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작품서문 - Magic Garden

Magic Garden 작품서문

 

열린 풍경

 

우리의 삶이란, 공기 중의 분자로 내려앉은 과거의 기억이 삶의 풍경에 흡수되어 공존하면서 순환의 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그 가운데 ‘기억’이라는 장치를 가지고 있는 인간은 그 기억들을 추억하며 매일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자유롭고 싶다. 좀 더 자유로운, 열린 세계로 가기를 갈망한다. 이미 상정되어 있는 실재가 부재한다고 해서 불안에 떨거나 혼란을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자유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자유로운 영혼을 위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열린 공간으로 향하고 있다.”

김정선 작가의 신작 <매직가든> 시리즈는 이런 현존하는 우리의 삶과 기꺼이 맞이할 새로운 나날에 대한 이야기를 그녀만의 특유의 화법으로 이야기한다.

작가는 34살까지 꿈을 꿨다. 상공 70M를 매일같이 하늘을 날았다.

작품 속 풍경은 초 현실적 추상적인 공간이 아니다. 어린시절의 기억에 내재 되어있는 소환된 풍경이거나 한 번쯤 보았단 일상의 데자뷰의 공간을 펼쳐 보이고 있다. 꿈에서 하늘을 날며 보았던 풍경이니 만큼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시점, 심원법(深遠法)을 사용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입체감과 볼륨감을 제공한다.

이끼, 담쟁이, 넝쿨이 무채색 돌담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하늘, 수박 이파리, 은행나무, 시냇물과 시계풀, 그리고 뜰 안에 자리한 푸른 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평온한 정경을 만들어낸다. 틈에서 발견되는 자연과 사물의 본질을 순간의 기억을 통해 포착, 표현하고 있다.

짧았던 어린시절이지만 자연과 함께했던 기억을 작가는 잊은 적이 없다. 등장하는 소재들은 작가에게 내재된 기억의 덩어리, 소환된 과거 속 풍경이자 미래로 통하는 ‘문’(Gate)이다.

면이 꽉 차 있는 채색이 주를 이루는 것 같아 보이지만 작가의 작품은 면이 아닌 역동적인 선이 주를 이룬다. 양의 공간과 음의 공간이 만들어내는 패턴과 선율, 무의식 속에서 무대 위를 누비는 듯한 그의 드로잉은 잠들어 있는 세포를 깨어나게 할 만큼 감각적이고 독특하다. 등장하는 동물들 역시 작가 자신이다. 오리로서, 소로서, 강아지로서 관객들과 소통을 시도한다.

북한산이 보이는 카페테리아 작업실에서 대화를 나누는 내내 작가는 ‘무의식’, ‘육감적’이라는 단어를 수차례 사용했다. 그렇다. 내가 알고 있는 김정선 작가는 이제껏 색을 계산하여 써 본적이 없다. 본능적으로 충실하고 있었지.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색으로 표현하는 데 능숙했고, 특히 뛰어난 시각적 예민함이 그의 작품을 더욱 밀도 있고 첨예하게 만들었다.

그간 우리는 2010년 <Shadow>와 2014년 <여행자> 시리즈를 통해 김정선 작가가 마주한 ‘과거’와 ‘미래’를 개별적으로 경험했다. 

이번 2021년 <매직가든> 시리즈는 ‘현재’라는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시간 속에 존재하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사물’을 통해 전달하고, 또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이동시켜 미래에 대한 메시지를 함께 드러낸다.

“개인적인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 과거를 소환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지만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거, 현재, 미래를 일직선상에 올려놓아야 했다.”고 말하는 그녀는 이번 <매직가든> 시리즈를 통해 안과 밖이 하나로 묶이고, 모든 곳이 모든 곳으로 통하는 마법 같은 서랍장을 표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곳이 통하고 만나는 <매직가든>. 그녀가 만들어낸 풍경이 주는 위로는 관객과 작가 모두에게 선물 같은 시간을 선사할 것이다.

감각의 확장과 시각적 경험의 새로운 지평-윤진섭
                      감각의 확장과 시각적 경험의 새로운 지평

                                    윤진섭(미술평론가/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
                 Yoon Jin Sup(art critic/vice president of AICA)

