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ST Criticism
꽃은 신이다. The flower is a god

<Flower Bomb> 작가노트 中

 

 같은 공간에 공존하지만 뚫어가는 시간은 다 다르다. 완성되어가는 시간, 소멸하게 만드는 시간, 현재의 법칙을 깨어 죽여가는 시간... 우리는 그 위에 놓였다.

 꽃은 ‘생명’과 ‘영원성’의 상징으로 소멸되어가는 시간을 붙잡는다.

 이번 신작 <Flower Bomb>의 강렬한 색상과 거친 느낌의 꽃들은 이질적인 심리적 현상을 드러낸다.  화려한 이미지의 꽃들은 단순히 시각적인 것을 넘어서 촉각과 후각을 자극시키며 영원한 기억으로 남는다. 

연약함을 상징하는 꽃이 아닌 금기를 깨는 듯 가두어 둔 욕망을 터뜨리는 동시에 내적 강인함과 화려함을 보여주는 상징적 이미지로 탈바꿈된다. 

그렇게‘Flower Bomb’은 새로운 존재의 방식을 의미하는 상호주체적인 감각으로 전환된다.

Artist Statement_자화상의 운명

Artist Statement

 이진하

자화상의 운명                          

       

수묵인물화로 시작된 본인의 작품은 수묵추상화를 거쳐 현재에 이른다. 초기 작품은 붓을 휘두르는 행위적인 요소와 그것을 담는 수묵의 조화로 숨겨두었던 내면의 감정들을 추상적으로 표출한다.  이후 행위, 필력만으로 채워졌던 추상작품에 잠재적 이미지들을 끌어내기 시작한다. 내면의 감정은 수묵추상작업을 통해 분출되면서 새로운 영감을 주었고 여러 가지 감정들은 은유적 상징으로 표현하기에 이른다.    수묵추상에서 초현실주의적인 이미지의 삽입으로 변해가던 작업은 <Who am I> 연작으로 구체화된다. 내면의 원초적인 비상욕망, 초월의 욕구들은 새의 날개 짓으로 형상화되고 꿈, 순수함, 욕망의 감정들은 어린아이의 얼굴형상에 빨간 입술로 표현된다.  새의 상징성은 개인에 따라 조금은 다른 관념으로 난해함을 동반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자유와 초월, 고독, 좌절 등의 관념들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새를 통해서 긍정과 부정이 포함된 비가시적인 내면세계를 가시적으로 표현한다. 입술은 여성뿐만 아니라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에서 오는 관능미와 생명을 품고 있는 욕구의 극에 달하는 욕망의 상징을 보여준다. 입술만을 극대화하여 그리거나, 화면에 여러 개의 입술들로 가득 채우기도 하고, 결국 얼굴에서 눈과 코를 제거하여 입술만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얼굴이란 단어의 어원이기도 한 ‘보는 것’, 바로 눈은 얼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인의 그림 속 얼굴에는 눈이 없다.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는 얼굴은 이름이 지닌 고유성과 같이 개별적이고 주체성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들뢰즈와 가타리[Pierre-Felix Guattari, 1930~1992]는 “시각 상관체(눈)를 가진 얼굴은 회화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며 특정한 시각적 개념, 얼굴(face)의 프랑스어인 visage에서 파생된 신조어 얼굴성의 개념으로 회화를 검토하려고 했다. 마치 음악이 음성을 탈 영토화 하는 것처럼 회화는 얼굴을 탈영토화 한다. 

 얼굴은 곧 유기체(신체의 기관으로의 조직화)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의미의 생성과 주체화의 바탕을 이룬다. 따라서 얼굴을 지우는 것, 얼굴의 해체는 곧 유기체의 해체이며 이것은 주체의 해체, 의미의 해체를 뜻한다.

 눈이 있어야 할 곳에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리고 그 얼굴에는 오로지 빨간 입술만이 남아 있다. 해체된 얼굴은 온전한 주체로 보이지 않는다.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눈먼 자의 기억(Memoirs of the Blind)』에서 눈멂의 구조에 대해 설명한다. 그는 두 가지 가설을 제시한다. 먼저 그림이 곧 눈이 멀었다. 그렇지 않다면 화가가 눈이 멀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눈의 접목이다. 한 가지 시점에서 다른 시점으로의 접목, 즉 눈먼 자의 그림이 곧 눈 먼 자의 그림이다. 여기에는 유의어의 반복은 없고, 단지 자화상의 운명만 있을 뿐이다. 시각의 각도(angle of sight)가 위협받거나 약속되고, 잃거나 회복 또는 주어지는 것이다.

