로서 ‘조각’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그가 고백하듯이 조각가의 업을 찾아 들기 전 ‘소녀’의 유목에 대한 꿈이 그를 이 길로 몰아 왔는지 모른다. 그토록 먼 길에서 그는 자신의 언어를 찾아 온 것이다. 그러나 그의 조각 언어가 내부적 변화를 거치며 진화해 왔음에도 조각의 형상성은 어떤 알 수 없는 ‘강박’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의 언어를 지나치게 고집하려는 의식과 깨쳐 나가려는 무의식이 긴장의 교집합 상태로 작동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오히려 대지를 뚫고 나왔던 처음의 조형이 형상적 힘을 방출한다. 공간을 압도하는 그 인물들은 하나의 덩어리만으로도 ‘신화’의 내재성을 담보했다. 이는 ‘나’가 곧 ‘타자’의 시선과 전시공간 안에서 맥놀이침을 말한다. 

‘몸’의 사유가 깊어지면서 거칠고 뭉툭했던 조형들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일이다. 처음, 형상의 출현이 어디에서 시작되며 어디로부터 연유하는 가에 대한 근본적이며 근원적인 질문을 쉽게 포기하는 순간, 자아의 신화는 예견치 못한 곳에서 길을 잃기 때문이다. 이 질문에서 작가마다 특수한 상황과 개별적 답안이 제출되겠지만, 조각적 탈바꿈의 지점이 파동하는 현장에서 다시 돌아 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자라다’의 형상과 의식은 긍정적이다. 작가의 의식이 유연해졌기 때문인데, 의식의 유연성이 이후 작업들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유연한 의식의 유목이 ‘형상’과 맞물려 확장되는 순간을 기다려 보는 고고자(鼓鼓子)의 기다림도 즐거운 일이다.

 

 

미지의 수많은 나를 바라보는 나-이선영
미지의 수많은 나를 바라보는 나

이선영(미술평론가)