 김정선은 사실주의 회화에 대한 기량이 매우 돋보이는 작가이다. 그러나 사실주의라고는 하되 말 그대로 대상의 겉모습을 캔버스 표면에 옮겨놓는 것이 아니라, 단색조의 상태를 유지, 비현실적인 화면효과를 창출한다. 그래서 사실 김정선의 그림은 대상의 재현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자연을 통한 정서의 구현이라는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독자적인 표현술을 낳고 있다. 화가에게 있어서 독자적인 표현술의 획득은 그 자체 생명과도 같거니와 다소 낭만주의 예술론에 근접한 이러한 해석이 시대착오적으로 들릴는지도 모르나 역시 현실은 현실인 것이다. 김정선은 엉겅퀴 꽃이 피어있는 강가나 드넓은 바다에 외롭게 떠있는 섬 등을 예의 치밀한 묘사를 통해 적막감에 감도는 자연의 정취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는 가령 핑크색조를 띤 엉겅퀴 꽃을 제외한 나머지 자연물은 연록색의 단색으로 처리, 비현실적인 느낌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그의 그림자 시리즈는 물을 중심으로 대칭적인 구조를 지닌 자연 풍경을 화면에 옮긴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을 이루는 요소는 물에 비친 달의 그림자이다. 캔버스에 나타난 달은 두 개인데 물속에 비친 것은 한결같이 어둡게 처리돼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김정선은 몽환적인 느낌을 배가시키고자 했다. 이처럼 일련의 초현실적인 화풍을 통해 김정선은 작가로서 두드러진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림자 시리즈와 혹은 그 전에 잠시 시도했던 명품 시리즈, 장쾌한 물줄기가 허공에서 떨어져 하얀 포말이 솟구치는 폭포 시리즈 등 김정선의 과거 작품들을 관류하는 정서는 욕망이다. 욕망은 어떤 것에 대한 결핍으로부터 나온다. 그의 화면은 분출하는 욕망에 대한 거침없는, 그러나 때로는 은유적인 표현 에 다름 아니다. 명품 시리즈는 가짜를 통해 기표만이 떠도는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풍자한 작품이다. ‘PRADA’라는 명품 라벨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핸드백의 아래에는 ‘29000’원 이란 가격표가 붙어있다. 저 멀리 고층건물이 즐비한 도시의 모습-그것은 얼핏 선남선녀의 소망의 대상인 뉴욕을 연상시킨다-이 보이고 그 위와 아래에는 두 개의 달이 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달은 반대의 모습으로 물 위에 비쳐 있다.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작가는 이런 형태의 반어(反語)를 통해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정선의 이처럼 예리한 비판의식은 루이뷔통의 명품을 소재로 한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대로 분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류의 작품들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폭포 시리즈로 진입하게 된다. 폭포 시리즈에는 ‘Allegro e Largo’ 등 음악의 지시어들이 붙어있다. 그는 작품을 제작할 때 반드시 음악을 듣는데 그 순간의 감정이 작품에 반영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이번 개인전의 주력 작품인 여행자 시리즈는 낭만과 환상의 섬으로 잘 알려진 그리스의 산토리니 섬을 소재로 한 것이다. 청색 단색조로 이루어진 건물들과 골목길, 바다, 하늘, 사람들을 묘사하면서 작가는 풍경의 일부를 사실에 가까운 색조로 옮기고 있다. 말하자면 현실과 비현실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면이 청색 단색조로 채워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비현실적이란 우리의 인식과 판단은 일종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때로 눈 안으로 강렬한 빛이 쏟아져 들어올 때 순간적으로 자연의 고유색을 인식하지 못하는 시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그처럼 강렬한 체험 아래서 때로 거기에 걸맞는 예술작품이  탄생한다. 강렬한 햇빛 때문에 살인을 하게 되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이 그렇다. 
 김정선은 예술 표현의 주체인 작가의 입장에서 느낀 감정을 낯선 회화적 기법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다. 관람객들은 그의 이 시리즈를 통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낯선 풍경을 대면하게 될 것이다. 김정선의 청색 단색조의 풍경은, 풍경은 풍경이되 작가의 독자적인 눈을 통해 재해석된 풍경이다. 청색은 작가의 예술적 비전을 화면 위에 풀어내는 매개물이다. 청색을 통해 관람객은 김정선의 예술적 시선과 만난다. 김정선의 청색 단색조 회화는 관람객의  시각적 경험의 지평을 확장시키는바, 그의 작품을 통해 관람객은 보다 풍부한 예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이다.       

[여행자] 감각의 확장과 시각적 경험의 새로운 지평_윤진섭(미술평론가/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

감각의 확장과 시각적 경험의 새로운 지평

 

- 윤진섭(미술평론가/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

Yoon Jin Sup(art critic/vice president of AICA)

 

