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맨손이 만들어 낸 마음속의 풍경과 색채_김종근(미술평론가)
맨손이 만들어 낸 마음속의 풍경과 색채

김종근(미술평론가)

그림이 점이나 선, 면, 색 등 조형적인 요소와 원리로만 꼭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은 형식적인 것들을 넘어 작가의 내면적인 정신과 만나 비로소 하나의 그림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칸딘스키가 추상화에서 이끌어 낸,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세계의 중요성은 이 점에서 유효하다. 이러한 필연성은 풍경을 그리는 작가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박희숙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물론 그의 그림이 풍경인가라는 점도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의 작품은 자칫 대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풍경화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풍경화는 아니다. 
그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도 않을뿐더러, 그의 시각이 풍경의 형식들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관념적인 세계를 형상화하는 추상화가라고 부를 수만도 없다. 그는 대상을 바라보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 기억의 잔상들을 화폭에 옮겨 놓는다. 이렇게 자연을 보는 그 시형식에는 그 방법을 관통하는 그만의 흐름과 기법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마음속의 풍경을 담아내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풍경에는 보통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차원의 풍경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내면의 풍경이 있다. 화가가 가지고 있는 그 마음속의 풍경, 박희숙은 후자인 그 풍경을 가슴에 두고 있다. 그러한 증거로 우리는 그가 풍경의 구체적인 묘사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화가가 어떠한 대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 대상의 인상이나 사실성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화가들의 일반적인 방식이다. 그러한 특징을 우리는 박희숙의 작품 전체에서 발견한다. 한 작품을 보자. 그의 풍경 가운데는 비 오는 날, 눈 내리는 날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이 있다. 또한 작열하는 듯한 핑크빛의 열정적인 꽃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설산의 눈처럼 깎아지른 빙벽의 풍경도 있다. 그것들은 고요한 자연의 인상을 닮아 있기도 하고, 휘몰아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떠올린다. 그렇다고 그 작품들이 마치 절대음악처럼 전적으로 내용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름나무,” 혹은 “봄,” 또는 “연인들의 바다.“ 에서는 우연히도 사계절의 감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감각은 실제 몇 가지의 특징을 통해 확인시켜준다. 기본적으로 자연의 대상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끌어당겨 확산시키거나 화폭 전면에 퍼트린다. 그는 사계절을 염두에 두면서도 특정한 테마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예를 들면, 물, 눈, 빛 그리고 꽃등에 관한 자연적인 주제가 대부분이다.  그는 보여지는 대상의 시선을 색채라는 것으로 보고 싶어한다. 핑크빛 꽃들이 화폭 전면에 봄의 멜로디처럼 퍼져있는 작품, 겨울을 떠올리는 보랏빛 설산, 여름 하늘처럼 푸른 하늘을 연상시키는 하늘빛 블루, 온통 봄날의 오후를 눈부시게 하는 노란 개나리, 이 그림들은 그의 시선이 주제와 테마가 잘 어루러져 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물론 이 가슴을 떨리게 하는 그림들은 마치 그가 자연을 바라보는 데 각기 다른 색채의 필터를 눈에다 달고 있는 것처럼 환상적이다. 그러면서도 색점들이 가지는 툭성과 형태의 통일감을 보여 주기도 하고 아울러 거의 전면회화를 떠올릴 만큼 전우 좌우로 향하여 자유분방한 형식을 나타낸다. 하늘색의 작품들은 무한한 창공의 공간감과 해방감을 주며, 핑크빛 색채는 거대한 꽃들의 집합의 힘을 보여준다. 이 모든 박희숙의 생각들은 마치 세잔느가 “자연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세심하거나, 지나치게 성실하거나 순종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라는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에는 억제된 색채와 뜨겁고 분명한 감정이 공존하고 있다.  고유한 감정에 빠져있다고 보기보다는 풍경을 색채로 인지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다른 작가들과도 구별되는 색다른 매력이 그에게는 있다. 그의 색채들이 아름다운 것은 물감이 아니라 그가 만들어 낸 풍경이 아름다운 것이다. 비록 풍경에는 이율배반적인 색채가 있다 하더라도 그 자신이 추구하는 색채표현에는 완전성을 부여하고 있다. 