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폭풍의 눈에 위치하는 회화-유근오
김석영‘곡신불사(谷神不死)’展

폭풍의 눈에 위치하는 회화
무엇인가 요동치고 술렁거리고, 무언가는급한 속도로 내달리고, 또 다른무언가는 들썩거리며 꿈틀댄다. 색채의 난장이 화면 위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런 첫 인상은 숨길수가 없다. 격동의 시간이 지나자 화면이 곧 잠잠해지며 섬섬하게 그려진 실체들이 망막에 포착된다. 분명 거기에는 화사한 꽃이, 다소 튀는 색깔들로 생경하게 재해석했음에도 거리낌 없이 내달리는 말이 경쾌하게 자리한다. 까닭에 사건의 전후를 고려하자면 그가 그려낸 아니 체현한 형상은 일순간에 낚아챈듯하고 임의적 묘사의 성격도 강하지만, 동시에 역설적으로 대상 본래의 형태에 심히빚진 게 아닌가 할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된 듯한 표현력도 엿보이지만 이는 작가와 대상 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통해물질을 정신으로 갱신할 수 있는 존재를 구현하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이러한 김석영의 그림에 대하여 회화의 거울 이미지, 혹은 대상에 대한 작가의 감정이입 등으로 진단한다. 물론 김석영의 그림이 어떤 대상을 재현했는지 명확하게 식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거울 이미지에도 해당되며, 그 대상에 작가의 감성을 격정적으로 투영시켰다는 의미에서 감정이입을 거론하는 것도 타당하다. 이런 진단은 어찌됐든 결국 김석영의 작품이 대범하긴 해도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일상적 세계를 화면 위에 펼쳐 보이는 조형언어를 구사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럼에도 김석영의 화면은 그 일상적 세계의 대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붓고 뿌리고 긋는 몸의 제스처가 보이는듯한, 일종의 가쁜 숨을 쉬고 맥박이 뛰는듯한 소리가 들리는 현장 같기도 하다. 이런 어휘는 흔히 추상표현주의를 논할 때 사용하는 어법이기는 하나 그가 그려내는 존재의 생명력내지는 활력, 즉 이런 기호체계에 의해 드러날 수 있는가시적 형상을 위한 매개의 행위에 집중함으로써 드러나는 상징적 어법이기도 하다. 이런 견지에서 감상자는 그의 작품에서 추상표현주의 작품에 버금가는 행위의 흔적을, 행위는 행위이되 표현적 재현의 층위를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기 재현의 방법론을 고의로 부정하거나 무시할 의도가 없었음은 이 재현의 층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오히려, 매개의 행위에 집중하면서도 대상의 내적인 어떤 것에 다가가려 했음에 있다. 나아가 이것은 그가 대상을 단지아름답게 수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진 본성을 구현하는데 더 심혈을 기울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양식적인 측면보다는 행위를 작동하게 하는 의미론적 측면에서 대상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자, 단지 대상을 형상화하는 과정으로 읽혀지던 붓질이 그에게는 더 적극적 형상성의 대리자로서의 행위를 통해 일상의 사물들을 그것들의 근원에서부터 추적해내려는(archi-peindre) 구조적 틀로 자리 잡았다는 말이다.

