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휴식과 위로의 말을 전한 '치유요정'

<The fairy>_ 2023

 

예전 나의 작업은 ‘꽃과 정원’이었다.

생명과 존재에 대한 생각들이 내 작품의 중요한 주제였다.

어떻게든 살아내야 하는 현대인들의 소외와 고독감을 형상화하여 태생을 뒤바꿔버린 동물성 꽃으로 표현하였다. 작품 속 꽃들은 그만의 독특한 존재방식으로 표현되어지다가 그 주변의 나무와 꽃 그리고 풀들의 형상으로 확장되어 ‘정원’이 되었다. 

‘정원’에는 수많은 나무와 꽃들이 존재하며 각자 그들의 언어로 그들을 찾아온 우리에게 휴식과 위로의 말을 전한다. 우리가 숲을 찾고 정원을 찾는 ‘이유’인 것이다. 그렇게 하여 오래전 임금님의 위로받던 ‘정원(비원)’이 그려졌다. 

 

 

그런데 그 식물들의 위로언어를 전달하는 다른 차원에 속하는 생명의 매체가 있었으니 그것이 ‘치유요정’으로 형상화 된다.

구체적 형상을 가진 ‘치유요정’은 우리를 안아주고 토닥여주며 힘든 삶을 이끌어준다.

그림에 반복해서 나타난 금색의 보름달 같은 형상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과 소망’이다.

‘치유요정’은 고단한 우리를 위로하며 꿈에 도달하도록 도와주는 ‘이로운 존재’인 것이다

 

Healing Garden-신지영
● Healing Garden - 김양희展

★신지영(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김양희의 ‘치유 정원(healing garden)’ 세 폭은 작가의 은밀한 정원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고 꽃과 풀과 나무와 하늘로 위로와 안식을 준다. 이번 김양희의 전시는 그간의 전시와는 달리 차분하다. ‘집착(obsession)’의 김양희는 강렬함으로 꿈틀댄다. 끈적끈적 흐드러지며 흘러내리던 붉은 양귀비꽃의 욕망이 화면 가득 강렬하다. ‘춘풍(spring breeze)’의 김양희는 원색의 화려함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인생을 멋지게 노닐자며 화려한 색감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하지만 이번 ‘치유 정원(healing garden)’에서 김양희는 이전과는 다른 성숙한 매력을 발산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녹색이 보라색, 노란색과 차분히 어울어지며 원숙한 화려함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두껍게 덧바른 유화 물감의 두께감이 화려함으로 피어난다.

김양희의 그림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는 단연 꽃이다. 집착에서도 춘풍에서도 그리고 이번 치유 정원에서도 김양희의 그림에는 늘 꽃이 등장한다. 하지만 각 전시에서 꽃은 약간 다른 의미를 갖는 듯하다. 꽃은 ‘집착’에서 화려하고 강렬하게 꿈틀대는 욕망이고 ‘춘풍’에서 송이송이 흩날리는 바람이다. 하지만 이번 ‘치유 정원’에서 만난 꽃들은 더 이상 꿈틀대는 욕망도, 흩날리는 바람도 아니다. 욕망도 지나고 바람도 지나 이제는 주변과 함께할 수 있는 ‘성숙’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꽃에만 집중했던 시선을 확장하여 그 꽃이 피어 있는 맥락을 화폭에 담고 있다. 작가는 이제 꽃을 지탱해 주고 있는 줄기와 잎에도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더 시야을 넓혀 꽃이 피어 있는 정원 전체를 조망한다. 화폭 위의 꽃들은 이제 어울려 피어나 서로를 응원하고 서로를 위로한다.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치유 정원의 김양희는 이렇게 자신의 아픔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주변의 아픔도 보듬어 품으려 한다. 그래서 김양희의 정원은 우리의 아픔을 치유하는 힘을 지닌다. 김양희의 은밀한 정원을 천천히 걸으며 오늘을 위한 위로를, 그리고 내일을 위한 응원을 받아 보자. 