이제 그의 화풍에는 추상화와 표현주의의 결합처럼 거칠면서도 균일한 화풍의 구조로 정착되어 간다. 그것은 풍경이라는 개념을 해체 된 양식으로 보고, 표현도 자연의 재현에서 벗어나 손으로 이미지화 하는 그만의 형식이기에 가능한 것으로 판단된다. 보기 드물게 그의 작품들은 손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도구의 행위를 통하여 작가 욕망의 내면세계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이 방법은 붓이라는 매체가 주는 간접적인 접촉을 거부한 것을 의미한다. 동시에 이것은 우연성의 효과를 새로운 미의식으로 발전시킨 액션 페인팅 화가들처럼 몸의 언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조각가 출신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실 그는 평면위에 색채조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제 그는 자신만의 개성적인 표현인 손으로 만들어낸 세계에 도달해 있다. 그 도달이란 동시에 물론 새로운 시작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는 이 제한적인 색채만으로 충분히 자유롭고 율동적인 선으로 강렬한  형태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언어를 뿌리 내리고 있다. 거기에는 순간적 효과보다 그의 즉흥적이고 속도감 있는 필치와 자신감으로 모노톤 회화의 특성까지도 포함하여 단순한 색채의 효과를 최고조로 증폭 시키고 있다. 
이제 그의 작업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좀 더 근원적인 표현의 밀도와 응집력이 있으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가져본다. 그러기 위해 작가는 그만이 추구하는 이념을 단순하고 강렬하게 들어내는 절제의 미학이 요구될 수도 있다. 그럴 때야 말로 진부한 추상미술의 전개가 아니라 실로 역동적인 필치와 대담하고 거친 마티에르로 박희숙만의 지평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미술대학을 졸업한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고 했다. 그동안 현장에서 미술교사로 있었지만 40대 중반, 분명 예술가로 치면 늦은 것은 아니지만, 나이로 치면 첫 번째 전람회가 늦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에게 한 약속은 지킨 셈이 된다. 그는 아주 오래 전 자신이 마음에 드는 작품이 100점이 넘으면 개인전을 갖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의 작업실에 널려진 100여점에 달하는 작품을 보고 이제 박희숙은 그가 원하는 대로 볼 수 있고 그가 느끼는 대로 색을 칠 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다. 이미 그것만으로 그의 출발은 눈부시다. 분명 첫 개인전은 그가 누리는 최고의 자유와 행복을 얻은 상징적 행위이다.  2005.03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시각의 복잡한 시현들 _죠나단 굿맨
Dana Park작품 세계 : 추상과 구상을 넘나드는 시각의 복잡한 시현들 

 일반적으로 한국 현대 미술의 큰 장점들 중 하나이기도 하며 특히, Park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특징으로 이미지를 캔버스에 표현해내는 묘사력을 꼽을 수 있다. 묘사력은 묘사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개념적인 근본을 간과해 버릴 수 있고 반대로 아이디어와 잘 만나 이미지를 강화시킬 수도 있다. 후자에 해당하는 Park의 작품은 한국 전통미술의 가장 웅장한 범주에 있는 풍경화의 복잡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해결해야 할 점은 산수화의 유산을 새로운 전통으로 발전시키며 다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떻게 한 개인이 천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작품들을 넘어설 수 있을까? 이 고민은 과거를 이어가며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모색으로 답을 해야 하는 동양 작가에게 형이상학적인 문제가 아니다
 Park의 작품에서 우리는 솟아오른 바위와 높은 고도에 쌓인 눈을 표현하는 약간의 기법을 찾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Dana로 하여금 그녀의 비전을 보여주며 전통 주제들을 현대적으로 다룰 수 있게 한다.  현대에 작가로서 가져야 할 능력은 인상적인 자신만의 작품 스타일인데, 그녀는 그녀의 가치를 반영하는 이러한 능력을 가지고  그녀의 작품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작가의 독자적인 성취에서, 우리는 기교와 전통적 스타일의 결합이 얼마나 관객들을 흔들어 놓는 지 볼 수 있다. 작가 Park은 반복적이고 겹치는 붓 터치로 시각적인 복합 이미지를 캔버스에 펼치는데, 이는 실로 우리의 눈을 아찔하게 한다. 각이 지고 복잡한 산 이미지는 자주 빛, 파랑, 초록 등의 색을 통해 느껴진다. 고도에서 바라본 높은 산과 바위들 사이의 대조와 강렬한 원색들의 붓 터치는 사람들에게 주제적인 면에서 신화적인 느낌을 갖게 하며 그녀가 바위들을 다루는 표현양식에서 풍경화 전통의 고유함을 느끼게 한다; 바로 이 고유함이 그녀만의 비전을 쌓으면서 동시에 전통 주제를 다루는 새로운 기법의 성공이다. 작가는 자연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열정적으로 드러내면서 자연과 그녀와의 대화를 강조한다. 그래서 작가의 성공 열쇠는 오랜 작품 활동에서 보여주는 형식에 대한 그녀만의 독자적인 표현이며 이러한 자세는 박 작가의 그림에서 처음부터 분명히 드러난다.