 김정선은 사실주의 회화에 대한 기량이 매우 돋보이는 작가이다. 그러나 사실주의라고는 하되 말 그대로 대상의 겉모습을 캔버스 표면에 옮겨놓는 것이 아니라, 단색조의 상태를 유지, 비현실적인 화면효과를 창출한다. 그래서 사실 김정선의 그림은 대상의 재현 그 자체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자연을 통한 정서의 구현이라는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독자적인 표현술을 낳고 있다. 화가에게 있어서 독자적인 표현술의 획득은 그 자체 생명과도 같거니와 다소 낭만주의 예술론에 근접한 이러한 해석이 시대착오적으로 들릴는지도 모르나 역시 현실은 현실인 것이다. 김정선은 엉겅퀴 꽃이 피어있는 강가나 드넓은 바다에 외롭게 떠있는 섬 등을 예의 치밀한 묘사를 통해 적막감에 감도는 자연의 정취를 전달하고자 했다. 그는 가령 핑크색조를 띤 엉겅퀴 꽃을 제외한 나머지 자연물은 연록색의 단색으로 처리, 비현실적인 느낌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그의 그림자 시리즈는 물을 중심으로 대칭적인 구조를 지닌 자연 풍경을 화면에 옮긴 것이다. 여기에서 핵심을 이루는 요소는 물에 비친 달의 그림자이다. 캔버스에 나타난 달은 두 개인데 물속에 비친 것은 한결같이 어둡게 처리돼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김정선은 몽환적인 느낌을 배가시키고자 했다. 이처럼 일련의 초현실적인 화풍을 통해 김정선은 작가로서 두드러진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림자 시리즈와 혹은 그 전에 잠시 시도했던 명품 시리즈, 장쾌한 물줄기가 허공에서 떨어져 하얀 포말이 솟구치는 폭포 시리즈 등 김정선의 과거 작품들을 관류하는 정서는 욕망이다. 욕망은 어떤 것에 대한 결핍으로부터 나온다. 그의 화면은 분출하는 욕망에 대한 거침없는, 그러나 때로는 은유적인 표현 에 다름 아니다. 명품 시리즈는 가짜를 통해 기표만이 떠도는 사회의 암울한 현실을 풍자한 작품이다. ‘PRADA’라는 명품 라벨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핸드백의 아래에는 ‘29000’원 이란 가격표가 붙어있다. 저 멀리 고층건물이 즐비한 도시의 모습-그것은 얼핏 선남선녀의 소망의 대상인 뉴욕을 연상시킨다-이 보이고 그 위와 아래에는 두 개의 달이 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달은 반대의 모습으로 물 위에 비쳐 있다. 서로 등을 돌리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작가는 이런 형태의 반어(反語)를 통해 현실의 부조리를 고발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정선의 이처럼 예리한 비판의식은 루이뷔통의 명품을 소재로 한 다른 작품들에서도 그대로 분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류의 작품들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폭포 시리즈로 진입하게 된다. 폭포 시리즈에는 ‘Allegro e Largo’ 등 음악의 지시어들이 붙어있다. 그는 작품을 제작할 때 반드시 음악을 듣는데 그 순간의 감정이 작품에 반영되는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본다. 

 

 이번 개인전의 주력 작품인 여행자 시리즈는 낭만과 환상의 섬으로 잘 알려진 그리스의 산토리니 섬을 소재로 한 것이다. 청색 단색조로 이루어진 건물들과 골목길, 바다, 하늘, 사람들을 묘사하면서 작가는 풍경의 일부를 사실에 가까운 색조로 옮기고 있다. 말하자면 현실과 비현실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화면이 청색 단색조로 채워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비현실적이란 우리의 인식과 판단은 일종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때로 눈 안으로 강렬한 빛이 쏟아져 들어올 때 순간적으로 자연의 고유색을 인식하지 못하는 시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그처럼 강렬한 체험 아래서 때로 거기에 걸맞는 예술작품이  탄생한다. 강렬한 햇빛 때문에 살인을 하게 되는 카뮈의 소설 ‘이방인’이 그렇다. 

 김정선은 예술 표현의 주체인 작가의 입장에서 느낀 감정을 낯선 회화적 기법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다. 관람객들은 그의 이 시리즈를 통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낯선 풍경을 대면하게 될 것이다. 김정선의 청색 단색조의 풍경은, 풍경은 풍경이되 작가의 독자적인 눈을 통해 재해석된 풍경이다. 청색은 작가의 예술적 비전을 화면 위에 풀어내는 매개물이다. 청색을 통해 관람객은 김정선의 예술적 시선과 만난다. 김정선의 청색 단색조 회화는 관람객의  시각적 경험의 지평을 확장시키는바, 그의 작품을 통해 관람객은 보다 풍부한 예술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이다.       

 

Magic Garden 미술평단 김정선_김진엽 미술평론가

미술평단 Magic Garden 김정선

 

 

[미술평단_김진엽] 김정선 展 - 보이지 않는 매직가든

 

<열린 풍경>, 김정선 展 | 2021.08.18~09.17 | 표갤러리

 

김진엽 미술평론가

 

김정선의 그림들은 정감을 주지만 무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번 전시는 ‘열린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매직 가든(magic garden) 시리즈를 선보였다. 선과 면이 교차되는 풍경들은 마법처럼 우리를 과거의 저편으로 몰고 간다. 하나의 캔버스는 문이면서 길이다. 우리는 김정선이 만든 문을 통해 과거 기억의 풍경이라는 여정에 접어들고 곧 그가 만든 마법의 세계에서 길을 잃는다. 우리는 과연 들어간 문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김정선이 만든 풍경들은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는 공간으로 서정과 서사가 혼재된 공간이다. 우리는 과거의 추억 속의 서정에 매료되지만 혼재된 길에서 시대와 역사라는 서사의 벽에 막힌다. 그 서사는 인습에 대한 비판이고 고착된 의식을 가르는 칼날이 되기도 한다.

