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푸른빛의 향훈(香薰)-임남진의 전- 양초롱(미술사 박사, 미술비평)
푸른빛의 향훈(香薰) : 임남진의 <Still Life_BLEU>전
- 양초롱(미술사 박사, 미술비평)

  임남진은 그동안 탱화, 민화 풍속도 등의 표현 방식, 특히 감로탱화에 나타난 풍속화의 조형성을 통해 현대인들의 이야기와 시대의 현실성을 재현했다. 또한 인간과 현실의 문제에 관해 자신의 화폭에 꽃, 달, 파랑새, 술잔 등과 같은 상징적 모티브를 사용함으로써 자신만의 회화성을 구축했다. 이번 전시에서 그녀는 이 모든 것을 던져 버린 듯하다. 거미줄처럼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속박하는 올가미와 같은 것들을 전부 털어내고자 했다던 그녀의 묵직한 발언을 통해 나는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해방감보다는 현실 참여의 새로운 방식을 모색하고자 하는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진실, 이를 추구하는 사람들과 이들을 둘러싼 상황들 가운데 변한 것은 무엇인가? 나는 현실에 대한 그녀의 복잡한 감정과 공감하기 위해 최대한 그녀의 내면에 깊이 들어가 보고자 한다.(물론 깊이 들어갈수록 표면으로 밀어내는 힘은 더 강하겠지만......)


1.  슬픔의 깊이, 블루의 심연(에서)
  겨울이 오기 전 깊은 가을 녘에, 아니면 노을이 지고 밤의 시작으로 접어드는 저녁에, 자연의 풍광이 달리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슬픔의 깊이의 차이, 드러남과 숨음의 감정의 차이를 느낄까? 문인 이옥의 표현처럼, 슬퍼하는 자들이 슬퍼할 줄은 알지 슬퍼하는 이유는 잘 모르는 것일까? 작가 자신의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던 이옥의 <선비가 가을을 슬퍼하는 이유>에서처럼, 인생의 중반에야 비로소 그 슬픔의 이유를 깨닫게 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아직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으며, 임남진이 그토록 슬퍼했던 시간들의 흔적을 살아보지 못해, 그 깊이를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떻게 그 깊이에 도달할까? 언제나 그랬듯, 나는 작품으로 그 심연을 탐색한다.

  임남진은 자신에게 한없이 들어오는 슬픔, 만물의 현상이 슬퍼지는 이유를 몇 회(會)를 거쳐 깨달은 감정을 어렴풋이 드러낸다. 그녀의 슬픔은 중년에 들어선 자신의 마음과 몸의 변화에서 발생된 개인적인 것일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서 비롯된 이 감정처럼, 인간의 수많은 마음을 시처럼 풀어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말 너머의 눈빛에서 그녀 스스로 지독할 정도로 억누르고 있는 30여 년 간의 한국사회의 복잡한 시간의 흔적에 매몰되어 있는 그녀의 슬픔의 시를 해석하고 싶었다. 그녀의 삶은 한국 사회의 변화 과정, 즉 민주화, 그리고 지역 미술계 및 한국미술의 급격한 변화의 과정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현세를 풍자하면서 자신의 시대와 생생한 일상 소재를 결합해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구축했다.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들의 삶과 현실성을 집요하게 담아냈던 자신만의 회화적 어법은 인간의 욕망과 현세의 삶을 집요하게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감로탱화’, ‘풍속도’ 등과 같은 독특한 방식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죽은 자인 아귀는 우리 자신이자 거울에 비친 현대인의 자화상이다. 그녀의 ‘아귀’는 최근 10여 년 전부터 ‘상사화’와 같은 새로운 모티브와 결합된다. 거친 파도 위에 불안하게 떠 있는 상사화는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한국인들의 욕망이자, 자신 내면에서 꿈틀대는 다양한 욕망의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그림1)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운동의 끝 무렵, 시대의 변화를 외쳤던 수많은 미술인들의 일부가 오히려 보편자 및 총체성의 폭력성에 희생되었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불행한 의식의 십여 년을 보냈다. 폭력과 지배의 표지이며 흔적인 포섭(subsumption)의 개념이 시대의 변화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화려해지고 아름다워지는 예술작품들, 여전히 가난함과 싸우는 와중에, 삶에서는 더욱 고급 지는 미술작품들, 신념에 의해 결속된 단체들의 지속적인 행동에서의 이견(異見), 대중의 변화, 이미 풍요로워진 사회에서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국가(사회)의 폭력적인 것 등이었다. 시대의 변혁에 참여했던 예술가들은 민주화 운동 이후의 시간이 오히려 혼돈의 시대였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끊임없이 고민했던 자신의 삶과 인생, 그리고 역사에서 사라져 가고 왜곡되어 가는 ‘시대의 미술’의 인식에 대한 절망, 미술과 사람들의 변화 등이 끊임없이 쏟아지며 그녀를 지독하게도 외롭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현실을 직면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눈이 그토록 슬퍼보였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시대의 조류 속에서 묵시록적인 감정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절망, 외로움, 갈구함에서 얻어지는 그녀 스스로의 끊임없는 욕망을 어떻게든지 떨쳐버리고 싶은 몸부림은 긴 심신의 아픔으로 나타났다. 그 가운데 그녀는 일상적인 삶에서의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하게 된다. 그녀가 넌지시 던진 영화, <스틸 라이프>에서의 푸른빛이 그녀의 일상을 물들인다.


