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조광기 회화의 푸른 심층 들여다보기- 화가 도병훈
조광기 회화의 푸른 심층 들여다보기
- 화가 도병훈
세계사적으로도 유례없는 근현대시기를 살아 온 이 땅의 화가들은 두 갈래의 상이한 미술 중에서 표면적으로는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했다. 그것은 전통회화에 뿌리를 둔 동양화(한국화)와 20세기 초 주로 일본을 통해 수용한 서양화를 말한다.(20세기 중후반까지 한정하면 고희동이나 근원 김용준, 이인성 처럼 기능적으로는 양쪽 모두에 능통했던 미술가도 있으나, 들여다보면 이들도 상이한 문맥을 가진 양자의 미적 특성 사이에서 고뇌하며 표면으로는 한 쪽의 길을 가야했다)

20세기의 전통회화 영역은 이른바 ‘6대가’로 대표되는 시기 이후, 근현대미술계에서 점차 소외되는 현상에 직면했다. 한 때 그들의 제자 세대들에 의한 자구책, 이를테면 1960년대 초반의 ‘묵림회’라든가 1980년대 초반에 일어났던 수묵화 운동 등으로 새로운 길을 모색해왔으나, 모방과 추종의 역사로 점철된 서양화 및 이식된 현대미술이 미술계의 대세가 되면서 점차 그 위상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 와중에 서양화 전공자가 전통회화에서 길을 모색하고자 하거나, 동양화 전공자가 현대회화 및 현대미술에서 미적 성취의 새 길을 찾고자 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서양화를 전공한 이는 전통회화에서, 전통회화를 전공한 이들은 서구 현대회화에서 새 길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는 서구근대미술의 모방과 추종에 대한 비판 정신, 또는 혼성화된 미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비평적 담론의 역할이 더욱 커졌다. 동양 고전을 통해 서구중심주의를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든, 우리의 전통을 과소평가하든 공히 허위의식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조광기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지만, 대학 졸업 직후부터 동양 특유의 세계관인 ‘기(氣)’의 세계를 추구하면서 십장생과 같은 민화적 모티브를 대상으로 삼아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민화적 소재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이런 그림의 특성상 갖게 마련인 장식성과 소재주의에서 벗어나고자, 점차 자연이나 사람과 같은 좀 더 구체적인 대상을 찾게 되었다. 자연의 경우, 주로 험준한 바위로 이루어진 ‘악산(嶽山)’ 계열의 산이나 능선을 타게 되는데, 이 중에서 그에게 특별한 영감을 준 곳은 설악산의 ‘공룡능선’이나 영암 ‘월출산’ 같은 장소였다. 이들 장소에서 산행 중 바라 본 일출과 일몰의 장면들도 그에게 각별한 체험이 되었다.

당시 산행에서 그는 특히 월출산 ‘바람 폭포’에서 겨울바람 속 물보라를 온 몸으로 체감하면서 그 감흥이 계기가 되어, 이후 폭포를 소재로 한 많은 그림을 그려왔다. 그는 폭포를 그리면서 무엇보다 흘러내림, 즉 하강후 바다에 이르는 물의 여정에서 세계의 순환을 느꼈다. 폭포는 그러한 순환을 잘 보여주는 가장 핵심적 장소이자 소재였던 것이다. 또한 이 시기 그림에선 나무도 풀도 없고 바위 같은 암벽 덩어리만이 있는데, 이는 물의 순환성에 더욱 초점을 맞추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그림 속 바위의 마티에르는 종이 죽 같은 것으로 그 질감을 표현해왔다.

그의 그림들은 모티브 측면에서 전통회화 이미지를 보여준다. 이런 그림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취향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테면, ‘나는 이런 그림을 좋아해!’라는 식이다. 그러니 비평은 필요가 없다. 반면에 ‘이런 그림은 내 취향이 아니야! 현대이후 급진적 의식에 의해 예술의 존재방식 자체가 근본적으로 바뀌었는데 아직도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어?’ 이렇게 단정하고 작품의 결을 깊이 들여다보지 않는 관점이 있다. 아마도 모티브부터 양식화된 전통회화 스타일일 뿐이라는 선입견 때문이지 않나 싶다. 우리나라 미술계의 특유의 현상이지만, 조광기가 20대 부터 50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작가의 길을 걸어왔어도 그림에 대한 비평적 담론이 부재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광기는 그동안 유행에 따라 서양현대미술을 추종하는 풍토 속에서도 우직하게 옛 사상과 그림에서 새 길을 찾아왔다. 법고(法古)로 창신(創新)을 추구한 것이다.
법고와 창신은 실제로는 배리적 모순 관계이다. 그래서 옛 것을 법으로 삼는다면서 옛 것에 머물러 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아주 드물게는 옛 것으로부터 새 길을 얻기도 한다. 이 길은 ‘반은 배우고 반은 버린다(學一半撇一半, 청대 ’정섭‘의 말)’는 태도로 요약할 수 있는데, 실제로 겸재 정선의 그림이나 세잔의 그림에서 이를 실감할 수 있다. 원효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개시개비(皆是皆非, 모두 옳지도 모두 아니지도 않은)’정신이다. 그러니 버린 부분은 온전히 스스로 채워야 하며, 그것이 새로운 예술의 지평을 연다.

