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정영한의 새로운 회화적 시도-역설적 감성코드의 메커니즘_윤우학<미술평론가>
정영한의 새로운 회화적 시도-역설적 감성코드의 메커니즘
 
  평면회화의 최근 방향은 사뭇 다양하고 흥미롭다. 
  특히 이미지를 다루는 형상회화의 경우는 대단히 복합적이다. 다른 매체와의 혼성은 물론, 매체에 대한 자의식이 방법론적으로 진보하여 여러 가지 재미있는 기술과 기교까지 더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회화적 숙명으로서의 ‘평면성’에 대한 단순한 검증이나 반성의 차원을 넘어 검증이나 반성 자체가 회화적 필연성을 보장하는 동시에 하나의 방법론으로서 자립하여 등장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에는 전통적 회화의 재료뿐 아니라 새로운 재료의 실험, 예컨대 사진과의 합성을 통해 이미지의 검증과 반성을 비교분석하는 일련의 흐름이 주류를 이루지만 한편에는 오히려 전통적인 재료를 보다 예민하게 사용하여 전통회화의 존재성을 극대화하는 경향도 동시에 존재한다.
  정영한의 회화는 바로 그 후자의 경향에 속한다. 그는 오일 페인팅과 아크릴 컬러를 혼용하여 이미지의 새로운 전개를 시도한 채 그 시도 자체가 하나의 회화적 감성으로 존재하게끔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사진영상처럼, 때로는 지극히 전통적인 유화적 감성의 그림으로 등장하여 도대체 회화가 이 시대에 있어서 무엇이며 그림은 어떻게 그려져야 하는지, 사진 같은 유화의 특징은 무엇이며 아크릭과의 혼성관계는?, 그리고 회화에 있어서 평면이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따위의 호기심과 의문을 거기에 자연스럽게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회화가 이러한 과제로 시종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작가적 발상이 처음부터 검증과 반성만을 목표로 시작되고 있지도 않지만 그러한 요소에 방법론적으로도 맹종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회화의 특징이 회화의 시스템과 그 메커니즘에 대한 자의식으로 꾸려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이다. 정영한의 회화도 그러한 자의식을 바탕으로 깔고 있지만 그 방법론적인 처리 과정에서 스스로의 성격과 개성을 농축시켜 오히려 회화 고유의 맛을 한껏 더 높여 나갔다는데 우선적인 특징이 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종래의 회화에서 극단적으로 기피하던 일련의 일루전적 가상성을 훨씬 증폭시키며 회화의 상상력을 부추겨 회화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 역설의 강조를 거기에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해경의 수평적 구도를 등장시켜 평면 특유의 공간감을 확장시키는 것은 물론, 화면의 전후좌우에 무중력한(초중력적인) 꽃잎의 등장 및 낙하장면을 삼투시켜 공간의 확장뿐 아니라 작가의 붓끝이 지연시키는 시간의 늘어짐(연장)을 관객에게 시각적으로 직접 맛보게 하는, 시공간의 다이내믹한 조형적 해석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언뜻 초현실주의처럼 보일지 모르나 전혀 다른 차원의 양식적 확장과 해석이 가능할 따름의 장면이다. 전면으로 향해 반복적으로 밀려오는 파도와 아래쪽으로 하염없이 낙하하는 꽃잎의 초중력적 위상관계는 숭고미와 우미의 긴장관계와 더불어 초현실주의의 돌발적 의식을 뛰어 넘어 보다 복합적인 회화세계의 출현을 예고하고 있다. 뿐더러 붓질의 균질성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부분, 사진과 같은 표면성을 일부러 조장 하는듯한 전개방식은 실물과 가상공간과의 대립적 공존이라는 모순율을 불러일으킨 채 또 다른 상상력을 극대화시켜 가기도 한다.
  따라서 정영한의 회화는 과거의 전통적인 회화의 약점으로 부각된 일루저니즘을 오히려 최대한 활용하며, 그것조차도 지극히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으로 살아남게 하여 그것을 현대회화의 자의식적 문맥에 새롭게 코드를 맞춘, 말 그대로 역설적 응용코드의 메커니즘을 통해 우리에게 새로운 감성의 시대를 조그맣게 열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윤우학<미술평론가>

실재와 이미지, 매체를 통해본 바다_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실재와 이미지, 매체를 통해본 바다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픽처레스크(picturesque), 마치 그림 같은 풍경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이 말 속에는 자연에 대한 현대인의 왜곡된 관념이 내재돼 있으며, 실재와 이로부터 비롯된 이미지와의 전도된 관계가 들어 있다. 즉 풍경이 그림의 기준이 되는 대신에 오히려 그림이 풍경의 기준이 된다. 마찬가지로 실재가 이미지의 근거가 되는 대신에 오히려 이미지가 실재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엄밀하게 말해 이 말 속에는 그림으로서의 이미지만 있고, 실재로서의 풍경은 없다. 그림을 통해 알려진 이미지, 학습된 이미지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실재하는 풍경이란 사실상 그것을 알아볼만한 근거가 없는, 한낱 낯설고 생소한 추상적인 기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초의 이미지는 실재로부터 유래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가 실재와 갖는 유기적인 관계는 단지 그 뿐이다. 일단 실재로부터 비롯된 그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를 낳게 되고, 재차 그 이미지는 또 다른 이미지를 낳게 된다. 이렇게 이미지는 실재로부터 멀어지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실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순수한 이미지로서 남게 된다. 원본이 없는 사본, 애초에 그것이 유래한 원본이 없으므로 사본이라고 말하기조차 어려운 사본, 자족적인 사본이 된다.

이는 현대인의 자연에 대한 관념을 말해준다. 즉 그에게 자연은 실재보다도 이미지로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 자연의 이미지에 더 길들여져 있으며, 심지어는 이를 더 친근하게 느끼기조차 한다. 그에게 자연은 수조 속에 들어 있는 플라스틱 물레방아로서 다가오고, TV의 연속극이나 사극에 이따금씩 등장하는 달 그림으로서 어필된다. 그는 내셔널지오그래픽 프로에 나오는 원시림과 야생의 세계에 감동하고, 아이맥스관에서 본 나이아가라 폭포의 장관에 압도당한다. 사진 화보 속에 등장하는 자연은 유원지나 관광지에서의 온갖 번잡함을 잊게 해주며, 자질구레한 일상사에 치인 마음을 위무해준다. 레이저프린터로 출력해낸 인공적인 색채와 형태가 적절히 조합된 자연 이미지에서 받는 쾌감은 자연 그 자체의 칙칙한 색채와 우연한 형태와는 비교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연 속에서 휴식을 취하는 대신에 서재에 걸려 있는 사진을 올려다보거나, 덜컹거리는 지하철 속에서 지갑 속에 간직한 풍경 사진을 설핏 보는 것만으로도 명상과 상상과 환상 속에 빠지며, 기꺼이 이를 즐긴다. 그렇다면 현대인은 과연 자연, 풍경, 실재를 상실한 것일까. 그에게 자연은 원형이나 신화와 같은 아득한 전설 이상의 실재감을 줄 수는 없는 것일까. 
정영한의 작업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맞닿아 있다. 현대인이 자연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전재하고서 그 흔적들을 가시화하는 한편, 또한 그렇게 상실된 자연의 실재감을 복원하려 한다.

정영한의 근작의 소재는 바다이다. 사람도 사물도 없는 텅 빈 화면에 단지 바다의 이미지만이 그려져 있다. 화면 아래쪽으로 뭍이 살짝 드러나 있기도 하고, 화면 위쪽으로 하늘이 잇대어져 있기도 하고, 수면만이 화면 전체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손에 잡힐 듯 사실적으로 그려진 바다는 그러나 손에 잡을 수는 없는, 가 닿을 수는 없는 아득하고 먼 느낌을 주며 눈앞에 펼쳐져 있다. 하얗게 포말을 일으키며 흩어지는 파도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그림 뒤쪽으로 이어지면서 화면에 원근감을 더하는 동안에, 잔잔한 수면은 시야가 미치지 못하는 바다 저편으로 멀어지다가 사라진다. 이렇듯 텅 빈 바다는 원시적이고 원초적이며, 바다로 명명되기 이전의 원형적인 바다를 우리로 하여금 대면케 한다. 여기서 시야가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인식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며, 바다 저편으로 사라진다는 것은 인식 저편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야가 끝나는 자리인 수평선은 인식의 이편과 저편을 가름하는 경계이다. 이러한 경계에 대한 인식이 바다로 하여금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한다. 이는 시간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는 덧없는 것들에 맞춰진 낭만주의자의 정조를 불러일으키고, 아득하고 먼 미지의 것들에 맞춰진 초현실주의자의 비전에 공감하게 한다.