2. 스틸 라이프, 상사화  
  영화 <스틸 라이프>에서 고독사를 당한 무연고 시신들의 사후를 처리하는 공무원 존 메이의 업무 방식은 독특하다. 그의 완벽하고, 절제된 감정, 똑같은 행동으로 일상을 보내는 무료한 그의 삶과 달리, 그의 업무는 긴 시간 죽은 자들을 위해 가족을 찾아 주고 장례절차를 지원하기 때문이다. 즉, 존의 삶은 반복된 일상에서 ‘정물’과 같다. 고요할 정도로 정지된 상태, 그의 반복된 일상이 ‘죽음’과 같은 것이다. 멈추어 있는 생명과 마주치는 한 편의 정물화처럼, 먹다 남은 사과가 텅 빈 공간에 남겨져 있는 장면처럼, 존의 삶은 조용하다 못해 공허하고 정지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업무 행위는 결코 죽음과 같지 않다. 망자들의 삶을 재단하거나 가치 판단을 내리지 않고, 그 자체로 경건하게 그들의 마지막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삶 속에서 정신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망자를 재단한다. 타인의 삶을 재단하는 과정은 오랜 시간을 같이 한 사람들조차 한 두 줄로 정의내리지만, 전혀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았던 존이 몇몇의 사물들을 통해 타인의 삶을 진정성 있는 답례로 서술한다. 존이 고독사를 하는 망자들에게 지독히도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무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을 망자와 교차시키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고독사한 사람의 사후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존은 고독사한 사람들의 삶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의 존재를 조명하고자 했던 것일 수도 있다. 
  ‘Still’이라는 단어는 형용사로 ‘계속된’과 ‘정지된’의 양자성이 내재되어 있고, 영국에서 이 단어는 형용사로 ‘고요한’ 혹은 ‘조용한’ 의미도 있다. 그래서인지 존을 둘러싼 삶의 색채는 채도가 낮다. 그러나 우리가 이 영화에서 주목할 부분은 대부분 잿빛의 장면과 함께 특정 사물에 ‘푸른색’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푸른색은 무료하고 잿빛의 화면에 ‘희망’과 같은 존재론적 ‘변화’의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고정되어 있고, 정돈되어 있었던 존의 삶은 오히려 망자의 삶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변화된다. 예를 들어, 망자의 살아 있는 친구들의 삶에서 존은 망자가 자신과 같이 똑같이 통조림 하나와 토스트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고 있었음을 ‘발견’한다. 망자의 과거 삶에서 자신을 발견한 존은 자신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림자 같은 그의 얼굴에 새로운 색채를 부가한다. 그의 삶에 푸른빛이 맴돈다. 항상 똑같은 통조림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존이 핫초코를 마시고, 상사의 차에 오줌을 갈기고, 노숙자와 술을 마시면서, 자신의 일상에 누군가를 들여다 놓는다. 망자의 지인들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그를 둘러싼 ‘상황’이 자신도 모르게 존을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망자를 위해 산자들이 행동한 것이 아니라, 망자가 산자(존 자신, 그리고 망자의 친구들)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망자, 윌리엄 스토크의 딸 켈리와 인간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화면에 또 다른 색채를 덧칠할 수 있는 기대감을 영화는 채워주지 않는다. 존은 그렇게 ‘어쩔 수 없이’ 들러붙은 외로움을 안고 홀로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그가 달래주었던 죽은 망자들이 깨어나 그의 옆에 선다. 망자들이 존의 죽음과 삶 모두에게 위로를 보낸다. 윌리엄 스토크의 생을 따라가면서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방식으로 타인과 소통하고, 그들의 기억에 남았는지를 발견하는 자신(존)과 망자의 지인들이 있다.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사람을 일깨우는 것이다. 살아 있는 자들은 망자를 쉽게 판단하며 기억하지만, 망자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존 자신의 삶이 바뀌는 것이었다.
  서로 관계없는 상황이 하나의 변화를 통해 연결되고, 변화되는 과정처럼, 우리는 그녀의 그림이, 그녀의 푸른색이, 우리의 삶의 모티프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 ‘그림’은 하나의 ‘푸른빛’과 같은 존재이다. 그녀에게서 그림이 인생의 동행이 되었던 것처럼, 머리로 그려진 작(제)품들과 달리, 그녀의 그림은 우리의 가슴 언저리를 꿈틀거리게 한다. 예술이 살아 있는 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감로탱화를 그리면서 그녀는 어리석고 외로운 현대인들의 영혼들을 붓끝으로나마 감싸 안고 싶어 했으며, 예술이 좀 더 따스하게 인간을 위한 것이었으면 하는 그녀의 일관된 바램이 여전히 푸른색을 통해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3. 그리는 것, 그녀의 즐거움
“우리가 태양으로부터 대지를 떼어낼 때, 도대체 우리는 무슨 일을 했던 것일까?
지구는 이제 어디로 가나? 모든 태양으로부터 우리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 (...)
더 추워지지 않았는가? 계속 밤이 또 밤이 오지 않는가?
오전에도 등불을 켜야만 하지 않을까?”    
- 프리드리히 니체 -

