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대관의 회화_막막한, 가볍는, 아득한, 그리운 강물_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 |
김대관의 회화 막막한, 가볍는, 아득한, 그리운 강물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강물을 쳐다보고 있으면 정신이 멍해질 때가 있다. 처음에는 강물과 함께 그 강물을 쳐다보고 있는 내가 같이 보인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나는 불현듯 지워지고 강물만 보인다. 강물과 의식이 서로 분리돼 있다가 점차 강물이 의식 쪽으로 건너와 스며들고 차고 넘쳐 종래에는 의식을 온통 침범하고 잠식하는 탓이다. 이처럼 강물이 의식 쪽으로 범람할 수는 없어도 의식이 강물을 범람시키지는 못한다. 의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기껏해야 강물을 무미건조한 개념으로나 환원할 수 있을 뿐. 여하튼 이렇듯 의식이 강물로 범람할 때 강물은 흐르는 것도 같고 흐르지 않는 것도 같다. 그러나 분명 강물은 흐른다. 마찬가지로 시간이 멈춰선 것도 같고 흐르는 것도 같다. 그러나 의식이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느리기는 하지만 분명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강물도 흐르고 시간도 흐른다. 이렇듯 흐르는 성질을 공유한 탓에 강물은 시간의 유비가 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다고 했다. 만물유전이다. 모든 존재는 항상적으로 변화한다. 변화한다는 것은 흐른다는 것. 이렇게 강물도 흐르고 시간도 흐르고 존재도 흐른다. 흐르는 존재를 붙잡을 수는 없는 일. 그래서 흘러가는 강물을 보고 있으면 가없고 덧없고 막막해진다.
김대관은 독일 힐레에서 유학할 때 곧잘 인근에 있는 강을 따라 산책하곤 했다. 그러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운 마음을 삭이고 키웠다. 고향에도 강이 흐르고 있었다. 이렇게 고향의 강이 범람하고, 이곳의 강이 범람해 그의 마음속에 또 다른 강이 흐르게 했다. 그러므로 작가에게 강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 곧 향수를 의미했고, 그 시절로 회귀하는 시간(시간여행)을 의미했다. 그리고 작가는 흐르는 강물에 착안해 그 향수며 시간을 조형하고 싶다는 욕망을 품기에 이르고 그 욕망을 작업으로 풀어낸다. 여기서 작가의 마음속에 흐르는 강은 다만 그 종류와 성분, 깊이와 폭이 다를 뿐 우리의 마음속에도 흐른다. 사람들은 저마다 마음속에 흐르는 강물 한 줄기 쯤은 간직하고 있는 법이다. 향수의 강, 시간의 강, 회한의 강, 그리고 망각의 강 등등. 그러므로 강을 소재로 한 작가의 주제와 작업은 작가의 경계를 넘어 우리의 마음속에 범람하면서 공감을 얻고 보편성을 얻는다.
그러나 말이 쉽지 마음속에 흐르는 강을 조형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마음도 그렇거니와 강 역시 정해진 형태가 없다. 얼핏 색이 있는 것 같지만 천만화의 스펙트럼을 아우르고 있어서 어떤 결정적인 색채로 환원하거나 한정할 수가 없다. 형태도 비결정적이고 색채도 비결정적이다. 형태나 색채가 자연현상(예컨대 빛의 강도나 대기의 조건)에 연동돼 있을 뿐만 아니라 이처럼 마음과도 연동돼 있다면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마음의 프리즘을 통해본 형태와 색채는 결국 질료를 품으면서 이행해서는 문제며 감각의 문제며 암시의 문제다. 이렇듯 감각이며 암시적인 강을 어떻게 붙잡을 수가 있는가.