크고 작은 동관을 용접하여 일으켜 세운 안재홍의 인체 상들은 마치 대지에서 자연스럽게 자라난 나무 같다. 묵직한 구조체를 지지하는 하체부분은 굵은 관들이, 머리를 포함한 상체부분은 분지하는 작은 관들의 구조가 부피를 만들어 그 안에 미세한 그물망을 형성한다. 그러나 나무처럼 대지 위에 우뚝 선 인체 상들은 밖으로 뻗어 나가기보다는 내향적이다. 그것들은 안으로 자라나며, 그 안에서 뒤얽힌다. 이러한 내향성은 자신을 바라본다는 전시 주제와 어울린다. 미술계 현장에서는 드문 존재인 40대 여성 조각가의 자화상이지만, 이 자소상의 성별은 불분명하고, 팔이 생략되어 있는 등 해부학적 구조도 모호하며, 선으로 만들어진 부피로 형성된 여러 개체들은 허상인지 실상인지도 확실치 않다. 선의 뭉치로 표현된 얼굴에 구체적 표정이 있을 리도 없다. 그러나 안재홍의 작품은 그 형태와 색채, 형식과 재료, 기법과 설치방식 그자체로 상기한 주제인 ‘looking at myself’(전시부제, 작품제목)를 표현한다. 
조각의 기본질서를 이루어왔던 인체가 해체되지 않으면서, 형식과 방법이 가질 수 있는 언어가 최대한 발휘되면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품의 서사는 부가적인 것이 아니라, 존재 전체가 말을 한다. 그래서 안재홍의 작품은 기계적인 복제나 과도한 표현주의와 연결되지 않고서도 자신을 밖으로 드러내는데 성공한다. 오랫동안 비슷한 주제를 견지해 온 안재홍의 작품들에서 자기에 대한 연민이 없지는 않지만, 전시가 계속되면서 진보해온 형식적 장치들은 작품의 언어를 개별이 아닌 보편으로 끌어올린다. 그녀에게 조각은 우선 나를 보는 행위이며, 이 과정을 공유할 수 있는 강력한 인터페이스를 구축함으로서 관객들에게 자기 스스로를 보도록 유도한다. 여기에서 인간, 또는 자신과의 닮음은 재현이 아니라, 구조적 유사성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인체가 무엇보다도 다양한 통과 관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상징은 그 구조와 기능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나무가 자라는 것 같은 유기적 과정은 금속으로 단단하게 구조화 된다. 벽에 붙여 설치하는 부조에서도 드러나듯이, 안재홍의 조각은 드로잉으로부터 시작된다. 드로잉 역시 무엇인가를 재현했다기보다는, 누에가 실을 뽑듯이 작가의 몸에서 자라난 것이다. 물론 자연발생적으로 자라난 형상을 3차원 공간에 일으켜 세운다는 것은 별개의 물리적 과정을 거쳐야 하는 문제이며, 그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한 점에 그 독특성이 있다. 다양한 굴곡 면을 가진 형태들은 일관된 매뉴얼을 불가능하게 하며, 자동화 될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누가 도와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매번 시행착오와 기적이 발생한다. 작가가 작품에 나를 고집해 온 것은 그것이 자신만이 온전하게 할 수 있는 작업이기 때문일 것이다. 머릿속에 떠도는 그 모호한 것들을 현실에 일으켜 세우는 일만큼 어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보통 사람들에게는 대부분 불발탄으로 끝나는 것들을 작가는 현실화함으로서, 그 누구와 소통하기 이전에 가장 먼저 창조의 희열이란 것을 맛볼 수 있다. 
그래서 작가에게 작품이란 공적인 소통이기 이전에, 우선 자신과 관련되는 문제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공허한 형식들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예술가는 어떤 내용으로 자신의 진정성을 확보하고자 하지만, 그 역시 내용을 객관적으로 보여야 하는 임무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온 몸으로 통과해야만 하는 시련의 시간들이 견디기 힘들기에, 평범한 작가들은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정치적 전략에 몰두하거나 제도 속에서 통용될 ‘객관적’ 자격 여건을 취득하기 위해 그렇게도 애를 쓰곤 한다. 그러나 그런 일에 시간과 돈, 정신 에너지를 투입해봤자 자신이 궁극적으로 돌파해야 하는 문제는 단지 지연될 뿐이다. 이때 예술은 이중적으로 자기 소외를 야기한다. 안재홍 역시 생활인으로서 한동안 조각을 쉴 수밖에 없었고, 10여년 만에 멈췄던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숨을 쉰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깊은 소외를 경험했다. 이 전시를 비롯해서 요즘작품에 등장하는 인체 상 가슴 안쪽 부분에 자리한 파랑새는 작업하는 삶이라는, 되찾은 희망을 상징하는 듯하다. 
몸속에 자리한 이 희망의 상징은 허의 공간이 없는 온전한 실체를 이루면서, ‘자아 안의 타자로서의 영혼’(레비나스)처럼 보인다. 인체상은 파랑새의 둥지가 되어준다. 작가는 육아 때문에 작업을 쉬고 있을 즈음, 비바람이 몰려오기 직전 나무가 바람에 아우성을 치는 듯한 모습을 보고서 자신의 상황을 중첩시켰다. 꽁꽁 뭉쳐진 금속선과 나무 형태의 결합은 그런 한스러운 감정으로부터 태어났다. 안재홍에게 조각은 무슨 특이한 형식과 내용이기 이전에, 무엇보다도 나를 되돌아보는 행위였다. 그러나 그것이 주관적 영역에 머물지 않는 것은 조형 언어가 가질 수 있는 객관적 힘 때문이다. 작가는 그렇게 자신의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을 밖으로 끌어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주/객 이원론에 바탕 한 재현이나 표현은 아니다. 조각을 전공한 안재홍은 학창시절 전통적 교육 과정을 충실하게 따라, 흙 작업을 열심히 했지만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는 재현의 방식에 불만을 느끼던 중, 91년에 고물상에서 동 선을 발견한다. 
그것은 가는 구리선을 압축하여 쌓은 것인데, 꽉꽉 뭉쳐져 내 동댕이쳐진 그 폐기물(재활용품)이 마치 자신처럼 느껴졌다. 이 발견된 오브제는 그자체로 강력하게 형상을 구축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구구절절한 표정의 재현 없이도 표현적일 수 있었다. 이렇게 90년대 초반에 우연찮게 동을 발견한 후, 작가는 줄 곧 그것을 활용했다. 전선이나 보일러 관 등으로 사용하는 동선이나 동관은 에너지를 전달하는 재료로, 금속이면서도 따뜻한 느낌을 주며 원하는 각도나 유연함이 가능하다는 이점이 있다. 무기질이면서 유기체적 느낌을 주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색이 변하는 것에서도 발견된다. 그것은 이 재료의 한계이면서 독특함이기도 하다. 번쩍거리는 황금색 도관은 어떤 마감처리를 거쳐도 거뭇하게 변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작가는 이 물리 화학적 과정도 작품에 포함시킨다. 그것은 나무처럼 자랄 뿐 아니라, 나무 같은 짙은 갈색으로 변모하는 것이다. 