김양희의 정원을 걷다-신지영

김양희의 정원을 걷다


신지영(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녹색의 푸르름 속에 보이는 노랑과 보라의 흔들림. 그 황홀한 손짓에 이끌려 다가가 본다. 네 개의 돌계단이 노란색 꽃 더미 속에 묻혀 저만치 놓여 있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단정한 돌계단이 어딘가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은밀히 알려 준다. 
황홀한 손짓에 이끌려 정신없이 그곳까지 왔지만, 막상 그 돌계단을 마주하니 조금은 망설여진다.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선뜻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는다. 발 앞에 놓인 보라색 꽃 연못이 나를 더 망설이게 한다. 계단에 오르려면 조금은 넓은 보폭으로 그 꽃 연못을 껑충 건너뛰어야 한다. 혹여 그 꽃 연못에 발이 빠지기라도 하면 꽃들은 내 발에 밟히게 될 것이다. 돌계단 뒤로 보이는 가지만 앙상해 보이는 나무도 나를 위협하는 것 같다. 그래도 용기를 내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디뎌 본다. 
돌계단을 올라 들어온 정원은 초록의 싱그러움으로 빽빽하다. 길을 따라 걸으며 간간이 보이는 보라색 꽃 몇 떨기가 차분히 나를 반겨 준다. 가지만 앙상해 보이던 나무들이 무르익은 봄의 푸르름을 한껏 머리에 인 채 싱그럽다. 입구에서는 보이지 않던 하늘도 저 멀리 조금 내 눈에 들어온다. 꽃들의 화려함도 푸르름 속에서 고요하다. 내 눈은 편안해지고 걱정은 사라진다. 
어느덧 차분해진 마음으로 정원의 끝에 이르렀다. 눈앞에 장미 한 떨기가 곱게 피어 있다. 겉꽃잎을 털고 더 아름다운 속꽃잎을 활짝 피우려 하고 있다. 어제의 묵은 나를 털어내면 더 멋진 내가 피어오를 거라는 위로와 용기를 건넨다. 장미꽃 곁에는 분홍색과 노란색 꽃들이 차분하고 또렷하게 피어 있다. 그 뒤로는 보라색 꽃들이 바람에 날리며 몽환적인 몸짓을 보인다. 보라색 꽃들 너머 푸른 하늘이 눈부시다. 이 모든 것들의 협주 덕분에 나는 위로와 안식을 만났다.
김양희의 ‘치유 정원(healing garden)’ 세 폭은 작가의 은밀한 정원으로 우리를 초대한다. 그리고 꽃과 풀과 나무와 하늘로 위로와 안식을 준다. 
이번 김양희의 전시는 그간의 전시와는 달리 차분하다. ‘집착(obsession)’의 김양희는 강렬함으로 꿈틀댔다. 끈적끈적 흐드러지며 흘러내리던 붉은 양귀비꽃의 욕망이 화면 가득 강렬했다. ‘춘풍(spring breeze)’의 김양희는 원색의 화려함으로 우리를 압도했다. 인생을 멋지게 노닐자며 화려한 색감으로 우리를 유혹했다. 하지만 이번 ‘치유 정원(healing garden)’에서 김양희는 이전과는 다른 성숙한 매력을 발산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녹색이 보라색, 노란색과 차분히 어울어지며 원숙한 화려함이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두껍게 덧바른 유화 물감의 두께감이 화려함으로 피어난다.
김양희의 그림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는 단연 꽃이다. 집착에서도 춘풍에서도 그리고 이번 치유 정원에서도 김양희의 그림에는 늘 꽃이 등장한다. 하지만 각 전시에서 꽃은 약간 다른 의미를 갖는 듯하다. 꽃은 ‘집착’에서 화려하고 강렬하게 꿈틀대던 욕망이었고 ‘춘풍’에서 송이송이 흩날리던 바람이었다. 하지만 이번 ‘치유 정원’에서 만난 꽃들은 더 이상 꿈틀대는 욕망도, 흩날리는 바람도 아니다. 욕망도 지나고 바람도 지나 이제는 주변과 함께할 수 있는 ‘성숙’이다. 
작가는 지금까지 꽃에만 집중했던 시선을 확장하여 그 꽃이 피어 있는 맥락을 화폭에 담고 있다. 작가는 이제 꽃을 지탱해 주고 있는 줄기와 잎에도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더 시야을 넓혀 꽃이 피어 있는 정원 전체를 조망한다. 화폭 위의 꽃들은 이제 어울려 피어나 서로를 응원하고 서로를 위로한다.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다. 
치유 정원의 김양희는 이렇게 자신의 아품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주변의 아품도 보듬어 품으려 한다. 그래서 김양희의 정원은 우리의 아품을 치유하는 힘을 지닌다. 김양희의 은밀한 정원을 천천히 걸으며 오늘을 위한 위로를, 그리고 내일을 위한 응원을 받아 보자.