  2차 세계대전 이후 광기와 몰락의 전쟁이 끝나고 변화된 세계, 그러나 더욱 짙어진 어둠은 과연 무엇인가? 상처받은 주체는 자신의 마지막 보루를 지키고자 했다. 시대의 미술이 변화의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한다는 안타까운 상황에서, 그리고 자신의 역할을 고민하는 과정에서 그 녀는 그토록 외로웠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슬픔과 외로움은 미술의 역할과 존재이유를 고민하는 과정의 상징적 표현이다. 
  10 여년의 이유 모르는 슬픔의 원인들을 그녀는 이제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신에게 부여되는 인간의 냉혹함, 시대의 부조리 등을 시간(사회)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자신을 자유롭게 했지만, 새롭게 구속하고 있는 예술의 이중성을 직면한다. 그래서 그녀는 거미줄처럼 자신을 옴짝달싹 못하게 속박하는 마법과 같은 올가미, 즉 자신을 규정짓는 예술 형식, 반복되면서 채워 넣는 색, 이야기를 ‘구성하고자’ 하는 방식, 그림이 ‘머리(지성)’가 되는 방식 등, ‘그리는’ 행위를 잊어버리고 있는 자신, 다시 말해 시간(사회) 속에서 최초의 영감이 진부해지고, 통속화되어가는 모든 것들, 즉 스스로 예술적 ‘달인’으로 만드는 모든 것들을 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완전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그리고 고귀하지도 않았던 자신의 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죽음이 삶과 반대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삶은 죽음의 한 형태이자 이면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일까? 그녀는 아직 살아 있다. 그녀는 아직 생각하고 있다. 그녀는 여전히 살아야만 하고, 생각해야하기 때문에 그녀가 ‘그리는’ 것이다. 화폭을 구성하는 한지(닥지) 자체의 어려움, 뭉게 뜨리고, 덧칠하고, 마르는 과정에서 무엇을 그토록 뭉개고자 했는지, 그 시간의 과정에서 마주한 이젤은 자신이 걸어온 시간만큼 그녀에게 회한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그녀는 ‘달’과 ‘구름’, 거리의 ‘꽃’들을 ‘새롭게’ 보았다. 대상을 가로지르며 자신의 몸을 감싸는 ‘바람’을 느꼈다. 턱 막힌 어둠의 골목길에서 예전과 다른 향을 느꼈다. 계절의 ‘냄새’가 보였다. 의식의 심층에서 느껴진 일상 속 풍경의 차이와 변화가 일상화되고 규격화된 삶의 국면에 새로운 차이화를 낳은 가능성임을 깨닫게 됨으로써, 그녀는 다시 한 번 그리는 즐거움을 발견한 것이다.(그림2)
