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림 한정선 읽기 : 늑대의 정신으로 야생의 사고하기 | |
해림 한정선 읽기 : 늑대의 정신으로 야생의 사고하기 호모 도메스티쿠스(Homo Domesticus)인가, 호모 레지스탕스(Homo Resistance)인가 해림(海林) 한정선. 작가는 ‘늑대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스스로를 ‘늑대’라고 여기며 자신이 사는 집을 ‘늑대굴’ 혹은 ‘늑대섬’이라고 부른다. 작가가 <휴일>이라는 그림에 부친, 남편에게 바치는 시(詩) <노을 이불>은 “새 한 마리가 늑대굴로 날아들었다”로 시작해 “늑대는 노을을 덮고 콜콜 잠이 들었다”로 끝난다. 늑대는 작가 한정선의 최근 그림을 이해하기 위한 알파(Alpha)이며, 늑대라는 동물의 습성과 이미지에서 파생된 ‘야생의 사고’는 오메가(Omega)라 할 수 있다. 작가는 2004년 말부터 늑대를 그리기 시작해 2006년 세상에 처음 내놓았다. 「야생의 사고」라는 독특하고 흥미로운 제목을 부친 제2회 개인전에서다. 자연을 배경-자연이 아닌 작가의 상상에 의한 배경도 있다-으로 정적이고 역동적인 늑대의 모습을 화폭에 사실적으로 담았다. 실의, 외로움, 행복, 불안, 분노 등 다양한 감정을 표정에 심어 자신만의 늑대를 창조했다. 늑대의 표정과 행동에 감정이입이 된다면, 그 늑대는 기실 늑대가 아니라 사람이다. 그로부터 12년이 흐른 2018년, 작가는 제3회 개인전을 연다. 「야생의 사고 : 두 번째 이야기」라는 제목을 달고 역시 늑대를 선보였다. 2006년과 동일한 제목인 ‘야생의 사고’지만, 작가는 동어반복에 발목을 잡히지 않았다. 야생의 늑대는 자연에서 인간 사회로 공간이동을 했고, 그 과정에서 반인반랑(半人半狼)의 모습으로 변신해 우화적(寓話的)인 액자에 담겼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반인반랑은 늑대의 의인화(擬人化)가 아니라 인간의 늑대화다. 빠르게 사물이 되어 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온전히 지키기 위해서는 늑대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일관된 목소리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축화된 인간 작가가 보건대, 현대인들은 ‘가축화’ 되었다. 호모 도메스티쿠스(Homo Domesticus). 즉 길들여진 인간이 되었다는 말이다. 학교, 병원, 군대, 감옥, 회사 등 권력에 의해 제도화 된 기관들은 규범과 규율을 통해 현대인들의 신체는 물론 생각, 행동, 장래의 계획조차도 길들이고 만들어 낸다. 자기계발 열풍으로 상징되는 ‘성과사회’는 보상과 처벌이라는 효율적인 수단으로 자기착취를 정당화 하며 ‘피로사회’를 낳았다. 회사의 가축, 즉 ‘사축’(社畜)이라는 단어의 탄생은 현대인의 비극적인 자화상에 다름 아니다. <피로사회>의 저자 한병철은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질병이 있다”며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과 낙오자를 만들어 낸다”고 갈파한다. 피로는 내면을 공격한다. 쟝 보드리야르는 이를 “자신의 피부 속에 박힌 내 손톱”이라고 표현한다. 현대인들은 소비사회에도 철저히 길들여져 있는 호모 콘수무스(Homo Consumus)다. 자동차는 더 이상 이동수단으로서의 효용이 아닌 신분과 위엄의 상징으로 소비되며, 이를 위해 광고는 정교한 언어로 상품의 이미지를 조작한다. 생체정보 등 개인정보는 IT 기기의 소비와 편의를 누리는 대가로 흔쾌히 지불되고, SNS는 양적 관계과잉 강박증을 부추기며 팬옵티콘(panopticon)을 넘어, 만인에 의한 만인의 감시인 시놉티콘(synopticon) 사회를 열었다. 투명사회는 긍정적인 측면에도 불구하고 피로의 총량을 증가시켰다. 이러한 사회에서 현대인의 일상은 풍요롭기 보다는 오히려 빈곤하고, 초라하고, 구차하고, 비루하다. 욕망은 구멍난 호주머니처럼 채워지지 않고, 무의미함의 반복으로 삶의 마른버짐이 곳곳에서 피어난다. 현대인은 호모 코티디아누스(Homo Quotidianus), 즉 일상인(日常人)으로서 이러한 삶을 죽을 때까지 견디며 살아야 한다. 