 얼굴은 백색의 장벽에 검은 구멍들이 모여 추상기계로부터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흰 벽과 검은 구멍의 특정한 배열로 얼굴의 구체적인 ‘배치’가 이루어진다. 몸에서 분리되어 허공에 떠있는 얼굴형상은 초현실주의적 오브제로 새롭게 조명되며, 그렇게 파편화된 신체의 부분은 본인만의 상징적 이미지로 거듭난다.

 연작<Fly>는 <Who am I>와 같은 맥락을 취하고 있으나 새로운 재료를 부착하여 독특한 재질감을 구성하거나 물감에 특수한 형태를 터치(Touch)감으로 특수한 시각적 효과를 준다. 크리스털 모르타르와 아크릴 물감, 매트 미디엄을 혼합하여 빛에 의해 반사되는 효과와 표면이 거친 느낌의 질감을 표현하고 도톰한 두께 감을 형성한다. 이러한 효과들을 극대화시키는 색채는 본인의 작품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색채는 시각적인 것을 넘어서 촉각성도 동반한다. 들뢰즈는 색채에는 광학적 사용과 촉감적 사용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내 안의 깊숙이 감추어진 존재의 속성으로 만들어진 상징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색 상징을 동반한다.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본인의 감정은 색으로 표출되며 형상에서의 '색채-힘'은 바탕의 '색채-구조'와 대립됨과 동시에 소통된다. 강렬한 색채와 오브제의 결합이 본인만의 내밀한 관계망으로 이어져 시각, 촉각, 청각 등 감각들을 관통한다. 본인의 색채는 무한한 활동을 통해 빛과 어둠을 만들고 그 의미의 명료성을 획득한다. 이렇듯 내적감각의 융합은 모호한 영역을 가시화 한다. 본인이 만들어낸 융합된 감각들은 정형화된 의식을 깨뜨리며 시점의 변경을 유도한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존재를 드러낸다. 본인은 상징적 이미지와 오브제, 색 상징을 통해 자아를 표현한다. 그러한 작품은 세계의 이면과 작가의 내면을 드러낼 수 있는 표현행위의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야성과 개성이 도드라지는 이진하의 그림-최석태