여기서 작가는 유리회화를 생각한다. 물이 그렇듯, 빛을 투과하는, 그래서 투명한 성질을 갖는 유리판 위에 채색이 얹힌다면 마음속에 흐르는 강물을 표현할 수가 있을 것이다. 물을 투명하게 하는 것도 물의 질료 속으로 투과하는 하는 것도 빛이다. 비록 질료는 다르지만 유리 역시 마찬가지다. 빛이 매개 가 되어져서 물과 유리를 상동하게 한다. 빛이 없으면 그 상동한 성질은 불가능해진다. 결국 물을 암시하기 위해서 빛도 같이 암시되어야 한다. 유리회화를 통해서 물물의 질료를 감각하게 하고, 동시에 빛 빛의 질감을 암시하는 것.
강물의 형태도 그렇지만 특히 색채는 자연현상에 연동돼 있다고 했다. 맑은 날에 강물은 파랗게 보이고 더 맑은 날에는 아예 옥색으로 보인다. 그 옆에 숲을 끼고 있을 때 강물은 연녹색으로 보이다가도 녹색과 때론 짙은 녹색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수면 위에 노을이 드리워질 때면 강물은 물의 색깔 위로 빛의 색깔을 밀어 올린다. 노란 색에서 주황색과 빨강색 사이에 위치하는 색채 스펙트럼을 온통 아우르는 것이다. 그러다가 날이 어둑해지면 파란 색은 군청색으로 짙어지다가 점차 어둠 속에 묻힌다. 어떤 색의 경우이건 색채의 이면에 투명한 깊이를 간직하고 있고, 어떤 특징의 색채로 환원되거나 한정되지는 않는, 몇 가지 색채를 동시에 아우르고 있는, 그저 색채라기보다는 색채의 기미, 색채의 느낌에 가까운 어떤 비전을 열어 보인다.
이렇게 해서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색채의 종류와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 된다. 결국 작가의 작업에서 이런 색채의 기미, 색채의 느낌 자체가 물의 기미며 빛의 느낌에 연동된 것을 재현하는 것이 핵심이라 관련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작업이 제작되는 과정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 대략적인 과정을 보면, 우선 유리판에다가 유리착색안료를 칠한다. 이때 가녀린 라인 테이프로 화면의 일정부분을 가려 안료가 묻지 않게 한대테이프는 이후 때 내거나, 아마도 소성과정에서 불에 타 없어지는 특수 테이프를 사용할 듯.) 이 상태로 620도까지 서서히 온도를 높여가며 가마에 구워낸다. 그리고 재차 색을 덧칠하고 구워내기를 수차례(대개는 여섯 차례 이상) 반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그 표면에 은근하면서도 투명한 질감의 색채가 착색된 유리판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렇게 착색된 두 장의 유리판을 일정한 간격을 두고 하나의 화면으로 중첩시키는데, 같은 계열의 색채가 착색된 유리판을 중첩시킨다. 이틀테면 좀 더 짙은 청색과 좀 더 옅은 청색이 착색된 유리판을 중첩시켜 같은 색조를 유지하면서도 라인 테이프로 처리한 빈 부분이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그리고 그 빈 라인 위에 대개는 대비되는 보색의 점들을 찍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여기서 안료가 착색된 유리판은 수면을 암시하며, 라인으로 처리된 부분은 화면을 가로지르는 시각적 현상으로 인해 수면의 방향혹은 평형과 유속(물이 흐르는 느낌)을 암시한다. 더불어 수면에 던져진 빛의 편린들을 암시하며, 이는 점점이 찍힌 점(광점)들에 의해 강조된다. 이렇게 해서 물이 흐르는 느낌과 함께 수면에서 난반사되는 빛의 산란효과를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작업이 제작되는 과정을 무슨 도해라도 하듯 역추적하고 재구성해봤지만, 작가의 작업은 기계적인 과정이나 느낌과는 분명 거리가 멀다. 이를테면 같은 계열의 색조가 중첩된 화면이 특정의 색채로 환원할 수는 없는, 상대적으로 투명하고 깊이감이 느껴지는 색감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역시 중첩된 화면으로 인해 라인으로 처리된 부분이 서로 겹치기도 하고 어긋나기도 하면서 다양한 선의 변주를 만들어낸다. 이런 일련의 현상들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져서 투명하면서도 깊은 물의 질감을 만들어내고, 물의 표면에서 물과 희롱하는 빛의 기미를 자아낸다. 그 질감과 기미에 힘입어 정적이고 서정적인 느낌과 함께 관조적이고 명상적인 계기에 이른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작가의 유리회화 중엔 수직성을 강조한 경우가 많지 않지만, 대개는 옆으로 긴 화면으로써 수평을 강조한 경우가 많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옆으로 흐르는 물의 성질을 따른 것이며(여기에서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그래서 수직으로 흐른다는 자연과학적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옆으로 펼쳐진 자연의 생리를 따른 것이다. 이처럼 옆으로a) 확정된 수평의 풍경은 수직의 풍경에 비해 쉽게 풍경에 동화되게 만든다에 반해 수직의 풍경은 흔히 범접할 수 없는 거리감으로 숭고를 자아낸다.