그러나 이처럼 인식의 침해를 거부하던 바다가 뒤로 물러나서 그림의 전체를 조망하게 되자, 인식을 건드리고 자극하기 시작한다. 바다가 조금씩 어긋나게 그려져 있으며, 지나칠 만큼 선명하고 투명하게 그려져 있다. 마치 스톱모션을 보는 듯 정적이고 차갑고 편평하게 그려져 있는 것이다. 손에 잡힐 듯한 원근적 실재감에도 불구하고 정작 어떠한 물질감이나 두께도 느낄 수 없으며, 특히 그림을 바로 앞에서 대면했었을 때의 어떠한 배후적인 깊이도 느껴지지가 않는다. 마치 다른 것들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의 지속적인 맥락으로부터 동떨어져 나온듯한 이미지, 그 전체적인 맥락으로부터 단절돼 나온듯한 이미지를 보는 것 같다. 
원시적인 생명력으로 낭만주의적 정조를 불러일으키던 바다가 이렇듯 갑자기 이질적이고 낯선 속성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 속성은 바다의 이면과 배후와 깊이로부터 우러나온 것이기보다는 그 표면인상에서 기인하고 있다. 그림이 편평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 생리는 자연 자체를 떠올리게 하기보다는, 카메라라는 매체의 눈을 통해본 자연의 이미지, 레이저프린터라는 매체를 통해 한차례 걸러진 자연의 이미지, 컴퓨터라는 매체를 통해서 프로그래밍 된 자연의 이미지에 가깝다.

이런 인공적인 느낌은 수십 개의 바다 그림들을 하나의 화면에다가 조합해놓은, 외관상으론 스테레오타입의 동어 반복적인 어법을 보는 것 같은, 일종의 모자이크 그림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다른 그림들에 비해 작가의 의도가 비교적 선명하게 반영돼 있는 이 그림은 마치 수십 개의 모니터를 통해 똑같은 화면을 내보내는 멀티비전을 보는 것 같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멀티비전에 방영된 낱낱의 화면들이 그 질적인 차이를 갖고 있지 않은 것에 비해, 정영한의 그림에서는 수평선의 높낮이를 달리 하는 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 물론 이 변화는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멀티비전과는 다른 차이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멀티비전과 닮은 동질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니까 미묘한 차이를 보이는 화면들을 병치시킴으로써 오히려 멀티비전 고유의 인공적인 느낌을 강화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정영한은 각종 매체에 의해 자연의 이미지에 길들여진 현대인의 생리를, 그리고 그 매체에 의해 해석된 자연의 이미지에 이끌리는 현대인의 관성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는 그대로 ‘매체가 달라지면, 메시지도 달라진다.’는 마셜 맥루언의 전언과도 통한다는 것이다. 즉 자연이 매체의 인공적인 눈에 포착된다는 것(인공적인 프로그램을 통과한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자연이 매체에 의해 해석된다는 것이며, 이로 인해 상당정도의 실재감이 상실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인의 생리가 이처럼 매체가 전송해준 이미지, 매체에 의해 해석되고 변질된 이미지를 자연 대신에 받아들이고 향유하는 한편, 자연과 이미지를 동일시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앞서의 모자이크 바다 그림과 마찬가지로 정영한의 여타의 바다 그림들의 이면에는 이렇듯 매체가 개입된 흔적이 느껴지고, 매체에 의해 조작된 이미지가 느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작가가 이를 위해 어떠한 매체의 도움 없이(예컨대 사진을 본떠 그린다든가, 슬라이드를 비쳐놓고 그 그림자 위에 덧그린다든가, 사실적인 묘사를 위해 스프레이를 도입한다든가 하는 식의) 순수하게 회화적인 과정만을 통해서 이러한 자연과 이미지, 실재와 이미지와의 전도된 관계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방법이 사실적인 만큼(실재를 빼닮은 만큼) 오히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는 점이다. 
정영한의 작업에서의 사실적인 묘사는 재현적인 어법과의 미묘한 관계를 드러낸다. 그러니까 한편으론 재현적인 어법을 취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이로부터 빗겨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일종의 트릭을 도입한다는 점에서 그 생리가 초현실주의자의 그것과 닮아 있다. 그러나 이때의 트릭은 환상이나 환영 등의 비현실적인 주제보다는 자연에 대한 현대인의 생리와 관성을 드러내기 위한 현실적인 주제에 맞닿아 있다. 따라서 그의 바다 그림은 내 손안의 한 장의 바다 사진과 믹스되고, 내가 대면하고 있는 모니터 속의 바다와 오버랩 되면서, 실재와 이미지와의 관계를 곱씹게 한다.

우리시대의 사랑과 꿈,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예술의 역할_하계훈(미술평론가)
우리시대의 사랑과 꿈,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하는 예술의 역할

하계훈(미술평론가)

정영한의 작품에는 사실적 재현 방식으로 그려진 꽃이나 과일, 또는 하늘과 바다 등의 이미지가 화면을 압도적으로 가득 채우고 있다. 꽃잎 하나하나와 껍질의 신선도까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랗게 그려진 꽃과 과일은 화려하고 탐스럽게 화면을 지배하고 있어서 손을 뻗으면 만져질 것 같고, 배경의 바다와 하늘은 밀려드는 파도 소리와 불어오는 공기의 냄새가 화면 밖으로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시각과 청각 뿐 아니라 후각까지도 활짝 열리게 만들어주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마치 사진처럼 사실적으로 묘사되어서 강한 설득력을 가지고 우리들의 감각 경험에 호소하여 작가가 전해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정영한의 작품을 살펴볼 때, 우리는 사실적이고 재현적인 이미지와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몇몇 단어들이 같은 화면 안에 공존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의 대상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분명한 이미지 위에 굵고 명암이나 색상을 달리하면서 선명한 글씨체로 새겨진, 제목을 가장한 추상적 단어들은 그 뒤에 배경처럼 드러나는 사과, 바다, 꽃과 같은 자연의 요소들이 지닌 사물의 속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들이며, 그것들은 오히려 대조(contrast)를 이룸으로써 역설적이게도 이미지는 그 단어에 함축된 의미와 정서를 강조해주고, 단어는 다시 이미지의 사실적 형태와 감각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조형적으로도 평면적인 글씨체와 입체적인 이미지는 하나로 어우러지기보다는 각각의 요소가 서로의 속성을 도드라지게 해주는, 일종의 상호 촉진작용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정영한은 이러한 이미지들과 단어들을 통해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 걸까? 작가는 지난 몇 해 동안 <우리 시대의 신화 - 아이콘>, <이미지, 시대의 단상>과 같은 제목으로 일련의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신화라고 하면 우리들은 쉽게 고대 그리스나 우리나라의 단군의 시대와 같이 아득하게 먼 과거의 시간을 떠올리지만, 작가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도 그리스 신화나 단군신화의 시대처럼 우리의 의식과 사고를 지배하는 신화적 우상이 여전히 존재함을 일깨워주고자 하고 있다. 작가는 이러한 메시지를 좀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으로 확대된 이미지와 그러한 이미지들을 사실적이고 돌발적이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는 북유럽 낭만주의나 초현실주의 작품들을 떠올리게 해주는 복합적인 방법으로 묘사하고, 다시 그러한 이미지 위에 추상적인 개념을 담은 단어들을 제시한 작품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 시대의 단상> 시리즈에서 작가가 제시하는 화면 안에는 사실적인 사물의 이미지와 함께 lost, dream, memory, love와 같은 단어들이 커다랗게 쓰여 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단어들은 이미지를 배경으로 레터링(lettering)되어 있다. 이러한 단어들은 대부분 회고적이고 사유적이다. 작가는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사유하면서 우리의 의식과 감성을 지배하는 어떤 것, 그러한 것을 우리들에게 다시 상기시켜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꿈과 기억, 사랑과 같은 정신작용과 감정 상태는 시대를 관통하면서 인간의 삶에서 중심적인 화두로 자리잡아왔으며 그러한 기능과 역할은 시대의 흐름과 관계없이 크게 변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산업사회와 후기산업사회를 넘어 정보화 사회를 사는 우리들에게 이러한 개념들은 점차 잃어버린(lost) 것이고 되찾고 싶은 것, 혹은 과거와 다른 형태로 새로운 세대에게 받아들여지는 정서가 되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상실감으로부터 구원을 받기 위하여 어쩌면 우리에게는 신화의 시대에 우리가 정신적으로 의지하던 아이콘(icon)을 다시 소환하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정영한은 동시대의 의식과 감수성이, 지나간 시대의 그것들과 부정교합을 이루는 현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다시 그것을 하나로 교합하고 소통시키려하는 행위로서 이러한 작품을 제작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용면에서 이러한 교합과 소통을 지향하는 작가는 이러한 작품들을 일정 규격과 형식의 프레임에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프레임은 작가가 청년시절을 보내던 우리사회에서, 당시로서는 시대를 선도하는 지식과 정보 제공의 대표적인 매체 가운데 하나인 잡지의 형식을 띠고 있다. 정영한의 작품들은 그 가운데에도 (지금은 전자출판의 시대를 맞아 지면 출간이 상당한 정도로 위축되었겠지만) 영어권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며 발간되던 <Time>지(誌)나 <National Geographic>지의 표지를 연상하게 해준다. 이러한 정영한의 작품은 작가와 시대적 경험을 공유하는 관람자들에게는 작품의 내용에 접근하기 이전에 프레임 그 자체로서 이미 작가가 전달하는 메시지의 신뢰성과 당위성을 어렵지 않게 받아들이게 만들어준다.
마치 오늘날 스마트 폰과 SNS의 시대를 사는 세대들이 이러한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정보를 별다른 검증 없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과거 <Time>지나 <National Geographic>지와 같은 잡지의 세대가 표지의 제목이나 그와 연관된 기사를 신뢰하고 추종하는 태도는 어쩌면 그것이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신화일 수도 있는 것이다. 작가는 이처럼 우리 삶의 곳곳에 우리가 때때로 감각과 의식을 기댈 수 있는 것, 즉 각각의 시대의 신화가 존재함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 
작가가 의도하였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정영한의 작품은 작가의 시대에 커다란 영향력을 갖던 대표적인 미디어로서의 잡지와 사회적 설득과 마케팅 전략의 도구로서의 그러한 잡지(화면)에 담긴 이미지와 단어들이 그 시대의 가치와 감수성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지금 이 시대의 정신과 물질적 가치관을 대변하고 있지 않다는 역설을 강조함으로써 우리 시대의 예술의 역할, 즉 사랑과 꿈, 그리고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예술의 역할에 대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정영한의 바다와 꽃, 그 페스티쉬에 관하여_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문학박사 임창섭
정영한의 바다와 꽃, 그 페스티쉬에 관하여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연구실장 ․ 문학박사 임창섭