 

김정선은 이러한 서정과 서사의 대비를 위해 강렬한 아크릴의 색감들을 사용한다. 다양한 색면과 헝클어진 선들은 미로를 만들고 기시감과 데자뷔가 섞인 혼돈으로 우리를 이끈다. 또 뒷골목에 쌓여 있는 벽돌들, 흐르는 강물 옆에 서 있는 새들, 바람과 구름이 흩어져 만들어 낸 굽이굽이 산에는 과거의 숨결과 현재의 탄식이 함께 얽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김정선의 매직 정원에서 길을 잃었다. 한참 길을 잃고 헤매는 여정에서 우리는 과거의 추억과 지나간 시간의 기억의 울림에 혼돈에 빠지기도 하고, 또한 기쁘게도 하고 슬프게도 하는 무언가 이상한 유혹의 손짓에 정신을 잃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 모든 것이 허망하고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된다, 이 모든 혼돈과 절망은 모두 우리의 마음에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김정선은 이런 식으로 현실과 가상의 공간을 대비시키고 그를 통해 우리가 안식할 수 있는 ‘사이’의 공간을 제시한다. 이 공간은 우리의 방황하는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공간으로 여기에서 예술이 탄생하고 우리의 미래를 기약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만 그 공간은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정처 없이 떠도는 유목의 공간이다. 다만 우리가 그 공간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자 하는 굳은 결심을 보일 때 그 공간은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 본 원고는 2021년 미술평단 여름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그림자로 그려낸 욕망의 자서전-임훈아
김정선
Biography of Shadow
그림자로 그려낸 욕망의 자서전

임훈아  A&C 편집장 

- 그녀의 풍경은 실존적인 고독의 자서전이다. 작은 자연물에 대한 미시적인 응시를 통해 내면적 그림자를 투영시키는 방식으로 심연에 접근한다. -

잠시 숨을 멈추고 고요히 응시해야만 포착할 수 있을 것 같은 섬세한 풍경 속에 달빛 받은 잡초들의 메마른 그림자가 떨어진다. 
김정선의 <Blue Shadow>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장면이다. 앞선 개인전에서 상품 소비에 얽매인 현대인의 욕망을 집요하게 파고들던 작가가 자연 속에서의 식물의 '그림자'를 선택하다니, 그 변모는 뜻 모를 비약으로 느껴질 법도 하다. 그러나 그림자에 숨겨진 결을 헤아릴 수 있다면 김정선의 작품을 관통하고 있는 화두가 여전히 '욕망'의 문제임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으리라. 

모든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그림자를 갖는다. 그림자는 존재의 짝패이며 역으로 말하면 그림자는 존재를 입증하는 단서이다. 
원시인은 그림자가 밟히면 마치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은 듯이 느꼈다고 한다. 네팔에서도 하늘로 날아오르는 폭풍의 신인 산카라의 그림자를 찌르자 떨어져 목이 부러졌다는 이야기가 있는 만큼 그림자는 존재의 영혼을 암시하는 상징적 원형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감추어져있는 자기 이미지로서의 그림자는 표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는 자아의 어둡고 음습한 측면을 뜻하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개념을 통해 의식의 이면에서 끊임없이 자아를 충동질하는 거대한 에너지를 설명했지만, 융 Gustav Jung 은 이러한 무의식을 '그림자'라는 개념으로 보다 정교하게 제안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그림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자아 콤플렉스의 열등한 인격이며, 사회적인 필터에 걸려 옆으로 보류되고 의식화되지 않은 채 내면에 남아있는 응어리이다. 
스스로 이러한 그림자를 직시하기란 매우 어렵다. 어두운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기억'이 작용하던 시절부터 내면에 켜켜이 쌓여져 온 어둡고 우울한 편린들을, 마치 판화처럼 마음에 찍혀있으나 부정해 온 이미지들을 하나하나 들춰내어 반추하는 것은 얼마나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선은 <Blue Shadow>를 통해 이러한 내면으로의 여행을 떠난 듯이 보인다. 전작에서 화려했던 컬러는 옅은 푸른빛의 단색조로 침잠하면서 명징해졌다. 수평의 구도에 빈 여백적 구성, 식물들의 아련한 실루엣은 침묵과 명상, 내성적인 분위기를 전달한다. 쇼팽의 야상곡이 낮은 음조로 들리는 듯한 화면. 도시라는 소재에서 자연으로의 회귀, 작가가 마음 저리게 좋아하는 들꽃과 들풀들의 이미지가 보다 개인적이고 사변적인 코드로 작품이 전환되었음을 알려준다. 
서걱이는 소리가 날 만큼 메마르고 까칠한 촉각이 전해지는 풀잎들 사이로 피어오른 엉겅퀴는 다름 아닌 작가 자신의 이미지로 읽혀져도 좋을 듯싶다. 그렇다. 그것은 온실에서 화사하게 자란 장미가 아니라, 척박한 대지에서 외롭지만 꿋꿋하게 생을 이어가고 있는 엉겅퀴인 것이다. 김정선은 자신의 내면에 똬리를 틀고 있던 그림자를 식물들의 이미지를 빌어 캔버스에 투영하고, 다시 그 엉겅퀴와 식물은 그림자를 반사하며 내면의 깊이를 더해준다. 
존재는 필연적으로 그림자를 수반하며 그림자는 필연적으로 그것이 비추어질 스크린, 곧 거울을 필요로 한다. 캔버스는 작가의 거울이 되고, 그 속의 이미지는 다시 거울 면 위에 비추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작품 속의 거울 면은 호수도 아니고 강도 아니며 대지도 아니다. 달은 떠 있으나 그 어슴푸레한 푸른빛이 감도는 화면 속의 시간은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제3의 시간을 암시한다. 식물들 역시 대칭적 구도 속에서 반영되고는 있으나, 그 상이 서로 일치하지도 않는다. 실제로 작가는 작품의 밑그림을 그릴 때 전혀 사진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한다. <Blue Shadow>는 매우 사실적이어 보이지만 전혀 사실적이지 않은 마음의 심상으로서 작가는 처음부터 풍경의 사실적인 재현 따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독일의 19세기 낭만주의 풍경화가 프리드리히의 작품에서처럼 그녀의 풍경은 실존적인 고독의 자서전이다. 프리드리히가 광활한 하늘과 바다에 가로놓인 외로운 인간의 그림자를 그렸다면, 그녀는 작은 자연물에 대한 미시적인 응시를 통해 자신의 내면적 그림자를 투영시키는 방식으로 심연에 접근하고 있다. 