                야성과 개성이 도드라지는 이진하의 그림


                                                           최석태 


  이진하의 그림은 야성이 도드라져 보인다. 땀이 보이지는 않다. 그렇기 보다는 피땀 정도일까? 피는 아니다. 그러나 튄다! 온 힘을 다하여 물감을 찍고는 한 바탕 붓을 휘두르고 마감한다. 다듬지 않는다. 그래서 야성이 도드라져 보인다는 것이다. 남다르다는 점에서도 튀지만, 그림도 튀는 기분을 준다. 그림 속이라는 창 안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그림이 아니라, 그림에서 무언가가 튀어 나와서 보는 이의 눈과 마음에 훅 끼치듯 뛰어서 다가든다.  
  그렇다고 기분 내키는 대로 속마음을 보이지는 않는다.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그녀가 수년 동안 그린 그림들은 일정한 범주의 소재를 다루고 있다. 꽃, 새 혹은 새의 날개, 사람 얼굴이 자주 등장한다. 이런 소재가 야성적인 느낌으로 다가온다니. 소녀의 두상은 실루엣으로 처리되었으며, 단지 그 실루엣에 빨간 입술이 찍혀 있다. 머리 위에는 꽃이나 새 혹은 새의 날개가 결합되어 있다. 단순한 결합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 결과는 그 자신이 말했듯이 어릴 적의 꿈과 희망, 새로운 시작과 설레임, 사람이라 지니게 되는 욕망, 이런 것이다. 이런 소재에서 우리는 승화와 변신의 꿈을 읽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진하는 삶을 지향하는 그림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려 한다. 일정한 소재를 그려서 이를 통해 그와 연관되었지만 별도의 추상 감정을 유도한다. 
  스스로 작성한 짧은 글에서 확연히 이런 점을 의식한 듯하다. 나만의 세계 속 고독, 그 속에 가득한 열정과 열망, 자신 안에 가득한 감정을 담았다고. 새의 날개 짓은 그리움, 외로움 그리고 자유와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고 한다. 
  과연 그러하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순조로울까? 일단 하찮은 반응을 받거나, 외면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별다른, 심지어 아무런 느낌을 주지 않는 그림은 널려 있다. 그런 그림과는 전혀 다른 출발이 다르다. 이런 상태는 이진하의 지금의 그림을 미루어 짐작하더라도 알 수 있다. 관행에 빠진 그림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른바 산수화라는 풍경이나 구체성 있는 초상에 가까운 인물화 같은 전통적인 소재를 다루지 않는다. 그랬다면 이런 생기나 야성이라고까지 했던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이런 것이 이진하의 개성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진하의 그림을 우리 미술 분야의 관행으로는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아직 속단하기에는 이를 뿐만 아니라 섣부른 규정에 빠질 염려가 크다. 관행에 찌들지 않은 남다른 좋은 출발이며, 방향도 좋기 때문이다. 방향이 틀린 출발은 시간이 지날수록 잘못된다. 그러나 방향이 좋다면, 좀 더디 간들 어떠랴? 살면서 중대하게 느끼는 감정이나 가치를 실현, 구현하기 위한 발걸음은 신뢰를 준다. 그런 관심과 존중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림을 그리는 삶이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림을 좀 더 볼만하게 만드는 기량이나 기술, 나아가 지혜는 세월이 지나서야 생길 것이다. 그림을 외면하기는 어렵지만, 찬찬히 들여다 보게 하는, 들여다 보다가 이리저리 눈을 움직이면서 그려진 이런저런 것들을 보면서 느끼게 하는 힘은 아직 덜 느껴진다. 이른바 시각적 집중력은 색이나 형상에 더하여 재질감이 결합하여 보이는 무엇일 텐데, 그런 점에서는 좀은 부족하다고 여겨진다. 다른 이의 그림과 섞였을 때, 과연 얼마나 소중하게 여겨지고, 눈여겨보는 대상이 될 것인가? 
  그런 점에서 이진하와는 시대와 세대도 다르지만 박생광이 겪은 고독과 성공은 커다란 참조가 될 것이다. 지난 세기 초에 태어나 일본에서 보낸 청년시절을 거쳐 다다른 장년기가 광복과 곧 이어진 전쟁 그리고 저개발과 독재의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오늘날과 비슷하다 할 수 있을까? 더욱 격렬한 세월이었다. 오랜 일본에서의 생활 탓이었는지 그는 이른바 왜색이라는 느낌을 배제하는데 오랜 세월이 걸렸다. 또한 사회에 활력이 없으니 그에 부응하는 바도 있기 힘든 상태였다. 그렇게 30년이 지난 1970년대 말, 그의 나이 70줄의 중반에 그는 오늘날 우리가 전형으로 기억하는 그림의 세계에 도달했다. 과연 분출했다. 그가 지향한 방향이 그나마 제대로 된 지향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도달점이었으리라. 그는 주로 우리 민족 집단의 문화정체성을 노래했다. 그가 젊은 시절부터 중년, 심지어 노년에 당해야 했던 수모에 가까운 외면에 좌절했다면, 마침내 분출한 그림의 세계는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의 이진하의 그림은 중의성을 지향하고, 지나치게 단순한 과정은 더욱 중층적이어야 할 것이다. 애써 일부러 그런 세계를 부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단지 좀 더 많은 사람의 이해와 애호를 받으며 나아가기 위해 고민하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이번 전시에 풍경화를 시도한 것도 보여서 반갑다. 더욱 추구할 필요가 있다. 자화상이나 타화상이라 할 존재를 미시적으로 탐구하는 영역을 천착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꽃과 새도 지금껏 해오던 것에 더하여 더욱 다양한 시도를 펼쳐야 할 것이다. 천대만상의 자연 세계는 아직도, 앞으로도 우리를 끌어당기는 존재가 아닌가.
  이진하의 세계는 개인의 정체성이 고양되기를 지향하는 세계다. 개인에서 출발하여 한 개체의 꿈과 고양을 지향한다. 전통적인 미술에서는, 우리 사회에서는 잘 다루어지지 않은 세계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미술이 지니게 된 식민성과 왜곡의 결과이다. 미술 자체가 그런 것이 아닌 것이다. 그녀가 이를 의식했는지 모르나 분명 그런 점에서 이진하가 지향하는 그림의 세계는 관행과는 상당히 다른 세계다.   
  그래서다. 아직은, 앞으로도 많이 외로울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은 남다른 세계를 지향하고 화풍 또한, 친절한 느낌이 아니라 강해서 눈여겨보는 사람이 적을 것이다. 더욱이 100년을 넘어 반세기 이상을 포함하는 일률적인 교육과 고도산업화의 결과로 일본처럼 순치된 사람들이 많아진 세상이다. 동북아시아의 교육과 특히 미술교육이 지닌 문제다. 여기서 상세히 거론하지는 않지만, 우리들의 딜렘마에 가까운 문제다. 다시 말하지만 다행한 것은 이진하가 흔히 거치는 청소년 시절의 미술 교육에 휘감기지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그랬다면 이런 그림과는 전혀 다른 그림, 흔히 눈에 익은 그림을 그려보였을 것이다. 그것이 이진하의 남다르고 좋은 점이다. 
  필자는 이진하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때의 그림을 기억한다. 다니던 학교를 옮겨서 끈덕지게 다시 시작했다는 그림이 낯설게 느껴지던 것을. 수많은 이방의 학생들 속에서 닳지 않은 그런 느낌은 지금은 상당히 달라졌지만 야성이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남다른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필자에게 그것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상당히 정리되어 보인다. 익숙해서가 아니다. 자신을 유지하면서 변해왔던 것이다. 야생성을 잃지 않은 상태로 질감 있는 색감과 삶을 생각하게 하고, 눈여겨보게 하는 세계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외로움을 타지 말아야 한다. 그림 그리기, 그림을 그려 하나의 세계를 이룩하는 일은 삶이 그렇듯 오랜 달리기와 같은 것이라 여겨진다. 목표를 더욱 굳건히 정하면서 나아가기를 바란다. 주의의 지지와 호응을 이끌어 내면서.  
눈먼 새의 비상-한의정
눈먼 새의 비상