정영한의 작품은 파도치는 바다를 배경으로 꽃이나 꽃잎을 그린 단순한 화면으로 구성되어있다. 암석에 부서지는 파도 혹은 수평선에서 밀려오는 파도를 배경으로 그린 꽃은 무궁화, 나리, 국화 등 종류가 다양하다. 여러 송이 꽃 대신에 오직 한 송이만 그리고, 혹은 몇 개의 꽃잎이 공간에 떨어지는 장면을 그린다. 대신에 기사내용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구겨진 신문을 그린 작품도 있다. 그의 그림에서 유치진의 시 ‘깃발’에 나오는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라는 시구가 떠오른다. 그의 그림에서 소리 없는 텅 빈 패러디의 고요를 발견한다. 그리고 지나갔다고 여겼던 포스트모더니즘이 머리에 맴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서구문화 전 장르에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가 1960년대였다. 그 광풍은 80년대 초에 이르러서야 우리나라에 불어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80년 중엽부터 90년대 초까지 뜨듯한 논쟁이 벌어졌었다. 하지만, 이천년에 이르러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억조차 없이 사라져버렸고 지금은 그런 게 있었지 하는 정도가 되었다. 물론 서구에서도, 60년대 이후에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있었지만, 더 이상 진전된 논의가 없었음은 물론이고, 90년대 말에 들어서서는 그 효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아마도 변화되는 자신들의 사회를 이 용어로는 더 이상 규명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을 적용해보기도 전에 사라졌다고 판단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생소하고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당시 우리사회는 포스트모던 사회로 진입하기 이전의 상태였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태생 자체가 모더니즘 반발로 등장한 용어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생명력 없고, 억압적이며, 규범적이고 물화된 특히나 그들만을 위한, 그들에 의한,  그들만의 이해에 따라 탄생한 모델이 모더니즘이라고 느낀 신세대가 파격적이고 전투적인 새로운 스타일을 만든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이었던 것이다. 이런 문화경향을 발생시킨 주요 원인은 어떤 중요한 것들의 경계와 구분이 사라진 사회, 고급과 저급 혹은 통속문화 사이에 존재하던 차별이 사라진 것에 있었고, 이러한 문화경향은 신-밀레니엄 시대에 들어서서야 우리가 직접 우리사회에서 목격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사회경향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단순하고 유치한 TV광고, 선정적인 노출을 한 모델사진으로 가득한 잡지, 펑크와 하드-락과 랩으로 대변되는 홍대 앞 클럽들, 심심파적 연예인들의 개인사를 들추는 방송, B급 영화 혹은 스릴러 물, 코리아 팝으로 불리는 미술작품, 캐릭터를 도입한 그림, 뒤섞인 문학 장르들. 이러한 경향이 넘치는 사회, 이런 것들로 구성된 나라에 우리는 지금 깊이 빠져있다. 그 원인을 몇 마디로 해석하기는 어렵겠지만, 일회적인 의미와 건조한 웃음, 스쳐지나가는 듯한 무관심, 현실과 가상의 혼동이 넘치는 사회에 우리가 속해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미술이 자연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모방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둘러싸였던 순수예술을 걷어차 버린 세월이 벌써 수백 년이 넘었다. 그래도 여전히 미술이 혹은 현대미술이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우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요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에서 느껴지는 고요가 함유된 정영한 작품 역시 우리사회의 현재를  담아내고 있는 매체 중에 하나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서 21세기 지금과 우리사회의 현상과 포스트모더니즘을 찾아내고 읽어내고 해석하는 것이 전혀 틀리지 않는 일이 될 것이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바다와 꽃, 줄기도 잎사귀도 없는 한 송이 꽃이 그저 바다를 배경으로 화면에 올라와 있는 장면은 어떤 시각적 착각을 강요하거나, 새로운 철학이나 난해한 언술을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불과 십수 년 전만하더라도, 전문적 철학적 언술과 정치적 혹은 사회학적 이론과 문학비평을 도용한 언술들로 둘러싸였을 작품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난다. 지금 우리는 예전의 철학적 혹은 사회적, 정치적 언술들에 대한 구분과 경계가 무의미함을 깨달은 것은 물론이고, 최소한의 관심조차 갖지 않는 세대이다. 우리는 과거의 가치에 대한 전면적인 비웃음으로 일관하는 세대이기에 자신의 작품에 그런 언술을 기재할 용의도, 여타의 작품에서 그런 난해한 언술을 읽어낼 의지도 없다. 이런 점에서 정영한의 작품은 소위 포스트모더니즘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그릇처럼 여기게 한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우리사회의 문화현상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들은 지금 실내장식이나 건물 디자인뿐만 아니라 영화, 음악, TV광고, 미술 등 각 장르 사이의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수없이 보고 있다. 패션 잡지와 비평 전문지 사이의 무-간격, 존재론적 형이상학에 대한 무시, 점점 과격해지는 감정 노출, 신세대의 집단적인 절망과 직접적인 행동, 과도한 수사학의 사용, 표피적 의미생산의 증식, 한계를 모르는 상품 물신주의 등등이다. 또한 유명스타의 스타일에 대한 맹목적 추종, 문화적 정치적 실존적 파편화의 과정과 그 위기, 주체의 탈-중심과 상실, 대서사에 대한 불신, 의미의 파괴와 복합, 문화적 질서의 붕괴, 마이크로 테크놀러지의 과도한 기능과 악-영향, 미디어로 향한 사회경제적 전도, 극한의 소비주의와 새로운 다국적 관계의 생성과 소멸.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 이런 현상들은, 지금은 효력을 상실한 포스트모더니즘이지만, 포스트모던의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 혹은 일어났던 일이라고 이미 60년대 서구의 포스트모더니즘이 밝힌 것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에서야 이런 사회 속에서 살고 있고, 소위 포스트모던 사회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바다의 광활함과 꽃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거나, 화면의 구성과 조형의 숨겨진 무언가를 찾아내고자 그린 그림이라고 정영한의 작품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한다면, 어쩌면 그는 포스트모던 사회가 아니라 모던-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를 구시대 혹은 세상의 흐름을 거역하며 사는 사람으로 치부해버려야 할지 모른다. 하긴 그것도 자신의 삶의 방식이니까, 남들이 끼어들 여지는 없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정영한의 작품제작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의 그림은 세밀하게 소재를 관찰하여 실재처럼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더 찬찬히 살펴보면, 소위 ‘극사실주의’(Hyper-Realism) 작품과 정영한의 작품은 전혀 다르게 제작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극사실주의는 말 그대로 실재를 실재처럼, 어떻게 하면 실재처럼 착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만한 복제물을 만들어 내는가에 초점을 맞춘 사조(思潮)이다. 물론 이를 위한 미적, 철학적, 사상적 언술이 다양하게 생산되어있지만, 어쨌든 극사실주의는 실재를 그대로 베껴내는 것이다. 여기에 비해 정영한의 작품은 실재를 그린 것이 아니다. 실재라고 여기는 가공된 이미지를 차용해서 그 가상의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다. 실재와 비슷하지만 실재가 아닌 가상의 이미지를 가지고 자신의 방식대로 가공한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마치 플라톤이 분명히 어딘가에 실재의 이데아가 있다고 말한 것처럼, 정영한도 누군가의 머리 속에 존재할 이미지의 실재를 추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광고에서 사용하는 청량음료 병 따는 소리는 가공의 소리이다. 이 가공의 소리를 들어야 우리는 실재 병 따는 소리로 느낀다. 가공의 소리를 듣고서야 실재를 경험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내셔날 지오그래픽이란 잡지가 아프리카를 취재하고서는 사진 속에 있는 흑인을 실재보다 피부색을 더 검게 만들어서 잡지를 인쇄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TV드라마를 보면서 현실과 가상의 공간을 혼돈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이미지의 이미지를 재생산하기 위한 정영한의 기법은 화면에서 붓 자국을 없애는 것이다. 관객에게 최대한 붓 자국을 없앤  이미지를 제공하여 자신이 생산한 이미지를 믿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고 냉정하고 건조한 감정이 담긴 붓놀림으로 이미지를 그린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그가 그린 바다와 꽃은 실재가 아니라 이미지의 이미지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바다와 꽃을 그리고 있지만, 그의 작품에서 바다와 꽃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나 그 의미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에게는 바다와 꽃의 실재 이미지와 의미는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바다와 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그림을 그리는 정영한 그는 역사와 문화의 의미-암시에 대한 자신만의 유희를 어쩌면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포스트모더니즘을 시대의 구분개념이라고 주장한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은 이런 것을 ‘페스티쉬’(pastiche)라고 정의했다.   
‘혼성모방’이라고도 번역하는 페스티쉬는 ‘텅 빈-패러디’ 혹은 ‘공허한 복사물’로 어떤 종류의 기준이나 관습이 나타날 가망이 없는 문화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엄청나게 다양한 개인적 양식과 매너리즘으로 파편화되고 개별적인 양상을 보였던 모더니즘이 극한 다다르자 자신만의 개별적인 언어를 말하게 되었다. 또한 그들만의 독특한 암호나 개인방언이 등장하면서 마침내는 개개인이 모든 이에게 분리된 일종의 문화적 섬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러자 모더니즘은 그 자체는 사라지고 단지 스타일상 다양함과 이질성만 남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전화되고 만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정영한은 바다와 꽃을 소재로 하여 모더니즘의 모더니즘을 모방하고, 그것을 페스티쉬로 우리의 포스트모던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정영한은 모더니즘의 스타일을 모방하면서 바다와 꽃의 이미지와 이야기를 삭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어떤 풍자적이거나 희극적 요소를 제거한 중성적 성격으로 제시한다. 붓 자국 없는 바다와 꽃, 특히나 꽃을 한쪽 방향으로 길게 왜곡시킨 그의 페스티쉬 제작방법은 포스트모던 사회에 속한 우리에게 가공의 이미지를 던지는 것으로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미지 속에서 살면서 그 이미지에 대한 공허함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의 작품은 하나의 시각적 일깨움이 될지 모르겠다.  