기억으로부터 발생하여 상상으로 피어나는 꽃 -하계훈

 기억으로부터 발생하여 상상으로 피어나는 꽃

하계훈(미술평론가) 

사람은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개인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사람들은 언젠가 한번 만난 대상에 대해서 일정한 시간동안 기억한다. 만약에 만남의 횟수가 반복된다면 기억은 그만큼 선명해질 수 있다. 그리고 눈을 감아도 그 대상을 마치 눈앞에 나타난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릴 수도 있다. 이와 반대로 오래 전에 만났던 대상에 대해서는 그것의 일부분만이 기억나거나 전체적으로 불분명한 기억 속에 그 대상으로부터 받았던 인상(impression)이 어떠한 상황이나 사물과 연계되어 상상과 함께 현실에서 편집된 상태로 되살아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김양희가 그리는 꽃은 작가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오는 어린 시절에서부터 기인한다. 어린 시절의 생활 주변에서 반복적으로 맡았던 꽃의 향기가 작가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수 십 년 뒤에까지 그것을 기억하게 만들었고 작품 속의 이미지로 환생하게 만들었다. 꽃은 시각으로만 기억되지 않고 후각이나 촉각 등으로도 기억된다. 그러나 김양희의 어린 시절의 꽃들은 시간의 경과에 비례하여 그 자체의 모습에 대한 사실주의적 선명도를 점차 잃어가고 있으며 그렇게 잃게 된 선명도의 빈자리를 작가의 상상력이 대신 메워가고 있다. 따라서 김양희의 꽃은 기억으로부터 발생하여 상상으로 마무리되는, 작가의 주관적인 감각의 경험과 의식을 드러내는 꽃인 것이다.

김양희는 자신이 화면에 도입하는 꽃들에게서 추억과 함께 물활론(物活論)적 정서를 느낀다. 그러므로 작가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시각화해내는 꽃은 우리의 공통정서에 자리 잡은 평범한 꽃의 실재이고 그것이 시각적으로 구현된 이미지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생명이며 에너지인 것이다. 코발트 색을 배경으로 한 화면에 가득히 담겨진 주황색 양귀비꽃은 사실적 재현성에 집중하기 보다는 한편으로는 마치 인간이나 동물처럼 살아있는 식물로서의 생명감과 정신적 존재감을 발산하며, 다른 한 편으로는 이를 바라보는 이들의 정신세계에 침투하여 몽환적인 상상계로 빠져들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드러낸다.  

