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도 끝도 없는_신혜영_이상원미술관 학예연구사 | |
시작도 끝도 없는
신혜영_이상원미술관 학예연구사 바위는 물결이 되었다. 응축과 단단함의 상징인 바위를 낙숫물이 뚫을 수 있느냐 없느냐(滴水穿石적수천석)의 이야기처럼 전태원 작가의 묵직한 바위(Stone)는 한 줌도 움켜쥘 수 없는 물결(Layer)이 되었다. 변화는 작가가 지내온 삶으로부터 말미암았고 늘 그의 곁을 지켜온 춘천의 강과 호수가 구체적인 이미지를 제공하였다. 그의 작품은 오브제이다. 입체 작품이라고 불러야만 한다. stone이라는 제목의 바위덩어리를 만들 때도 그렇고, 최근 수 년 간 몰두해오는 Layer작업도 마찬가지다. 평평한 입체라고 해야 하나? 모순이 있는 단어지만 그의 작품은 평면회화의 외양을 하고 있으나 엄밀하게 말하자면 작은 종이를 쌓아올려 만든 입체이다. 작품형식에 대한 분류에 있어 그의 작품을 평면으로 볼 것인지 입체작품으로 볼 것인지의 차이는 작품을 멀리서 바라볼 때와 가까이서 바라볼 때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마치 삶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작가가 응축된 바위로 표현하다가 끊임없이 지속되는 물결로 표현하는 것과 같다. 삶을 바라보는 해석의 차이가 작품의 변화에 근간이 되었을 것이다.
작가의 작업실에는 다양한 톤(tone)으로 분류된 얇게 썬 종잇조각 모둠이 있다. 거의 1~2mm 크기의 종잇조각이 그에게 물감이다. 이미지가 착상되면 종잇조각을 평면위에 붙여나간다. 종이의 기본 색감이 작품의 전체 느낌을 형성하고 종이를 붙인 두께와 모양에 따라 입체적인 효과를 얻는다. 동심원의 물결무늬에서부터 유유히 흘러가는 물결, 물결이 모래바닥을 훑고 지나간 듯한 모양, 영하의 온도가 느껴지는 무겁고 날카로운 물결이 있는가하면 잔잔하다 못해 결의 흔적이 사라진 모습까지 다채롭다. Stone 연작에서 작가는 오랜 동안 이어지는 역사의 무게에 대해 이야기했다. 삶이 축적되면서 생기는 시공간의 밀도에 대해 자연이 생성할 수 있는 가장 단단하고 묵직한 ‘바위’를 상징물로 재현하였다. 가볍고 얇은 종잇조각이 무거운 바위로 표현되기까지의 지난한 작업 과정은 그가 표현하려고 했던 시공간의 축적에 비한다면 당연하고도 필연적으로 다가온다. 이후 절대적인 노동과 시간을 투여하는 작업의 과정은 변함이 없었으나, 그는 시간의 흐름, 삶이라는 거대한 변화 그 자체를 표현하는 작품의 형태를 바꾸었다. 바위가 움켜쥔 주먹이라면 물결은 힘을 빼고 펼친 손바닥과 같다. 어떤 것도 붙잡지 않았지만 물결은 시작과 끝을 지정할 수 없어 훨씬 광활하다. 바위는 마치 시간이 축적된 결과물과 같아 과거에서 시작하여 현재의 시점에서 마치는 선형적인 세계관으로 읽힌다. 그러나 물결은 처음의 물결이 마지막의 물결이 될 때까지 지속되며 변형되는 순환적 세계관과 같다. 물결의 일부분은 전체 물결의 모양과 비슷하다. 끝이 없어 보이는 과정뿐인 물결에서는 결과라는 개념을 붙잡을 수 없으며 다만 지금 현재를 경험할 뿐이다. 그러나 과정에 전체가 담겨있다면 지금 경험하는 일부분을 통해 전체를 유추할 수도 있다. 삶에 대한 이런 관점은 태어난 시점을 기억하지도 마감할 시점을 예상할 수도 없는 개인의 삶에 대한 현실적인 이해가 아닐까? 나아가 공동체의 삶은 수많은 개인이 정신적 육체적인 측면에서 이어지는 연쇄적 현상이다. 우리는 이미 타인의 삶을 통해 나의 삶을 이해하고, 다른 시기의 역사를 통해 지금의 역사를 통찰하는 등 순환적 세계관을 적용해왔다. 그러나 현대의 지배적인 세계관은 직선적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다. 과학과 기술에 대한 맹목에서 야기된 이 세계관은 우리의 삶을 거칠게 양분한다. 성공과 실패, 지식과 무지, 옳고 그름을 획일화하고 정(正)과 반(反)의 이원론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것을 지식으로 파악하고 결과물로 평가하는 가치체계가 실재하는 현실로부터 존재를 떼어놓는 것은 아닌지 되물어야한다. 