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인생의 고뇌와 희열, 그리움과 사랑을 담은 작품세계
“격조 높은 그림으로 희망의 나래를 펼치다!”
인생의 고뇌와 희열, 그리움과 사랑을 담은 작품세계
Melting the joy, love, pain and missing into paintings

도전과 변화로 일군 작품에 평론가들이 찬사.
한 예술가의 작품세계는 그가 몰두하고 천착하는 정신의 깊이에 따라 펼쳐지며, 사색에 비례해 원숙되고 내면이 주관적인 시야로 표현된다. 이런 관점에서 서양화가 황두순 작가는 누구보다 다양한 소재를 소화하며 자유자재의 격조 높은 작품을 지향해 가고 있다. 오래도록 내면을 관조하고 작품에 몰두하는 그의 작품 세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뉠 수 있다. 풍경화, 인물화 및 정물화, 그리고 꽃을 소재로 한 자유로운 창작이다. 특히 최근까지 지속해오는 꽃 작품들은 그 나름의 주관적 해석 속에 이를 보듬는 부 소재로 하여 주요 평론가들로부터 비상한 관심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이런 작품의 원천은 탄탄하게 다진 기반과 오랜 작업에서 나온다. 그러면서 삶에 대한 깊은 사유와 성찰에서 비롯되어진다. 그리하여 작품 외적으로 얻어진 불필요한 부분의 체념, 이해의 폭을 더 넓힌 진정한 작가의 반열에 올라 있다. 황 작가는 오래 전부터 많은 여행과 사생을 통해 작가적 기반
과 역량을 축적시켜 왔다. 풍경화는 미화의 흔적이 지나치게 나타나지 않는다. 지극히 냉철하면서 자연을 응시하면서 단지 눈에 보이는 사실에 충실하면서 색채의 화려함을 경계하고 있다. 이런 그림이 담담하게 느껴지는 것도 색채 이미지에 대한 절제와 무관하지 않다. 그림 모임에서 15년을 지켜보며 황 작가를 잘 아는 김서봉 한국풍경화가 회장(작고)은 “그녀는 말 숱이 적고 결코 가볍지 않은 몸짓으로 캔버스 앞에서 지극정성으로 묵묵히 작업을 해가는 작가다”
고 피력한 바가 있다. 신항섭 미술평론가도 “그는 작가적인 시각, 즉 시각적인 즐거움만 쫓는데서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 대체로 현장 작업임에도 묘사력 보다는 실제감을 전달하는 데 힘썼다.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감정을 옮겨놓는 데 집중한다” 면서 “세부 묘사에 집착하지 않고 보다 생생한 현장성을 살리는 것을 이상으로 여긴다. 더불어 화려하진 않으나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 이미지는 감상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이 강하다. 아름다운 색채 및 화려한 묘사를 배재했음에도 진솔한 마음이 그림 속에 녹아들고 있기 때문이리라 ”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움이 사무친 작품 세계에 마음 숙연케 해.
하지만 늘 창작에 목마른 황 작가에겐 무엇보다 새로운 변화가 필요했다. 그것은
보다 자유로우면서 주관적인 해석을 해가는 자신만의 창작 세계를 찾는 일이었다. 이전부터 풍경화 등에서도 간간히 나타나듯 그대로의 묘사에만 치중하는 게 아닌 깊은 의미에서 화의를 결여시키는 기로에 들어섰던 것이다. 그는 이것을 ‘꽃’ 을 소재로 해 바꾸어 나갔다. 물론 이것은 견실한 소묘를 기반으로 해 소재 및 대상에 구애받지 않고 폭넓은 작품을 아우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대해 박명인(朴明仁) 미술평론가는 “황두순의 이러한 형태의 결여는 가장 깊은 초현실적인 엄숙미(嚴肅美)라든가, 또는 신비감을 표출하려는 의도였고, 가장 깊은, 가장 중요한 자신의 인생의 지울 수 없는 궤적들, 이른바 일심적(一心的) 영역을 은유시킨 공간이다. 사실 미술제작에 있어서 공간을 강조하는 것은 나쁜 것만은 아니다. 미술에 있어서 여러가지 형태의 미가 분출되는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장 심오한 영역