인간에서 나무로 변하는 신화처럼, 형태 뿐 아니라 색채도 나무화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용접한 선들도 일부러 지우지 않는다. 작품은 나무의 옹이나 나이테처럼 마디마디 자신이 겪은 일이 온몸에 새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는 작품의 시작인 드로잉 자체가 나무 같다. 몸과 무의식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것들이 종이 위에 발산되는 드로잉은, 안재홍에게 어떤 내용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나무처럼 통과시키는 것이다. 틈틈이 행해진 드로잉을 바탕으로 조각의 굵고 가늘기를 결정한다. 그러나 평면과는 다른 차원들을 생각지 않을 수 없는 조각은 드로잉을 바탕으로는 하지만, 그것을 정확히 재현하지 않는다. 3차원에서 수행되는 공간 드로잉은 0.15mm에서 8cm 사이의 10개가 넘는 동선(관)의 계열로 이루어진다. 평소에 붓 펜으로 드로잉을 하지만, 붓 펜 드로잉과 실제 구리선 드로잉의 느낌은 다르다. 평면이 용접을 통해 입체화될 때는 부피가 생기면서 각도 등이 미묘하게 변화한다. 
입체화 될 때 선의 관계는 매우 복잡해진다. 벽에 붙이는 작업과 달리 입체화는 앞, 뒤, 옆선이 360도로 원하는 형상이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각을 맞추기 위해 수없이 눕혔다 세웠다를 반복하며, 큰 작품의 경우 하루에도 수백 번 사다리를 탄다. 전시된 작품은 규모가 크든 작든 간에 대지 위에 웅장하게 서있으면서도 웅크리는 듯한 느낌이다. 나무처럼 분지를 이루는 관다발로 얽혀 만들어진 인체상의 상체 부분은 다양한 굵기의 관으로 밀도가 높고, 하체 부분은 굵고 성글다. 균질하지 않은 밀도가 밑바닥에 발을 묻은 채 고정된 조각상에 잠재적 움직임을 만든다. 팔은 그 비슷한 실루엣만 보인다. 인체상이 걷는 모습일 때는 무게 중심이 아래에 있어서 그런지 뭔가 엉거주춤하다. 서있을 때는 물론, 움직일 때조차 외향적이지 않다. 밀도와 크기가 다른 여러 인체상이 함께 있을 때 남녀상이나 군상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한 사람(작가)이며, 그 주변의 비슷한 형상은 분신이거나 그림자이다. 재현의 기원이 되는 그림자나 분신에는 타자라는 주제가 뒤따른다.
안재홍의 작품에서 실상과 허상 간의 질적 차이는 발견되지 않는다. 벽에 붙여 설치하는 작품의 경우, 작품 자체가 드로잉이기에 그림자에 의해 선이 배수로 늘어나는 것까지 고려한다. 공간에 그린 드로잉은 마음속에 떠오른 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그렸다는 기본적인 속성은, 그것이 자연의 외적인 모방이 아닌 자연적 과정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과정의 구조화를 통해, 조각예술의 기본인 인체 상을 부정하지 않고서도 재현주의를 벗어나는 현대적 어법을 획득한다. 여러 굵기와 밀도, 그리고 각도의 선이 나오지만, 어떤 해부학적 기관이나 얼굴표정을 결정짓는 선은 없다. 어떤 것은 잠재적이고 어떤 것은 현실적이다. 무수히 반복되는 선들은 잠재성과 현실성을 일치시키지 않는다. 또한 이 두 차원은 관객의 시선에 따라 자리를 수시로 바꾼다. 재현의 동일성을 부정하는 이러한 가변적 속성 때문에, 주체는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끝없이 변모한다. 이 변모의 과정 자체가 실체, 즉 그 인간의 정체성을 이룬다. 
이 금속 뭉치들은 여러 매개 없이 무의식과 욕망을 표출하는 것이다. 이 무의식과 욕망은 다양한 분지의 체계를 통과하고, 작품 전체의 복잡한 굴곡 면으로 전달된다. 안재홍의 작품은 인체의 가장 표현적 부위인 얼굴과 팔(손)을 생략한다. 판토마임 배우나 웅변가들이 곧잘 이용하듯이, 뭔가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수단인 손과 얼굴은 안재홍의 작품에서 단지 몸통의 어느 위치에 표시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얼굴은 얼굴이 아니라 단지 머리통이고, 수많은 갈래의 선들이 교차된 머리는 분열적이다. 게다가 팔은 몸통에 흡수되어 있어 마치 유령처럼 보인다. 이전 작품에서 몸통자체가 거의 팔인 작품도 발견되기는 하지만, 그렇게 과장된 팔 역시 통상적인 의미의 팔은 아니다. 대지로부터 자유로워진 손은 뇌의 용적률과 함께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즉 만물의 영장으로 만든 가장 강력한 동인이었는데, 그녀의 작품에서 그것은 대지에 묻혀있는 발과 함께 식물적 형상으로 응축된다. 재현과 표현, 노동과 이동을 통해 외부 세계를 인식하고 정복하는 인간의 속성이 축소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조각예술도 크게 기여해온 인간중심의 목적론에 대한 작가의 대답이다. 자연의 지배자가 아니라 자연의 일원으로 그것과 공존하려는 태도는 나무로 자라난 인간형상, 그리고 인간 중심의 목적론에 의해 타자화 된 자연을 품고 있는 모습에서 읽혀진다. 안재홍이 바라본 자신은 주체가 아닌 타자이다. 그것은 주체가 자신을 바라보기 위해 분열되어야 한다는 것, 더 나아가 주체 자체가 타자를 통해 확실시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주체와의 소통은 곧 타자와의 소통이다. 결정적이지 않은 수없는 선들의 흐름으로서의 인체상은 주체를 이루는 현실, 상상, 상징 사이의 메워질 수 없는 틈과 간극을 나타낸다. 변치 않음을 가정하는 동일성(sameness)은 주저하는 그렇지만 단호한 선들의 흐름에 의해 분열되고 분절화 된다. 폴 리꾀르가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에서 말했듯이, 타자는 동일성 안에서 나를 결집시키고 나를 확고히 하며 나를 유지하도록 도와준다. 
철학자가 물었듯이, 어떤 조건으로 이 타자는 나의 복제, 또 다른 나가 아니라 나와는 다른 진정한 타자가 될 것인가가 중요하다. 안재홍이 바라본 자기의 모습에는 타자들이 흔적처럼 새겨져 있으며, 그자체가 자신을 이룬다. 동일자가 아닌 타자로서의 자신은 현대철학의 중심주제이기도 하며, 그것은 재현주의로부터 멀어진 현대미술의 흐름과도 중첩된다. 폴 리꾀르에 의하면 근대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의 그 주체는 ‘나는 원하고 움직이고 행한다’를 말한다. 데카르트는 존재를 실체와 같은 것으로 보는 오래된 동일화를 전혀 문제 삼지 않았는데, 이 동일화는 시각적인 표상에 부여된 배타적 특권에 의거한다. 그러나 존재와 있음 대신에 부재와 결여를 통해 타자의 자리를 마련하는 안재홍의 작품은 인간을 세계의 주체로 격상시키는 유아론적 태도와 거리를 둔다. 자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처럼 바라봄은 20 여 년 전에 흙을 대신 할  금속선 뭉치를 발견했을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안재홍이 만든 몸들-박영택
제 2회 평론