  과거 기억의 현재로의 중단 없는 참여는 그녀의 ‘그리는’ 과정에서, 일상의 경험에서 정서의 변화가 대상 속에 표현되는 결과이다. 이로써 그의 그림은 일상에서 새롭게 발견된 대상에 대한 의식을 동반하면서 동시에 이를 넘어서고자 한다. 억압된 의식에서 해방 되고자하는 자유로운 몸부림은 ‘그리는’ 행위로 돌아간다. 그리는 행위를 강조하는 방식에서 그녀가 오히려 추상, 반구상, 그리고 김환기의 오마쥬(homage)를 끄집어냈다. 지나간 대세에 얽매이지 않고, 지나간 대세를 다시 끄집어 주면서 조망해주는 미술계에 대해 오히려 그녀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비타협적 태도로 접근한다. 이 태도는 그녀가 ‘관리되는 사회’의 바깥에서 자신의 사회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감히 주장한다. 이는 저항의 모든 요소까지 자본이 흡수해 가버리는 현 사회에서 그녀만의 불만과 미움의 표출이었을 것이다. 그래야만 새로운 저항이 있을 수 있으니, 그녀의 추상이 그녀의 행위에 대한 정당한 도전이 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신체적 행위, 즉 자신의 작업과정에서 분출된 에너지를 위해 동원된 근육이나 신경의 움직임에 무관심하듯 표출되는 추상적 행위나 신체적 움직임을 최대한 배제하며 지적 사유의 방식에서 대상을 관조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이 행하는 그림의 내용의 목적을 의도하지 않은 채 몸을 움직인다. 이런 점에서 그의 표현 속에는 어떤 강제적인 명령도, 규칙도 허용되지 않는 그 자체로의 표현, 그녀만의 차분하고 정제된 감성이 존재한다. 삶 그 자체로서의 그녀의 그림은 언제나 우리의 삶의 사건들과 얽혀 있다. 그녀는 대상과 현실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 속에서 자신의 삶과 의미의 지평을 더 폭넓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 그녀는 소소함의 가치를 발견하고, 비로소 자기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그러한 자유로움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수없이 계속 반복되기를 원하고 있는 순간을 포착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영겁회귀(永劫回歸)의 일상을 예술가의 감각으로 직조한다. 즐겁게 시작되었지만, 즐겁지 않았던 사색과 고찰, 그리는 행위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그녀는 과감히, 그리고 대담하게 도약을 한다. 
  이러한 작업을 통해 그녀는 사물(예술의 원자재) 속에서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속성을 느끼고 기록함으로써, 예측 불가능한 사실을 새롭게 불러일으킨다. 개인적·사회적 구속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작가의 행위에서 우리는 바람 및 구름의 결, 얽히고설킨 전봇대에서 하루 일과를 아웅다웅 보낸 사람들의 흔적, 정적하고, 좁은 고샅에서 시끌벅적 부딪히며 하루를 보낸 사람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삶을 다시 끄집어냄으로써 그녀만의 ‘푸른색’의 깊이를 공감해본다. 부조리의 현실과 세상 이면에 감춰진 현실의 혼돈은 숨 쉴 틈 없이 차가운 겨울을 에워싼다. 그러나 살 에일 듯한 추위와 짙은 밤에도 우리는 등불을 켜지 않는가...... 전시장 가득 채워진 그녀의 푸른빛의 향훈처럼 말이다.
따뜻한 가슴으로 들려주는 사람 사는 이야기_임종영(학예연구사)
따뜻한 가슴으로 들려주는 사람 사는 이야기