김양희의 꽃을 자세히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꽃이라는 식물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나 향기, 부드러움이나 화려함 같은 표현이 정확하게 어울리기 힘든 치명적인, 그러나 그로부터 쉽게 벗어나기 힘든 환상과 같은 자태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모종의 액체에 잠긴 듯 허공에서 둥둥 떠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꽃은 잎의 테두리부분에서 점점 녹아내리듯이 허공으로 해체되면서 꽃으로서의 자아의 존재를 새로운 그 무엇인가로 전이시키려는 것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김양희의 꽃은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떤 곳으로부터 작용하는 일종의 충동이 에너지를 발산하듯 꽃잎을 화면에 가득 차게 만드는 모습으로 제시된다. 

김양희 본인의 말에 따르면 작가는 인간을 포함한 사물은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보다 높은 단계를 향해 현실을 초월하려는 본능적 욕구를 억제할 수 없으며, 이러한 욕구 혹은 염원을 욕망이라는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보다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에서의 적극적인 자가 실현 욕구의 가시화이며 종의 진화를 염원하는 노력이라는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볼 때 김양희의 작품에서 꽃의 형태는 점차 해체되어 점점 추상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붉은 꽃의 잎들은 또 다른 생명체의 해체과정을 보여주는 것처럼 실타래가 풀리듯 가장자리 부분에서부터 허물어져가고 꽃술 역시 꽃잎의 중앙 깊은 곳으로부터 그림의 표면으로 부유하듯 솟아오르며 한 올 한 올 해체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결국 이러한 형태의 해체과정은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형태의 해체와 색채의 단순화를 예고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청보라색 꽃들이 전개되는 화면의 단계에 이르면 김양희의 작품은 이미 재현의 단계를 지나 추상의 단계로 들어서며 색채 또한 모노톤에 가깝게 비사실적이며 상징적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전환은 작가의 작품 전체를 조망할 때 지극히 자연스런 맥락상의 전환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며 색과 선, 표면 질감 등의 형식주의적 요소들의 일관성을 통해 작품의 전이를 정당화시켜주는 면이 있다. 화면의 전반적인 모노톤에 비하여 명암의 강조나 붓의 스트로크가 만들어내는 생명감이 오히려 화면을 생기 있게 만들어주면서 작품은 점점 신비스런 환상의 심연으로 빨려들어가듯 관람자들의 시각을 자극한다.

평면 작품과 함께 출품된 설치작품들은 작가가 이전부터 천착해 온 obsession이라는 주제를 담은 연작으로서 인간을 사로잡는 욕망과 집착의 조형적 표현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충동을 넘어서 존재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 초월하려는 의지를 가시화한 입체물의 설치로서 해석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작가는 꽃으로 인식되는 이미지를 유지하며 재료에 있어서 한지를 사용함으로써 주제면에 있어서는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표현 형식에 있어서 평면과는 다른 확장된 조형적 시도를 모색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처럼 김양희는 오래 동안 꽃이라는 식물의 생명성과 그것에 투영된 존재의 숙명, 그리고 그 존재의 숙명을 초월하려는 염원을 시각화하는 작업에 작가의 에너지를 바쳐왔으며 작품의 전이가 일어나는 단계마다 표현의 형식을 달리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였지만 일관되게 김양희의 작품을 관통하는 소재는 작가의 기억으로부터 발생하여 상상으로 피어나는 꽃이었고, 그 꽃을 통해 존재와 생명의 문제를 천착해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The source 작품세계
The source 작가노트
- 김양희

몇 해 전부터 나에게 강한 변화의 느낌이 찾아왔다

치유에 관한 꽃과 정원을 두터운 마티에르로 표현하던 것을 
단순화시켜보고자 하는 생각이다.
구체적 형상 언어를 빼버린다면 어찌 될까?
아버지께서 돌아가실 때 심박측정기 모니터가 가로 선으로 펼쳐지는 순간 이 선이 갖는 놀라운 언어를 깨달았다.
그것이 끝이자 시작이라는 생각이다.
지평선 수평선 세상의 근본적인 형상인 것이다.