겸재가 30대에 그린 첫 금강산 그림인 『신묘년풍악도첩』 속 그림들은 정묘한 북화적 요소와 함께 미불산수화의 영향이 보이는 남화적 요소가 혼재하는 데, 특히 이 시기는 만년 그림에 비하면 형사 위주의 필치로 그린 특색을 보여준다. 그런데 50대 후반이후 『내연삼용추도』부터, 특히 간송미술관 소장의 『청풍계도』에 이르면 화폭의 구성면에서나 필치 면에서나 독자적 화풍을 성취한 그림을 보여 준다.

세잔은 푸생의 고전주의 화풍과 인상주의의 모순적 시지각을 해결하기 위해 고투했다. 세잔 이전까지 수백 년 간 지속된 명암법에 의한 입체감과 투시 원근법으로 공간감을 구축해온 종래의 고전주의적 표현 방식을 버리는 대신, 인상파의 색채로써 고전적 형태를 구축하는, 어떻게 보면 모순적인 어법으로 시지각의 새 지평을 여는 과정이 ‘세잔의 사과’이자 ‘생트 빅투아르산’ 연작이다. 이처럼 세잔은 수 백 년 전통과 단절하고 새로운 미의 지평을 열었다.

한·중·일에서 문인화는 각각 다른 특질을 보여주지만, 그림의 요체를 ‘형사에 있지 않고(不在形似)’ ‘사의寫意,’ 즉 뜻을 옮기는 데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명대의 서위(徐渭)는 어떤 제화시에서 “형사를 구하지 않고 생운(生韻)을 구하나니, 뿌리나 잎은 다 내 다섯 손가락이 기른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이런 의미에서의 ‘사의’는 흔히 잘못 생각하듯 관념적 개념이 아니라 필묵의 기교에서 생성될 수 있는 ‘살아 있는 리듬’과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달리 추사 김정희는 청대 화가 ‘장경(張庚)’의 말을 빌려, “대개 (그림의) 품격이 높고 낮음은 그 솜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뜻에 있으니, 그 뜻을 아는 사람은 비록 청록이니 이금 어느 색채를 써도 좋다”고 보았다. 서위는 솜씨로 형사와 다른 세계를 나타낼 수 있다고 보았지만 추사는 사의를 그 솜씨보다 높은 단계로 상정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추사의 서화를 깊이 들여다보면 솜씨를 배제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림의 요체가 형사에 있지 않다는 서위나 추사의 말은 형사가 목적이 아니란 뜻이지 형사를 부정하는 의미가 아니다. 즉 이들이 말하는 전통회화의 본질은 형사, 즉 재현에 있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형사를 떠나서도 있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중국의 근현대화가인 치바이스(齊白石)는 닮지 않은 것은 ‘세상을 속이는 것이고(欺世),’ 지나치게 닮은 것은 ‘세상에 아부하는 것(媚世)’이라 했다. 그래서 좋은 그림은 ‘닮음과 닮지 않음의 사이(似與不似之間)’에 있다는 말도 다시 음미할 수 있다.

조광기의 이번 개인전 작품 중에는 이전 그림에 비해 주목할 만한 어떤 '결'을 보여주는 작품이 있다. 이번에 새롭게 시도한 짙은 청색조의 폭포 그림 중 토왕성 폭포와 울산 바위 등을 짙은 청색과 흰색의 대비로 간결하게 표현했다. 그런데 두 그림은 회화의 섬세한 지층이 드러나는 고투의 과정이 보였고, 이 같은 오랜 회화적 도전 끝에서야 도달할 수 있는 접점으로 인해 어떤 맑음과 깊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울산 바위를 그린 부분의 하단 부분은 마치 생명주(비단)에다 묽은 아교를 바르고 담채를 올린 격조 높은 전통회화 특유의 담채를 연상케 하면서도 깊고 푸른 물속을 들여다보는 듯했다.