임종영(학예연구사)

임남진은 전통형식을 계승하여 이 시대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그리는 풍속화가 이다. 비록 그녀가 지금까지 발표한 풍속도가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임남진을 21세기 신(新)풍속도를 개척해 나가고 있는 작가로 인식하고 있다.  이는 그녀가 다른 작품에 비해 규모 있는 풍속도를 완성하기까지 쏟아 부은 각고의 노력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겠지만, 임남진의 풍속도에서 거울처럼 투영(投影)된 우리의 자화상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임남진은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였지만 졸업 즈음 접한 ‘고려불화 특별전’을 관람한 후 불화(佛畵)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그때 그 느낌의 전율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치밀한 밑그림, 섬세한 선묘, 은근하게 우러나오는 색채의 미감(美感)등... 그것은 완벽한 하나의 세계였다.”라고 작가 스스로 고백 했듯이 당시 고려불화를 보고 느꼈던 충격과 감동은 무척 커 보인다.

예술가라면 누구나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데, 불화, 특히  인간의 삶과 죽음, 그리고 구원을 주제로 한 감로탱(甘露幀)을 통해 임남진은 작품의 내용과 형식에 대한 고민을 풀 수 있는 실마리를 발견하게 된다. 1995년 대학 졸업 후 임남진은 본격적으로 불화 습작기간을 거쳐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져왔던 ‘낙태(落胎)’와 ‘5월 광주’를 주제로 감로탱화 형식을 빌려 형상화하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투시(透視)와 부감(俯瞰) 형식을 적용해 다양한 인물상을 포착한 ‘풍속도’ 연작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작품의 주제 변화는 작가의 시선이 사회문제와 역사인식에서 동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주변 사람들로 자연스럽게 이동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화면상으로는 불화 형식의 느낌이 서서히 사라지는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사람 속에 살아간다. 사람들은 서로 뒤 엉켜 부대끼면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느낀다. 임남진의 ‘풍속도’연작은 사람냄새 풀풀 나는 그런 그림들이다. 그림을 마주하면 슬며시 미소가 지어지고, 슬퍼지며, 때론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속에 내가 있고, 우리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임남진의 풍속도는 우리네 삶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제한된 규격의 풍속도 연작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작가 자신을 비롯하여 화우(畵友)들, 그리고 다정한 우리의 이웃들이다. 우리는 식당, 거실, 주방, 화장실, 옥상, 포장마차, 주점, 길 복판 등에서 이들과 마주한다. 화면에 나타난 공간들은 작가가 실재 접하는 환경이자 또한 우리가 매일 발 딛고 생활하는 친숙한 삶의 공간들이다. 
임남진의 풍속도를 보면 그녀가 얼마나 사람에 대한 애정이 넘치는지를 알 수 있다. 탁월한 상황설정과 함께 개별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까지, 기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곳에서든지 손에 쥔 작은 기기만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가득한 요즘, 임남진의 사람에 대한 관심과 애정의 산물인 풍속도가 그래서 더욱 특별한 감동의 울림으로 다가온다.   