그때부터 나의 고행과 같은 지긋지긋한 선 긋기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직선을 무한히 그어대었다. 알록달록 색동의 가로 선을 긋다 어느 순간 곡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형상을 만들기도 하고 한복과 청자 백자에서 영감을 받은 한국의 단아한 좌우대칭 선을 만들기도 하고 또다시 풀어 헤쳐져 그 선 들은 무지막지한 중첩을 주며 터질 것 같은 밀도를 주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중심부에는 직선으로 만들어진 원의 형태가 나타난다.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표현하려 하는가? 
본질적인 되물음을 거듭하며 지속적으로 올라오는 불안감을 무한한 선을 긋는 행위로 
스스로를 치유해 나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 끝까지 가보았다는 생각이 들자 스스로 답답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끝까지 채워 가던 날 문득 선 긋기를 시작할 때 아무 생각 없이 그은 선 몇 개가 훨씬 강렬한 언어 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여백을 두고 지켜보며 나의 그림은 숨을 쉴 수 있게 되었다.

사선으로 가장자리부터 여백을 채워나가면서 그것이 나중에는 중간에 둥근 느낌의 여백이 남는다. 그 사선들은 나를 둘러싼 나의 삶 · 생각 욕망 들이었다. 
그 선들은 서로 연결되어 나의 염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붓에 물감을 많이 적신다면 그것은 아래로 흘러버리거나 아니면 전에 그어졌던 선에 합류한다. 의식적으로 똑바로 일정한 두께로 긋지 않고 그저 무의식의 흐름에 맡겨 물감이 흘러내려 만드는 직선과 나의 손으로 긋는 사선이 교차하며 화면은 채워지고 원의 형상에 가까운 여백을 맞이한다.

자연히 발생 된 여백은 
역설적으로 비우는 만다라의 염원을 생각하게 된다.
꽃의 욕망-조광석
꽃의 욕망

김양희는 꽃을 그리고 있다. 주변에서 본 듯한 꽃인데 두꺼운 붓 자국에서 발산되는 꽃잎의 볼륨은 열대식물의 두툼한 육질의 풍만함을 느끼게 하는 꽃이다. 그 위에 꽃가루가 흩어져 날리고, 끈끈한 액체가 선을 그으며 꽃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망사처럼 가는 선들은 거미가 집을 지으면서 밀실 안으로 끌어드리는 선율처럼 주위로 흩어지다가 다시 강력한 자력에 이끌려 주변의 액체흐름 사이로 스며들게 한다. 
돌연변이로 파생된 꽃-작가가 이전에 추구하였던 생명체의 변이는 식충식물로 전이(轉移)되고, 두터운 꽃잎 깊숙한 곳에서 발산되는 힘은 우리의 시선을 무겁게 한다. ‘꽃’의 주제에서 연상될 수 있는 화려함, 아름다움, 부드러움과 다른 무게를 지닌다. 꽃은 그 자체가 시각적으로 가벼움을 주지만 이 꽃은 다른 내면을 감추고 있다.
작품의 주제 ‘Obsession’은 작가를 ‘사로잡고 있는 무엇’이다. 그것은 욕망과 충동이 육체에 침투하고, 작가는 중심에 꽃을 그리고 있다. ‘Obsession’은 욕망과 충동을 재현하는 이념이아니라, 보이는 것으로 전달하는 저 깊이 속에 있는 것, 바로 보이지 않는 것으로 계속 변태(變態)하는 생명체의 숙명이다. 
일상생활에서 항상 사유하는 본래의 주체로서 육체는 언어로 자신의 스스로의 욕망을 표현하는 것이 항상 완전할 수 없다. 육체는 자신을 끊임없이 읽어가며 일상 언어에 많은 이야기를 퍼트리지만, 육체와 언어 사이에는 합치될 수 없는 어떤 불충분함이 존재하고, 언어는 영원히 육체를 부분적으로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메를로-뽕띠(Merleau-Ponty)의 표현을 빌자면, 사람들은 살면서 자신의 육체(La chair) 주변만을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를 구사하고 있는 육체에 또한 관계된다. 육체는 경험의 주체이면서 또 사유의 주체인 것이다. 따라서 육체는 순수의식과 순수자연, 능동성과 수동성, 자율성과 의존성, 반성적, 실증적 사고의 진동사이에서 또 다른 차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현상작용에 의해 확정할 수 없는 육체의 한계이다. 육체가 의미를 낳는다면, 의미가 육체 속에서 생산된다면 그것은 재현의 체계를 통해서 간접적으로이다. 