일상의 신화_김영호 (미술평론가)
일상의 신화

김영호 (미술평론가)

I.
2016년 이후 정영한은 <이미지-시대의 단상> 이라는 새 제명으로 새로운 회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또한 2005년부터 10년 이상 지속해 오고 있는 <우리시대 신화> 시리즈 역시 새로운 차원의 조형 방법을 도입함으로써 변화를 가하고 있다. 20회를 맞는 이번 전시회가 주목되는 이유는 최근 시도하고 있는 작품의 변화상을 종합적으로 살펴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향후 그가 걷게 될 작품 세계의 향방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정영한이 한국 극사실 회화의 맥을 잇는 세대의 한사람이라는 점에서 그가 시도하는 실험의 내용을 분석하는 것은 나름 의미를 지닌다. 일견해 보자면 그의 변화는 표현 방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우선 <이미지-시대의 단상> 시리즈의 경우 시각 이미지를 드러내는 방식이 ‘타임즈’ 따위의 대중잡지 표지나 ‘모바일 폰’의 화면 디자인을 차용하고 있다. 한편 <우리시대 신화>의 후속 시리즈는 두 개의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디지털 카메라를 이용해 자신의 기존 작업 이미지를 촬영하고 컴퓨터로 편집한 후 프린터로 출력하는 작업이며, 또 하나는 역시 자신의 기존 작업에 표상된 특정 이미지를 3차원의 입체물로 모델링한 것이다. 작가는 전자와 후자에 각각 <Beyond the Myth>와 <Trans the Myth>라는 제명을 붙여 놓았다. 이상과 같은 두 그룹의 실험은 극사실 회화를 포함한 동시대의 시각문화 전반에서 제기되고 있는 원본과 복제, 실재와 허상 따위의 개념에 대한 비평적 성찰을 요구한다.            

II.
<이미지-시대의 단상>은 이미지와 단어를 화면에 함께 조합해 놓은 신작 시리즈다. 화면에 극사실적 기법으로 그려진 자연이나 사물들은 추상적 개념의 문자와 서로 어우러지면서 보는 이들에게 새로운 시각상(visual image)을 제공해 준다. 이 신작 시리즈에서 작가가 힘주어 내놓은 단어는 ‘상실(LOST)’이다. 의미론적 차원에서 상실이란 잃어버린 어떤 대상을 전제하는 문자라는 점에서 그의 그림은 ‘회복(get back)’을 원하는 작가의 의도를 암묵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역설적 의미가 생겨나게 되는 것은 문자와 함께 그려진 극사실적 이미지의 시각적 아우라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정영한의 캔버스에 그려진 상실의 이미지는 섬세하면서 찬란하고 아름답다. 남다르게 치밀한 성품의 작가는 회복의 대상으로 제시한 추상적 개념의 문자를 일곱 개의 작품에 저마다 제시하고 각각의 하단에 다음과 같은 텍스트를 반복적으로 추가해 놓았다 : “Must get back!” 
         
<이미지-시대의 단상> 시리즈에서 정영한이 채택한 일곱 개의 문자는 기억(MEMORY), 로맨스(ROMANCE), 시간(TIME), 희망(HOPE), 꿈(DREAM), 사랑(LOVE), 그리고 환상(FANTASY)이다. 이상적 가치가 고갈되어가는 현대사회에서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단어들이다. 고전주의에서 낭만주의에 이르는 시대를 풍미했던 단어들이었지만 자본과 대중문화가 지배하는 근대주의 이후 도전받기 시작해 현대에 이르러 변질되어버린 개념들이다. 1987년 발표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가 베스트 셀러가 된 이후, 우리는 바야흐로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잃어버린 가치들을 찾아 나선 작가의 탐험은 캔버스라는 사각의 공간에 머무르지 않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작가의 화면 구성방식은 2016년에 처음 도입한 대중잡지 ‘타임즈’의 표지에서 2017년 ‘모바일 폰’의 차용으로 빠르게 변모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시대의 시각문화를 주도하는 매스 미디어 이미지의 차용에 의해 작가가 시도하는 상실 혹은 회복의 개념은 확대된 해석의 영역으로 미끄러져 간다.      

정영한의 <이미지-시대의 단상> 시리즈에서 채택하고 있는 일곱 개의 상실 키워드에는 대부분 하나의 이미지가 등장한다. 기억=바다, 낭만=두상조각, 시간=신문, 희망=빙산, 꿈=장미, 사랑=사과, 그리고 환상=바다·장미 등의 조합이 그것이다. 하지만 캔버스에 그려진 문자와 이미지 사이에는 특정한 의미 구조가 주어져 있지 않다. 이는 작가가 자신의 노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미지 채집 과정에서 보여주는 작가의 무작위적 태도와 연관이 되어 있다 : “인터넷에서 떠도는 이미지, 잡지나 신문에서 보여 지는 이미지들을 무작위로 채집하고 저장해 두었다가 작품을 할 때면 하나씩 하나씩 올리는 과정을 겪는다”. 대중적 매체에서 이미지를 차용하고 복제하는 방식은 그의 작업을 ‘팝아트’의 맥락에 포함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을 팝의 범주로 제한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대중적 이미지의 차용이나 문자의 활용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세계는 형상 미술의 계보를 잇는 형식 논리들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정영한의 작품에는 비가시적인 세계 혹은 형이상학적 가치에 대한 탐구의 노력이 스며있다. 이른바 일상의 사물들이 그의 작품에서 비일상의 차원으로 전치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치의 논리는 롤랑 바르트가 제시한 ‘일상의 신화(Mythologies quotidiennes)’처럼 배치된 기호들 사이에 충돌이 각각의 대상들의 본래적 의미를 파기하고 제삼의 현실로 우리의 의식을 이끌기 때문이다. 새로운 버전인 <이미지-시대의 단상> 시리즈에 대한 다음과 같은 작가노트는 이러한 신화를 향한 전치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 “제목을 가장한 추상적 단어들은 그 뒤에 배경처럼 드러나는 사과, 바다, 꽃과 같은 자연의 요소들이 지닌 사물의 속성들과 화면에서 오히려 대조를 이룬다. 역설적이게도 이미지는 그 단어에 함축된 의미와 정서를 강조해 주고, 단어는 다시 이미지의 사실적 형태와 감각을 더욱 강조해주고 있다”. 인생의 범속한 사건들이 극중에서 예술을 위한 주제가 되듯이 정영한의 일상적 사물들은 화면 위에서 신화적 속성을 지닌 대상으로 축성되는 것이다.        