이는 전통 수묵화의 주된 특성 중 하나인 선적, 필치적 특성, 즉 ‘필법’적 특성이 아니라 먹의 농담, 즉 ‘묵법’적 요소와 유사성을 드러낸다. 즉 무수한 담묵을 겹쳐 먹의 층을 쌓아 올리는 일종의 적묵법적 특질이다. 그런데도 먹과는 다른 재료와 작가 특유의 다른 호흡, 다른 기법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한다. 작가는 이런 그림을 시도하게 된 이유를 여태껏 자신이 그림을 가지고 말해 온 비유적 설명이 죽은 지식의 나열임을 깨닫게 되면서부터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회화적 층에서 대상적 실경이 아닌 자신을 내면을 들여다보는 거울 같은 감응이 생겨난다.

우리의 옛 그림은 오늘의 미술에 대해 결정적인 해답을 주지 않는다. 옛 그림의 가치는 오늘 그림에 정답을 제공해서가 아니라 통찰과 자극을 주기에 유의미하다. 추구해야할 것은 외형적 이미지가 아니다. 이는 오히려 걷어내고 버려야할 ‘투식(套式)’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문맥에서 ‘사의’의 참뜻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조광기의 블루 시리즈 이전 그림에서 볼 수 있는 패턴화되어 보이기까지 하는 익숙한 이미지나 마티에르 기법에 대해 비평적 논의의 대상으로 삼지 않은 것은 회화적 이미지와 어법의 관성과 상관이 있다.
비평은 문화적 콘텍스트 속에서 작품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다. 그러니 비평적 담론은 작가에게도 자양분이 될 수 있고, 향수자에게도 반드시 필요하다. 작가의 작품 못지않게 비평적 역할이 큰 것이다. 언젠가 한층 더 깊은 세계로 진입한 그의 예술적 성취가 우리 미술계의 귀한 자산으로서 시각예술의 참된 가치를 일깨우는 날이 오리라는 기대도 작가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버지가 건네는 조용한 말들-윤제
아버지가 건네는 조용한 말들.......
조광기 전시회에 부쳐 

포천아트밸리 예술감독 윤 제

조광기를 처음 알게 된 때는 그가 대학 1학년일 때이다. 그 이후에는 드문드문 보게 되었지만, 그가 그로부터 20여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거의 그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한사람으로서의 그의 모습은 주위와 함께 어울리고 함께 살아가는 소박한 삶을 즐거워했고 그의 주위와 때로는 함께 기뻐하고 때로는 함께 슬퍼하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그런 사람으로 기억한다. 이제는 한가정의 가장이 된 그의 삶은 그 가족과 더불어 단출한 가운데 그 의미를 새겨 가리라.

그는 그의 세상의 중심을, 자기중심을 철저히 그의 삶 중앙에 새겨 넣고 있지 않은가 싶다. 미술제도권 안에서 한 작가라는, 엘리트주의 같은 프로근성으로 설정하는 것을 무엇인가 괴리감이 있지 않았나하며 반문을 하였을지도 모른다. 작품의 브랜드화라던 지, 작가의 캐릭터 화된 모습들은 일종에 스포트라이트만을 바라보는 한 순간의 계산된 설정은 마치 연예인들의 그것들과 다르지 않은가? 평생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이지, 한순간의 정점을 바라보고 예술을 행하는 것인지? 한 번 숙고해봐야 할 대목이다. 삶의 스펙트럼을 하나하나 바라보면서 인생전반을 아우르는 예술작업은 정녕 대가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작가들 중에는 개인적 삶의 궤적과 작가적 삶의 궤적이 많이 일치하지 못할지언정, 작가의 모습과 삶의 모습이 따로 노는 것 처럼 이율배반적인 모순은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제도권의 미술이라는 것은 시대나 특정 장르의 형식들이 우선시 되다보니 작가의 작품은 그러한 문맥위에 걸리고 작가는 그것을 생산하는 생산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고루한 생각일지라도 예술작품이라는 것이 시대의 얼굴이나 상업적인 가치만을 따지기 보다는 한 개인의 인생관, 세계관을 나타내는 것만으로 그 가치는 소용이 없을까?