자연과 서정성, 그 속에 파고드는 욕망의 내면은 명품과 가방, 잘 빠진 자동차를 그렸던 전작의 관심과 그리 멀지 않은 것이다. 그녀의 전작을 살펴본다면 '욕망'의 문제가 그 외피만을 갈아입었거나 좀 더 내면적인 방향으로 진화되었을 뿐,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짝퉁 명품 가방을 하이퍼리얼리즘의 기법으로 그리면서 고작 기호를 소비함으로써 지시대상 자체에는 도달하지 못하는, 영원한 굶주림의 상태에 놓이게 되는 현대인의 불구적 상황을 꼬집었었다. 갈구하면 할수록 더 허해지는 현대인의 허기증을 상징하기 때문이었을까, 김정선의 가방은 공중에 부유(浮游)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가방의 배경에 나무와 풀들이 지면에 반영되고 있는 것은 그림자 모티프의 전단계라 할 만하다. 그리고 가방에서 스카프와 화장품들이 꺼내어져 나오는 다음 단계의 작품들에서부터 그녀는 자신의 내면의 것들을 끄집어내고 반영시키는 작업을 본격화한다. 이것이 그녀가 화단의 트렌드였던 하이퍼리얼리즘으로 나아가지 않고, 보다 자아성찰적인 방식으로 방향을 튼 지점이다. 
매끈하고 빤질한 가방의 표면에서, 그 속에서 쏟아져 나오고 풀어져 나오는 스토리로, 그리고 잡초 사이의 한 떨기 엉겅퀴로, 다시 그 그림자로…. 김정선의 이미지들은 한 목소리로 욕망을 변주한다. 이렇게 작가는 보다 고백적인, 혹은 자아와의 고통스럽지만 용기 있는 대면으로 쉽지 않은 길을 택하고 있다.    

융은 그림자를 회피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진실성'을 전제로 하며, 그럼으로써 피상적인 자아ego가 아닌, 완전한 자기self로 통합될 수 있음을 말했다. 
삶은 죽음으로 통하고 죽음은 다시 생을 잉태한다. 밤과 낮, 의식과 무의식, 표면과 심연, 빛과 그림자. 이분법적로 나뉘어져 있는 세상을 직시하며 김정선은 그것을 하나의 캔버스에 아우른다. 그것은 조건 지어진 작가의 실존과 아픔에 대한 인정과 받아들임이 아닐까. 그녀의 작품에 그려진 초승달이 다시 그믐달로 반사되고 있는 것처럼 완성을 향한 달의 순환이 또 다른 길을 제시하기를. 더 큰 작가적 실존으로 나아가기를.    

그녀의 꿈, 물에 들어가다-김종근
그녀의 꿈, 물에 들어가다.

