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유토피아를 꿈꾸는 행복의 서사시_김윤섭(한국미술경영연구소 소장, 미술평론가)
유토피아를 꿈꾸는 행복의 서사시
글_김윤섭(한국미술경영연구소 소장, 미술평론가)  2010. 3

행복을 꿈꾸는 작가 임근우
“행복하신가요?” 불현듯 누군가 물어온다면 참 난감하다. ‘행복’이라…. 너무나 자주 썼던 말이긴 한데, 정작 그 대상이 남이 아니라 내 자신이라면 좀 그렇다. 대충 무슨 소린지는 알겠는데 뾰족한 대답을 찾지 못하겠다. 그러고 보니 ‘진정한 행복’에 대해 진중하게 고민해본 적도 드문 것 같다. 궁여지책으로 컨닝 해봐야 파울로 코엘료가 『연금술사』에서 말했던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란 정도. 그러면 또 내게 ‘아름다움’은 어떤 것일까? 이쯤 되면 꼬리를 물린 질문으로 머리가 복잡해진다. 작가 임근우의 그림읽기 역시 이런 물음에서 시작된다. 임근우의 그림은 우리 삶의 중심을 관통하는 ‘행복의 서사시’이다.
임근우 그림이 매력적인 이유는 우선 과거로 미래를 반추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1990년 첫 개인전부터 줄곧 작품명제로 삼은 는 작가적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다. 지난 시간의 상징인 ‘고고학(考古學)’과 앞으로의 상황을 예측하는 ‘기상도(氣象圖)’ 개념을 하나로 묶어 그만의 질서와 시스템으로 재구성한 우주(Cosmos)를 선보이고 있는 셈이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가교는 현재의 작가 자신이며, 소통의 수단은 바로 꿈이다. ‘인생이 살맛나게 해주는 건 꿈이 실현되리라는 믿음 때문’이라고 했듯, 임근우의 작품 역시 시공의 터널을 지나온 꿈 이야기로 보는 이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그의 작품을 통해 꿈꾸는 동안은 행복하다.
다음은 사람이 중심이 되는 유토피아를 그린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에 초대된 이라면 누구나 주인공이 된다. 특히 도원경(桃源境)을 테마로 하는 최근 작품은 그의 작가적 메시지를 좀 더 명확하게 전달하려는 듯, 바탕 화면에 ‘복숭아꽃 피는 아름다운 이상향’을 지도처럼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해냈다. 많이 본 듯한 산세(山勢)지만, 그렇다고 콕 집어낼 수 없는…. 이런 일련의 몽유도원도 시리즈는 2006~2007년에 실험이 시작되어 작년 봄부터 구체화되었다고 한다. 비록 당장 가볼 수는 없지만, 마음속으로나마 깊은 위안과 행복하고 풍요로운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을 구현해내고 있다. 이 또한 현대인이면 누구나 가고 싶은 미래의 기상도일 것이다.
임근우가 ‘고고학적 상상력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화가’로 자리매김한 것은 유년의 추억이 한 몫을 한다. 그의 고향인 춘천은 선사시대의 유물인 고인돌이 많았는데, 그것은 소년에게 더없이 큰 상상력을 불러일으킨 놀이터이자 꿈의 타임캡슐이었다. 또한 어린 꼬마에게 고인돌은 완벽하고 견고한 건축 자체였으며, 미적 감수성까지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당시 경험은 작품의 평생 주제뿐만 아니라, 실제 지금은 서울경기고고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게 할 정도로 인생의 패턴을 바꿔놓았다. 어쩌면 유년기에 고인돌 위에 앉아 먼 옛날의 그들과 만났던 행복한 꿈속의 수수께끼들을 지금까지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지도 모른다.  

만능 엔터테이너 임근우
임근우는 만능 재주꾼이다. 평면회화와 입체조각, 설치작품에 이르기까지 화가에서 설치미술가로 활동영역이 방대하다. 한 작가가 다양한 장르에 재능을 인정받긴 힘들다. 하지만 그는 마치 동명이인이라도 된 것처럼, 각각의 작품에서 완벽함을 보여준다. 가장 대표적인 에피소드는 월드컵 시즌이던 2002년의 설치작품일 것이다. 당시 2002 서울월드컵 개막식 날의 주인공은 임근우 작가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아직까지도 회자된다. 상암월드컵경기장 앞에 담양에서 공수해온 2002개의 대나무 장대에 10만장의 오방색 깃발을 매단 작품을 설치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오색창연 휘날리는 깃발은 마치 월드컵의 성공을 염원하는 온 국민의 함성을 대변하는 것처럼 장관을 연출했다. 
그의 손을 거치면 플래카드(현수막)도 예술작품이 된다. 임근우는 2003년에 예술문화공간이 태부족하던 경기 의왕시에 ‘찾아가는 전시회’의 일환으로 현장 설치전시를 기획한다. 이것이 획기적인 ‘플래카드 아트페스티벌’이었다. 당시 모 미술전문지 기자였던 입장에서 이 아이디어를 접했을 때 참으로 매우 신선하고 기발해서, 현실참여적인 미술작업의 새로운 대안으로 비쳐질 수 있겠다 싶었다.(물론 예상은 적중했다.) 여러 작가의 작품이미지를 웹하드로 받아 출력해 사용한다는 발상은 인터넷 문화가 보편화되기 시작한 시기와 맞물려 더욱 빛을 발했다. 더구나 백운호수 주변에 설치해 일반 관람객의 접근성과 편의성을 고려함은 물론 국제전이었다는 점에서도 완성도를 인정받았다. 
이외에도 작년 ‘2009컬러풀대구페스티벌’에서 큰 주목을 받았던 강변 깃발설치, 해외 공연을 나가는 국악팀의 무대설치, 의왕시 한성기백제시대 모락산성의 고고학적 흔적을 현대적으로 해석해낸 발굴프로젝트 작품, 현대를 플라스틱 시대로 비유하며 플라스틱 의자 100여개를 사용해 한양대학교 박물관 벽에 설치했던 작품, 버려진 음료수 페트병으로 만든 ‘플라스틱 트리’ 등 흥미로운 작업이 적지 않다. 
사실 임근우가 평면작품 외에 설치나 입체작품에도 능한 이유가 있다. 그는 미술을 전공하기 이전인 1977년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정식으로 먼저 전공했다. 물론 이유는 작품의 완성도와 어릴 적 꿈―고인돌이 축조됐던 원시시대의 모습을 기술적으로 좀 더 완벽하게 구현하기 위한―을 작품에 담고 싶어서였다. 
결국 임근우는 다양한 활동영역에서 고른 재능을 발휘하길 기대하는 현대미술의 시류에 견줄 때 충분히 준비된 작가라 여겨진다.  