임에 틀림없다.” 고 호응하며 피력했다. 이런 작품에 대해 황 작가는 “화의를 사실 안에 표출하는 것도 좋지만, 정말 깊은 의미로서의 화의를 결여시키고 싶은 충동심리가 작용했다.”고 말한다. 이 같은 작품의 변화와 줄기 속에는 무엇보다 인생의 가장 큰 시련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들을 하늘로 먼저 보내고 만 것이다. 세상이 모두 무너지는 심정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어렵사리 마음을 추스린 작가는 영원히 가슴에 묻었고, 모성과 그리움이 가득 찬 작품을 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2010년부터 자유로움과 주관적 해석이 깃든 꽃 작품을 본격적으로 펼쳐갔다. 예를 들면, 형광색 처럼 밝게 빨강색 바탕 위에 둥둥 떠 있는 파란색 수국, 밝은 연두색 바탕에 그려진 주황색 튜울립, 노란색 바탕 위의 빨간색 장미 등이 그러하다. 이는 주인공인 꽃을 돋보이기 위한 배경색만은 아니다. 꽃과 함께 아니, 꽃보다 더 강렬한 색채로 자신을 드러내곤 한다. 그리하여 바탕과 보색 관계에 있는 꽃들은 자신의 색채로 주변과 잘 어울려 마음을 이끌어 가고 있다. 이는 작가가 내면에 잠재된 심리적 욕구, 지난 시간 마음의 외로움과 고통을 잠재우고 일어서는 자신의 색채 언어로 그림을 통한 그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소통인 동시에 마음 치유 언어이기도 하다.
작품 외에도 무욕절제, 진실과 선함으로 소통이어가. 황 작가의 그림 인생은 한 마디로 도전의 연속이다. 다행스럽게 이런 작품의 의미를 알아차린 사람들은 “마치 고흐의 작품 같다. 잘 그린 그림은 아니지만 마음이 움직이는 그림이다” 는 호평을 내놓는다. 또한 작가의 작품 분위기는 프랑스 후기 인상주의 작가 고갱과 흡사하다. 고갱의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작품에는 타이티섬에 전해지는 전설 속의 여신상과 그 곁에 고갱의 딸 알린이 그려져 있다. 분신처럼 아끼던 딸 알린이 죽고 작가는 여신의 힘을 빌어 되살리고자 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황 작가는 자신이 꽃이 되어 악기를 다루는 아들을 비춤으로써 오버랩 되어져 더욱 마음 아리게 만든다. 그는 이와 비슷한 그림을 그리며 지난 시간의 아픔을 극복하고 아트페어와 해외초대전에 여러 번 참여했다. 작품들은 전시마다 곧잘 팔려 이목이 집중됐고 중국 북경에서 내놓은 4점은 다 팔리기도 했다. 황 작가는 “혼자 여러 꽃들을 염두하고 이런 작업을 진작부터 하고 싶었다” 면서 “진정한 예술이란 고행이다” 고 예술 철학을 밝힌다. 결론적으로 황 작가는 누구보다 예술을 향한 단호한 의지와 집념이 매우 강한 작가임에 분명하다. 그는 오랜만에 5월 25일부터 6월 8일까지 서울 종로의 ‘서경갤러리’ 에서 여러 꽃 작품을 가지고 초대개인전을 갖는다. 박명인 미술평론가는
작품 평 말미에 “천붕지괴(天崩地壞 ;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짐) 고통을 이겨낸 의지, 무욕절제의 편안함, 예술에 대한 집념, 진실을 추구하는 선한 마음,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이 뭉쳐서 이룬 것들이 황두순의 미적 개념의 바탕인 것이다”고 덧붙였다. 어쩌면 부모에게 자식이란 존재는 단편적인 설명으로 절대 부족할 그런 존재이자 영원한 숙제인 듯하다. 황 작가에게 있어 ‘그림’ 이란 하늘에 오른 아들의 영원한 응원과도 같다. 그는 자식을 앞세운 세속의 눈보다는 지금의 모습 그대로 보아주길 바란다. 그가 오래도록 작품 활동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따뜻한 격려와 마음의 응원을 함께 보낸다.

