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서양화가 이명화의 ‘엉겅퀴 꽃’의 심상적 풍경전_김재관(쉐마미술관 관장, 미술학 박사)

서양화가 이명화의 ‘엉겅퀴 꽃’의 심상적 풍경 전

 

- 글, 김재관(쉐마미술관 관장, 미술학 박사)

 

 “예술이란 눈에 보이는 것의 재현이 아니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다.” 이 말은 파울 클레가 한 말이다. 클레는 스위스에서 태어났으나 독일에서 ‘청기사 운동’에도 참가하고 ‘바우하우스’ 교수로도 활동한 감성적이면서 매우 이성적인 작가이다. 클레는 사실적 묘사력이 아주 뛰어나기 때문에 초현실주의 작가들이 자신들의 그룹에 동참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거절하고 자유로운 드로잉을 실험하면서 엄격한 입방체의 탐구뿐만 아니라 점묘법까지 탐색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적 표현보다 대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데 더욱 심혈을 기울였던 작가이다. 

 이명화 작가의 작품은 여느 작가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대상의 사실적 묘사에서 시작하고 있다. 물론 대상의 이미지를 미적 표현으로 실현하고자 하지만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과 삶의 현상을 투영시켜 새로운 이미지를 재현하고자 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것은 클레가 눈에 보이는 대상을 그리지만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고자 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고자 한 것처럼 이명화 작가도 자신의 눈으로 만 볼 수 있는 새로운 이미지로 재현하고자 한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으로 읽고 느낀 이미지를 재구성하고 있지 않나 추측해 볼 수 있다.

 

 이명화 작가는 중학생 시절부터 미술부 활동을 하고 대학 생활과 홍익대학교에서 미술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기까지 거의 40여 년 동안 쉴 새 없이 그림만 그린 화가이다. 이렇듯 학생 시절이나 중등학교 미술 교사 시절이나 작가 시절이나 한결같이 그림만 생각하고 작업에 몰입한 작가이다. 그동안 주로 자연 속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을 구상적 풍경과 정물을 주제로 작업하였는데 꽤 오래전에 수많은 잡초들 중에 하나인 ‘영겅퀴’와 만나게 된다. 엉겅퀴란, 모든 꽃들이 그러하듯이 흙에서 싹트고 자라나 꽃을 피우고 자신의 홀씨를 날려 보내어 다시 흙에 정착하여 한 해의 생명을 다하는 생태적 과정을 갖는 식물이다. 이러한 엉겅퀴의 형태적 특성을 관찰하고 외형적 이미지의 표현에서 내면적 시각의 관점으로 다시 관찰하면서 표현 방법도 변화를 갖게 된다. 이처럼 엉겅퀴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자연의 순리를 이명화 작가 자신의 삶의 모습에 대입시켜 표현한 것이 <엉겅퀴 꽃> 시리즈 작품이 아닌가 싶다. 

 

 그동안 표현기법과 형식은 ‘사실적 표현’, ‘드로잉적 표현’, ‘이미지의 해체적 표현’ 등으로 요약 설명될 수 있으나 전통적인 서양화의 사실주의와 신인상파 표현기법에 얽매이지 않고 이미지의 배경의 공간을 소중하게 처리함으로써 마치 동양 사상의 무위자연의 정신을 차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사실주의 회화가 입체적으로 보이는 시각적 진실의 환영을 만들려고 시도했다면, 이명화의 작품은 환영적 이미지의 표현을 보다 ‘일루전’으로 해석하려고 함으로써 동양화의 관념적 산수화처럼 ‘여백의 미’를 중시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중시하는 자연의 ‘생명성’을 엿볼 수 있게 하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명화 작가’와 ‘엉겅퀴’는 작가와 대상이라는 대립적 대상이 아닌 엉겅퀴라는 자연 속에 존재하는 주제와 자아를 동양의 예술 정신과 합일함으로써 인간의 삶의 본질과 나아가서 본인의 삶에 대한 존재의 물음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자 함을 느낄 수 있다.