앙리 르페브르가 말한 ‘일상성의 비참’이다. 인간의 자질은 이 과정에서 상실되고, 이 “일상인은 잠재적으로 로봇이다.” 지하철의 공간학 작가는 호모 도메스티쿠스, 호모 콘수무스, 호모 코티디아누스가 모종의 힘에 의해 모이고 교차하고 흩어지는 공간으로 ‘지하철’을 주목한다. 정글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일상성이 응축된 공간이 지하철이다. 현대인들의 욕망과 좌절, 피로와 우울과 무기력, 종국에는 배신당하고야 말 꿈과 희망들이 부유하고 들러붙은 곳, 거대권력과 미시권력의 정교한 작동 아래 일상과 욕망이 조직되고 부풀려지며 통제되고 길들여지는 곳, 그 거대한 힘의 효과가 ‘가축화’라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곳이 바로 지하철이다. 작품의 공간적 배경이 주로 지하철 안이거나 지하철을 기다라는 벤치인 이유다. <블랙홀 : 밥의 제국>은 그 가공(可恐)할 힘을 보여 준다. 거대한 상어로 표현된 지하철이 물고기 떼를 빨아들이는 듯하지만 결국에는 그 힘에 길들여진 물고기 떼들이 스스로 몰려 들어간다. 주체성과 다양성이 상실된 좀비 같지 않는가! 깊은 밤, 지하철이 ‘장미인간’들을 태운 <터널을 지날 때>를 보자. 장미는 대부분 시들고 진한 피로의 축적 때문인지 색감이 칙칙하다. 장미의 입 속에는 검은 비명(悲鳴)이 갇혀 있고, 삶의 파편처럼 바닥에는 꽃잎들이 떨어져 있다. 이 파편 한 덩어리가 검은 양복을 입은 장미인간의 검은 구두에 밟혀 있다. 장미가 ‘존엄과 가치’를 상징한다면, 우리는 어떤 힘에 의해 이토록 향기를 잃어가고 있는가. 이 터널은 통과의례인가, 삶의 종착지인가. 그럼에도 자본주의는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성과를 강요한다. 성과달성 경쟁에 내몰린 우리들은 스스로를 착취하고, 그 결과는 피로다. 우리는 안다. 피로의 축적은 곧 자본의 축적이라는 걸. 현대인들의 <귀갓길>은 그렇게 소진된다. 극도의 피로에도 우리는 왜 지하철로 나가는가. 생존을 위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다. 소설가 김훈은 <밥벌이의 지겨움>에서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고 썼다. <일용할 양식>은 밥벌이의 끔찍한 의미를 묻는다. 더 이상 생산할 수 없는 자들은 <보이지 않는> 자들이 되어 결국 저 귀퉁이로 밀려나고야 만다. 그리고 무한경쟁과 배려 없는 관계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에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시대의 고유한 질병인 우울증이 노크한다. 우울증 환자는 한병철 교수의 말대로 “내면화 된 전쟁에서 부상을 입은 군인”이다. 장미들이 위태롭다. 몸을 틀 수 없을 정도로 좁은 고시원 원룸 침대가 있는 <이상한 나라 앨리스>에서는 우리 시대 청춘들이 길들여지고 있다. <이율배반>은 타자에 의해 길들여지고 부풀려진 욕망을 다루고 있다. 무거운 바위 배낭을 짊어진 풍선 청년, 아파트 핸드백을 쥔, 나비 머리 초록색 토피어리(topiary) 여성. 날개 달린, 풍뎅이 날개 가방을 맨 황금 나사 직장인. 이 욕망은 현실에서는 이율배반이다. 늑대가방을 쥐어뜯으며 피눈물을 흘리는 늑대는 이 부조리를 자기파괴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어쩔 수 없어. 삶이 원래 다 그런 거야”라고 인정하는 순간, 자신의 장미는 흩어지고 시들어 버린다. 막연한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면, 헝가리 혁명시인 페퇴피 산도르가 “희망은 매춘부”라는 경고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녹슬고 구부러진 못이 되어 벤치에 박혀 있는 <희망>이라는 작품 속 노인들을 보라. 희망은 그대의 청춘을 다 바쳤을 때 그대를 저버린다. 야생의 사고와 늑대 작가는 이러한 삶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야생의 사고’를 가져야만 한다고 역설한다. 