III. 
이번 전시회에 소개된 또 하나의 신작 시리즈 <Beyond the Myth>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작가 자신의 선행 시리즈 <우리시대 신화>의 특정 작품을 원본으로 삼아 컴퓨터 미디어로 복제한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기존 작품 이미지를 디지털 사진으로 채취한 후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편집하고 인쇄 출력하는 과정을 거치며 새로운 작품으로 완성해 낸다. 사진적 재현과 디지털 변형을 거쳐 새롭게 태어난 작품은 원본과 복제본 사이의 관례적 관계를 해체시키며 다양한 담론들을 만들어 낸다. 그림 속 이미지는 사진적 복제를 거치며 원본으로서 리얼리티를 획득하게 되지만 동시에 복제물로서 존재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인식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원본과 복제, 환영과 실재 사이의 간극을 파고들어 재현에 대한 다중적 해석을 일으키는 작업은 형상미술의 장르에 새롭고도 신선한 물음을 제시하고 있다. 이른바 극사실 회화를 둘러싸고 제기되어 온 리얼리티 개념에 대한 역설과 모순의 물음이다. 

<Beyond the Myth> 시리즈에서 사진으로 전사되어 디지털 프로그램으로 편집된 이미지는  영롱한 시각상을 제공해 주고 있다. 파도가 일렁이는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거대한 꽃송이가 공중에 부유하는 풍경이다. 컴퓨터로 재현된 이미지가 보석처럼 영롱하게 보이는 것은 디지털 프로그램을 사용한 편집 효과에 기인한 것이다. 작가가 전시장에 설치한 입체안경을 쓰지 않더라도 이 풍경은 기존의 회화 이미지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형상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진적 이미지에서 얻어지는 새로움이다. 그러나 정작 이 시리즈에서 작가가 의도하는 것은 사진과 회화라는 장르의 차이나 선호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의 관심은 컴퓨터 미디어가 주도하고 있는 동시대 시각이미지의 구조와 해석의 문제와 관련해 신형상 미술이 개척해야 할 하나의 길을 제시하는데 있다.

이번 전시회에 소개된 세 번째 시리즈 작업은 <Trans the Myth>로 명명되어 있다. 처음 선보이는 작품은 좌대를 포함해 높이 2m의 인체 조각상이며 화가로서 정영한의 실험적 노정을 조심스럽게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우리시대 신화> 시리즈의 그림에 등장하는 그리스 조각상 이미지를 3차원의 볼륨으로 재현한 것으로, 앞서 언급한 사진적 복제의 작업과 동일한 맥락에서 실험의 취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그림에 그려진 그리스 조각상인 큐피드가 다시 3차원의 공간 속에 실재로 모습을 드러내면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불러일으킨다. 원래가 가공물인 큐피드가 허상적 이미지로 그림의 평면 위에 재현되었다가 다시 실재 공간을 점유하는 존재로 태어나면서 허상과 실재의 이미지와 개념은 계속적으로 미끄러짐을 반복한다. 원본이 없는 복제물로서 시뮬라크르의 반복적 생산은 어느덧 창작의 유희가 되어 회화 이미지와 조각의 볼륨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      

이상과 같이 정영한의 조형 실험은 오래전부터 천착해 온 극사실 회화의 형식논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형상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반복해 강조하려니와 허상 이미지를 원본으로 삼아 사진으로 복제하거나 3차원의 입체물로 재현하는 정영한의 실험적 작업은 우리시대의 예술적 유산의 하나가 될 형상 미술의 계보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어가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2017.11) 

관계로서 신화 <꽃과 바다> _조광석(미술평론, 조형예술학 박사)
관계로서 신화 <꽃과 바다> 

정영한의 작품에는 바다와 꽃이 등장하고 있다. 잔잔한 바다 위에 약간 비뚤어진 시선으로 꽃이 하늘에 떠있다. 그리스 조각과 함께 있거나 신문지 조각 단면과 꽃송이가 그려져 있기도 한다. 여러 가지 소품이 그림 안에 들어가 있지만 바다와 꽃은 ‘우리시대 신화’에서 서로 대비되는 이미지로 등장한다. 이 장면은 가상의 상황이고 비현실적이다. 바다가 등장하는 비현실적 구성은 르네 마그리트나, 살바도르 달리를 연상하게하며 초현실주의를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작업하던 시대에 비교하면 빠르게 변하는 21세기에 정영한의 작품은 우리시대의 이야기를 보게 한다.  
그림 안에서 한 송이의 장미꽃은 실제 하는 꽃을 연상하는 이미지이다. 그려진 꽃은 더 이상 실재의 꽃이 아니라 표현된 현실이다. 그 꽃은 우리시대에 특정한 소비의 방식으로 장식되고, 개조된 꽃이다. 시각적 자기만족, 비유 이미지, 다시 말해 순수한 물질에 덧붙여진 사회적 관용의 방식으로 장식된 꽃이다. 그 꽃은 바다와 대비되면서 신화 속의 이야기가 되어 간다. 바다와 꽃의 상황은 자연적, 물리적 위치를 빗겨가면서 전설적인 이야기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작품에 반영된 작가의 시각은 사회적인 것을 언술하는 미술사 계보에 진입하고 있다. 
정영한의 자품은 시각적으로 가상의 공간을 만들고 있다. 가상이라는 말은 영어의 형용사 ‘virtual’을 번역한 것이다. 흔히 인터넷 상의 공간을 말하고 우리들의 상상속의 공간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virtual’의 또 다른 해석으로 ‘실질상’의 의미로도 쓰이고 있음을 대부분은 간과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작가는 “가상성은 비현실적이거나 상상에 의해 실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회화가 시대성과 결부한 표현 방법론의 특질, 그리고 감각으로 조직되어 생성된 회화적 공간에서 볼 수 없던 것들을 가시화 한 것”이라고 자신의 박사 논문에서 언급하고 있다. 작품 속의 바다와 꽃의 배열은 시각적으로 가상공간을 구성하여 실재와 연관된 진실을 바라본다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것은 이미지가 유통되고 있는 고도의 테크놀로지 시대에 재구성된 질서를 반영하고 있다. 공중에 떠있는 꽃송이가 현실로부터 거리를 지니는 것은 공간의 물리적 위치가 아니라 우리의 관점이다. 자연적인 것이 사라지고 인위적인 것들이 활성화된 문화에 잠재하고 있는 현대인의 이데올로기, 담론적인 것으로 대치된 사물들의 신화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다 위에 떠있는 꽃송이는 실제와 다른, 불가능의 상황과 공존하는 허구의 세계이다. 바다는 중력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지만 하늘에 떠있는 꽃송이는 육체를 잃은 채 바람에 날려가는 듯하다. 줄기와 잎이 사라진 꽃송이는 몸이 제거된 현대인의 머리 같은 모습이다. 과학적 객관성과 작가의 주관 사이에 심리적 분석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거기에서 바다와 꽃의 재현은 단순한 사물의 복제가 아닌 기호적인 생산으로 나간다. 모음과 자음의 결합체계를 지닌 언어처럼 의사소통이 가능한 의미의 언어체로 나타난다. 이미지는 다시 구성된 재현을 통해 단순히 경험된 것을 넘어서 관념적인 것이 된다. 
바다는 정영한이 어릴 때 살아온 고향, 부산의 이미지 배경에 자리 잡고 있는 무의식이다. 광활한 수평선과 파도의 거친 모습은 꽃송이와 마주하면서 감미로운 이미지로 바뀐다. 여성적인 부드러움과 대치되는 바다는 남성 중심적, 권위를 지닌 중력의 질서가 지배하는 것 같지만 작품 안에 바다는 순화된 잔잔한 파도일 뿐이다. 
바다는 어머니, 모성, 탄생의 상징으로 서구적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바다의 본질인 ‘물’은 우리들의 무의식에 남아 있는 어머니 뱃속의 양수로 회귀하고 싶은 본성이다. 신화에서 본다면 고대 사람에게 바다는 신비한 것이면서도 공포의 대상이었다. 한없이 전개되는 수평선과 알 수 없는 깊이, 예측할 수 없는 시기에 불어오는 풍랑, 거기에 희생이 따르면서 그들에게 그런 생각을 품게 하였다. 그 두려움은 여러 민족에게 바다에 얽힌 많은 신화나 전설을 낳게 하였다. 과일이나 꽃, 책과 같이 정물화의 주제이었던 사물들은 한동안 신화적 이야기의 먹이가 되지만, 그 사물의 이야기는 곧 사라지고 다른 대상들이 그 자리에 나타나 신화의 지위를 획득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바다가 암시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영원한 신화이다. 
여기에서 정영한이 말하는 ‘신화’의 의미를 언급하고 넘어가야할 것이다. ‘우리시대 신화’는 롤랑 바르트의 신화론(Mythologies)을 연상하지 않을 수 없다. 바르트의 ‘신화’는 현대사회 매스미디어에 나타나는 이미지 기호의 불연속성과 유사하다. 바르트의 ‘신화’는 하나의 이야기가 지속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이 바뀌면 새롭게 생성되고, 새로운 이야기가 앞의 것을 덮쳐버린 현대인의 담론이다. 현대의 일상적 삶에 놓여있는 사소한 사물들과 현상들에서 신화처럼 이데올로기가 감춰진 의도를 읽고 있다. 
그러한 현대인의 신화는 기호적 관계망에서 형성된 소통의 체계이며 거기에서 파생되는 메시지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신화’를 대상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인식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신화’는 현대사회에서 의미작용을 만드는 한 양식이며 일종의 언어의 형식과 구조의 범주인 것이다. “신화적 대상들 사이의 실질적인 구별은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신화는 하나의 빠롤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담론의 관할에 속하는 신화가 될 수 있다. 신화는 그 메시지의 대상에 의해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신화가 그 메시지를 말하는 방식에 의해 규정된다. (바르트, 현대의 신화)” 옛날 이야기 대신에 일상에 유통되는 이미지를 모아 ‘신화’로 이름 붙인 바르트의 논의에 따르면 ‘신화’는 현대인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들, 사건들이 한 사회의 일반적인 생각을 만드는 일상적 ‘언어’, 곧 우리 주변에 떠도는 ‘스피치’인 셈이다.