안재홍이 만든 몸들 

박영택    미술평론가, 경기대 교수

얇고 가는 구리선이 무수하게 엉켜 체적을 이루고 자잘한 선들이 모여 부피를 만들며 볼륨과  입체감을 형성하고 있다. 그리곤 그것이 사람이 되었다. 짚으로 만든 인형 실 뭉치로 채운 상을 떠올려본다. 표피를 벗겨낸 청동 선을 사용하고 있는 작가는 그것을 뭉치로 만들고 이를 다시 굵은 청동 선으로 엮어내는 방법론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했듯이 섬세한 인공섬유처럼 실선의 모양을 하고 있는 동선들은 육체의 피질을 제거한 신경조직이나 미세혈관을 연상케 한다. 철골로 용접된 기초 모형의 틀 위를 동선뭉치로 겹겹이 덮고, 씌운 다음 인체를 결박하듯 묶어 지탱하는 두꺼운 철사의 조형성을 통해 폭력과 억압의 의미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가 하면 시간이 흐르면서 피어난 청동의 부식현상(동선들을 암모니아수로 습기를 먹여 밀봉해 두면 그런 효과가 나온다)은 흡사 부패한 인체를 보는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우연히 고물상에서 뭉쳐져 나뒹구는 구리선을 발견한 작가는 한 번 쓰고 버려지는 그 구리선이 자신과 동일시되기도 하고 자신의 속살을 보는듯한 느낌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 안을 들여다보는 느낌, 마치 자신의 초상을 보는듯한 착각이 들어 그 재료를 선호하게 되었다고 한다.

화성 봉담 근처에 있는 작가의 작업실에서 만난 다소 기이한 이 물질의 다발은 흡사 바위에 잔뜩 낀 이끼나 벽에 무섭게 매달린 담쟁이 넝쿨처럼 그렇게 번져 나가거나 부풀어 오르면서 자연스레 인간의 몸을 떠올려 준다. 녹이 슨 동선이 자아내는 진한 청록의 색감과 자잘한 선들로 빼곡히 채워진 인체는 기이한 흥미를 던져준다. 아울러 특정한 성의 표식이 지워진 이 중성적인 인간형들은 벽에 결려있거나 바닥에 웅크리고 있다. 바위나 돌이 되어버린 인간, 모든 음성을 지우고 오로지 침묵으로만 굳어버린 사람, 감정을 억누른 채 부동으로 존재하는 이 ‘몸’들은 저마다의 배역을 맡고 있어 보인다.
안재홍은 자신의 분신 같은 이 몸들을 공간에 부려 놓으면서 결국 자신의 몸, 모든 것을 함축하고 저장하고 기억하고 있는 그 몸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그 동안 작가는 언제나 인체로 이야기를 풀어왔다. 그러니까 그녀의 작업은 언제나 인체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런 저런 모습으로 묶여 있는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매개가 됨과 동시에 무엇보다도 자신을 표현하고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드러내고 자기 안에서 꿈틀대고 있는 힘, 
의지를 보이고 싶어 한다. 아니 자신의 작업이 그냥 사람이고자 하는 것이다.