망막에 상이 맺히기도 전에 화면에 산포된 현란한 색채의 형상에 압도되는 김석영의 그림은 어떻게 보자면 의외로 안료의 아말감이다. 아말감이란 색채가 마구뒤섞여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뒤섞임 속에서도 쓸데없는 재현이나 마티에르를 위한 필요 이상의 남아도는 물감 층은 없다. 혹여 잉여의 물감층이 보인다면 그것은 실체가 아니라 시각적 현상일 뿐이다. 게다가 그 아말감 덩어리 사이에서 우리가 아는 것,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 이상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가 현실적 주제를 즉흥적으로 그려내는 또 다른 표현주의자에 불과한 작가가 아니라는 점을 말해준다. 사실 김석영이 다루는 모티프는 그 만의 독창성을 드러낼만한 특이한 것은 아니다. ‘꽃’과 ‘말’ 등의 주제가 그리 새로울 것도 없다. 오히려 전통적 주제에 가깝다. 차라리 다른 작가들보다 더 잘 그려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허망할 수밖에 없는 모티프이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서 예기치 않은 감흥을 받을 수 있는 것은 화면에 심대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음이다. 폭풍은 폭풍이되 거부할 수 없는 우아한 폭풍이다. 단지 폭풍처럼 휘도는 격앙된 붓질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감성이 그 손끝에 있어야만 느끼는 우아함이다. 이 우아한 폭풍은 더 엄밀하게 말해그가 그런 격렬한 붓질 속에서도 대상이 가진 특징들을 놓치지 않고 디테일하게 그려내고 있다는데 연유한다. 대개 격렬하고 표현적인 그림에서 이만한 섬세함을 발견한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 일이아니다. 왜냐하면 격렬함과 섬세함은 당연히 의미론상 대척점에 놓여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세차게 내달린 거친 붓질이, 색의 아말감이 현실과 물질의 너머에 있는 세계(예술작품)로 향하는 것은 이런 상이한 형식의 충돌과 불일치에서 융합을 이끌어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김석영의 작품은 웅변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렇다면 김석영의 작품을 명확하게 진단하기 위해서는 그가 이 대척점에 위치하는 두 관점을 어떻게 융합하는데 성공했느냐를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융합에 대한 결론은 사실 매우 단순하다. 주체인 작가와 대상 사이 어디에 방점을 찍고 있느냐에 따라 그 융합의 가치는 달라진다. 사실 김석영은 앞선 개인전에서 대상 자체보다는 작가 자신의 감성에 충실하여 이 융합의 덕목이 잘 보이지 않았다. 대상은 단지 미끼일 뿐 작가가 분출한 감성적 행위의 흔적만 보일 뿐이었다. 말하자면 보편적 시각으로 있는 그대로의 재현을 염두에 두지는 않았을지라도 작가의 의도가 너무나도 드러났다. 하지만 이런 류의 그림에서도 우리는 작품의 이면을 보길 원한다. 물론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안다. 한편으로 그 너머를 보는 것이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다. 그러나 어쩌면 물질의 세계에서 정신의 세계-물질세계의 이면-로 넘어 가는 것이 예술작품이라는 것을 또 다른 이면으로 오해한 것은 아닐까. 착각이었을까? ‘회화의 세계에서 작가는 침묵할 뿐 말하는 것은 이미지’라는 것을 우리는 종종 무시해 버린다. 에둘러 말해서 반대의 경우라면, 즉 이미지보다 작가의 언어가 과도하게 도드라질 때 미술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이런 경향의 작품 군을 표현주의라고 통칭한다. 표현주의라 하여 작품의 조형적 가치나 질이 떨어질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일세를 풍미한 위대한 양식이다. 문제는 거기에 맞물려 물질 속에그 작가만의 독특한 정신이 담겨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있다. 김석영이 이번 전시에 도달한 세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혹여 이것이 상상력의 문제라면 피카소의 말처럼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곧 우리의 또 다른 현실임을 상기하자.

이 상상력의 세계는 늘 고려해 보아야 할 문제겠지만, 굳이 작품의 이면 운운하는 것은 필자가 이번 전시에서 김석영만의 특출한 방법론이 물질 속에 발현되고 있음을 주목하고자 함이다. 근작에서도 분명 현란한 색채의 축제가 화면 위에서 펼쳐지고 있음은 자명하다. 그럼에도대상의 존재감이 그대로 살아있다는 것은 이제 김석영이 자신과 대상 사이에, 물질과 정신 사이에 모종의 교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부언하자면 대상의 실물 자체를 곧이곧대로 재현하고 하고 있지 않음에도 대상이 풍기는 존재의 생명력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음이다. 예컨대 말들을 푸르게 혹은 붉게 혹은 노랗게 더 나아가 온갖색채의 범벅으로 휘저어 놓은 작가의 맥박과 숨결이 동시에 말들에게서도 감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말들의 맥박과 숨결이 작가에게 전이되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여 때때로 색깔들이 들썩거리며 사각의 캔버스를 벗어나고 싶어 한다. 이런 측면에서 그는 그려내는 대상을 캔버스에 가두어 두기보다는 캔버스 외부로 탈출시키고자 하는 것 같다. 설사 그렇지는 못하더라도 화면을 생동감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는 유효하다. 이는 작품이 살아 움직이는듯하다라는 의미에서 작가와 대상, 물질과 정신의 상호 교호를 통해드러낼 수 있는 작품의 진면목이다. 또 다른 덕목은 김석영이 오랜 시간 동안사각의 틀에 갇혀 부동의 무기력증에 걸린 형상의 한계를, 나아가 현대미술에서 평이한 대상의 재현미술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식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통해 그 자신 만의 독특한 조형언어로 형상화 함으로써 재현의 회화가 지닌 형상의 흥취를 극대화 시키고 있다는데 있다. ★유근오(미술평론)