- 홍기인 기자
사실성 사의(寫意)를 회화적 사유(思惟)로 성립시키는 과감한 시도_박명인(미술평론가, 한국미학연구소 대표)
사실성 사의(寫意)를 회화적 사유(思惟)로 성립시키는 과감한 시도
- 대상으로부터의 표상(表象)은 쾌(快), 불쾌(不快)의 감정에 따라 식별하게 되는 것

박명인(미술평론가, 한국미학연구소 대표)

사실적인 사물을 표현할 때 필연적인 대상이라고 해서 그대로 표현한다면 그 화가의 
개성표현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개성이란 화가의 감성에 따라 자유롭게 자신의 화의(畵意)를 전개해야 한다. 그중에서도 근자에 많은 화가들이 꽃을 주제로 삼고 있어서 귀추가 주목되었는데, 이번 황두순의 꽃을 주제로 한 전람회를 계기로 심층적 분석을 다시 한번 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작품에서 일반적인 정물화의 개념과 다른 깊이있는 화의와 작가적 의도를 발견하게 되었다.
첫째 배경처리가 단순한 단색으로 처리되어 있으나 그 화의(畵意)는 남다르다.  정물에 대한 배경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고 있는 공간이다. 특히 공간표면이란 공기와 접촉하고 있는 물체의 일부이고 이 공기라는 물체에 빛이 반사되면 색채는 무색이 된다. 이러한 공기 역학적 색채논리를 응용하여 꽃이라는 물체를 부각시키면서 직물 평면에 색채에 의한 공간감과 원근감을 조성하고 꽃이라는 매체를 공간에 존재하는 자연의 생명으로 완성했다. 그런 다음 황두순은 그 공간을 통해 세계의 많은 매체와 대화를 한다. 시간과의 대화, 역사 속에 묻혀있는 많은 궤적과의 대화, 자신의 인생 여정에 있었던 질곡의 사연들과의 대화, 형제와의 대화, 멀리 떠난 가족간의 대화, 헤어진 가족과의 대화. 다시만난 친구와의 대화,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과의 대화. 그렇기 때문에 무형상의 단순한 공간일지라도 많은 형상들이 은유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발언하는 꽃. 그것은 일상적인 경험에서는 얻을 수 없는 미적 체험의 결실이고 화가로서 사물을 주제적으로 전개시키는 자연적 태도이며 천붕지괴(天崩地壞) 이후에 변화를 가져온 황두순의 이성적 자연주의 태도이다. 
둘째, 구성적 주관의 사실 존재인 꽃을 만선만색의 질과 양이 가득찬 물질로 파악하는 것이다. 질은 직감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대상으로부터 받아들인 표상을 스스로 쾌 또는 불쾌 의 감정 여하에 따라 대상을 식별하게 하는 것이다. 또한 양은 인간의 공통개념으로서 
대상의 미적 판단을 공유하고 있는 것. 그리고 감성보다 주어진 자극을 그 상에 적용시킨다.
결국 질과 양은 직감적 반응과 감성적 자극을 대상에 적용하게 되는데 이 질과 량이 협화를이루면서 황두순의 표상은 완성되어 간다. 특히 명제에서 나타나듯이 여린 생명과의 대화에서 본질적인 아름다움이 무엇인가 하는 매체적 의미 파악으로 염원하는 기도가 담겨있다.
셋째, 사실 결여의 미적 의미가 있다. 황두순의 표상을 분석해 볼 때, 근자에 화가들이 꽃을 주제로 묘사하면서 주변에 많은 사물들을 채워넣어 전체 화면에 꽃이라는 존재는장식적 역할뿐인데 비해 소재의 배경을 밀대로 밀어내어 단색화한 것이 독특한 개성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꽃이라는 사물의 형상을 실제보다 크게 또는 작게 하거나 불가사의한 색으로 표현함으로써 환상적인 상상력을 배가하여 정신력을 과시하고 있다. 작품에서  사물의 형태를 밀대로 밀어낸 공간에는 작품 안에 사실 형상의 결여로 생기는 미적 효과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공간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형태는 아니다. 그러나 밀대로 밀어냄으로써 마치 의도적으로 구도를 잡고 표출시킨 것과 같은 디테일 효과가 있다. 