그리고 작가는 이 일련의 유리회화와 함께 캔버스 그림을 시도한다. 다만 매체가 달라졌을 뿐, 이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는 마찬가지로 자연 속에 흐르는 강물이며, 내 마음 속에 흐르는 강물이다. 그 제작과정을 보면, 짙은 색을 먼저 칠하고 점차 밝은 색을 덧칠하는 수순을 밟는데, 안료를 덧칠할 때는 지극히 묽은 안료를 수십 차례 중첩시켜 그 이면의 짙은 색이 은근히 배어 나오도록 조절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묽은 안료를 덧칠할 때 일부 안료의 알갱이가 화면에 남겨진 채 굳어지면서 그 위로 붓질이 지나갈 때 생긴 자국이 여실해진다는 점이다. 화면을 가로지르며 옆으로 연장된 이 자국은 유리회화에서 라인테이프로 처리한 선에 해당하며, 그 선의 느낌곧 및 혹은 빛줄기의 느낌을 캔버스 그림의 생리에 맞게 구현한 경우로 볼 수 있겠다.
수십 차례에 걸쳐 묽은 안료를 덧바른 화면에서 이면의 색채와 표면의 색채가 하나의 갤혹은 층위로 중첩되고, 특정의 색채로 한정되지가 않는 풍부한 색채의 스펙트럼을 아우르게 되고, 이로써 마치 색채가 화면의 이면으로부터 배어 나온 듯 은근한 느낌과 함께 어떤 내적 울림을 자아낸다. 내적 울림? 그것은 자연 속에 흐르는 강물보다는 마음속에 흐르는 강물, 가시적인 강물보다는 비가시적인 강물, 질료적인 강물보다는 관념적인 강물의 생리를 더 닮았다. 그래서 캔버스 그림은 유리회화에 비해 더 관념적이고 더 추상적으로 보인다. 사실상 모노톤의 화면이 미니멀리즘의 한 변주처럼 보이고, 그러면서도 그 이면에 내적 울림을 자아내는 서정적인 느낌이 후기미니멀리즘의 가능성을 예시하고 있다.
김대관의 작업은 흐르는 강물에 착상된 것이다. 강물은 우선 작가의 고향에 흘렀었다. 실제와는 상관없이 모든 고향에는 원지 강이 흘렀던 것 같고, 강이 흐를 때 고향은 더 고향다운 것 같고, 고향에 흐르는 강은 왠지 과거형으로 기술될 때 더 격적인 것 같다. 그리고 강물은 작가가 서있는 지금여기에도 흐르고, 작가의 마음속에도 흐른다. 모든 강물은 한줄기로 연결돼 있다. 원래 고향에 흐르던 강이 지금여기 위로 차고 넘치고, 마침내 내 마음속에마저 범람한 것. 이렇게 범람된 강물은 그 원천이 고향이란 점에서 모든 강물은 결국 그리움인 것. 그래서 강물을 그린다 는 것은 곧 그리움을 그리는 것.
