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NOTE
2021-09-24 임창열 작가노트
임창열 임한나: 까마귀 날고 배 떨어지고
2018.7.7 ~ 7.16

임창열 작가노트

40세를 넘은 딸이, 함께 하는 전시회를 제안해 왔다. 20대 초반 프랑스에 유학, 미술 대학을 졸업한 딸은 작가로서 생존하는 삶을 뒤로 하고 에너지 산업 분야에서 그 동안 근무해 왔다. 그 딸이 잠깐 쉬어가고 싶다며, 아버지와 의미 있는 추억을 만들고 싶다며, “父女 展”을 구상한 거다. 

생각해 보았다. 어떤 주제로 작업해야 딸과 함께하는 잊을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 딸의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는지.  딸은 설치 작업을 한다고 했다. 그럼 난 어떤 평면 작업을 해야 딸의 작업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사과를 다시 그리기로 했다. 이번엔 흑백으로. 

난 내 화가인생에서 사과를 가장 많이 그렸다. 이 열매가 갖는 온갖 역사적, 과학적, 사회적, 종교적, 예술적 상징이 충분이 매력적이었고, 그 의미를 차치하고서라도 이 동그란 물체는 사물이 갖는 존재감 자체로 항상 내 시선에 도전해 왔고, 난 붓과 물감을 가지고 그 도전에 응해 왔다. 형용할 수 없는 색감이 눈부시게 관능적이었고, 빛을 꺾지 않는 모 없는 둥그스러움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을 맴도는 유혹이었으며, 모태 나무와 떨어져도 당분과 수분을 가득 품고 생명의 역할을 다하는 이 생물은 내게 용기였다.    
삶의 황혼에 이르러 내 주위를 살펴본다. 이젤 옆, 항아리, 바구니와 함께 언제나처럼 주름진 사과, 썩은 사과, 말라 비틀어진 사과가 뒹굴고 있다. 기억을 소환해 본다. 내가 캔버스에 영원히 남겼던 사과들. 사과를 주제로 했던 전시회들. 내 사과를 담았던 시선들, 그리고 떠나간 발걸음들. 내가 떠나고 남겨질 사과들. 그 사과를 또 바라볼 미래의 시선들. 

흑백으로 재현해 보고 싶었다. 상징의 무게를 내리고, 유혹의 색감을 떠나, 벌거벗은 사물을 조용히 관조하고 싶었다. 희미해지는 기억, 느려지는 감각, 흐려지는 시선, 그래서 더 간절해지는 생명과의 대면이기에, 겸손하게, 간결하게 그리고 더 깊고 끈끈하게 만남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이렇게 구현된 흑백의 사물을 다시 대면하니, 살아온 시간을, 모든 스쳐간 인연을 거리를 두고 고찰하게 된다.  

내가 이제까지 현란한 붓질로 재현했던 색깔들은 결국 이 黒 사과 에 집합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내 삶이 어떤 의미에서, 이 흙 사과에 수렴되듯이 말이다.
아직은 어디론가 계속 날아가고 싶은 딸은 이 黒 사과, 흙 사과를 어떻게 기억에 재편할까.  이 사물을 재현한 손을, 손의 주인공을 어떻게 추억할까, 묵묵히 딸에게 물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