- 한의정 (미학, 미술비평)


가까이 보아야 한다
이진하의 작품은 우리 눈이 촉각처럼 기능하게 한다. 19세기 미술사가 알로이스 리글(Aloïs Riegl)에 의하면 우리의 눈은 단순히 보는 작용(optic) 외에 만지는 기능(haptic) 또한 갖고 있다. 우리 시각이 단순히 보는 기능으로 작용할 때에는 대상에게서 거리를 두고 멀리서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한다. 그러나 시각이 대상을 만지려 할 때, 즉 촉지적(haptic)으로 기능할 때는 대상의 가까운 곳에서 대상의 부분적 묘사와 표면의 질감에 집중한다. 이진하의 작품은 가까이에서, 근접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눈이 칠흙같은 검은 배경 속에서 조용히 떠오르는 얼굴과 그 머리에서부터 솟아나는 거친 질감을 가진 꽃다발, 새 등의 형상들을 어루만지며 따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얼굴-그림자’의 탄생
촉지적인 형상들 아래에서 혹은 검은 심연 위로 얼굴이 비친다. 이 얼굴들은 살(flesh)을 갖지 못한 것처럼 그 너머의 검은 배경이 새어나오고 있어 마치 그림자와 같은 모습이다. 그림자처럼 지금 내 앞에 현전(presence)하고 있지만, 그 실체를 잡으려 하면 잡을 수 없는 부재(absence)의 존재이다. 물 위에 비친 나르시스의 얼굴처럼, 단테를 끌어안았지만 단테는 잡을 수 없었던 그림자 같이, 이것은 허상(eidolon)이다. 이 얼굴-그림자는 복사되어 두 개로, 때로는 네 개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얼굴-그림자의 원본, 원래 얼굴이 어딘가에 존재할 것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들은 원본을 상정하는 복사본들이 아니다. 그저 희미한 표정 변화와 같은 차이를 생성하고 있는 시뮬라크르(simulacre)들끼리 서로 반복되는 놀이를 즐기고 있을 뿐이다. 