과연 작품에 사물의 형태를 배제하고 싶었던 심리 작용은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미적 요소뿐 아니라 많은 의미가 내재되어 있다. 아픈 상처에 대한 자신과의 싸움의 흔적도 묻어두고 있다. 천붕지괴를 당하고서도 정신적 혼란 속에서 그래도 방황하지 않고 그림에 몰두하면서 이겨냈다. 그러한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처음에는 사람의 흔적들을 찾아다니며 바다도 그리고 산도 그리고 풍경속에 이야기들을 담아 풍요로왔던 자신의 삶과 윤택한 형상들을 도출시켜왔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가 부질없는 삶의 속성들이라며 자신의 작품을 발전시키는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젊은 나이에 무욕절제의 철학을 깨우친 것이다. 우리는 대승이 열반하는 상태를 안심입명이라고도 말한다. 이는 불가의 언어이기는 하지만 생사이해에 흔들리지 않고 태연하다는 말이다. 절명 순간에서도 태연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미술에 있어서의 독창적인 예술적 작품을 만드는데도 죽음에 직면하는 것과같은 정신집중이 필연적이라고 말하는 화가도 있다. 몰두한다. 집중한다. 몰입한다. 등등 많은 말들이 있지만 이는 바로 황두순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필자는 인터뷰 중에 그의 말을 들으며 안심입명과 같은 회화에 대한 집요한 열정이 없었다면 오늘 그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현실을 직감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삶의 흔적들을 묻어 버린 공간이 의식적 행위만은 아니다. 회화직법으로 분석해 보면 그는 꽃이라는 화려한 사물의 생명력을 강하게 부각시키기 위해 배경의 현란한 사물을 구상하지 않고 오히려 배제시켰으며 색 평면에 의해 환상성을 강조했다. 따라서 사실성과 전혀 다른 색으로 꽃이나 사물들의 색을 구성하기도 했다. 흰 새들이 앉아 있는 사의를 사실성에서 더 비약시켜 빨간 새, 노랑 새, 파랑 새 등 혼성 색채들을 구사하여 자신의 사유가 회화적으로 성립되기를 기도하면서 과감하게 시도했다. 이를 두고 ‘사물을 표현할 때  느닷없이 푸른 강에 빨강 색을 칠하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했습니다’ 라고 당시 심리변화를 말하기도 한다. 형상에 있어서도 나비들의 Kissing motion을 그려 넣어 지능이 없는 곤충들의 애정 표현에 의해 미물도 고귀한 번식 본능이 있다는 자연주의적 발상을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밀대에 밀려 사라진 많은 형상들은 회화적 색감으로 화려하게 다시 태어나면서 
캔버스 위에 완성된 작품에 밀대에 밀려 사라진 형상과 실제로 표출된 존재물(꽃. 곤충. 인물. 풍경 따위)과의 양자를 관통하는 황두순의 기가 느껴진다. 그것은 숨겨진 음적인 것, 그리고 표현된 양적인 것이 협화적인 생명력을 생성하는 음과 양의 법칙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재된 미가 외형적인 미와 일치되었을 때의 미의 형태는 화가가 창의성을 표출하게 되는 외형적 미도 미이지만 화가의 상상력에 따라 달라지는 형상도 미인 것이라는 발언이다. 이러한 황두순의 감관(感官)에 의해 사물을 관조하는 시각은 체험적 직관(lntuition)과 감응(Affections)에 의한 순수한 지성적 표출이며 객체의 의의에 대한 미적 도전으로써 새로운 형상을 도출해 내고 있다. 이것이 곧 일상생활에 닥친 천붕지괴를 떨쳐낼 수 있었던 심미의식. 심미경험. 심미수양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
이번 꽃을 주제로 한 전람회는 13번째 전람회, 흔히 꽃이란 소재에 대해 단순한 소묘적 견해로 말하는 경향도 있지만 꽃이야말로 가장 많은 선과 가장 많은 색을 풍부하게 지닌 유일한 사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꽃을 주제로 삼느냐 부제로 삼느냐 하는데 그 역할은 달라진다. 
현대미학에서 미술이란 인류 최후의 조화의 현상이라고 말한다. 사람의 손으로 만드는 것도 
자연현상도 모두 미적 조화현상이라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정신이 요구하는 것은 삶을 가치있고 윤택하게 만드는 지혜, 영성, 정신에 의한 진과 선과 미이다. 노자의 도경에도 같은 말이 있다. 착하지 않은 사람은 아름다울 수 없다는 것이다. 착한 사람의 선행은 인의예지신을 행동규제의 덕목으로 삼고 선의 경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한다. 그만큼 선에 도달하기도 어렵고 착한 사람으로 존재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노자는 이러한 경지에 도달해야 착한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어서 착하게 산다는 것, 아름답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실감하게 한다. 현대사회에 노자가 말하는 착한 사람이 존재하는지 의구심이 앞선다. 진실된 선으로 미에 도달해야 한다는 노자의 사상이야말로 진선미의 교본인 것이다. 왜 고대로부터 미를 다루는데 진과 선이 전제되어야 했는가를 뭇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미를 추구하는 화가라면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사상철학이라고 생각된다. 
천붕지괴의 고통을 이겨낸 의지, 무욕절제의 편안함, 예술에 대한 집념, 진실을 추구하는 선한 마음,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이 뭉쳐서 이룬 것들이 황두순의 미적 개념의 바탕인 것이다. 