상업적 미술이 어느 때보다 활달한 요사이 미술 판에서나 대학교 등등에서 보면 모든 가치는 속칭 잘나가다는 작가의 작업은 미술사적이거나 시대상을 나타내고 있는 부분도 사실 그리 많지 않다. 그것들의 의미는 그야말로 잘 팔리는 것만으로 가늠하면 될 것이다. 그것들이 이시대의 지표나 미술사적인 의미까지 함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 장황해진 말들을 일단락 시키지자면, 그린다는 행위와 작가라는 입장은 일반화되어 인사동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또 다른 의미와 가치들을 위해 계속 지속되어야한다

조광기 그는 지금 인사동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부류의 작가는 아니다. 최고의 미술대학을 나와 당연하게 미술판에 있어야 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자신들의 삶의 영역은 그것들과 거리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예술가가 아니라는 말은 모순이다. 미술판이 아닌 곳에서 끊임없이 자기의 세계관에 대하여 고민하고 그것을 표현애 내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길이다. 그는 그가 속한 위치에서 중앙의 제도권으로 움직이기 보다는 그가 원했던 철학적인 어느 한 정점에서, 그것을 위해 내재된 희망과 아니면 나약한 매너리즘의 양면성을 가지고 그렇게 그만의 시간 속에 있었다. 

그의 대학교 친구들은 고루한 선배들의 작업세계들을 반대하고 보다 적극적이고 과감한 형식의 미술을 찾아 그들만의 보금자리를 떠났다. 그당시 미술은 형이상학적인(결코 서구의 형이상학이 아닌 기득권자들의 장막으로만 이용되는) 스승들의 권위와 그것들과의 관계를 청산한 민중미술 밖에는 우리나라에는 어느 다른 형식의 미술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친구들은 매체와 퍼포먼스 등등의 제3의 표현 방식을 찾아 나섰지만 그에게는 그것들조차 낯설고 자기가 알고 있는 세계관이나 판단할 수 있는 가치관들과는 거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것들 보다 그가 선택한 쪽은 우리 역사의 문맥등과 같은 오랜 세월 속에서 이해되는 것이나, 고유한정서의 것 같은 쪽으로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가 판단하기에 그의 친구들의 퍼포먼스나 매체 작업들은 단지 미술판 안에서의 하나의 이벤트내지는 충격적으로 자기를 알리는 액션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우리는 언제인지 모르지만 주체의 형성이 어느시기에 정점이 된다면 그정점의 가치판단으로 그 이후의 세계관은 새로운 가치관에 의해 범용될 때까지 스스로 싸우고 방어하고 함락당하는 결렬한 작용이 있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모르게 새로운 것들에게 매우 많은 호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쉽사리 변화되고 따라가는 양떼 같은 면이 있다. 하지만 조광기의 일련의 작업들을 보면 그의 고집이 자신만의 세계관을 그것들과 유사한 유물이나 작업들을 함께 화면에 등장시켜 어렵고 거창하지 않고 쉽고 편안하게 그의 작업관을, 그의 세계관을 전달하려고 한다.

따라서 그의 작업에서 보이는 암석화나 이중섭의 작업 같은 것은 그의 작업에서 그가 보이려고 하는 세계에 길목에 있는 일종의 좌표인 셈이고 그것들로 인해 안내되는 그의 세계관은 앞서서 말한 소박한 자연관과 지금까지 연연히 이어지는 우리들의 동양적인 세계관이다. 언제나 자연과 함께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에 등한시 되었던 우리주변의 꽃과 나무 동물들에게서 살아있고 그리고 살아가는 경외심을 그는 놓치지 않는다. 매사에 감사하며 그것으로 충분한 일종의 종교적인 면을 그가 화면에서 보여주고 싶은 것이라. 작품은 거창한 시대의 담론이나 역사의 증언을 하기도 하지만, 사랑스런 아내와 자녀들에게 건네는 아버지의 말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가볍게 건네는 그 말 속에는 우주의 진리가, 자연의 신비가, 우리의 역사가 들어있는 것이다. 

보통의 작가들이 미술판을 염두에 놓고 작업을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이 주는 긍정적인 면인 없진 않으니깐, 하지만 역으로 그것이 가져다 두는 그늘을 한번 생각해보는 것도 필요하리라, 가령 이러한 것이다. 미술이 과연 직업적인 면으로써 작가의 생업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일생을 이어가게 하는 절대적인 가치는 될 수가 없다. 여기서는 한 번의 스포트라이트가 필요하다. 마치 인기절정의 가수를 꿈꾸는 피에로와 다르지 않다. 반면 그것들과 상관없이 삶 속에서 한 개인이 관통하고 있는 그만의 진리를 살아가며 일상의 전반적인 스펙트럼에서 보이는 한 작가의 모습은 너무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작가 조광기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한 미술작품이 가질 수 있는 미술적인 의미가 아니다. 한사람이, 한주체가 인생을 살아가며 스스로 소박하게 주위사람들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미술판에서 보이기에 한편으로는 서글픈 이야기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반가운 소식같은 것이다. 그의 끊임없는 작품 활동에 따따부따 말을 하기 보다는 조용히 그의 행보에 격려의 말 한마디가 필요한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