작품의 제목은 작품의 내용을 설명한다. 말하자면 제목은 작가의 의도를 부연하고 작품과 상호작용하고 있다. 한때 추상 작가들은 작품의 제목을 붙이기를 거부한 때가 있었다. 제목이 지닌 언어적 무게가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을 왜곡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영한은 ‘우리시대 신화’라고 제목을 붙이고 있다. 이미지의 구성을 보면서 간편하게 초현실주의로 미술사적 분리하는 것을 거부하는 언술이다. 
롤랑 바르트는 <카메라 루시다>에서 작품과 제목의 관계를 기호학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 제목은 작품의 내용을 설명하는 텍스트처럼 주석이 개입된다고 말하고 있다. 작품에 제목을 부여하는 방식은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기술적 현존성과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순환적 사고가 나타난다. 회화, 데생, 조각과 같은 고도의 재능이 반영되는 모방 예술에서 그러한 작업 기술이 그대로 이미지의 현존성이 된다. 누구나 쉽게 모방할 수 없는 기술에 감탄하는 것 자체이다. 그러나 작품을 만들어내는 기술적 과정과 병치되어 있는 제목의 내면화는 기술적 현존과 다른 것이다. 미디어 환경 안에 사진들처럼, 서술적 장면을 묘사하는 작품에 부여되어 있는 제목은 작가의 의도를 다양하게 해석하게 만든다. 

그렇게 본다면 신화는 가상적 가치가 유통되고 있는 사회에서 선택된 질서이며, 신화는 사회적인 것이다. 사람들이 요구하는 이념적 가치와 욕망을 반영하는 문화적 양상이라 할 수 있다. ‘우리시대 신화’는 자연적인 것들을 사회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으면서 자연적인 것에서 문화, 역사적인 것, 이데올로기로 뒤집어놓은 상황이다. 거대하게 확대된 꽃은 본래의 감정 전달의 수단이나 아름다움의 표현 수단으로 환희의 지위를 벗어난다. 왜냐하면 우리 시대의 신화에 떠오르는 꽃은 물신화 되면서 본성이 분해되는 것을 용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에 이미 존재했던 꽃의 상징은 바다 위의 하늘에 놓이면서 우리 시대의 기호와 결합하고 새로운 신화의 지위를 만든다.
‘우리시대 신화’는 이전에 존재했던 기호학으로부터 시작해 구성된 특수체계, 곧 이차적 서열의 기호학적 체계이다. 우리는 신화적 소재인 ‘언어’ 그 자체, 종교의식, 조각, 회화, 사진, 포스터, 상품, 인터넷 등등을 여기에 다시 불러들여야만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각기 다르지만, 그 소재들은 ‘신화’에 의해 포획되는 순간 본래의 의미는 변형 왜곡된다. 현대의 신화는 우리들을 이야기 안에 잡아 가두는 특성이 있다. 이러한 신화는 역사적 관용으로부터 유래하고, 인간적 운명으로부터 배어나온 것이다. 그러면서도 신화는 그것을 만들고 있는 주체, ‘우리’에게 귀착된다. 주변에 흩어진 신화는 ‘우리’를 향하여 명령하고, 우리는 그 무의식적인 힘에 정복된다. 우리 시대는 대중 매체에 의해 대량 생산되어진 신화에 의해 확장되어가는 애매성을 수용하도록 우리에게 강요한다. 

조광석(Jo Kwangsuk 경기대 교수, 미술평론, 조형예술학 박사)
원본 없는 이미지로서의 그림_ 윤진섭 (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 호남대교수)
원본 없는 이미지로서의 그림


윤진섭 (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 호남대교수)

정영한은 최근 몇 년간 바다를 즐겨 그려왔다. 따라서 바다는 그에게 있어서 주요한 소재이면서 동시에 탐구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는 이번 개인전을 위해 발행한 도록에 한편의 논문을 싣고 있는데, 거기에서 그는 바다라고 하는 소재가 지닌 의미와 기법, 그리고 작업의 의의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내가 바로 앞에서 바다를 가리켜 ‘탐구의 대상’이라고 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반드시 논문을 위한 ‘탐구의 대상’이 아니더라도 화가에게 있어서 자연은 예로부터 흔히 탐구의 대상이 돼 왔다. 세잔과 몽 생 빅토와르산의 관계가 그렇고, 모네와 노적가리 의 관계가 그렇다. 세잔은 몽 생 빅토와르산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단순히 대상의 재현이 아닌 자신의 눈을 통해 재구성된 실재를, 모네는 빛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노적가리의 모습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정영한의 경우, 탐구의 내용은 과연 무엇인가? 겉보기에 그가 그린 바다의 풍경은 눈앞에 보이는 바다의 모습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흰 이를 드러내며 우리에게 달려오는 파도의 포말로 인하여 매우 박진감 있게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일망무제로 펼쳐진 바다 앞에서 벌러흐(Bullough)가 이야기하는 소위 ‘심리적 거리’를 유지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심리적 거리’란 예술작품이 야기하는 감흥에 젖어 관람객이 거기에 빨려 들어가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균형감각을 의미한다. 소위 관조를 위한 전제조건인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가령, 바위에 부딪혀 큰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의 모습을 그린 정영한의 그림들은 그것을 감상하는 관람객들에게 그러한 장면이 마치 눈앞에서 전개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가 재현에 성공했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은 또한 포도송이를 너무나 기가 막히게 잘 그려 새가 쪼아 먹으려 달려들었다는 고대 제욱시스의 일화로 후퇴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가 그의 작품을 바라보며 놀라는 까닭은 그것이 주는 메시지가 아니라, 빼어나게 대상을 묘사하는 그의 솜씨가 아닌가.

사진이 대상을 그대로 재현하는 이 시대에 수공에 의해 대상을 재현하는 일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정영한의 바다 그림은 적어도 이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에 이르는 하나의 통로를 제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논문 속에서 자신의 작업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재현이 아닌 겹쳐진 이미지의 층들로 인하여 조작된, 그럼으로써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풍경임을 강조하고 있다. 말하자면 포토리얼리즘과는 그 본질을 달리하는 작가 자신의 주관적 ‘조작’의 개입을 통하여 원본이 없는 시뮬라크르에 이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사진을 이용하여 작업을 한 그의 바다 풍경이 과연 원본을 지니지 않는 것일까? 사진의 피사체인 바다가 프린트된 사진의 원본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것을 바탕으로 그린 바다 그림을 시뮬라크르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 사진을 바탕으로 그린 그의 바다 그림은 적어도 다음과 같은 점에서 볼 때 원본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적어도 사진이 전해주는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캔버스에 옮기려고 했다기보다는 일련의 조작을 통해 대상의 존재감과는 다른 바다의 이미지를 창출해내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마치 컴퓨터상에서 포토샵을 이용하여 대상을 조작하듯이, 붓질의 흔적이 없이 매끄럽게 다듬어진 그림 속의 바다의 모습은 일종의 편집에 의한 것이다. 그것은 사진에 찍혀진 피사체로서의 대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미끄러지는 이미지의 이미지들이다. 따라서 그림 속의 이미지들이 원본으로부터 미끄러지면 질수록 원본성은 점차 희미해진다.