김정선이 돌아왔다. 오랫동안 마산에서 레지던시 기간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온 그녀의 작업은 한층 더 세련되고 용감해졌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레지던시 동안 집요하게 추구해온 <물 >의 이미지 연작은 우리들을 숭고한 감정과 내면의 침묵적 언어로 안내 한다. 
그녀가 폭포에 풀어 놓은 푸른 색채의 진동에서 우리는 저항할 수 없는 그녀의 파도와 물결에 흔들림을 발견한다. 
김정선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그 흔들림의 본질과 에너지는 무엇일까 ? 
우리가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적인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공동묘지에 뛰어놀던 그의 어린 시절과 어머니의 죽음을 살펴 봐야하듯이, 김정선의 그림을 해석하기 위해 그녀의 소녀시절고백으로 거슬러 가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소녀시절 물에 빠져 본 몇 번의 경험이 있다. 한번쯤은 경험해 볼 수 있는 일이겠지만 나에게 물이란 공포의 상징이자 가까이 할 수 없는 위협의  대상이었다. 허우적대는 그 순간 물은 인체처럼 살아서 꿈틀대더니 수 많은 사악한 생명체가 되어 날 밀고 당기는 듯 한 엄청난 공포가 느껴졌다.” 
이처럼 그녀에게 어린 시절 물은 추억속의 친근한 대상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의 순간을 넘나드는 위험한 경계의 지대로 각인되어 있다. 
김정선은 그림자 시리즈 이후 작품 속에 이런 공포의 트라우마가 감지되는 어린시절 단편의 이미지를 일관되게 고집 해왔다.
구체적으로는 그 공포가 강이 되거나 바다로 태어나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에게 강이나 바다는 물의 힘을 가진 위협적인 곳으로만 인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아픈 추억을 서슴없이 악몽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악몽의 이미지는 그녀 자신에게 아주 깊은 기억의 층이 되어 물의 이미지로 되살아 나는 것이다.
그에게 회화란 이런 상처와 트라우마의 흔적이 되는 것이다. 마치 화가 뭉크의 그림속 공포처럼 말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이 악몽의 색조는 푸르게 때로는 붉게 그리고 보라색으로 변해왔다. 
작가는 그 두려움의 대상들이 사라지는 찰나들을 끈질기게 붙잡으면서 그림이 무엇인가라는 회화의 물음에 이렇게 답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아이러니이다. 그녀가 그렇게 싫어한 물을 다시 화폭 속에서 천연덕스럽게 물의 이미지로 재현한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역설적이다.  
작가에게 이런 아프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다시 현실에 덤벼들면서 묘사한다는 것은 그 악몽을 벗어나기 위한 작가의 지독한 의지이며 그 공포에서의 탈출일 것이다. 
그는 그 어린시절의 흔들림을 이렇게 색채로 파도의 표정으로 폭포의 떨어짐처럼 끌어 올린다. 
그러기에 집요하게 물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향한 그의 열정은 작가의 내면을 드러내는 예술가의 오랜 관습처럼 격정적이다.   
모네가 지베르니의 정원에 수련을 통해서 어떤 평화를 얻었듯이, 조지아 오키프가 사막의 풍경에서 자신의 초상을 발견하듯이 그녀도 그 물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존재 방식을 숨겨 놓는다.
“강이나 바다란 인간에게 부정 할 수 없는 친숙한 자연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괴력을 가진 무서운 대상일 뿐이었다.“ 어쩌면 그가 화면 가득 물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일은 그 자신의 말처럼 아이러니컬한 일임은 틀림없다. 
“물 안에서 한없이 약해지고 추락해 가는 자신감을 극복하고 싶었다. 그것은 내가 만든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본능” 같은 그런 것, 이처럼 그녀는 화가로서도 매우 본능적이며 적극적이다. 마치 해일이 이는 바다 위에 거침없이 뛰어 들어가 휘저으며 캔버스의 표면에 닻을 내려놓고 요동치듯 붉고 푸른 물감을 풀어 제친다. 
어린시절 아픈 순간과 감정이 그로 하여금 이제는 매우 절제된 색채와 함축적인 형태로 
물의 세밀한 표정들을 포착한다. 
그림을 보는 우리들은 주저없이 그녀의 강물이나 파도 혹은 폭포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본능적인 삶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 그 열정은 절대적인 차원에서 풍경처럼 느껴지지만 작품들은 하나 같이 내면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이제 그의 그림은 바다나 강 같은 화면속의 풍경에서 여행하고 있다. 그 여행에서 그녀는 
여자로서 겪어내야 하는 삶의 흔적들을 바다에다 강에다 쓸어 담는다.
그리고 그림 속에 두려움과 거대한 해일들은 이제 그녀에게 예술적 영감과 힘이 되어 화폭 속에서 서서히 부활한다. 
그것은 마치 뱃 머리에 몸을 묶어 폭풍과 파도의 해일을 직접적으로 겪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고자 했던 화가 윌리암 터너에 심경이 그러했으리라 .   
김정선에게 이제 물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도 슬픔의 모티브도 아니다. 
비록 그의 화면 속에 폭포나 물의 이미지가 한편의 삶을 보듯이 드라마틱하고 격정적이지만 
그 삶의 풍경처럼 서술적이고 순간들이 만나 거대한 파노라마를 연출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THIS IS OILE” 라 불리는 그녀 작업의 제목들은 시각적인 것으로만 보아서는 안되고 가슴과 뜨거운 색채로 읽어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곧 파도가 되고 , 자신의 기억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바로 삶이며 자신의 기억속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예술가들이 새삼스럽게 창조적인 순간에 자신들의 속내와 본질을 드러낸다는 사실들을 확인하게 된다. 
회오리 치듯 눈길을 사로잡는 그윽한 색채놀이와 자신의 감추어진 초상, 그 곳에 던져 새롭게 일어나길 꿈꾸는 열망,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김정선 그림의 감출 수 없는 매력이 이것 아닐까 ? 

김종근 홍익대 겸임교수 미술평론가 

내면 풍경의 그림자를 찾아서-김종근
그녀의 꿈, 물에 들어가다.