다소 비장하고 더러 엄숙하고 무겁게 자리한 이 인간의 형상은 다분히 실존적인 뉘앙스를 함축하고 있어 보인다. 고뇌에 찬 몸짓이거나 속박과 굴레를 머금은 인간의 보편적인 운명에 대한 부드럽지만 예민한 시선이, 감촉이 깃든 조각으로 다가온다. 한편으로는 그런 것들이 다소 상식적으로 눈을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도 든다. 그러한 상투형의 인상을 벗어나 다시 그 조각들을 본다면 꽁꽁 묶인 채 웅크리고 있거나 묶여서 밑을 내다보는 인간 군상들보다는 벽의 피부에 걸쳐있는, 단절과 생략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인체들이 좀 더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것들은 일종의 부조이자 동시에 벽의 표면에 그려진 그림의 일종이다. 커다란 벽면에 힘찬 드로잉을 하듯 작가는 동선으로 그림(부조)을 그렸다. 무척이나 회화적인 충동을 감지하게 하는 그런 작업이다. 그래서 조각 작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커다란 회화, 벽화로 다가온다. 가는 동선다발을 물감 삼아, 전시장 벽면을 화폭으로 삼고 그 위에 인간의 몸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선으로 이루어진 이 부조(회화)는 덩어리로 존재하는, 특정한 3차원적 공간을 물리적으로 점유하는 조각의 관행에서 슬쩍 빠져 나와 평면에 기생하면서 납작한 평면이면서도 동시에 일정한 높이를 지닌 입체로서의 삶을 횡단한다. 또한 주변 벽면(환경)을 자신의 영역으로 빨아들이면서 분리시키거나 억압하지 않는다. 흰 벽면을 실존의 공간으로 삼아 무언의 몸짓을 펼쳐 보인다.

안재홍이 만든 몸은 구체적인 표정이나 특별한 몸짓 이전의 본능적인 살덩어리, 피와 혈관과 수분으로 뭉쳐진, 살과 뼈가 합쳐진 그런 몸으로 다가온다. 마치 살 껍질을 죄다 벗겨내 드러난 살의 안쪽 같다. 조각이 결국 몸의 외형만을 재현할 수밖에 없다면 이 작가는 그 안쪽, 깊이를 지닌 그 내부를 들여다보고자 염원하는데 그것은 다소 절박하다. 인간의 몸이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텅 빈 공간 같다. 한 개인의 감정과 사유가 분명 거주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그저 장기들로 가득 채워진 고무봉지 같은 것이 몸이기도 하다. 동물성으로서의 몸이 고상하고 숭고한 정신의 거처라는 아이러니는 화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이라면, 부정할 수 없다면 그 두 개의 영역을 함께 인정하는 선에서 살아갈 것이다. 미술은 그 두 개의 영역에서 언제나 정신의 우월성을 강조해왔지만 최근에는 몸 자체를 억압하지 않고 솔직하게 들여다보고자 한다. 몸의 재현이 동시대 미술의 화두가 되었음을 떠올려 보라.
안재홍은 인간의 안쪽을 표현하고자 한다. 자기의 내부를 보여 주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무척 어렵고 지난한 일이다. 과연 미술은 인간의 그 내부를 재현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인간은 자신의 내부에 있는 것들을 길어 올려 시각의 영역아래 두고자 했다. 미술이 정신의 표현이고 내면을 투영하는 적절한 수단이라고 여겨왔다. 아마도 그것은 눈으로 볼 수 없고 보여줄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시각화의 욕망에 지배되어 왔다.
우리의 눈은 인간의 내부를 들여다 볼 수는 없다. 우리가 내부를 보기 위해서는 절개를 해야 한다. 그러니 절개한 몸에는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없다. 그저 동물성으로써의 몸뿐이다. 안재홍의 조각은 일종의 절개와 단면의 조각인 셈이다. 외면하고 싶고 부정하고 싶은 그 안쪽을 다시 보게 하는 것이다. 장기로 흘러넘치는 안의 육체를 은유화 하는 동선들은 그것을 넘어서 인간 내부의 복잡 미묘한 심리와 정신의 예민한 가닥들 또한 효과적으로 재현한다. 피상적인 외피의 창백한 재현보다 적나라한 내부를 응시하게 하는 것이다.