김양희는 자신이 그린 꽃에서 무엇엔가 집착하고 있는 욕망의 한 부분에 다가서고 있다. 누구에게나 있는 내면의 불안을 넘어서려는 집착이기도하다. 불안함을 분해하여 의도적으로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놓는다. 감추어진 자신의 욕망을 검열하고 작품을 통해 자신을 또 다시 분해한다. 욕망과 충동이 육체에 침투되고, 그리기의 중심에 위치한다. 꽃이 육체의 능동적, 수동적 체계의 축으로 그려지면서, 그래서 꽃은 즉각적으로, 그 자체로 자신이 아니라 그렇게 변화되는 것처럼, 육체를 다른 생명체에 배합하며 상상하고, 창조한다.
핑크빛, 노란색, 원색으로 그려진 꽃은 이미 드러난 소망이며 그 소망은 벗어버릴 수 없는 운명의 한계 앞에서 자신을 감추고 있다. 뿌리와 줄기, 잎으로 구성된 식물의 구조는 몸체를 스스로 움직일 수 없게 땅에 붙들어 매어 놓인 숙명이다. 한 그루의 나무가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시간이 이어질 때까지 받아들여야하는 대자연의 법칙으로 우리 모두의 어깨를 가장 무겁게 누르고 있는 진실이다. 
그 진실은 성공과 같은 많은 화려한 찬사 뒤에 어둡게 가려진 침묵의 그림자이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꽃은 향기나 화려한 색상과 달콤한 꿀로 만들어진 유혹의 자태가 주어졌고 그것에 이끌린 곤충들의 육체를 빌려 해방을 찾는다. 꽃가루의 작은 세포들을 사방에 날려 보내면서 스스로가 운명에 얽매인 존재가 아님을 과시하는 것이다. 
김양희의 꽃은 그러한 꽃가루처럼 자신의 분신을 사방으로 흩으러 놓는다. 꽃에서 끈끈한 흰색의 방사는 욕망과 감정이 끊임없이 열리는 세계이면서 욕망이 완결되지 않는 차이(différence)다. 그것은 대비나 조화 등, 합리성에 바탕을 둔 미학적 추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범주 밖의 또 다른 차이(l'autre différence)를 향해 뿜어대는 작가의 열기이다.

작가는 숙명의 고뇌를 작품 안에서 장식적인 화려함을 가라앉히는 흩어지는 끈끈한 액체,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액체의 흔적으로 분해한다. 그리고 자신의 내부에서 발산하는 에너지를 주변으로 확산시킨다. 인간에게 부여된 시간의 굴레, 역사적 인간의 굴레를 깊이 박힌 나무의 뿌리처럼 거추장스럽게 느끼면서, 움직일 수 없는 숙명은 씨앗이 되어 번진다. 열매의 안쪽에 감추어진 생명의 시간을 간직한 채 멀리 떠나보내고 싶은 작가의 씨앗이다.  
꽃에는 이미 아름다운 유혹의 자태와 함께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져있고 그것은 동물세계에서 여성성과 동일시하는 이유일 것이다. 꽃은 작가의 생각이 투영된 이미지이지만 작가의 육체를 거쳐 비추어진 또 다른 육체이다. 어떠한 형상에 대하여도 대립되지 않는 식물본래의 자태를 간직하면서 작가는 애매하고 규정짓기 어려운 것을 꽃으로 재연한다. 

조광석(미술평론가 JO Kwang-S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