보라색 풍경화에서 보면, 안개와 구름은 높은 암석의 봉우리와 경쟁하듯이 있는데; 마치 우리가 세상의 끝에 있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 그녀의 정교한 묘사는 거의 초자연적이다. 모호한 형태의 구름은 바위의 날카롭게 솟은 봉우리와 서로 만나고 있다.  Park은 자연에 대한 개인적인 상상력에 근거하여 작업하고 있는데 나는 개인적 상상력은 동양의 산수화를 그리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동양의 산수화는 자연의 다양한 상상의 세계를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Park의 작품은 독자적인 관점을 유도하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작품들의 전통으로부터 나왔으며 참신하고 특별하다. 보이는 현실을 표현하는 것 보다 더 많이 그녀의 내재된 진실함을 소통하고자 하는 입장에서 보면 자연에 대한 통찰력은 깊은 생각의 결과물에 가깝다. 이러한 조형에서 볼 수 있는 암석의 돌출부는 적어도 박 작가가 자연의 원형적인 진리와 놀라운 친화력으로 자연과 교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이는 작가가 자연을 본연의 진실을 담고 있는 친밀한 대상으로 보고 있다고 하겠다. 회화가 상상에 의해 그려진 것이라면 그리고 그 기원이 자연 그 자체보다 자연의 문화적 표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이 작품은 감성과 마음 모두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보라색 그림과 마찬가지로, 초록색 그림 또한 수직적이며 유사한 영역을 보여준다. 하지만 여기서 박 작가는 보라색 작품에서 보다 더 큰 실험을 시도한다.  그 배경은 눈으로 덮힌 오르막처럼 보이며, 전면에는 수정체의 결정 구조 같은 것들이 추상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각각의 구조는 개별적인 눈송이가 각기 다른 윤곽 형태를 보여주며 서로 다르게 드러나 있다. 이들의 전체적 효과는 굉장히 흥미로우며, 단순이 특이하다는 것 이상이다; 그 결과, 우리는 박 작가가 자연 그 자체의 북극 풍경을 시각화 하면서, 얼마나 진지하게 그녀의 풍부한 상상력을 사용했는지 주의 깊게 보게 된다. 이 그림은 박 작가의 유사한 연작에서 표현된 빛에서도 보여진다; 그들의 연결성은 자연 안에서 우리의 경험을 극대화시켜 준다. 이러한 것들은 구상과 추상 양자의 의도와 목적을 위해 비유적이고 추상적이며 문화적으로 상상되어 그들의 조응은 자연 속에서 우리의 경험을 강화하고 상승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독자적인 형태를 만들어내는 작가의 능력을 이해하는 적절한 단서를 갖게 된다. 