                                      

꿈꾸는 몸의 기억-김영호
  꿈꾸는 몸의 기억  (1회 개인전 평론글)           

김영호 (중앙대교수, 미술평론가)

조소예술의 기원 이래 끊임없이 다루어져온 소재인 인체가 오늘에 와서도 예술가들에 의해 개성적 의미생산의 매체로 다루어질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전통적 장르를 넘어 다양한 시각매체를 통해 수없이 침체되고 그에 대한 비평원리도 다각도로 분류된 지금 인체의 새로운 언어는 무엇인가? 로댕에서 쟈코메티, 무어에서 브랑쿠지를 거쳐 시걸과 부르주아에 이르는 현대 조소예술의 문맥에서 신체이미지는 시대의 단편적 마디를 규정하는 의미생산의 도구일 뿐인가? 아니면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는 주체로서 예술가들이 남긴 자아 표현의 흔적, 혹은 두려움과 기쁨이라는 생명현상의 자취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안재홍의 작품에 등장하는 중심 화두는 인간이다. 조소예술의 보편화된 소재로서 그가 선택한 인체의 형상을 보면 인간존재의 원형적 메시지들과 개체적 삶의 기억들이 뒤섞여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는 그의 작업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해석의 가능성이 다채롭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도 하다.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있거나 군집 흉상으로 나열된, 혹은 파편화된 두상의 모습으로 제시된 인체의 표정은 억압된 자유의지와 침묵 속에 갇혀있는 영혼의 존재상황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그이 인체들은 이미 이상세계를 지향하는 고전주의 전통을 따르지 않을 뿐 아니라 낭만주의자들의 숭고한 정서도 배제되어 있다. 박제된 동물의 껍질처럼 제시된 형상들은 물성을 강하게 보여주므로 즉물적이다.

 이러한 이유로 안재홍이 표상하는 인체 이미지는 로댕이나 아바카노비치 그리고 루이 부르주아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억제된 몸짓을 취하는 인물상은 상처받는 영혼을 담아내는 듯 뒤틀려 있으며, 몸의 표면을 떠낸  듯한 인물은 의식이 빠져나간 육체처럼 공허한 물질감을 드러낸다. 상실의 기억 속에 파편화된 신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초적이고 육감적인 감각이 은밀하게 숨 쉬고 있음을 전해준다. 한편, 안재홍의 인물은 신체를 강조하고 있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특정한 성에 대한 구별이 없어 보인다. 작가 스스로가 말하듯이 여성 혹은 남성의 이미지를 표상한다는 것은 관심 밖의 일이며  인간 그 자체가 관심의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체조각을 둘러싼 해석의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안재홍의 인체작업에는 개성적인 요소들이 엿보인다. 그가 사용하는 매체로서 표피를 벗긴 청동선 뭉치가 그것의 하나이다. 사실 섬세한 인공섬유처럼 실선의 모양을 하고 있는 동선들은 그의 신체작업과 비평에 중요한 단서로 쓰인다. 육체의 피질을 제거한 신경조직이나 미세혈관을 연상케 하는 동선은 철골로 용접된 기초 모형작업의 틀 위를 겹겹이 덮고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피어난 청동의 부식현상은 불타거나 부패한 인체를 보는 듯 강렬한 시각체험을 유도하기도 한다. 때로 통나무나 바위를 감싸고 있는 청동 뭉치는 물질과 인간의 교합되는 효과 속에서 서로의 관계성을 강화시키고 있다.

 철사작업의 조형적 완결성이 강화되어야 할 필요를 느낌에도 불구하고 안재홍이 차용하고 있는 조형형식은 그가 드러내려는 주제와 긴밀한 연결고리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특히 동선 뭉치를 씌우기 이전 과정에서 제작되는 인체의 기본 틀을 보면 작가의 조형적 전문성이 엿보인다. 마무리 작업에서 인체를 결박하듯 묶어 지탱하는 두꺼운 철사의 조형성은 작품의 폭력과 억압의 의미를 강화시키는 간접적인 요인으로 보인다. 결국 동선과 부식 그리고 철제 골격 위에 거친 살 붙임의 과정을 통해 드러난 볼륨과 빈 공간 등의 요인은 작가가 드러내려는 시간의 굴레 위에 실려 있는 욕망과 방황 그리고 삶의 무게를 지탱하고 대응하려는 작가의 의지를 반영하고 있다. 

 대부분의 예술가들의 작업동기가 그러하듯 안재홍의 인체작업은 자전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 예술이란 현대를 살아가는 자신의 주변과 그 환경에 대응해 자신을 보호하려는 본능의 결과물이듯이 그의 작업 역시 욕망과 상실의 기억인 것이다. 안재홍의 인체는 이 대목에서 보편적 가치와 이어지는 연결고리를 가지며 소통의 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남성 혹은 여성을 떠나 합일된 인간의 모습이나 머리를 감싸고 있는 뒤틀린 신체 그리고 물질화 혹은 박제화 되어가는 자신에 끊임없는 자성의지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라면 안재홍의 인체는 너가 아닌 바로 나의 모습으로 다가온다.       