연결되고 반복되는 거대한 물결과 같은 삶에서 늘 어떤 결과를 얻으려는 목적의식적 태도는 집착과 왜곡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것을 다른 표현으로 하면 삶으로부터의 소외, 진실로부터의 유리(流離)이다. 결과에 집착하지 않은 채 물결을 타고 삶의 과정을 경험하다 보면 외면적으로는 동일해 보이는 움직임일지라도 질적으로 다른 깊이를 가진 경험을 맞이하게 된다. 물론 그것조차도 새로운 물결의 시작일 뿐이지만. 어느 사이엔가 하나의 마디를 형성한 후 계속 자라나가는 나이테와 같이 이전과 비슷하나 또 다른 삶을 살아나가게 된다. 그 전체를 멀리서 조망하면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물결과 같을 것이다. 목적의식적 삶에 지쳐버린 듯 최근에는 순간의 미학이 동시대 미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목적과 결과와 함께 근원이나 진실까지 예술작품의 주제로서 매력을 잃은 듯하다. 사람들은 작품을 1~2초 남짓 일견하고 스마트폰에 사진으로 저장한 뒤, 잠시 소비하고 곧 잊는다. 순간의 미학은 자칫 현재에 충실하고자 하는 흐름으로 오해될 수 있다. 하지만 방향도 없고, 목적도 없으며, 무엇보다 진지한 질문이 없는 순간의 미학은 과정이라기보다 단절이며, 변화의 연속이기보다 죽음의 연속이다. 이러한 순간의 미학은 미술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적용된다. 어쩌면 변화를 위한 변화에 중독된 일상을 미술이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전태원 작가의 작업은 그 반대편에 서있다. 미세한 종잇조각을 켜켜이 겹쳐 시작도 끝도 없는 물의 결을 만들고 있다. 그것은 어떤 의지에서 오는 것일까? 근경의 시각이 아니라 원경의 시각. 불현듯 이 세상에 나타난 듯 보이는 나란 존재에 대해 그 근원을 쫒으려는 열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흐르는 강물과 파도치는 바다 앞에 섰을 때 그 단순한 리듬과 간결한 조형에서 오는 알 수 없는 신비에 말을 잃을 때의 ‘근원에 다가가는 느낌’을 자신의 화폭에 담고자하는 예술가의 기개에서 오는 것이 아닐까? 직선적인 세계관의 경직과 순간의 자극만 반복되는 가벼움에서 끝없이 재생되는 물결이 우리에게 어떤 다른 길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 2018 이상원미술관 개인전 도록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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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과 시작점_박정수(정수아트센터, 아트나인갤러리 관장) | |
박정수(정수아트센터, 아트나인갤러리 관장)
처음과 시작점
돌과 바위가 있습니다. 돌은 모래보다는 크고 바위보다는 작은 단단한 덩어리를 말합니다. 모래나 돌이나 바위는 크기만 다를 뿐 흙이라는 성분은 같은 물질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같으면서 다른 무엇으로 변한 것입니다. 여기에 전태원은 영겁(永劫)의 시간을 잠시 묶어둡니다. 지금이 지나면 다른 무엇으로 전환될 사물의 시간을 멈추면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킵니다. 물성의 대별로 이해될 수도 있는 바위와 물을 제작합니다. 특정의 모양을 유지하고 있는 고체와 외부와 어떤 기물에 의해 어떤 모양으로도 변화 가능한 물을 만들어냅니다. 그렇다고 자체를 명명하는 것이 아니라 파장에 의해 일어나는 물결의 ‘결’자체를 이야기 합니다. 물이 아니라 그것으로 표현되는 흐름과 시간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흐름 자체가 됩니다. 바위가 있습니다. 