김정선이 돌아왔다. 오랫동안 마산에서 레지던시 기간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온 그녀의 작업은 한층 더 세련되고 용감해졌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레지던시 동안 집요하게 추구해온 <물 >의 이미지 연작은 우리들을 숭고한 감정과 내면의 침묵적 언어로 안내 한다. 
그녀가 폭포에 풀어 놓은 푸른 색채의 진동에서 우리는 저항할 수 없는 그녀의 파도와 물결에 흔들림을 발견한다. 
김정선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그 흔들림의 본질과 에너지는 무엇일까 ? 
우리가 르네 마그리트의 초현실적인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 공동묘지에 뛰어놀던 그의 어린 시절과 어머니의 죽음을 살펴 봐야하듯이, 김정선의 그림을 해석하기 위해 그녀의 소녀시절고백으로 거슬러 가 볼 필요가 있다. 
“나는 소녀시절 물에 빠져 본 몇 번의 경험이 있다. 한번쯤은 경험해 볼 수 있는 일이겠지만 나에게 물이란 공포의 상징이자 가까이 할 수 없는 위협의  대상이었다. 허우적대는 그 순간 물은 인체처럼 살아서 꿈틀대더니 수 많은 사악한 생명체가 되어 날 밀고 당기는 듯 한 엄청난 공포가 느껴졌다.” 
이처럼 그녀에게 어린 시절 물은 추억속의 친근한 대상이 아니라 생명과 죽음의 순간을 넘나드는 위험한 경계의 지대로 각인되어 있다. 
김정선은 그림자 시리즈 이후 작품 속에 이런 공포의 트라우마가 감지되는 어린시절 단편의 이미지를 일관되게 고집 해왔다.
구체적으로는 그 공포가 강이 되거나 바다로 태어나는 것이다. 어쩌면 그녀에게 강이나 바다는 물의 힘을 가진 위협적인 곳으로만 인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아픈 추억을 서슴없이 악몽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악몽의 이미지는 그녀 자신에게 아주 깊은 기억의 층이 되어 물의 이미지로 되살아 나는 것이다.
그에게 회화란 이런 상처와 트라우마의 흔적이 되는 것이다. 마치 화가 뭉크의 그림속 공포처럼 말이다. 생과 사의 경계에서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이 악몽의 색조는 푸르게 때로는 붉게 그리고 보라색으로 변해왔다. 
작가는 그 두려움의 대상들이 사라지는 찰나들을 끈질기게 붙잡으면서 그림이 무엇인가라는 회화의 물음에 이렇게 답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아이러니이다. 그녀가 그렇게 싫어한 물을 다시 화폭 속에서 천연덕스럽게 물의 이미지로 재현한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역설적이다.  
작가에게 이런 아프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다시 현실에 덤벼들면서 묘사한다는 것은 그 악몽을 벗어나기 위한 작가의 지독한 의지이며 그 공포에서의 탈출일 것이다. 
그는 그 어린시절의 흔들림을 이렇게 색채로 파도의 표정으로 폭포의 떨어짐처럼 끌어 올린다. 
그러기에 집요하게 물의 다양한 이미지들을 향한 그의 열정은 작가의 내면을 드러내는 예술가의 오랜 관습처럼 격정적이다.   
모네가 지베르니의 정원에 수련을 통해서 어떤 평화를 얻었듯이, 조지아 오키프가 사막의 풍경에서 자신의 초상을 발견하듯이 그녀도 그 물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신의 존재 방식을 숨겨 놓는다.
“강이나 바다란 인간에게 부정 할 수 없는 친숙한 자연임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괴력을 가진 무서운 대상일 뿐이었다.“ 어쩌면 그가 화면 가득 물의 이미지를 그려내는 일은 그 자신의 말처럼 아이러니컬한 일임은 틀림없다. 
“물 안에서 한없이 약해지고 추락해 가는 자신감을 극복하고 싶었다. 그것은 내가 만든 억압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본능” 같은 그런 것, 이처럼 그녀는 화가로서도 매우 본능적이며 적극적이다. 마치 해일이 이는 바다 위에 거침없이 뛰어 들어가 휘저으며 캔버스의 표면에 닻을 내려놓고 요동치듯 붉고 푸른 물감을 풀어 제친다. 
어린시절 아픈 순간과 감정이 그로 하여금 이제는 매우 절제된 색채와 함축적인 형태로 
물의 세밀한 표정들을 포착한다. 
그림을 보는 우리들은 주저없이 그녀의 강물이나 파도 혹은 폭포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그 안에 본능적인 삶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 그 열정은 절대적인 차원에서 풍경처럼 느껴지지만 작품들은 하나 같이 내면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이제 그의 그림은 바다나 강 같은 화면속의 풍경에서 여행하고 있다. 그 여행에서 그녀는 여자로서 겪어내야 하는 삶의 흔적들을 바다에다 강에다 쓸어 담는다.
그리고 그림 속에 두려움과 거대한 해일들은 이제 그녀에게 예술적 영감과 힘이 되어 화폭 속에서 서서히 부활한다. 
그것은 마치 뱃 머리에 몸을 묶어 폭풍과 파도의 해일을 직접적으로 겪고 그것을 그림으로 그리고자 했던 화가 윌리암 터너에 심경이 그러했으리라 .   
김정선에게 이제 물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도 슬픔의 모티브도 아니다. 
비록 그의 화면 속에 폭포나 물의 이미지가 한편의 삶을 보듯이 드라마틱하고 격정적이지만 
그 삶의 풍경처럼 서술적이고 순간들이 만나 거대한 파노라마를 연출하는 것 뿐이다. 
그래서  “THIS IS OILE” 라 불리는 그녀 작업의 제목들은 시각적인 것으로만 보아서는 안되고 가슴과 뜨거운 색채로 읽어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곧 파도가 되고 , 자신의 기억을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바로 삶이며 자신의 기억속의 상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예술가들이 새삼스럽게 창조적인 순간에 자신들의 속내와 본질을 드러낸다는 사실들을 확인하게 된다. 
회오리 치듯 눈길을 사로잡는 그윽한 색채놀이와 자신의 감추어진 초상, 그 곳에 던져 새롭게 일어나길 꿈꾸는 열망,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김정선 그림의 감출 수 없는 매력이 이것 아닐까 ? 