임남진의 작품은 불화 외에도 민화(民畵) 형식-문자도(文字圖), 책가도(冊架圖) 등에서 응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작가가 얼마만큼 전통에서 작업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했는지를 엿 볼 수 있다. 그녀의 작품 ‘휴(休)’, ‘섬’, ‘여여-무위, 무위(如如-無爲, 撫慰)’, 그리고 최근 개인전을 통해 선보인 ‘꽃’과 ‘괴석(怪石)’ 연작에서는 한층 화면 구성의 여유로움과 내용적으로 편안함이 느껴진다. 풍속도가 ‘대화’ 형식이었다면, 위에서 언급한 연작들은 ‘독백’ 형식이라 말 할 수 있다. 그녀는 대화와 독백을 통해 인간의 존재, 삶의 가치, 구원과 영혼, 그리고 자신을 찾기 위한 노력들을 이야기 하고 있다.  

몇 일전 임남진은 자신의 개인전 개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미술관을 방문하였다. 꽃과 나비, 괴석을 소재로 한 개인전 카다로그를 내게 전달할 때, 나는 그녀에게 풍속도를 계속 그릴 것을 조언해 주었다. 꽃과 나비를 그리는 작가는 많이 있기 때문에 ‘임남진 스타일’의 신 풍속도를 완성해 주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바람에서였다. 또한 풍속도를 발전시켜 나간다면 소위 ‘성공하는 작가’로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하지만 임남진은 ‘스타 작가’가 되기 위한 것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고. 당시 나는 그녀의 작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의 깊이만 확인할 수 있었다. 

임남진은 테크닉을 앞세워 손으로만 그리는 작가도 아니요, 스타 작가가 되기 위해 잘 팔리는 그림의 경향을 따르려는 얄팍한 머리를 지닌 작가는 더 더욱 아니다. 임남진은 따뜻한 가슴으로 사람 사는 세상 이야기들을 진솔하고 생생하게 들려주는  작가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녀가 들려줄 아름답고 감동적인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심심深心한 날
심심深心한 날

21세기를 살고 있는, 살아가야 할 우리들은 표지판 없는 교차로에서 목적지의 방향을 잃어버리고 헤매는 모습이다. 모든 첨단 기능을 다 갖춘 전자 장비로 무장하고 있지만, 별자리나 나침반 하나로 망망대해를 항해하던 과거의 인류와 달리 분명한 좌표를 설정하지 못한다. 지식이 분화되어질수록 전문적이 되어 가긴 하지만, 사람들의 사고영역은 줄어들고 통찰의 힘도 줄어들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컴퓨터의 데이터에 의존하여 연계된 지식의 탑을 쌓아올리고 있지만, 여기에는 고도의 지식이 우리들을 서로 격리시키는 '지식의 바벨탑'이 될 지도 모른다는 고민이 잠재해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정체성을 찾고 나아갈 방향을 정립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 철학적 사유를 통한 현실 해석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금남로분관에서 청년작가로 선정 초대받은 작가 임남진의 『심심深心한 날』展은 그녀만의 독특한 해법으로 우리의 일상을 다양하게 포착해 보여준다. 항상 작품의 출발을 자신의 성찰로부터 시작하는 작가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작품을 통해 털어 놓는다. 천을 염색한 뒤, 수 십 번의 붓질로 형상 하나 하나를 완성해 나가는 더딘 작업방식 또한 작가에게는 자신의 근원으로 침잠하는 것을 가능케 하는 듯싶다. 작품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절절한 고통으로 느꼈던 사회의 아픈 현상들은 「떠도는 어린 넋을 위하여」,「오월五月문자도」 등의 작품으로 화폭에 옮겨졌고, 이러한 현실주의 참여미술이 지금도 작업 근간을 이루고 있다.

