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보이는 표면, 실재하는 표면-이희영

보이는 표면, 실재하는 표면
정인완 매체의 전개                                           이희영, 미술평론가

1990년대 10년간 정인완의 화면은 회화가 지닌 칠의 속성(the painterly)을 유지했다. 사진, 청동과 같은 물리적 대상을 화면에 적용할 때에도 칠은 그의 중요한 회화적 주장이었다. 이를 통해 그는 내면에서 분출하는 반응을 회화에 토해 내었고 "공간체험"연작(series)을 출발시켰다. 이 연작의 초기 버전(version)들은 얼굴 없는 인체나 몸통 없는 날개의 형상(figure)들과 간간이 완결되지 못한 물리적 대상(주로 동판)의 적용들로 부재, 절망 혹은 끝없는 기다림과 같은 연상을 자극한다. 형상이 없는 자리에는 몸짓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칠이 어김없이 채워졌다.
1990년대 중반 같은 연작을 구성하는 "문명에 대한 회상"버전의 작품들에서 칠은 황토의 평평한 적용으로 급격한 분출이 다소 누그러뜨려졌고 형상들이 칠보다 도식(graphic)에 더 많이 의존하는 것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놀림에 의한 얼룩과 거친 표면은 여전했다. 
문명이라는 개념적 주제를 다룸에도 그는 역시 칠을 통해 그의 회화적 주장을 펼쳤다.
이후 '90년대 말 카셀(Kassel)에서 제작된 드로잉들 또한 칠에서 유래하는 습성을 고수했다. 그래서 미술가의 손에서 직접 그어지는 휘갈김이나 속도가 그것들에 기록된 것이 발견된다. 그 방식으로 드러나는 형상들은 대상의 시각적 외관의 친절한 재현보다 중첩된 덩어리나 산만한 선의 뭉치로 화면에 자리한다. 이들은 일종의 상징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 그는 새로운 연작 "메이드 인 네이처"(Made in Nature)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거친 칠이 거의 잠잠해지고 표면은 매끈하게 바뀌어갔다. 부재하고 절망적으로 보이는 미완의 형상은 사라지고 대신에 적극적으로 재현된 대상의 사정들이 그대로 표면에 나타났다. 이 변화는 이전 10년간의 제작과 분명한 비약으로 비친다. 하지만 외부에 대한 강력한 주장은 지속된다. 정인완은 과일과 가축과 같은 농업 생산물과 함께 바코드를 그림으로써 관리의 편리를 위해 고안된 인공의 아이디에 대한 강력한 비판을 펼친다. 여기서 몇몇 대상은 제작자의 손길이 남긴 얼룩, 물감방울 그리고 속도와 같은 몸짓보다 사진사실주의에 접근된 정밀한 표현의 현장감으로 그 주장을 개진했다.  이 주장은 급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미술가의 동료들이 그의 동질성을 여전히 인정하게 했다.
이번에 걸리는 회화들은 2007년 봄에 보인 변화를 포함하는 새로운 시도의 결과물들이다. 나는 이 변화 앞에 이들 회화들은 "메이드 인 네이처"연작을 구성하는 하는 한편 앞으로 새로운 10년간을 개척해갈 정인완의 새로운 버전으로 본다. 지난 20년간 정인완 회화의 전개를 회고해 볼 때 처음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외부로 향한 반응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그의 출발은 고립과 부재에서 비롯되었다. 반면 그의 독일행 이후 자연에 대한 인공의 부조리와 같은 사회적 문제에 적극적으로 매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표면의 칠은 얇아지고 정교한 재현을 점차 허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음이 확인된다.