작가는 유례가 없는 유리회화를 통해서 이처럼 존재에 대한 그리움 그 자체가 고향으로 표상된, 그리고 일종의 원형의식에 연동된이 투사된 강물을 그린다. 그 그림이 막막한, 가없는, 아득한 감정에 빠져들게 만든다. 강물 앞에 선다는 것, 그것은 밑도 끝도 없는 그리움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그 그리운 강물 앞에 서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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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관의 작품세계 – 회화적 프로세스가 빛이 될 때_Raúl C. Sampaio Lopes (미술비평가, 미술사 박사) | |
김대관의 작품세계 – 회화적 프로세스가 빛이 될 때 -Raúl C. Sampaio Lopes (미술비평가, 미술사 박사)
예술사적인 용어나 개념을 굳이 찾지 않더라도 김대관의 작품들은 한눈에 보아도 회화로 정의될 수 있다. 그의 작업에서는 구체적으로 두 종류의 회화가 존재하는데, 하나는 캔버스에 그린 회화이고, 다른 하나는 유리에 그린 회화이다. 이 서로 다른 표면의 재질은 빛에 관한 한 근본적으로 차별화되는 작업을 포함한다. 캔버스로 작업할 경우 빛은 불투명한 표면에 떨어지는 것이지만, 유리에 작업하는 경우 반투명하거나 투명한 표면이 빛을 투과한다. 유리 회화에 대해서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최근 몇몇 대작가들이 관심을 보였던 채색 유리창, 스테인드글라스의 작업 양상 뿐이다. 가령 피에르 술라주(1919년생)는 1994년에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콩크 시의 로마식 성당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설계했고, 게르하르트 리슈터(1932년생)는 2007년 쾰른 시의 대성당 내 남쪽 가로 회랑에 스테인드글라스의 형태로 추상 색조들을 구성했다. 또한 션 스컬리(1945년생)는 카탈로니아 지방의 산타 세실리아 예배당의 장식물에 스테인드글라스를 삽입했고 이는 2015년에 완성되었다. 그런데 김대관의 유리 회화들이 앞서의 대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첫째 그것이 지닌 내밀성에 의해서이다. 그의 작품들은 개인 소장가들의 보다 소박한 실내용으로 적합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현대예술의 특수성에 없어서는 안되는 요소 즉 인공적 빛을 이용한다는 점이다. 내가 이 글에서 김대관의 캔버스 회화를 더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유리 회화에 대한 내 부족함 탓만은 아니다. 캔버스 작업이야 말로 그의 구상예술에 대한 탐구에 있어 가장 핵심적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캔버스 회화
김대관의 회화작품들은 추상예술의 전통적 장르에 속한다. 추상화에는 얼마나 다양한 면모가 있던가. 그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여기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그의 작품들이 추상예술 분야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우선 살펴보려고 한다. 회화가 이룬 성공적 입지와 그 의미는 그것의 제작 프로세스에 있다. 바로 이 관점에서 회화는 곧바로 추상예술의 한 부류로 편입된다. 추상예술은 1950년대 일어나기 시작하여 1960-70년대 매우 혁혁한 결과를 도출해냈고, 이어 1990-2000년대에 새로운 세대의 작가들을 배출했다. 김대관의 회화세계가 어떤 점에서 그의 선대 작가들과 맥을 같이 하는지 혹은 그들에게서 멀어지는지 이해하려면,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독창성을 이해하려면 추상예술의 서로 다른 모델들을 참고해 볼 필요가 있다. 잭슨 폴록(1912-1956)은 김대관의 관점에서 ‘페인팅 액션’과 ‘드리핑 액션’이라는 이중적 출발점으로 삼기에 적절하다. 드리핑 기법은 폴록이 자신의 행위에 자유를 부여하고, 작업의 공간을 확장시키는 일종의 기술적 해법이었다. 좀 더 후에 모리스 루이스(1912-1962)는 드리핑 기법을 다시 이용했지만 폴록과 달리 행위의 간섭을 배제하고, 거대한 면직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을 그저 흐르게 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물감을 다소 우연적으로 흐르게 하는 이 방식은 작가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곤 했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회화가 추구하던 놀라움의 효과, 일종의 계시와 같은 효과였다. 프랑스 작가인 시몽 한타이(1922-2008)는 접힘 기법을 통해서 이들과 유사한 경험을 이어갔다. 작업이 진행되는 프로세스 중에 작가는 한치 앞을 볼 수 없이 혹은 최종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한타이는 캔버스를 접거나 묶은 후에 그 위에 칠을 하고, 다시 묶은 부분을 펼친다. 그러면 물감이 칠해지지 않은 부분이 드러난다. 접기와 펼치기의 작업을 통해 예측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모습을 드러내지만, 그것은 전체적인 모티브 구성에서 일정 부분 작가의 의도를 반영하면서 칠해진 부분과 대비를 이룬다.