관람객이 바라보는 정영한의 바다 그림은 원본으로부터 멀어진, 그러나 아직 원본의 온기를 간직하고 있는 바다의 이미지다. 우리가 그의 그림 앞에서 바다의 아우라를 느끼는 까닭은 그의 그림이 아직은 대상의 원본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잘못된 일일까?

(아트인컬쳐2008.7월호)
바다와 오브제 이미지 충돌의 신화_김종근 (미술평론가, 숙명여대 겸임교수)
바다와 오브제 이미지 충돌의 신화  


김종근 (미술평론가, 숙명여대 겸임교수)


최근 우리 현대미술에서 주요한 흐름 중에 하나는 극사실주의 화풍에 대한 뜨거운 열풍이다. 화단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그 하이퍼 리얼리즘의 흐름 속에서 일관되게 바다의 풍경 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 작가가 정영한이다. 주목 받고 있는 극사실 화풍의 작가군에서 크게 비켜나 있지 않은 그의 작품세계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극사실적 경향을 취한다는 것과 그 극사실적 풍경에 더하여 오브제를 결합 시킨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 본질적으로 바다와 오브제와의 만남이 잘 맞아 떨어지는가 라는 점이다. 즉 그가 의도하는 컨셉중에 하나인 바다와 꽃의 이미지가 완벽하게 결합 되는가 이다.

정영한에게 있어 사실 그 풍경과 오브제가 어떤 특별한 필연성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지는 않아 보인다. 그의 작품세계에 키워드로 요약되는 이 물리적인 풍경과 오브제와의 만남은 서로 다른 대상들이 만나는 신선한 충돌로 회화가 주는 상상력의 즐거움을 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예를 들면 서로 다른 이미지들이 상충하면서 우리들에게 아주 낯선 쾌감과 시각적 충격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그의 풍경은 실제 바다로 착각할 만큼의 극사실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 기법은 일종의 그림상의 트릭이다. 프랑스어 가운데에는 눈속임이란 트롱프뢰유trompe-lóeil라는 단어가 있다. 바로 그림의 처음 시작은 눈속임에서 출발하며 그림이란 것이 원래 시각적인 눈속임이라는 것이다.

그의 어느 작품을 보더라도 주요 배경에 바다는 매우 낭만적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그 위에는 언제나 커다란 꽃이 놓여있다. 이러한 컨셉은 마치 1958년 달리가 그린 <명상적인 장미>의 작품 구성을 떠 올릴 만큼 깊은 연관성을 보여준다. 그의 회화가 초현실주의와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달리가 푸른 하늘에 붉은 장미를 띄워 놓아 낯설고 극적인 대비를 통해 시각적 놀라움을 주었다면, 정영한은 바다위에 꽃과 꽃잎을 설정 배치한다. 그러고 보면 작가는 평면 위에 오브제를 끌어들여 어떤 관계로 연결,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 낸다. 이 물리적이고 의도적인 충돌적 만남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그의 회화의 목적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

비록 눈속임이란 것이 실재가 아닌 환영의 세계를 보여 주지만 그것조차도 눈에 보이는 실재가 어쩌면 허구일지 모른다는 알레고리적인 개념을 그는 담고 있다. 그에게 그림의 목적은 바다를 똑같이 그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키는 추상화가처럼 바다와 꽃이라는 충돌적 세계를 드러낼 뿐이다.

그러한 세계를 더욱 설득력 있게 하기 위하여 그는 꽃을 가져다 놓지만 실제로 그의 화폭에서 꽃은 그다지 큰 상징성이나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이미지의 가상화 일뿐이다. 사람도 사물도 없는 텅 빈 화면에 단지 바다 이미지가 난데없이 등장하는 거대한 꽃과 꽃잎, 그는 이것을 자연에 대한 실재 이미지보다 체험하는 자연을 제시 하는 것이다.

또한 돌발 이미지로 바다풍경의 허공에 삽입된 거대한 꽃들은 화면을 현실적이면서도 비현실적 공간으로 옮겨가게 한다. 궁극적으로 그는 회화를 주, 객관적인 시각에 국한되지 않고 자유로운 연상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각적 유희로 이미지를 탈출시키고자하는 목적을 드러낸다.

반면에 각기 다른 형태의 색깔과 이미지의 꽃들은 사진처럼 정밀하게 그려진 바다와 충돌 되어 또 다른 풍경을 위해 충실하게 복무한다. 원래 꽃은 화분이나 정원 혹은 자연 속에 놓이는 대상이다. 꽃이 하늘에 혹은 바다 위에 떠 있어야할 오브제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곳에 놓여 있어야 할 꽃을 그는 바다공간에 끌어다 놓는다. 그것이 바로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이다.

전위나 전치로 물체나 영상을 그것이 놓여있던 본래의 배경에서 떼어내어 그 사물의 속성과는 전혀 관련 없는 엉뚱한 장소에 놓음으로써, 심리적 혹은 시각적 충격을 주는 기법인 것이다. 즉 위치를 바꾸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면서 그리하여 마음 속 깊이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의 세계를 해방시키는 방법이다. 작가는 이 데페이즈망의 형식으로 바로 파도와 꽃을 초현실적으로 배치한 '우리時代 神話' 연작 시리즈를 탄생시킨 것이다.

물론 그의 회화에서 형상은 그리기 보다는 화면에 이미지화, 또는 프린트화 시킨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처럼 화면은 기계적 수법에 의해 표면이 단정하다. 여기에서 그는 붓 자국을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음으로 절제된 감정으로 대상을 관조하고 있음도 암시적으로 드러낸다.

정영한의 이 회화적 변용과 시도는 초기 건물이나 특정한 이미지를 병치시키는 것에서 시작 되어 점차 도시 풍경을 거쳐 바다 위에 꽃을 놓는 스타일로 진행 되어 왔다. 화면처럼 그의 전개방식은 구성이나 포맷에서 단순하게 완결 짓는다. 동어 반복적 이미지의 바다로 그는 보고 싶은 대상만을 취한다는 의미에서 멀티비전과 다중채널의 방식을 끌어들이기도 하지만 집요한 표현으로 회화적 감성과 사진의 경계를 아우른다.

사실 현대회화가 하이퍼 리얼리즘의 차원을 넘어서기 위한 다양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회화는 불투명하며 종래의 회화에서 사용되던 일루전과 가상성은 회화의 상상력 속에서 더 이상의 새로운 비전을 주고 있지 못하다. 르네 마그리트나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보였던 양식들이 더 이상 현대미술에서 새롭게 등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정영한의 작품 속에 회화성은 여전히 현대미술, 하이퍼 미술에 대한 포스트모던 쪽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 할 가치가 있다.
회화에서 이미지와 실재의 문제 ; - <우리時代 神話, 2005-8> 연작_유재길 (미술비평. 홍익대교수)
회화에서 이미지와 실재의 문제 ;  - <우리時代 神話, 2005-8> 연작

유재길 (미술비평. 홍익대교수)

‘형상의 새로운 표현’을 탐구한다는 정영한은 시각의 마술사이다. 그가 보여주고 있는 이미지는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신비롭고 화려하며, 축제 속에 펼쳐지는 마술처럼 관객의 시각을 사로잡는다. 더욱이 그가 선택한 모티브는 사진매체의 활용으로 복합구조의 구성과 극사실 묘사로 시각에 충격을 준다. 현대도시의 일상적 풍경에서 시작한 그의 이미지 회화는 최근 자연을 주제로 형상의 극사실과 변형, 그리고 돌발성이나 복합적 구조 등 다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는 회화에서 사물의 실재를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새로운 형상의 모색과 구조변화를 통한 이미지의 자연적 실재la réalité naturelle와 인위적 실재la réalité artificielle 탐구로 해석할 수 있다.

초기 그의 형상작업은 <현대인-문명인>에 관한 사진적 기록물처럼 제작되어 왔다. <21世紀 風景, 1999-2002> 연작에서 그는 현대도시의 풍경과 토르소, 또는 인체 누드와 한자, 작은 원들, 꽃을 극사실로 묘사하고 있다. 이를 평론가 김영호는 “도시풍경의 연출된 상황으로 상황 전이와 다중적 화면구성의 이미지”(제5회 개인전 서문, 성곡미술관, 2002)로 해석한다. 거대한 도시의 회색 건물, 아파트와 빌딩, 그리고 흑색의 아스팔트와 자동차 등 21세기 도시풍경이 배경으로 나타나면서 이와 다른 채색된 이미지들은 삭막한 도시를 대변하면서 실재의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이는 회화에서 가장 중요시되었던 자연의 모방이나 재현과 다른 출발이다. 이제 화가들은 형상의 재현을 단순한 사실-실재(real)의 재현이나 복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영한의 경우도 ‘형상의 새로운 표현’ 연구는 단순한 사물의 극사실 묘사가 아니다. 그는 분명 현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개인적 관념이 삽입된 의식의 재현을 실재의 문제로 제기하면서 시작하는 것이다. 초기 이러한 문제를 그는 회화의 전통과 연관된 1)재생산의 문제나 2)이미지 해체와 조합, 3)사물의 드러냄과 은폐라는 내용으로 설명하고 있다.(정영한 석사논문, 1997) 이와 같은 이론적 배경을 바탕으로 그의 회화는 단순한 사물, 또는 환영(illusion)의 재현이 아니라 선택된 대상의 해체나 관념화를 통한 주관적 표현을 지속하면서 근작에 이른다.   