작은 파란색 그림은 나무 가지에 눈이 추상으로 반복된 것처럼 보이는 두 개의 수직 기둥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그것들이 보여주는 것은 표현할 수 없이 신비하고 수수께끼 같고, 그 붓 놀림은 뛰어날 정도로 적절하다.. 전면에 흰색 통로는 눈 같이 보이는데, 여기서 우리는 작가의 시각적 전망이 북쪽의 날씨와 자연 형태에 일반적으로 관련되어 있음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녀의 다른 작품들처럼, 이 조형은 추상과 현실 사이의 조밀한 혼성을 보여주는 독특한 면이 있다. 
작가는 리얼리즘에서 추상으로 가거나 혹은 반대 상황이 그녀의 작품에 일어나는 순간을 즐긴다. ‘어디에 시각의 두 가지 범주를 둘 것인가?’ 그녀 작품 세계의 강력한 서브텍스트이다. 추상과 현실이 만나는 그 지점이 그녀 작품의 잠재된 특징이다. 앞으로 그녀의 관객들은 그녀가 더 효과적으로 다른 기법들을 통합하여 모색하는 것을 바랄지도 모르겠다. 비록, 추상과 비유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라도 말이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잘못 또는 관객의 잘못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시야의 한계로 추상과 비유의 이미지화를 동시에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확실한 것은 박 작가가 훌륭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시각의 경계들을 넘나드는 자기만의 세계를 정립하고자 하며, 그리고 이는 세상과 일반적으로 보이는 현상 너머에 있는 모두를 볼 수 있는 관점을 관객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그녀의 상상력은 우리에게 이를 요구한다. 
그녀의 상상력은 막힘이 없다.   
                            
- 2014.12     죠나단 굿맨 

김종근 평론 중에서
김종근 평론 중에서

그림이 점이나 선, 면, 색 등 조형적인 요소와 원리로만 꼭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은 형식적인 것들을 넘어 작가의 내면적인 정신과 만나 비로소 하나의 그림으로 태어나기 때문이다. 칸딘스키가 추상화에서 이끌어 낸, 예술에 있어서 정신적인 세계의 중요성은 이 점에서 유효하다. 이러한 필연성은 풍경을 그리는 작가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박희숙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된다. 물론 그의 그림이 풍경인가라는 점도 논의의 여지가 있다. 그의 작품은 자칫 대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풍경화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풍경화는 아니다. 
그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도 않을뿐더러, 그의 시각이 풍경의 형식들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관념적인 세계를 형상화하는 추상화가라고 부를 수만도 없다. 그는 대상을 바라보고 이해한다. 그리고 그 기억의 잔상들을 화폭에 옮겨 놓는다. 이렇게 자연을 보는 그 시형식에는 그 방법을 관통하는 그만의 흐름과 기법이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마음속의 풍경을 담아내는 방법이다. 
일반적으로 풍경에는 보통 눈에 보이는 시각적인 차원의 풍경이 있고,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내면의 풍경이 있다. 화가가 가지고 있는 그 마음속의 풍경, 박희숙은 후자인 그 풍경을 가슴에 두고 있다. 그러한 증거로 우리는 그가 풍경의 구체적인 묘사를 피하고 있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화가가 어떠한 대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거나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 대상의 인상이나 사실성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화가들의 일반적인 방식이다. 그러한 특징을 우리는 박희숙의 작품 전체에서 발견한다. 한 작품을 보자. 그의 풍경 가운데는 비 오는 날, 눈 내리는 날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이 있다. 또한 작열하는 듯한 핑크빛의 열정적인 꽃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설산의 눈처럼 깎아지른 빙벽의 풍경도 있다. 그것들은 고요한 자연의 인상을 닮아 있기도 하고, 휘몰아치는 겨울의 한 순간을 떠올린다. 기본적으로 자연의 대상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끌어당겨 확산시키거나 화폭 전면에 퍼트린다.  그가 자연을 바라보는 데 각기 다른 색채의 필터를 눈에다 달고 있는 것처럼 환상적이다. 그러면서도 색점들이 가지는 특성과 형태의 통일감을 보여 주기도 하고 아울러 거의 전면회화를 떠올릴 만큼 전우 좌우로 향하여 자유분방한 형식을 나타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