화폭에 담은 그리움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여정

화폭에 담은 그리움과 사랑, 그리고 희망의 여정

 

- 인생의 고뇌, 희열, 그리움을 예술로 승화시킨 황두순 화가의 꽃 작품들

한 예술가의 작품 세계는 그가 몰두하고 천착하는 정신의 깊이에 따라 펼쳐지며, 사색에 비례해 원숙되고 내면이 주관적인 시야로 표현된다. 그것이 지나온 작가의 깊은 경험 속에 녹아낸 작품이라면 그런 느낌은 화폭에 고스란히 되살아나 남다른 추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이런 가운데 회화의 여러 장르를 소화하며 자유롭고 격조 높은 작품세계를 지향하는 서양화가 황두순 작가의 '꽃' 작품에 많은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꽃 들은 작가의 주관적 해석에서 상징적인 소재로 쓰였으며 이는 어떤 그리움이 듬뿍 담겨진 있다.

작가의 작품을 보면 형광색 처럼 밝게 빨강색 바탕 위에 둥둥 떠 있는 파란색 수국, 밝은 연두색 바탕에 그려진 주황색 튜울립, 노란색 바탕위의 빨간색 장미 등은 그저 주인공인 꽃을 돋보이기 위한 배경색이 아니다. 꽃과 함께 아니, 꽃보다 더 강렬한 색채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바탕과 보색 관계에 있는 꽃들은 자신의 색채로 주변과 잘 어울려 보는 이들을 편안하게 이끌어 가기에 충분하다. 이런 작품들은 작가가 겪었던 지난 시절의 깊은 고뇌와 그리움에 대한 표출이며, 나아가 예술을 향한 단호한 의지와 집념으로 빚어낸 것들이다. 그것은 곧 내면에 잠재된 심리적 욕구, 그것을 일깨우는 색채 언어로, 그림을 통한 많은 사람과 소통인 동시에 마음치유의 언어이기도 하다.

풍경화와 인물 등을 그리던 황 작가는 2006년 첫 개인전 이후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면서 2010년 부터 단순화시킨 꽃 이미지의 작품들을 내놓았다. 최근들어 작품에 더 혼신을 투영시키는 황 작가는 "진정한 예술이란 고행이다" 면서 강한 예술 철학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황 작가는 꽃 작품에 ‘더 조이’ 를 주제로 5월 25- 6월 8일까지 서울 종로의 서경갤러리(서울경찰청) 26번째 초대개인전을 가질 예정이다 < 취재 / 홍기인 기자>

사생과 소묘로 다진 진솔한 사실성_신항섭(미술평론가)

사생과 소묘로 다진 진솔한 사실성

- 신항섭(미술평론가)

사생은 화가에게 하나의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다. 자연을 찬미하기 위해서는 실상과 마주해야 하고 그 실상으로부터 감동을 느끼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감동한다는 것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표현충동, 즉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생은 실제의 자연과 마주하고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현장작업은 형태의 명확성 및 공간감, 그리고 생동감을 얻음과 동시에 삶에 대한 깊은 철학적인 사유를 수반하기 마련이다. 현장에서 그린 그림은 확실히 사진작업과는 다른 생동감을 제공한다.