초기 도시풍경에서 시작한 형상의 새로운 표현은 2000년대 중반 도시인이 상실한 ‘자연’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미지의 실재를 다시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는 도시의 인위적 실재와 자연의 자연적 실재가 공존하거나 변화를 갖는 시점이다. 도시인이 상실한 자연을 작가는 가상의 이미지처럼 바다와 꽃으로 재현한다. 평론가 고충환은 이것을 “현대인이 자연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그 흔적을 가시화하는 한편, 또한 그렇게 상실된 자연의 실재감을 복원하는 것.”(제9회 개인전 서문, 갤러리 宇德, 2006)으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정영한은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사물의 실재를 가상성과 관계를 표현하고자 한다. 그가 그린 거대한 바다와 꽃은 화면을 가득 채우면서 분할된 구조를 바탕으로 재구성되고 있다. 아울러 자연적 실재로 이미지는 변형을 통해 가상성(simulacre)을 갖는다. 더욱이 이중구조를 바탕으로 확대와 변형된 이미지는 시각적 고립과 충격을 준다. 특히 가상성은 사진이라는 매체 활용으로 더욱 발전되면서 화려하게 전개된다. 서로 다른 공간에 존재하는 사물의 결합은 자연이라는 실재를 상실한 현대 도시인들에게 마치 자연을 체험하게 하는 보약처럼 사용되고 있다.

이미지 가상성은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형상 표현이 아니라 실재 대상을 가상공간에 삽입시키는 것이다. 이것을 극사실 묘사로 시각에 자극을 주며, 실재의 유사성과 관계없이 가상공간에서 극대화가 이루어진다. 특히 2005년 이후 제작된 <우리時代 神話>연작에서 작가는 사진매체가 갖는 이미지의 변화, 즉 가상성에 초점을 맞춘다.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바다와 확대된 꽃은 현실인 동시에 가상세계이다. 자연보다 더 자연 같은 형상의 재현과 이중구조의 공간을 통해 가상성이 확대되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가상성은 상실된 실재의 복원이라기보다 우리시대의 시각적 현상이다. 이것을 작가는 거창한 이데올로기 탄생보다 재미있는 시각적 신화 만들기로 생각하고 있다. 오늘날 회화에서 이미지를 통한 사물의 실재로 귀환은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매체예술은 예술의 종말이나 저자의 죽음 등으로 가상성을 통한 이미지 복제가 발달되고 있다. 모더니즘 이후 거대 서사의 해체는 일루전이라는 이미지 해체와 같았으나, 예술의 종말론 이후 표상의 강조로 이미지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정영한의 새로운 이미지 예술로 실재의 형상 회복은 가상성을 통한 회화의 복귀이며, 인위적이고 자연적인 실재로의 귀환이다. 바다와 꽃 등 실재 사물의 극사실과 확대, 변형을 통한 그의 독특한 이미지 세계는 우리시대의 특성인 디지털의 새로운 시각언어처럼 이데올로기보다 일상의 신화를 생각하게 한다.  

이러한 그의 이미지 회화는 매체론을 도입하면서 ‘새로운 형상 표현’ 이론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자신의 이론적 키워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첫째는 이미지의 돌발성uncanny과 변형anamorphosis, 그리고 동어 반복적 구조tautologie와 표면의 불확실성이다. 이는 초기 이미지 이론에서 제기하였던 1)재생산과 2)이미지 해체와 조합, 3)사물의 드러냄과 은폐의 연장을 확인하게 된다. 점차 새로운 담론과 이론을 바탕으로 형성되는 그의 작업은 단순한 사물의 묘사나 실재의 재현이 아니라 해체, 또는 가상세계를 통한 실천적, 이론적 연구로 전개되어 나가고 있다.
먼저 가상세계에서 돌발성은 서로 다른 형상의 결합과 같이 돌출적 이미지 구성이다. 그가 그린 바다풍경에 거대한 꽃이 등장하는 상반된 이미지의 돌발성은 풍경의 해체를 바탕으로 나타난다. 이는 초현실주의자들이 해부대 위에 재봉틀과 우산이 만나는 것과 같은 데페이즈망 기법과 유사하다. 그러나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돌발성은 초현실이 아닌 현실의 자연으로 고립된 사물들의 풍경이다. 돌출적 표현의 사물들이 일상의 신화가 되어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은 아마 고립의 문제가 아닌가 한다. 따라서 현대인은 대상의 실재보다 이미지로 체험한다고 하는데, 그의 모티브로 등장하는 바다와 꽃은 자연의 원형인 실재이면서 돌발성에 의해 고립의 의미를 강조하게 된다. 고립은 돌출된 이미지로 우리시대의 신화처럼 이야기될 수 있다.  
    
이어서 그의 이미지 돌출과 변형은 사진과 같은 극사실 묘사로 실재보다 더 실재와 같은 형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는 어떤 것이 아닌 가상의 이미지이다. 비록 바다나 꽃이라는 사물의 존재를 생각하게 하나 디지털 사진을 통한 극사실 형상은 가상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이미지 축제이다. 여기서 관객은 이미지가 이미지로 끝나며, 실재의 대상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관객이 얻는 것은 실재보다 이미지, 그 자체이다.
이처럼 그의 마술적 이미지는 자연의 실재가 아닌 허상임을 알면서도 관객은 만족스런 마음으로 시각의 축제로 참여한다. 이는 이중구조의 공간과 거대한 이미지의 돌출현상과 변형에서 관객은 어떤 것이 아닌 가상의 존재, 또는 존재 없는 대상의 데페이즈망에서 우리 시대의 신화를 읽게 되는 동시에, 신화를 잃어버린 시대에서 신화 창조가 그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상세계에서 만들어지는 이미지 축제가 신화와 연결되면서 이미지의 자연적 실재는 우리에서 새로운 생명을 부여하게 된다.

한편 동어 반복적 구조와 표면의 불확실성은 비시간적, 비공간적 이미지를 추구한다. 작가의 동어 반복적 구조는 들뢰즈와 후기구조주의자들이 지적한 “반복을 통한 차이의 확인,”이나 “자기가 아닌 타자에 순응시키려 하는 반복성” 이론을 근거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차이의 반복’의 시대적 특성으로 담론과 연결되며, 미디어 사회의 다중채널과 관계를 맺는다.
그가 보여주고자 하는 동어 반복적 구조와 형상은 제약 없이 시공간을 넘나드는 실재의 이미지들이다. 그는 자신이 반복적 형상을 통해 어떠한 대상의 이미지가 아닌 고유한 독립적 사물로 존재를 확인시키고자 한다. 사진이라는 매체 이미지 활용에도 불구하고 반복된 구조와 이미지는 독자적 사물과 동등한 가치를 획득한다. 이는 디지털 시대의 기계적 이미지와 다르다. 실재의 자연적 이미지는 사진매체의 활용으로 다중적 구조와 의미를 가지며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인위적 이미지로 전환이 이루어진다. 아울러 그가 제시하는 실재 이미지는 대상의 재현과 함께 장소성을 중요시하게 된다. 대상(꽃)의 배경이 되는 장소(바다), 그리고 장소(바다)와 격리된 대상(꽃)은 동일한 화면에 존재하나 고립성과 같이 독특한 장소성으로 주목된다. 그의 장소성은 돌발성의 데페이즈망 이미지처럼 형상의 고립과 격리를 부추긴다. 장소의 돌발성과 사물의 고립화로 그의 신화는 서술적이거나 설명적 이야기를 거부한다. 회화에서 실재의 문제는 이미지 재생산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영한의 가상성이나 동어 반복적 구조의 회화는 오늘날 화가들이 숙제처럼 생각하는 실재의 문제 제기이다. 그의 경우는 자연적 실재와 인위적 실재의 구별 없이 실재가 탈공간적, 탈 시간적 표현으로 이어진다. 전통회화의 경우 물리적, 시간적 제약을 받으면서 형상의 재현이 이루어져 왔으나, 오늘날 실재의 다양한 해석과 표현은 두 개의 영역을 넘나들면서 자유롭게 전개되고 있다. 특히 디지털 이미지 등장은 대상의 재현에서 가상성과 사물의 근원을 해체시키고 있다. 예술의 종말에서 이미지 생산이 다시 진행되고, 주제를 통한 의사소통, 그리고 고립을 통한 순수의 서술적, 삽화적 개념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영한의 <우리時代 神話, 2005-8> 연작은 현대회화에서 실재의 새로운 형상 표현으로 또 다른 기대를 갖게 한다.

                        2008.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