아픔을 승화시키는 谷神의 맨얼굴-김재홍
‘아픔을 승화시키는 谷神의 맨얼굴’


김재홍(金載弘) 시인*


무시무시한 낭하를 향해 질주하는 푸르고 흰 말들의 곧추 선 등짝은 분명 공포 반응이나 분노의 폭발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자연의 한 억센 생명이 자신의 근육과 운동 신경을 극단의 강도로 표출하는 찬란한 희열이었다.

속도에 밀려 부리부리한 눈과 귀는 터질 듯 찢어질 듯 날렸고, 콧구멍은 젖혀져 금방이라도 굉음을 쏟아낼 것 같았다. 그리고 풀냄새가 났다. 꽃향기가 들렸고, 새와 나비와 벌레의 날갯짓 소리가 보였다. 

김석영 화백이 경영한 화면 속에서는 말도 새도 나비도 풍경도 모두 강렬하고 역동적이었다. 거칠고 격렬한 붓질과 오감을 모두 뚫어주겠다는 듯한 화려한 색채는 멀뚱히 서서 구경하는 감상자에게도 장쾌한 생명에의 경외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랬다.

‘청마의 해’라며 많은 사람들이 쓸데없는 기대에 부풀었던 지난 1월, 서울 평창동 ‘금보성 아트센터’에서 열린 <곡신불사> 展은 그랬다. 전시 자체가 생명을 향한 억센 말발굽의 질주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랬다.

노자 <도덕경> 제 6장의 바로 이 구절, ‘谷神不死 是謂玄牝’(직역 : 곡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현빈이라 부른다)의 번역 불가능한 다의적 화면이 전시장 곳곳을 채우고 있었다. 산속 깊은 골짜기의 텅 빈 오묘한 곳을 곡신이라 부르더라도, 만물의 탄생과 순환의 여성성을 현빈이라 하더라도, 그의 화폭에 담긴 강렬하고 다채로운 생명의 양상은 쉽게 몇 마디로 함축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2014년 4월 16일이었다. 수학여행을 가던 어린 학생 수백 명이, 수십 년 별러 여행을 떠난 동창생 수십 명이, 대한민국 물류의 첨병 운짱들 수십 명이 한꺼번에 ‘세월’에 갇히고 말았다. 시시각각 전해지는 영상과 자막과 기자들의 보도는 차라리 상처를 덧내는 날선 칼과 같았다.

푸르구나
푸르구나

푸른 하늘
푸른 바다
맨몸으로
마주한 오늘

어찌 할까
어찌 할까

날렵하구나
흰 운동화여
날렵하구나
흰 바람이여

차라리 나는
이 세상에 나지 말고
푸른 하늘
푸른 바다
마주하지 말 것을

차라리 나는
저 메마른 땅 속
새까만 돌덩이로나
남을 것을

푸르구나
푸르구나

- 拙詩 <4월의 노래> 전문

그로부터 김석영 선생의 곡신은 ‘치유의 곡신’이 되어야 했다. 상처받은 영혼, 맹골수로를 배회하는 길 잃은 영혼을 위한 ‘생명의 곡신’이 되어야 했다. 그리하여 ‘곡신불사 시위현빈’의 본뜻대로 영혼의 안식처로 길안내를 하고, 아픔을 넘어서는 예술적 ‘승화의 곡신’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현장을 눈으로 보고 있다.