김대관과 가까운 시기의 현대작가들로 넘어오자. 영국 작가 이안 다벤포트(1966년생)와 프랑스 작가 세드릭 테세르(1968년생)는 1990년대에 와서 거의 같은 시점에 둘다 ‘세로로 놓인’ 작업면에 아크릴 물감을 붓는 구상을 했고, 그렇게 캔버스의 공간을 채우면서 수직선들을 만들어냈다. 이들의 작업은 모리스 루이스의 일부 작품들과 형식면에서 매우 가까운 결과를 도출했다. 다벤포트가 독일의 유명 도자기 메이슨과의 협업을 위해 구상한 계획은 묘하게도 초기 모리스 루이스 작품의 미니어처 같은 인상을 준다. 더 나아가 모리스 루이스와 어느 정도 연관이 있는 워싱턴 학파의 또 다른 작가인 젠 데이비스(1920-1985)의 수직밴드 회화도 매우 유사하다. 이 미국인 작가는 막연할지 언정 어느 정도 예정된 플랜을 따르는 대신, 되는 대로 자기 손에 잡히는 색원료를 사용하여 자신이 직접 선을 그었다. 다시 말하면 이전 작가들처럼 중력의 힘을 빌지 않고 작품을 완성한 것이다. 반대로 테세르와 다벤포트는 자신들의 프로세스를 더욱 강조하기에 이른다. 우선 테세르는 흘러내린 물감이 캔버스 아래 경계를 지나치도록 내버려두었다. 이렇게 흘러내린 자국이 굳은 후에 캔버스를 벽에 걸면 물감이 멈춘 모양은 천장에 매달린 종유석처럼 보인다. 다벤포트는 유사한 작업과정을 통해 물감이 바닥에 맞닿아 흘러내린 부분을 접어서 새로운 면을 구성하기도 한다. 완벽하게 수직으로 내려온 물감은 접힌 면이 만들어낸 예측 불가능한 일종의 무질서와 만난다. 접힌 부분이 완전히 마른 후에 이를 벽에 걸면 이는 반듯한 형태의 전통적인 회화 작품이 된다. 때로 다벤포트는 물감이 바닥 위로 흘러내려오도록 두는데 이는 테세르와 같은 방식이지만 보다 제한적이다.
이러한 실례들을 보자면 자신만의 회화를 캔버스에 작업하기 위해서 김대관이 취하는 방법이 얼마나 놀랍도록 인지적 작용을 거치는지 이해하게 된다. 우선 그는 평편하게 바닥에 깔아 놓은 모노크롬 표면에 물감을 떨어뜨린다. 물감 방울이 마르게 되면 그것은 표면에 봉긋한 딱지처럼 굳는다. 이는 장 아르프(1886-1966)라고 하는 다다이즘 작가가 찢어진 종이, 색칠한 종이를 캔버스 위로 떨어뜨리며 했던 실험을 떠오르게 한다. 이어 김대관은 캔버스를 세로 방향으로 세우고 납작 붓에 반투명 물감을 바른 후 거의 기계적으로 일정하게, 위에서 아래로 매번 같은 방향으로 쓸어내린다. 그의 이 자동적이고 기계적인 행위는 미국의 거장 프랭크 스텔라(1936년생)가 에서 기하학적인 문양의 선들을 미리 그어 놓고 비개성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양상과 가깝다.