실존적 인간과 존재론적 자의식-고충환
실존적 인간과 존재론적 자의식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헤겔은 예술을 이념의 감각적 현현이라고 했다. 창작주체의 이념이 이러저러한 감각적 형식을 덧입고 상형되는 것, 즉 이념의 표상이라는 말이다. 이 말은 형식논리가 강한(흔히 모더니즘 서사에 의해 지지되는) 경향성보다는, 형상성과 서사성이 강한 경향성의 작업에 더 잘 어울린다. 신체를 소재로 한 안재홍의 조각은 형상성과 서사성이 강한 편이며, 그런 만큼 그 신체에는 작가의 남다른 이념이, 인간관이,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자기반성이 들어있다. 
그 신체는, 말하자면, 예사로운 신체가 아닌, 작가의 남다른 이념을 표상하고 수행하는, 예사롭지 않은 신체며, 이념의 집이다. 그러나 정작, 그 신체는, 신체에 대한 선입견이 없다면, 그 신체를 신체로서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암시적이다(정보량과 암시력은 반비례한다. 즉 정보량이 적으면, 그만큼의 의미론적 공백이 생겨나고, 그 공백을 채우기 위해 암시력이 강화된다). 오죽하면, 그 신체에는 얼굴도 없고, 수족도 없다. 얼굴이 없으니, 표정도 없다. 표정이 없으니, 개별성도 없다(작가의 작업에서 신체는, 평면회화로 치자면, 최소한의 실루엣 형상으로 환원되고, 그런 만큼 개별성보다는 익명성이 강조되고, 그로 인해 오히려 보편성을 획득한다. 비록 시작은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으로부터 유래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론, 개인적인 경험의 경계를 넘어 보편적인 존재론적 조건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며, 이런 연유로 작가의 작업은 쉽게 공감을 끌어낸다. 그리고 이런 실루엣 형상으로 인해, 작가의 작업은, 심지어 입체의 형상을 띌 때조차, 조각이면서, 동시에, 회화처럼 보인다. 일종의 회화적인 조각을 실현하고 있는 것인데, 그렇다고 부조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작가의 입체조각이 정통적인 환조와는 상관이 없듯, 드로잉 조각 역시, 다만, 조금은 평면적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정통적인 부조와는 다르다). 
그저, 겨우, 신체임을 암시할 뿐인, 애매하고 유기적인 덩어리가 있을 뿐이다(작가는, 도무지, 신체의 감각적 닮은꼴 그대로를 옮겨놓는 일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보다는 더 결정적인 일에, 이를테면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층위로 끌어올리는 일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그 애매하고 유기적인 덩어리가, 왠지,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포즈의 신체를 연상시키고(작가의 조각에서, 자기 외부를 향해 열려져 있는 포즈의 신체는 찾아볼 수가 없다. 거의 전무하다고 봐도 되는데, 바로 이 포즈의 특정성이 그대로 작가의 조각의 특정성으로 연결된다), 내면적이고 내향적인 경향성을 상기시키고, 암울한 정서를 자아낸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암울한 정서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실존주의다. 작가의 신체조각은, 그 속에, 실존주의적 인간관이 들어있다. 이를테면,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론적 자의식이(하이데거), 심지어는, 자기 자신마저도 낯설어하는 자기소외가(사르트르), 삶은, 그저, 우연한 현상일 뿐이며, 도덕은, 다만, 인간의 자기논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부조리 의식과 이방인 의식이(카뮈) 스며들어있다. 이런, 존재론적 자의식이 짓누르는 무게가 작가의 조각에 나타난 신체로 하여금, 마치, 고치처럼, 안쪽으로 몸을 말아 덩어리 짓게 하고, 서 있을 때조차 웅크리게 하고, 걸음을 떼, 움직임을 암시할 때조차 엉거주춤하게 하고, 땅을 쳐다보게 만든다(작가의 조각에서 신체는, 결코, 단 한순간도, 정면을 주시하거나, 자기외부를 향해 열려져있거나,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이 없다. 자기외부세계와 화해하지 못한 자의 전형적인 몸짓을 보여주고 있는, 그의 제스처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실존주의적 인간을 표상하는, 자코메티의 조각의 신체가 보여주는, 존재론적 자의식이 만들어준 상처를, 무슨 훈장처럼, 온몸으로 받아내며 똑바로 서서 정면을 직시하는 포즈와 비교된다. 여하튼, 두 경우 모두 실존주의를, 실존주의적 인간을 표상한다. 차이점이 있다면, 작가의 경우에 존재론적 자의식이 자기 내부를 향해 열려져 있다면, 자코메티에게서 그 자의식은 자기 외부를 향해 열려져 있는 점이 다르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앉아있을 때도 그렇고, 서 있을 때도 여전히 그런), 그는, 말하자면, 그렇게 웅크려진 몸의 안쪽을, 자기의 내면을, 자기의 실존을, 자기의 (또 다른) 자아를, 자기의 타자를, 자기의 어둠을, 자기의 무의식을, 자기의 심연을, 자기의 침묵을, 자기의 광기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웅크려진 몸의 안쪽을 통해, 자기가 유래한 근원(이유와 원인), 존재의 근원(이유와 원인), 세계의 근원(이유와 원인)을 직시하고, 그 근원에 직면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곳엔, 다만, 침묵(언어와 논리, 개념과 의미를 집어삼키는 인식론적 블랙홀)과 어둠(존재를 집어삼키는 존재론적 블랙홀)이 있을 뿐이다.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며, 존재의 근원도, 존재하는 이유와 원인도 찾을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처럼 예정된 실패, 알려진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실패를 감행하는 것, 그것도 매번, 이미 알고 있는, 알면서도 하는, 똑같은 실패를 반복하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인간을 인간이게 해주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거듭나는, 위대한 순간이며, 사건이다. 어쩌면, 그 실패를, 거듭, 반복하다보면, 칠흑 같던 자의식이, 조금은 투명해질지도 모를 일이다. 