김종근 홍익대 겸임교수 미술평론가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짝퉁가방-김종근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짝퉁가방

               김  종  근  (미술평론가, 숙명여대 겸임교수)


영국 사진작가 마틴파는 일반 서민층에게서 지극히 평범하게 보이는 일상의 삶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한 독특한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대중들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와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시니컬하게 포착하고 있어 주목을 모았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비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빼놓고 인간을 설명하고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사람들은 소비라는 형식을 통해 물질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욕망으러 해결한다. 

김정선의 아주 실제 명품처럼 하이퍼 화풍으로 그려진 럭셔리한 가방들은 사릴 일상생활에 필요한 도구로서 그것을 구임한다는 것은 사회, 문화적인 현상이다. 즉 사람들의 욕망과 필요를 충족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소비가 명품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이다. 다만 이 상징적인 현상 중에 하나가 명품에 대한 집착과 그것을 대체 만족해주는 것이 짝퉁이라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김정선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모즌 이미지들은 두 가지의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그의 모티브가 가방이라는 점과 또 하나는 그 가방들이 명품을 방자한 짝퉁이라는 사실이다.  

그의 작품들을 보자. 가방의 명품으로 불리는 루이뷔통, 샤넬, 프라다 등 명품들이다. 가끔 그 가방들을 배경으로 한 도시의 풍경도 BMW나 아우디등 명품으로 배경을 두르고 있다. 그는 이처럼 도시와 생활의 모든 것을 명품으로 포장한다. 수백만 원하는 150여년 역사의 루이비동이 불과 몇만원 가격이면 살 수 있다. 그의 그림에 붙어있는 이 라벨의 가격들은 이 물건들이 무엇인가를 다소 시니컬하면서 허위적인 욕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오브제임을 명시 해주고 있다. 화면 가운데 던져진 명품의 얼굴을 흉내낸 가짜가방을 짝퉁으로 리얼하게 연출한다.

그는 이 명품둘에 집착하는 그리하여 짝퉁을 사는 사람들의 과시욕과 허위성을 단도 직입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만약에 우리가 무인도에 홀로 있게 된다면 아름다움을 추구하거나 명품이나 명성을 얻는다는 것에 의미를 잃게 될 것이며 타인을 통해 자신을 뽐낼 대상도 구매욕망을 가질이유가 없다고 항변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명품에 대한 아우라에서 벗어자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의 옥망을 작가는 가방으로 말한다. 우리가 집착우로 불릴만한 욕망과 소비의 타깃이 되는 상품은 품질이나 서능 등의 문제라기 보다 명품이라는브랜드의 물적 가치에 대한 사회적 통념에 기인한다.

명백한 소비와 욕망이 만들여 낸 하나의 기호의 가치를 지닌다. 특히 그 가방이 가지고 있는 기존 이미지와 광고, 상표 등과 결합해서 짝퉁은 비구매층의 소비를 자극하고 욕망을 불러 일으켜 가방이라는 도구를 넘어선 특별한 의미의 매개체가 된다. 
그가 그림속에서 의도하는 가방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격으로 구별된다. 실구매자는 최고의 상품을 구매 했다는 자신의 만족과 욕망의 달성을 햐유하게 되고 김정선이 그리는 이 특정의 물건은 그의 욕망의 은유적 혹은 우회적 표현이라고 부른다. 

김정선이 고집하는 것은 분명 가방의 일차적인 의미에서의 가방은 아니다. 가방의 역사가 기원전 9세기경 아시리아의 고대 유적에 날개 달링 신상의 손에 네모난 핸드백을 보아 고대부터 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또 하나는 신분계층에 따라 사용하는 가방 크기가 달랐다는 점이다. 오늘날 가방이 이러한 신분의 계층을 나느는 대상이 된 것처럼 오래 전부터 귀족이나 왕족이 패션 소품으로 작은 가방에 돈이나 보석을 넣고 다니고 이에 비해 상인, 병사등의 서민이 큰 가방에 소지품 등을 넣고 다녔다는 점이다. 우리는 인간의 욕망을 무한대로 자극하고 부풀리는 것이 마음보다 물건에의 유혹이 라는 사실을 다시 한 본 확인한다. 바로 그러한 옥망의 지평에서 명품고 짝퉁이 만들어내는 미묘한 세계를 김정선의 그림 속에서 만나는 것이 여간 흥미로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