비참한 현실세태의 들춤만이 목적이 아닌 임남진은 자신이 항상 고민해 오던 인간의 '죽음'과 '구원'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고, '자비'를 전해주는 감로탱화를 통해 그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또한 감로탱화는 영화와 같은 시점인 시간성과 연극과 같은 요소인 공간성을 가지고 있어서 현대적 미감으로 풀어내기에 더없이 적절했으며, 형식에 치우치지 않는 창의성은 현대적인 새로운 조형세계의 창출에 풍부한 영감을 제공해 줄 수 있었다. 특히 하단의 여러 무리 중 목구멍이 바늘만큼 작고 큰 입을 가진 아귀가 등장하는데, 굶어 죽는 고통을 받는 아귀의 형상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온갖 고난한 삶의 모습들을 열거하는데 적합한 소재가 되었다. ● 가장 한국적인 양식으로 선택한 감로탱화 형식을 통해 임남진은 현 세태를 담아내는 풍속도를 그리게 된다. 2007년 첫 번째 개인전을 통해 전시되었던 「풍속도」, 「취생몽사」 「시간의 저편」 등의 작품은 재미와 유머를 담고 있는 서글픈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눈여겨 살펴볼 때, 곳곳에 대입되어진 우리 주변의 풍경을 발견하고 웃게 되지만, 웃음 뒤에는 가볍게 뒤돌아 설 수 없는 짙은 페이소스가 전해온다. 하지만 작가는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고 싶어 한다. 감로탱화를 보면 '아귀'는 결코 죄 속에 해매는 존재로 머물러 있는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상단에 펼쳐지는 불보살의 세계가 마지막에 구원받아 천국에 이르게 됨을 보여주듯이 '아귀'는 구원이 가능한 존재인 것이다.

최근 들어 작가는 우리네 세태를 조명하는 풍속도 작업에서 한걸음 나아가 인물 탐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바람에게」, 「심심한 상상」, 「행복한 하루」 작품은 현재 작가의 변화하고 있는 사유의 중심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주변 이야기의 서사에서 벗어나 자신의 내면에 머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품의 화자이자 자신을 대변하는 '아귀'는 어둠에 갇힌 자가 아니라 구원가능한 자로서 밝음 속에 드러낼 수 있는 사랑스러운 존재로 바뀌어졌다. 화면은 밝아지고, 빛처럼 쏟아지는 나무줄기는 가벼운 경쾌함마저 감돈다. 임남진은 비로소 자신의 아픈 상처를 감싸 안고, 누추함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구원을 느낀다. ●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은 화면 가득 그려진 형상들을 점점 비워내는 형태로 작업방식이 변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빈 화면 속 작은 군상들은 거대한 우주 속의 일점(一點)을 이루는 인간 존재로서의 겸허함을 전해주고,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 어렵다는 것을 절감케 한다. 작품 구상의 밑그림 작업에서부터 붓을 잡기까지 더딘 과정은 생명을 잉태하듯 조심스럽고 극진하다. 작가는 자신이 부려놓은 화폭의 형상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자신을 정화시키고, 불보살 세계의 단비가 이 땅에 내리기를 염원하고 있다. 전시장을 찾는 관람객들 역시 작품을 마주할 때, 비움으로서 드러나는 참됨을 발견하는 기쁨을 함께 누리길 바란다. ■ 황유정

임남진 Lim, namjin 작품세계
임남진  Lim, namjin

불교의 감로탱화 형식을 빌어 세상과 삶의 구석구석을 비춰내는 그녀의 회화세계는 
인생에 대한 냉철하고 따뜻한 시선과 애정이 짙게 배어 있으면서 소재가 주는 비장함과 
처절함, 진솔하면서도 애틋함이 함께 묻어난다. 민족문화의 뿌리 위에서 실체성을
명확히 드러내는 독자적 회화세계를 모색, 작가의 현실주의적 관점과 함께 회화적
치성과 공양을 통해 인간의 업보와 아픔들을 치유하고 구원으로 이르게 하고픈 바램이 
담겨져 있다. - 조인호(미술사)

작가 임남진은 1995년 조선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를 졸업한 뒤 개인전을 비롯하여
다수의 단체전을 참여 하였으며, 주요 단체전으로 대전 시립미술관, 대만 국립미술관,
광주 시립미술관, 5.18문화회관, 일본 동경미술관, 대안 공간 ‘미나리’ 등이 있다.
현재 전국미술인연합, 광주민족미술인협회,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광주시립미술관
창작스튜디오 입주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