 

 세계적인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은 태어나서 삶과 죽음 사이의 선택의 연속이다.”라고 하였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 존재한다. 결국 인간은 자연 속에서의 생명의 탄생과 소멸 속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또한 작가는 작품 속에 자신의 생각을 용해시키고

작품의 기법과 형식으로 그 해답을 풀어가게 함으로써 하나의 작품을 탄생하게 한다. 

이명화 작품은 주제의 형식적 관점에서 언급하자면 몇 가지 특징적 형식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엉겅퀴 꽃의 생명의 탄생과 소멸이라는 연속성과 시간성을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심미적 대상을 만들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결국 ‘엉겅퀴’라는 

       ‘실재(Reality)’를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자신을 해체(De-construction)’ 시키는 

       특징을 말한다.

 둘째, 물체(이미지)와 공간(여백)이 별개로 존재하지 않고 동시에 존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마치 동양화에서 그려지지 않는 여백의 공간이 작품의 미완성 부분이 아니라 완전한

       작품의 한 부분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동시에 존재하게 한다.

         

 이처럼 이명화 작가는 엉겅퀴를 통하여 ‘자연의 신비로움’을, ‘부드러운 여백‘을 작가 자신의 내적인 표현의 공간으로 연출하고 있지 않나 싶다. 이번 쉐마미술관 기획전을 계기로 이러한 작품의 제작 방법이 더욱 독자적 양식으로 외부의 환경을 반영하고 이명화 작가만의 주관적 생명과 감정으로 새로운 주제들을 발굴하여 시도함으로써 또 다른 도약이 있게 되길 기대해 본다.

이명화 엉겅퀴 이야기-서성록

이명화 엉겅퀴 이야기

이명화는 인적이 드문 산과 들에 가야 볼 수 있는 엉겅퀴를 모티브로 삼는다. 엉겅퀴는 고고하지만 한편으로 정이 그리워 사람들의 시선에 잘 띄도록 더운 여름에도 꼿꼿하게 머리를 들고 있는 꽃으로 이명화에게 각인되어 있다.  작가가 쓴 ‘소멸, 그 아름다움’이란 글에는 그런 생각이 잘 담겨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산길, 타는 듯한 햇볕이 내려 쬐는 길가에 핀 엉겅퀴를 본적이 있는가? 타는 듯한 太陽 아래서 가시를 달고 있는 짙푸른 이파리, 붉은 용암이 솟아 나오는 듯한 요염한 불꽃 같은 꽃, 꺾이지 않는 농염하고 도도한 아름다움에 어찌 빠져들지 않을 수 있을까…” 

이명화는 유년시절 경상북도 안강이란 마을에서 자라나 어렸을 적부터 산과들의 자연물들을 벗삼아 지내왔다. 초등학교 때 그곳을 떠나왔지만 언제나 그의 가슴속에는 마을 앞 방죽에서 뛰어 놀았던 즐거운 추억과 철 따라 산과 들에 피어났던 들꽃들이 오롯이 남아있다. 안강은 추억의 원본이자 순결한 냄새가 풍기는 곳이다. 그의 그림은 이처럼 고향에 관한 추억에서 싹을 틔우고 또 길어 올려지고 있다. 