안재홍은 고물상에서 피복이 벗겨진 채 뭉쳐있는 동선다발을 본다. 그리고 그 동선다발이 꼭 자기 같다는 생각을 한다. 쓸모없이 버려진 동선다발과 자기의 처지를 동일시한 것이다. 그리고부터 지금까지, 그 동선다발을 취해 작업을 하는데, 꼭 자기를 만지고, 자기를 만들고, 자기를 빚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러므로 작가의 조각은 모두가 자기 자신이며, 자기분신이다. 
그 분신들은 서로 어우러져서 군상이 되기도 하고, 나무가 되기도 하고, 숲을 이루기도 한다. 사람들이 모여서 숲을 일궈낸다. 사람 속에 숲이 들어있고, 숲 속에 사람들이 들어있다. 사람과 나무와 숲이 그 경계를 허물고, 서로에게 스며들고 녹아들면서, 유기적인 덩어리를, 그 속에 허허로운 숨구멍으로 숭숭한 덩어리를 일궈낸다(그러므로 작가의 조각은 정통적인 조각과는 다르다. 말하자면, 안쪽과 바깥쪽이 막혀 있는, 정통적인 조각의 매스, 양감, 속이 꽉 찬 덩어리를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통적인 선조로 보기도 어렵다. 선조에 비해, 동선다발로 뭉쳐낸, 작가의 조각은 정형화된 형식을 결여하고 있다). 사람이 나무가 되고, 숲이 되는,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위한 풍경이 되는, 그 풍경 속에 또 다른 사람이 웅크리고 있거나, 서 있는, 사람과 풍경이 서로를 향해 열리고, 서로를 자기 속에 받아들이는, 풍경조각으로 부를 만한 한 경지를 예시해준다. 
그런가하면, 동선다발이 신체를 온통 촘촘하게 감싸고 있는 핏줄다발을 떠올리게 한다. 엄밀하게는, 가녀린 선은 핏줄 같고, 좀 더 굵은 선(관 형태의 동 파이프를 용접해 만든)은 힘줄 같다. 드로잉조각이나 실루엣으로 나타난 사람형상과, 핏줄과 힘줄다발, 그리고 대개는,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 떠올려주는 내면화와 내재화의 경향성이 어우러져서, 신체의 바깥쪽과 안쪽, 그리고 그보다 더 안쪽에 있는 심리의 지층을 하나로 꿰뚫고, 신체의 가시적인 형상과 비가시적인 층위를 관통해 보여준다. 이처럼 작가의 조각에서 사물, 세계, 대상의 안쪽과 바깥쪽은 서로 통하면서 연속돼 있다(사람이 풍경과 통하고, 신체의 바깥쪽이 안쪽과 통하는). 그 자체를, 생태담론과 생명사상에 공감하고 공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동선다발은, 마치, 삶이 지나간 궤적과 흔적들이 오롯이 중첩된 선들의 뭉치로 남겨진 것 같다. 
이로써, 안재홍의 조각은, 말하자면 작가 자신의 자화상(자소상)이면서, 동시에, 삶의 메타포로서의 의미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자화상은, 동시에, 우리의 자화상이며, 그 자화상이 그려 보이는 삶은, 동시에,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작가가, 유독, 유별나게 겪어내고 있는 실존적 인간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살고 있는 자아며, 타자며,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