임근우 그림 읽는 키워드
임근우의 작품에는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형상들이 있다. 이 형상들은 각각이 모여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인 주제를 뒷받침하는 소재로서 역할을 한다. 보는 주체나 상황, 시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내재된 보편적인 의미를 미리 살펴본다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치 게임의 기본 룰을 알아야 제대로 입문할 수 있고, 점차 응용하면서 즐겨나가는 것과 유사하지 않을까.
중절모. 영화 ‘인디아나존스’의 주인공 모자를 닮은 이것은 고고학자를 상징한다. 화면 전체를 무대로 점점이 부유한다거나, 붉은 색 꽃과 어울려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청색의 모자다. 아마도 작가는 과거의 신비를 담고 있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 있는 키(Key)로써 인식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고고학자는 단순히 한 인간을 넘어 시공간을 꿰뚫어 서로의 벽을 개방하는 신비로운 존재이다. 그래서 청색의 모자는 작가 자신의 염원을 상징하는 동시에 보는 이 모두를 배려하는 ‘공공의 교감’을 상징하고 있다.
심산유곡. 안평대군의 꿈을 안견이 그려낸 몽유도원도를 닮아 있으며, 화면의 가장 많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손에 잡힐 듯 하면서도 저 너머에 신기루처럼 펼쳐 놓음으로써 신비감과 간절함을 더 크게 자극하고 있다. 지친 현대인이 머물고 싶은 안식처이자, 언젠가는 꼭 가게 될 것 같은 유토피아이자 이상향, 샹그릴라인 셈이다.   
동물형상. 얼핏 동물 같지만 식물이고, 말처럼 보이는가 싶으면 젖소이기도 하다. 이는 역동성을 상징하는 말과 풍요를 상징하는 젖소를 합성한 새로운 종의 동물이다. 특히 뿔 달린 서양의 유니콘과는 차이가 나는 머리에 큰 나뭇가지들이 솟았다. 그리고 머리부분은 금색 혹은 반짝이는 펄로 처리함과 동시에 점박이 문양을 더해 신비함을 돕고 있다. 마치 조선시대 해태상의 영험함을 표현했던 방법과 유사하다. 결국 동물에서 나뭇가지가 자라나는 현상을 통해 동식물 또는 음양의 조화로움을 나타내고 있다. 
복숭아꽃. 동물에서 뻗어 나온 가지엔 예외 없이 핑크색 꽃이 활짝 폈다. 짐작되듯 도원경(桃源境)의 상징이다. 그러나 전통적인 무릉도와는 다르다. 그것은 옛 도화는 고정된 장소에 한정적으로 피었다면, 여기에선 원하는 곳이나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영험한 동물을 만난 고고학자의 안내로 우리도 함께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고 있는 듯하다.
다완. 다완과 차주전자는 출토 유물의 상징이다. 특히 둘은 녹차가 지닌 정신성 혹은 사유의 장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차피 현실에서 도달할 수 없는 이상향이라면, 깊은 사색이나 수행으로 당도해보자는 작가의 제안으로도 여겨진다.
무한대 도형. 이 무한대 기호는 아주 재밌는 요소이다. 17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이 기호는 19세기에 나온 뫼비우스의 띠와 함께 영원함을 상징한다. 동양적으로는 순환이나 윤회와도 통할 것이다. 그런데 그냥 무한대 기호가 아니라 한쪽이 ‘하트’모양이다. 작가의 재치이다. 이 또한 본인의 작품이 어떤 측면에서 읽혀지길 원하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비록 얼핏 과거지향적인 작품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지만, 그는 모든 시간의 터널을 깊게 관통하는 것은 결국 ‘행복의 에너지’이길 바란다고 해석된다.

무릉도원이라는 개념은 중국 고래의 유토피아 사상에서 유래됐다지만, 임근우에겐 그리 중요하지 않다. 임근우는 그 개념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면서 현실과 환상, 현재와 과거, 사실과 허구의 경계를 넘나드는 탁월한 서사적 전개능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풍경에 대한 묘사는 손을 내뻗으면 잡힐 듯이 신비롭고 아름다우며 서정적이다. 도시화된 삶 속에서 ‘무릉도원'을 꿈꿔왔던 현대인에게 도연명의 무릉원보다 더 직접적으로 와 닿는 이유이기도 하다.
꿈꾸는 것은 사람만의 특권이다. 그 꿈은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더 살아갈 명분과 힘이 된다. 무한한 행복의 에너지원이 되기도 한다. 임근우의 가 더욱 특별하게 가슴에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은 우리 자신이 잠시 잊었던 유토피아에 대한 꿈 그리고 행복을 부르는 주문을 다시 들려주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