작가의 개인전 제목인 「야생의 사고」는 문화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 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의 저서 <야생의 사고>에서 차용했다. 레비 스트로스에 따르면 “야생의 사고는 야만인의 사고도 아니고 미개인의 사고도 아니다. 효율을 높이기 위해 세련화 되었다든가 가축화 된 사고와는 다른 길들여지지 않은 상태의 사고다.” 작가는 이 정의를 자기화 한다. 그리고 그림 속 자신의 철학을 전달하는 유용한 문구로 사용한다. 작가가 사용하는 ‘야생의 사고’는 영어로 ‘wild thoughts’가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의미의 ‘untamed thoughts’다. 작가는 가축화 된 현대인들을 “이 세상 사물들을 비싼 값에 사고 팔고 옮겨주는 일을 하면서도 주인이 주는 마른 짚을 받아 먹고 달가워하는 당나귀에 다름이 아니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작가의 작품에는 대부분 ’늑대‘가 등장하는데, 이 늑대는 ’당나귀‘와는 대척점에 있다. 작가에게 늑대는 야생적 사고의 상징적인 동물이다. 절대로 가축이 될 수 없는, 즉 길들여지지 않는 존재가 바로 늑대이며, “자본주의 세계의 일상성에 길들여 신성과 신화를 잃어버린 현대인의 남루한 순간들을 응시한다.” 이 남루한 순간은 마모, 피로, 소진, 녹슮, 우울, 고립, 소외, 무기력, 이율배반적 욕망, 배신당한 희망 등으로 우화적 방식으로, 그러나 강렬하게 표현된다. 작가는 “내 그림에서 늑대는 저항정신이며, 삶을 성찰하는 눈동자”라고 말한다. 이 눈동자는 지하철 뿐만 아니라 옷장에서도, 거실의 책장에서도, 비좁은 고시원에서도 존재한다. 아니, 어느 곳에서도 존재해야만 한다. 그럴 때 우리는 <25시 너머>를 상상할 수 있다. 작가는 현대인들이 앙리 르페브르의 말을 인용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일상성에서 출발해 일상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일상의 진부함과 상투성과 성찰과 실천으로 투쟁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호모 레지스탕스(Homo Resistance), 즉 저항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말은 작가가 “화가는 그림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고 인간의 내면과 사회를 성찰하며, 인간의 존엄을 위해 조용히 투쟁하는 사람”, “그림은 삶과 사회에 대한 사유와 성찰“, ”비언어(非言語)로 표현하는 적극적이고 강렬한 메시지이자 사람들에게 보내는 뜨거운 호소”,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자기만족과 행복을 넘어선, 세상을 향한 사회적 발언, 더 나아가 사회적 변화를 요구하는 정치적 발언”이라는 자신의 작가관과 연장선상에 있다. 작가는 “화가가 재현하는 기술자라면 그 길은 나의 길이 아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앞으로도 “어느 익숙한 공간에서 저녁 빛처럼 어느 한 순간에 흩어지고 마는 존재들. 그 존재들의 감추어진 의미와 그들의 말들, 인간의 동물성 속에 파묻힌 신성(神性), 일상에서 흘리거나 놓쳐버린 줄도 모르는 것들, 영혼의 눈동자와 깃털, 비늘이나 발톱, 현실에서 꺾인 꽃모가지, 발에 밟혀 으스러진 것, 코르크 마개처럼 틀어 막힌 비명, 가면에 가린 영롱한 빛과 슬픔의 물기를 그리겠다.”고 약속한다. 작가의 오빠인 한승원 소설가는 좁은 문을 고집하는 동생의 그림에 대해 “시장경제 속에서 그녀의 그림은 외롭다. 그녀의 그림은 시장의 거래질서를 도발적으로 고집스럽게 외면하는, 아득한 신화 속에서 당나귀를 끌고 와서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생명력 왕성한 늑대소녀의 풍경 해석하기다. 슬픈 눈으로 냉엄하게 세상 응시하기다”고 평가한다. 글 : 이종오 |
ARTIST Critic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