시각의 상실
이 얼굴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 외에 또 그림자처럼 보이는 이유는 눈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찍힌 듯한 붉은 입술은 간혹 보이지만, 얼굴들 모두가 눈은 소유하고 있지 않다. 얼굴을 위한 가면, 복면이었더라면 눈을 위한 구멍이라도 뚫려 있을텐데, 그조차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 얼굴-그림자들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각의 상실 상태를 보여준다. 그러나 처음부터 이진하의 화폭에서 시각의 보는 기능은 필요가 없었다. 그의 세계는 암전된 방이며, 거기에서 우리의 시각은 형태와 배경 사이의 낮은 높낮이를 더듬는 손과 같은 기능만을 가졌었다. 우리의 보는 눈을 감아야, 이진하의 형상은 비로소 나타난다.

눈먼 자의 자화상
플리니우스(Gaius Plinius Secundus)가 『박물지』(Historia Naturalis)에 실린 부타데스의 딸 이야기는 예술의 기원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부타데스의 딸은 다음날 전쟁터로 떠날 연인의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벽에 비친 그의 그림자 윤곽을 따라 그렸다. 이것이 최초의 드로잉, 회화, 초상화라는 것이다. 이미지의 기원은 곧 사라져버릴 존재를 붙잡기 위한, 부재를 현존으로 만들기 위한 사랑의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자끄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눈먼 자의 기억』(Mémoires d’aveugle)에서 이 이야기를 눈멂의 구조로 설명한다. 여인은 그림자의 윤곽을 따라 그림을 그릴 때 동시에 자신의 연인을 볼 수 없었다. 연인에 대해 눈먼 장님이 되어 그림을 그렸다. 화가가 초상화를 그릴 때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캔버스에 얼굴을 그릴 때 그는 모델을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다. 모델을 볼 때는 캔버스를 볼 수 없고, 캔버스를 볼 때는 모델을 볼 수 없다. 어느 한쪽에는 눈먼 상태가 되어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림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시각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화가는 환한 빛으로 가득 찬 시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일순간 외부의 모든 지각으로부터 차단된, 눈먼(blind) 상태에서 대상에 대한 기억을 고도로 응축시킬 때 그림이 시작된다. 화가로서 이진하는 어둠 속 눈먼 상태로 그림을 그린다. 게다가 이진하의 그림은 눈먼 얼굴에 대한 것이다. 눈먼 자가 그리는 눈먼 자의 초상, 즉 자화상이다. 

순간에서 영원으로
부타데스의 딸이 그린 그림자 그림은 연인의 이미지를 영원히 지속시키고 싶은 마음,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이지만, 그것은 아직까지 실루엣에 불과한, 실체가 없는 이미지(eidolon)였다. 여기에 아버지 부타데스가 개입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코린트의 도공이었던 부타데스는 딸이 그린 그림자 윤곽에 진흙을 바르고, 본을 떠서 조형물로 만들었고, 이를 신전으로 옮겼다. 한낱 이미지, 허상에 불과했던 그림자가 실체를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신전이라는 공간에서 영원한 시간까지 보장받은 것이다. 그림자와 같았던 이진하의 눈먼 초상도 진흙을 바르는 도공의 손길을 받는다. 이 손길은 크리스탈, 스톤, 유리 등을 곱게 발라 그림자의 머리에서 꽃이 피어나고, 새가 날개짓을 퍼덕이도록 빚어낸다. 장지와 캔버스라는 한정된 공간에 얽매이지 않고, 꽃은 계속 자라날 것이고, 새는 멀리 날아갈 것이다. 

멀리 날아간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 짙은 어둠 때문에 눈의 시각적 기능을 사용할 수 없는 우리는 눈의 촉지적 기능을 작동시켜 이 공간을 더듬더듬 만져나갔다. 그 곳에서 타인의 얼굴과 잘 구별되지 않는 나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 비슷비슷한 얼굴들이 모두 나의 얼굴이었을런지도 모른다. 눈의 손길에 붙잡히지 않고 신기루처럼 자꾸 사라져버리려는 그 얼굴에서 분명히 만질 수 있었던 부분은 정수리에서 피어나는 꽃다발이었고, 부드럽고 따뜻한 깃털로 이루어진 날개였다.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꽃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지막히 들렸고, 새가 푸드덕 힘차게 날아가는 날개짓 소리도 분명히 들었다. 새가 날아가버린 후에도 그 자리에는 여전히 따뜻한 온기가 선연한 색의 스펙트럼으로 남아 있다.