김대관은 나에게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아무 것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으며 작업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작가가 이 기계적인 행위를 얼마나 잘 제어하는지가 작업의 결과를 좌우한다. 붓털은 딱딱하게 굳은 물감 위로 올라갔다가 좀 떨어진 단색의 표면으로 내려온다. 그러니 표면의 어떤 부분은 물감의 포개어진 층을 벗어난다. 캔버스 면 전체에 걸쳐 이런 방식으로 작업한 후 작가는 캔버스를 90도 돌려 다른 반투명의 색으로 같은 작업을 성실하게 반복한다. 붓길이 거치지 않은 부분은 매번 같은 장소가 될 수 없으니, 우리는 붓이 지나간 노정과 자취를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회화라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시간이 그 작품 안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만 같다. 스텔라가 초기에 추구했던 즉시성, 데이비스, 다벤포트, 테세르에게서 우리가 느꼈을 즉시성의 효과와는 단연코 거리가 먼 것이다. 붓길이 닿지 않은 김대관의 이 공간은 일종의 반-흘림, 흘림의 관념화와 같다. 오히려 작업이 기계적이지 않을 때 흘림 기법은 자못 경망스러운 현대 회화의 클리쉐가 되어버린다. 캔버스의 방향을 연속적으로 돌리는 것은 수직과 수평을 매우 분명히 표시하는 행동이다. 그것은 피에트 몬드리안(1872-1944)이 구성한 수직, 수평처럼 매우 분명하게 드러나며, 몬드리안의 후기 작품을 연상하게 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김대관이 바닥에 펼쳐 놓은 평면에 물감을 떨어뜨리는 자세는 폴록이 취한 것이지도 하지만 이는 극동아시아의 서예기법에서 발상을 얻은 것이었다. (당대 서양 작가들 사이에서는 우키요에의 유행과 더불어 ‘제2의 오리엔탈리즘’이라 불릴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김대관은 이어서 회화적 면의 수직성, 오랫동안 서양작가들이 자기네 회화의 특성으로 삼았던 수직성을 매우 솔직하게 인정한다. 우리가 보듯이, 김대관의 회화는 회화에 대한 회화이다. 모든 관념적 회화가 그러하듯, 그 자신에게 집중하는 회화이다. 매우 개인적인 방식으로 회화의 역사에서 다루는 그리고 현대 회화에서 다루는 많은 주제들에 대해, 서양과 동양의 전통을 경쾌하게 혼합하며 재-작업하는 회화이다
회화와 빛
이제는 회화작가들이 색을 통해서 빛을 실험하거나 그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대단히 드문 일이 되었다. 이점에 대해서는 션 스컬리의 을 참고로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에서 빛은 색의 조합, 조화의 결과물이다. 또 색의 부재를 통해 빛을 강조한 피에르 술라주가 있다. 우리가 확인하였듯이, 김대관에게서 색은 회화의 제작 과정, 프로세스의 일부분을 이룬다. 서로 다르게 색을 바른, 서로 다른 글라시가 중복된 결과이다. 그것은 각 층의 투명성에 좌우되는 색이며, 말하자면 각 층에 빛이 투과되는 정도에 따라 결정되는 색이다. 따라서 색은 빛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 이런 회화작품들은 한 가지 색으로 표면을 채운다는 원칙으로 보건대 모노크롬 회화의 정신 속에 들어가는 것이지만, 결과에 있어서는 제작과정의 상이한 요소들이 모노크롬 회화이기를 방해하는 역설적인 작품들이다. 마치 모노크롬 회화의 이상이 구현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목표로 한 듯하다. 일부 근대주의자들은 이를 회화의 종말과 결부시키는데 그것은 다음의 이중적 의미에서 그러하다. 회화가 지향하는 최고의 목표, 최후의 위상은 회화가 더 이상 지향할 것이 없는 가장 완벽한 형태이며, 따라서 회화의 죽음을 의미한다. 김대관 작업의 형식과 과정상에서 살펴보았던 이전의 접근과 달리, 이번에는 끊임없이 모델들의 얼굴에서 살을 파내면서 해골과 죽음을 마주할 것이라 생각했던 알베르토 자코메티(1901-1966)가 실상은 조각상에 생생한 존재성을 부여하고자 늘 노력했던 것을 떠올릴 수 있다. 김대관은 오로지 죽음의 언저리에서만 회화의 삶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이 회화의 삶은 결정적으로 빛의 탐구와 맥을 같이 한다. 그렇다면 어떤 빛일까? 분명 빛이라는 단어의 일차적 의미, 비유적 의미 둘 다에 관련될 것이지만, 내가 보기엔 매우 정확하고 구체적인 어떤 표현을 거기에 부여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김대관 작품의 최종 색채는 우리가 예측할 수 없다. 