맹렬한 기세로 근육이 끊어질 듯 터질 듯 살갗이 벗겨질 듯 흩어질 듯 달려 나가는 청마의 기운이 다시 솟아나기를 기원한다. ‘치유의 곡신’ 전을 통해 상처를 뛰어넘어 생명에의 열렬한 환호성을 질러보고 싶다.

회화의 표면과 이면-이대범
회화의 표면과 이면
회화의 경계. 회화의 경계는 비록 작가의 전작의 주제이지만, 사실은 전작과 근작 모두를 아우르며 김석영의 그림 저변을 관통하는 전제이기도 하다.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암암리에 회화의 본성을 드러내는 것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고, 회화의 프로세스를 체현하고 재구성해 보여주는 것에 방점이 찍힌다. 

체현한다? 회화의 본성을 온몸으로 부닥쳐 드러낸다? 
작가의 그림은 몸적이고 감각적이다. 
캔버스 속으로 육박해 들어가서 붓질을 휘두르고 색채를 내지른다. 그렇게 날것들로 낭자해진 현장이 회화의 본성을 드러내고, 회화와 긴밀하게 상호작용했던 존재의 생생한 순간(존재가 오롯해지는 순간)을 알게 한다. 

이를테면 모든 그림은 일회적인 분출이며 사건이라는(현실 그대로를 스테레오타입으로 재탕한 것이 아니라는)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말이나, 그림은 말(특정 소재)이면서 동시에 노랗고 파랗게 칠해진 평면이라는 모리스 드니의 말, 그리고 그림은 결국 색이라는 마티스의 말이 모두 이런 의미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림 속에 그려진 말이 현실 속의 말과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림은 현실 그대로를 가져온다기보다는 현실을 참조하고 간섭하고 들쑤시고 
재해석하는 한에서만 현실과 관계 맺는다. 
그 긴밀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현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또 다른 현실을 내놓는다. 
이를테면 단 몇 차례의 붓질로서 말의 구조를 단번에 잡아채는 것이나, 무슨 격투라도 벌이듯, 혹여 생생한 순간의 인상이 흩어지거나 퇴색되는 것을 염려하기라도 하듯 부지불식간에 휘두른 붓질과 내던진 색채가 현실 속의 말을 집어삼켜 외관상 현실과 닮았지만 분명 현실과는 다른(어쩌면 현실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을지도 모를) 종류의 비전을, 세계를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김석영의 그림은 그렇게 말을 그리면서 회화의 본성을 드러내고, 
부처를 그리면서 회화의 과정을 체현한다. 

근작들의 주제인 ‘곡신’(谷神)은 이처럼 자연과 대지의 노래요 
치유와 생명의 에너지로 나를 살려내는 작업이다.


경계 위에서의 대화 
죽음에 대한 제의는 많은 경우 죽음을 달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는 삶과 죽음의 극단적 세계를 상정하고, 주체가 삶의 세계에서 이탈해 죽음의 세계로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나무(꽃)는 삶과 죽음 사이를 순환한다. 죽음에 서서히 다가가는 그들의 삶은 역설적으로 또 다른 생명을 예고한다. 그러기에 나무(꽃)는 우주적인 생명원리의 중심을 상징하는 기호로 자주 인용된다. 김석영의 회화에는 '나무(꽃)'가 자주 등장한다. 이 '나무(꽃)'는 풍경의 이미지로 고착화된 나무가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수용하며 '생명-죽음-생명'으로 변하는 유기체이다. 그러기에 김석영의 나무는 생명의 찬란함을 자랑하는 시기를 담아낼 때에도 죽음의 그림자가, 죽음의 처연한 순간을 담아낼 때에도 생명에 대한 부푼 기대가 서려 있다. 즉, 이러한 극단의 교차와 이동을 통해 그의 회화는 시간과 죽음(삶)에 관한 연구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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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영은 회화를 통해 대화를 하고자 한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그곳에서 작가 자신만의 답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별자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들의 개입을 배제 혹은 제거하지 않고 수용함으로 대화를 한다. 이것은 경계를 인정하는 자에게 허락된다. 불안과 우아, 매혹과 혐오, 냉정과 열정, 유머와 공포 등 모든 양 극단을 제거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 김석영은 지금 그 대화의 장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대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