최근의 변화에 직면하는 그의 동료들의 당황스러움은 그와 같은 전개의 일관성을 유지할 강력한 주장이 없어 보이는 아쉬움에서 비롯된 듯하다. 패션에 편승하는 마네킹이나 유아적 호기심에 불과한 인형을 확대한 화면이고 보면 그러한 아쉬움은 당연할 법하다. 하지만 미술가는 여전히 자신의 회화가 인공과 자연의 대비를 통한 회화적 주장을 펼친다고 생각한다. 정인완은 다량 복제된 마네킹과 인형이 한 자리에 고정해서 요동치는 회색도시의 인파와 소음을 말없이 관찰한다고 한다. 이들의 모습을 화면에 재현함으로써 미술가는 과잉생산, 자본의 욕망, 물질만능과 같은 사회적 병리 현상을 고발할 것을 기대한다.
나는 초기의 연작에서 유래하는 칠의 노동이 지속되는 것에서 그리고 생생한 색면의 선명한 물리적 속성이 강조되는 것에서 그는 여전히 자신의 매체를 통해 외부에 반응하고 비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인형과 마네킹의 양감을 설정하는 엷은 칠의 점진적 변화(gradation)를 주목할 때 그것들의 형상에 따른 사정(figurative episode)은 감지되지 못한다. 즉 그것들이 그려진 표면을 응시하면 미술가의 손짓이 여전히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찬찬히 그 표면을 보면 입술에 반짝이는 밝음은 분명 칠의 속성에서 유래하는 붓질이다. 인형과 마네킹의 표면에 그려진 눈썹이나 화장이 재현될 때는 가차 없이 미술가는 세세한 사정을 따르지 않고 갓 짜낸 물감 그 자체의 속성을 허용한다. 여기서 정인완은 좁은 면적이지만 재현의 부담을 들고 묘사에서 자유로워진다. 이 자유는 인형과 마네킹이 이웃하는 색면의 칠에서 증폭된다. 색면들은 인공의 부조리에 대한 반응으로 도입된 바코드에서 변형된 것이다.
표면이 인형과 마네킹 또는 과일로 읽혀지는 것은 전적으로 비유(figurative)에 의존한 인식이다. 그것들이 묵묵히 한 자리에서 대면하는 문명과 인공은 비유의 세계이다. 왜냐하면 그 주체인 인간들은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전개할 때 비유를 손쉽게 활용하고 비유에 대부분의 사고를 의존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의 거장들이 개발한 단일시점의 환영이나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 번역되는 영상은 죄다 비유이다.
비유는 인간과의 유사성에서 출발하는 사고이다. 따라서 마네킹으로 읽혀지는 이미지와 그 표면, 그 이미지와 지루한 색면들의 물질감, 이들의 대비는 앞선 버전들과 동일하게 주장하는 매체로서의 특성을 갖는다. 이 지점은 비평이 가능하고 질문이 가능한 기회를 제공한다. 때문에 정인완의 매체는 여전히 인공의 부조리를 향한 항변을 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비유로 감지되는 표면 즉, 보이는 표면과 물리적 진실로 존재하는 표면 사이의 충돌은 초점이 빗나간 렌즈로 재현된 인형에서 훨씬 쉽게 감지된다. 사진기와 같은 광학기기가 제공하는 이미지가 오늘날 대부분의 환경을 뒤덮고 있다. 정인완은 이 번 버전을 통해 인공 대 자연의 대비에 머물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 만든 인식론적 환경 전반에 대한 비평을 시도한다. 그의 회화는 곧 보이는 것에 대한 현대인의 보편적 믿음을 재고하게 한다. 정인완은 처음 사사로운 내면의 문제를 분출하는 매체로 회화를 다루는 것에서 출발하여 독일의 새로운 환경에서 외부의 문제를 적극적으로 거론하는 방식으로 회화를 제작했다. 이 과정에 회화의 칠이 갖는 제스처의 직접성과 형상의 객관적 재현간의 조절을 통해 비평하는 회화로서의 동질성을 유지했다. 2007년에 드러나는 비약으로 그 동질성의 손상에 관한 염려를 야기하지만 회화표면의 물리적 특성과 시각적 특성을 대비함으로써 자신의 매체가 비평에 기여함을 확인시킨다. 여기에 단순한 대중적 취향의 소재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버전의 개발 가능성을 보이는 것으로 확인된다. 이제 그의 동료들은 이 번 전시회를 통해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