그의 작품을 추적해가면 그의 심상을 파악할 수 있는데 가령 2002년에는 야생화를 비롯하여 해바라기, 맨드라미 등을 다루었고, 2004년에는 늘 푸른 소나무, 2005년에는 마음에 새겨져 있는 꽃들을 정물로 표현하였다.  2009년에는 꽃으로 의인화 되는 여성 그 자체를 나타내는 장신구를 다룬 개인전을 열었을 정도로 대부분의 테마는 마음에 남아있는 고향과도 같은 꽃과 자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번 전시의 작품 역시 엉겅퀴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의 기조를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작품에 등장하는 엉겅퀴는 작가가 오서산, 칠장산, 칠보산, 군자산, 속리산 등지를 산행하면서 만난 것들로 강렬하게 마음속으로 헤집고 들어온 엉겅퀴와 그 당시의 산의 느낌과 영원처럼 남아 있는 고향의 느낌을 오버랩 시켜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의 엉겅퀴는 대체로 흐릿한 풍경을 후경으로 삼고 있다. 산중턱 또는 정상에 올라 내려다본 풍경이랄 수 있으며 전면에는 예외없이 엉겅퀴가 자리잡고 있다. 작가는 엉겅퀴를 ‘요염한 불꽃같은 꽃’으로 묘사하였지만 사실 그 꽃은 가시가 나있어 만질 수 없으며, 이파리는 무슨 사연이 그렇게 많은지 톱날처럼 날카로운 돌기로 보는 사람에게 경고신호를 보내고 있다.  
 거센 바람과 찬공기에 시달리고 움추리며 살아오면서도 연분홍꽃을 피어낸 엉겅퀴, 그러기에 엉겅퀴의 존재는 더없이 귀해 보인다. 핏빛 면류관을 둘러쓴 엉겅퀴는 우리에게 아픔 없이 사랑할 수 있느냐고, 눈물 없이 사랑하겠느냐고 되묻는 것같다.
그림에 핀 엉겅퀴는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지만 그 삶의 여로를 돌이켜 보면 숙연해진다. 작가의 그림에는 황금기를 보낸, 하얀 보풀이 휘날리는 엉겅퀴도 자주 눈에 띈다. 흰털에다 씨를 실어 주위로 날리며 겨울채비를 서두른다. 가을의 엉겅퀴는 그야말로 추레한 모습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이명화가 초라한 엉겅퀴마저도 주목하는 것은 그것의 장렬한 죽음속에서 다음 생명을 위한 고결한 희생정신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렇듯 작가는 한때는 영화로왔으나 이제는 시들어 보잘것없이 되어버린 꽃속에서 ‘한 가닥의 진실’을 찾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작가는 담백하고 소박하게 나타내고 있다. 엉겅퀴의 화려한 겉모습 대신 그는  자신이 잉태한 씨앗을 마지막 한 털까지도 바람에 멀리 날려보냄으로써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자기비움과 희생의 의미를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절제된 색감을 통해 소멸의 아름다움이 지닌 가치를 전달해주고 있는 셈이다. 
                                                                                        그의 작품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기법상의 문제이다. 덧칠하여 형태와 색채를 완성해 가는 이전의 유화작품과는 달리 터치와 물감 자체의 질료감을 매우 중요시 된다. 동일한 물감이라도 물감의 양과 건조시키는 시간의 차이점을 생각하고, 테레핀 같은 종류의 용매제를 사용하지않고 물감 그대로의 날것만을 캔버스에 올리는 기법을 사용한다. 그러면 물감이 화면에 고착화되지 않고 그대로 점성을 지니게 되는데, 그러한 물감의 특성을 이용하여 형태를 만들어 간다. 물감의 점성은 건조되는 시간에 따라 완성되어지는 최적화의 조건을 만들어 준다.  이런 정지작업을 한뒤에 찍는기법으로 형태를 만들어간다. 즉  붓의 모서리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도장을 찍듯이 그런 행위를 무수히 반복하여 만들어진다.. 따라서 그림은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붓 자국에 의한 흔적이다. 이러한  ‘내려찍은’ 붓으로 꽃과 줄기, 이파리를 완성시키게 된다. 
 

 그의 그림을 단순한 풍경화로 본다면 올바르게 이해했다고 볼 수 없다. 작가가 기용한 형태는 상징성을 띤다.
  엉겅퀴는 ‘기다림’과 희생‘과 같은 덕목을 함축하고 있다. 영롱한 꽃은 생명의 충만을, 가시는 인고의 세월을, 하얀 보풀은 자기희생을 각각 뜻한다. 대상을 아름답게만 바라보는 표현의 대상으로만 보는 것 이 아니라 그 속에서 인간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 어떤 외부의 손길을 거부하고 온 몸에 갑옷을 두른 채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엉겅퀴가 이처럼 꿋꿋하게 자라올 수 있었던 것은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사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인가는 백화난만한 ’영원한 계절‘ 을 맞이하겠다는 소망, 바로 그것이 엉겅퀴를 이토록 강인한 존재로 만든 것은 아닐까.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