종이로 만들어진 바위는 종이의 습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바위로 이해되는 시각의 편차를 보여줍니다. 바위에 붙어서 자라는 이끼로 영역을 확장시킵니다. 미세한 물기만으로도 자신의 생명을 유지해 나갑니다. 큰 욕심 없는 삶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바위와 물과 이끼는 각기 다른 물성이지만 영겁의 영역에서는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지금은 다르지만 언젠가는 같아질 수도 있는 공존의 시간입니다. 잠시 멈춰진 시간입니다. 잠시 멈춰진 시간에는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시점이 생겨납니다. 시작은 결과나 끝을 예정하기 때문에 지속적 순환과는 조금 멀리 있기 마련입니다. 처음과 시작은 서로 만나지 않습니다. 처음은 경험치가 제어하지 않은 새로운 무엇입니다. 처음이기 때문에 낯설고 어색하고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처음이 익숙해지면서 모양을 찾아 의미를 만들고 소통과 연결되는 시점이 만들어집니다. 여기에 전태원의 작품이 있습니다. 박정수(정수아트센터 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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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와 콜라주가 함께 한 그림이다(미술평론가 - 박영택 ) | |
미술평론가 - 박영택 전태원은 신문지와 여타 종이류를 잘게 파쇄해서 바탕(캔바스)에 산포 시킨 후, 그 위에 자연을 소재로 한 특정 이미지를 올려놓는다. 유화와 콜라주가 함께 한 그림이다. 독특한 바탕처리와 함께 설정된 자연대상은 자연의 순환, 그리고 생성과 소멸의 법칙을 은유하는 매개로 작동한다. 고대 인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세계는 먼지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작가 역시 모든 것은 먼지에 불과해서 종내는 모두 사라지는 편린임을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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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원, 결(Layer)_이재언 미술평론가·인천 아트플랫폼 관장 | |
이재언 미술평론가·인천 아트플랫폼 관장 문화일보 / 그림 에세이 / 2019.10.2.
전태원, 결(Layer), 163×131㎝, Paper on Canvas, 2018
세상의 그 어떤 이별이나 종말도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들 말한다. 이별 가운데 가장 찜찜한 이별은 아마도 책과의 이별이 아닐까. 온갖 지혜와 주옥같은 말씀들로 감동과 위로를 주었던 서책들과도 이별의 순간이 오지만, 이별 장소가 헌책방이라면 그나마 예를 다한 것이다.전태원의 화면이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용도를 다한 수많은 서책이 파쇄 후 반죽 과정의 경건한 의식을 거쳐 화면에 미장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저자의 혼을 노래하는 것일까. 텍스트는 가물거리는 전생의 기억을 더듬으며 물 위에 빛으로 재생, 아니 환생한 것이다. 재처럼 산화된 철자(綴字)의 편린들이 물결을 따라 출렁이며 스스로 말한다. 자연 회귀…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내 손 놓는 그대여 / 더 멀리 가시라 / 더 좋은 곳에서 / 하루를 적시며 / 반짝반짝 빛나기를’ (전윤호 시, ‘턱걸이’ 부분) |
ARTIST Critic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