황두순은 오랜 동안 사생에 전면해 왔다. 그리하여 생동감이 담긴 자연풍경에 대한 체험 및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사생을 통해 한 작가로서의 기반 및 역량을 축적하게 된 것이다. 그의 풍경화에는 지나친 미화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는다. 형태야 사실적인 묘사니까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색채를 통해 미화시키고 싶다는 욕구를 억제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아름다운 자연미에 현혹되는 까닭에 실제보다 더 아름다운 색채를 구사하고 싶다는 욕구를 물리치기는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그는 지극히 냉철하게 자연을 응시하면서 단지 눈에 보이는 사실에 충실하면서도 지나친 색채의 화려함을 경계했다. 어쩌면 그의 그림이 항상 담단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처럼 색채이미지에 대한 절제와 무관하지 않다. 어느 면에서는 실제보다도 좀더 무겁고 어둡다는 기분이 들 정도인 것이다. 이는 천성이거나 아니면 색채에 대한 뚜렷한 주관적인 해석의 결과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의 그림에서는 생에 대한 깊은 사유 및 성찰이 감지된다. 이는 그림에 대한 작가적인 시각, 즉 시각적인 즐거움만을 좇는데서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의 작업은 대체로 현장작업이기에 묘사력보다는 실재감을 전달하는 데 힘썼다.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감정을 옮겨놓는데 집중했다. 그래서 세부묘사에 집착하지 않고 보다 생생한 현장성을 살리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다. 어쩌면 공간감이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는 것도 사생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더불어 화려하지 않으나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이미지는 감상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호소력이 강하다. 아름다운 색채 및 화려한 묘사를 배제했음에도 진솔한 작가의 마음이 그림 속에 녹아들고 있기 때문이리라.

이처럼 자연으로부터 시각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눈을 뜨고 사계절의 순환을 체험하면서 작가적인 역량을 다져왔다. 그는 풍경을 포함하여 인물과 정물이 고른 수준을 유지한다. 견실한 소묘를 기반으로 하는 까닭에 이처럼 소재 및 대상에 구애받지 않고 폭넓은 세계를 아우르는 것이다. 정물화에서도 결코 색채의 과잉이나 남용을 허용하지 않는다. 화려한 순색을 통해 시선을 사로잡겠다는 생각이 없어 보인다. 한마디로 절제된 색채감각을 통해 소재의 진솔한 이미지에 접근하겠다는 생각인지도 모른다. 이는 보다 이성적인 접근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인물화는 그에게 새로운 도전이다. 자연사생으로 그림을 시작하였으니 물상의 형용과 채색 그리고 명함 및 원근은 자연스럽게 익힌 터이다. 그러나 인물은 자의적인 의지 및 감성을 지닌 동적인 대상인 만큼 그 구조적인 치밀한 이해가 선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뿐만 아니라 골격과 근육 구조로 인체에 대한 해부학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가 인체소묘에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한 것도 수시로 변하는 표정 및 입체감 그리고 동세를 정확히 포착하기 위해서다.

그는 최근 인물화에서 새로운 즐거움을 맛보고 있는 듯싶다. 주로 여행지에서 만난 아이들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물화는 스냅형식이다. 초상화처럼 경직된 포즈의 인물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카메라 사진을 이용하고 있지만 결코 평면적인 이미지는 아니다. 인체소묘를 통해 양감에 대한 이해 및 감각을 충분히 익힘으로서 사진의 재현이라는 문제를 넘어서고 있다. 더구나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인물화는 그에게는 보다 각별한 의미가 있는지 모른다. 천진무구한 어린이들의 해맑은 표정이야말로 이상적인 세계상을 구현하기 위한 초석일 수도 있겠기에 말이다. 그는 밝은 어린이들의 표정 속에서 진정한 인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른다.

한편 풍경화에서는 가능한 한 현실을 그대로 옮겨오려는 이전과 달리 부분적인 생략을 통해 주관적인 해석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이제까지 사실성에 추구했던데 비하면 적지 않은 변화인 셈인데, 재현성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조형적인 유희를 즐기면서 개별적인 세계를 지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리라. 이는 앞으로 전개될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변화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오랜 동안 사생에 전념했으니, 이제는 그로부터 벗어나 보다 자유로운 주관적인 해석을 통해 개별적인 세계를 지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마디로 변화가 필요한 시기에 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