물론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드리워 감추어진 어떤 색이다. 그것은 엄청난 강렬함을 지니고 있다. 이 색채, 그것이 무엇보다 환기시키는 것은 이곳 한국에서 볼 수 있는 매우 특별한 빛이다. 공기가 머금은 습기는 연무를 만들고 태양을 가리기에 충분하지만, 강하게 발산하는 태양 빛을 완전히 가리기에는 불충분하다. 이때 색은 습기 때문에 생기는 강화작용과 빛의 강렬함으로 인해 이중의 강도를 지닌다. 구름이 있는데도 눈이 부신 것과 같다. 전통적 수묵화 작가들은 이러한 빛을 재현할 수 없다. 거기에는 빛의 강렬함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과 완전히 다른 전통을 훌륭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고 또 재창조하는 김대관은 그 빛을 재현하기에 이른다. 다양한 전통들을 섭렵하여 내면의 힘을 키운 후,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 고유의 색을 찾아낸 (단어 본래의 의미에서 뿐 아니라 비유적 의미에서) 김대관은 편협한 개인주의에 갇히는 대신, 자신의 경험이 이 경이-빛의 역사를 얼마나 풍요롭게 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결과물을, 매우 정교하게 구현된 결과물을 우리와 공유한다. 빛의 경지에 다다른 작가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르네 파스롱(1920-2017)이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제 우리 각자는 자신이 믿는 빛의 거울을 거기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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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대관의 작업은 흐르는 강물에 착상된 것이다 | |
김대관의 작업은 흐르는 강물에 착상된 것이다. 강물은 우선 작가의 고향에 흘렀었다. 실제와는 상관없이 모든 고향에는 왠지 강이 흘렀던 것같고, 강이 흐를 때 고향은 더 고향다운 것 같고, 고향에 흐르는 강은 왠지 과거형으로 기술될 때에 더 적격인 것 같다. 그리고 강물은 작가가서있는 지금 여기에도 흐르고, 작가의 마음 속에도 흐른다. 모든 강물은 한줄기로 연결되어 있다. 원래 고향에 흐르던 강이 지금 여기 위로 차고 넘치고, 마침내, 내 마음 속에 마저 범람한 것. 이렇게 범람된 강물은 그 원천이 고향이란 점에서 모든 강물은 결국 그리움인 것. 그래서 강물을 그린다는 것은 곧 그리움을 그린다는 것.
Kim got the idea of his works from flowing river. River ran through his home. Regardless of whether it really ran, a river runthrough every home. Every countryside home is more homelike when a river runs through it, and one always thinks about theriver that ran through one’s home on reminiscing about it. A river is running both on the ground where the artist stands and inhis mind. All rivers converge into one. The river that ran through home flows and finally overflows in the artist’s mind. That a riveris always connected to the image of home in this artist’s consciousness finally leads to our recognition that all rivers signify hislonging for his old home. Therefore, drawing a river means expressing his longing for his original being with this artist.Notes :A Vast, Endless River Running through Our Reminiscent Mind by Kho Chung Hwan, Art Criti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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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ST Criticis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